C. S. 루이스(C. S. Lewis, 1898~1963)는 미국·영국과 마찬가지로, 한국 기독교 출판계의 아이콘 중 하나다. 그가 영어로 쓴 글 대부분이 한글로 이미 번역되었고, 수차례 판형을 바꾸어 개정 출판되었으며, 지금도 출판되고 있다. 루이스가 쓴 글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한 책도 끊임없이 나왔다. 책뿐만 아니라, 여러 잡지와 저널의 기사 및 기고문, 학위논문으로도 많은 글이 쏟아져 나왔다. 저명한 루이스 전문 번역자(홍종락·이종태 등)가 있고, 전문 연구자(홍종락·김진혁·장경철·박성일·권연경·문용식·서병철·손향숙 등)도 많으므로, 세미나나 강독 모임도 수시로 열린다. 요컨대, 루이스의 모국 영국, 루이스가 가장 많이 소비되고 거의 성인(saint) 추앙을 받는 미국을 제외한다면, 한국만큼 널리 읽히며 회자되는 나라는 드물 것이다.

본 글에서는 이미 많은 전문가가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전파한 루이스의 생애와 사상 일반에 대한 언급은 최소화하려 한다. 대신, 필자가 루이스의 글과 그에 대한 전기 및 연구서를 읽어 나가면서 느낀 인상을 중심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루이스는 아주 다채로운 면모를 지닌 복합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필자에게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그의 인상은 '어정쩡함', '내키지 않음', '예기치 못함', '주저함', '모호함' 같은 단어로 집약된다. 이런 단어들이 가진 부정적 뉘앙스 그대로, 그는 전반적으로 두루뭉술한 면모를 지닌 인물이다. 교리·조직·체계·논리 등 명료성과 직선성을 강조하는 단어들과는 달리, 문학·신비·상상·직관 등, 루이스를 대표하는 단어들은 모호성과 곡선성을 대변한다. 이런 그의 생애와 생각의 특징들은 불확실성의 시대인 20세기 세계인들에게 오히려 매력적으로 수용된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 필자는 이런 루이스의 모호한 면모에 집중하여 그의 삶과 인식의 특징을 드러내고자 한다: △'어정쩡한' 아일랜드인 △'내키지 않는' 회심자 △'순전한' 기독교 △'예기치 못한' 복음주의 아이콘.

20세기 대표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 영문학자이자 소설가로도 활동했다.

1. '어정쩡한' 아일랜드인

영국(Britain)과 아일랜드(Ireland)는 서로 다른 두 나라다. 이주·침공·방어·식민지·병합·독립·분쟁 등으로 점철된 오랜 역사 속에서 두 나라는 어떤 때에는 각각 별개의 두 나라이기도 했고, 한때는 한 나라이기도 했다. 아일랜드라는 섬에 언제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아일랜드인의 선조로 알려진 여러 유형의 켈트족이 이주한 이후 국가 형태로 공동체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900년이다. 이때부터 청동기·철기·농경문화를 거쳐, 5세기 이후 로마제국의 국교 기독교(가톨릭)를 성 패트릭(St Patrick)이 전파하면서 아일랜드가 서유럽 가톨릭 문명권에 편입되었다. 8세기 이후 아일랜드섬을 지속적으로 침공한 노르만계 바이킹족이 아일랜드 켈트족 원주민과 융합 및 동화되면서, 오늘날 아일랜드인의 직계 조상이 되는 민족이 형성되었다.

아일랜드가 바다 건너 영국 제도(British Isles)에 사는 이웃과 불신과 증오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 계기는, 이 제도에서 가장 정복욕이 강한 잉글랜드인들이 12세기부터 지속적으로 아일랜드를 침공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아일랜드는 비공식적으로든, 공식적으로든 영국 식민지로 있다가, 약 700년이 지난 1921년 12월에야 드디어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잉글랜드(England), 혹은 (1701년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통합된 이후에는) 영국(United Kingdom)의 지배를 받은 기간 내내 아일랜드인은 여러 형태로 지배자들에게 저항했다. 피지배자 아일랜드인에 대한 지배자 잉글랜드인의 민족 차별이 첫 저항의 요인이었다면, 16세기 종교개혁에서 브리튼섬의 국가들(잉글랜드-웨일스, 스코틀랜드)이 개신교를 수용한 이후에는 종교적 저항이 더해졌다. 이들 지배자들이 아일랜드인들에게 개신교, 특히 잉글랜드의 국교인 성공회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의 국교(Church of Ireland) 또한 잉글랜드의 국교(Church of England)와 마찬가지로 성공회(Anglican/Episcopal Church)가 되었다.

그러나 공식 국교가 성공회인 것과는 상관없이, 그 정신과 실천에서, 아일랜드인은 거의 예외 없이 뼛속 깊이 가톨릭이었다. 영국 정부는 군사적·제도적·종교적 강요만으로 아일랜드인의 땅과 정신을 영국화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런 판단하에 정부가 시행한 추가 정책 중 하나가 영국(잉글랜드/스코틀랜드)계 개신교인들의 아일랜드 이주와 정착이었다. 잉글랜드-스코틀랜드 통합 왕국(United Kingdom) 첫 왕인 제임스 1세(혹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시대에 주로 스코틀랜드 장로회 신자와 일부 잉글랜드 성공회 신자들이 아일랜드 북부 얼스터(Ulster) 지방으로 이주를 시작했다. 이 당시 이 이민자들은 정부의 지원하에 토지를 확보하고, 종교적·제도적 특권 등을 누렸기에, 아일랜드 가톨릭 원주민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17세기 청교도 정치 지도자 크롬웰의 아일랜드 파병과 저항 진압, 그리고 연이은 토지 몰수도 이런 증오의 밀도를 더 높이는 데 기여했다.

1886년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아일랜드 자치 및 독립안은 1차 대전이 지난 1921년에 와서야 열매를 맺었다. 1921년 12월에 아일랜드자유국이 성립되었고, 1949년에는 국명을 아일랜드공화국(Republic of Ireland)으로 개명했다. 그러나 얼스터에서 이미 400년 가까이 거주하며 이 지역을 자신들 고향으로 삼은 개신교인으로서는 가톨릭 아일랜드로의 복귀가 새로운 분리와 차별의 시작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아일랜드 자치 법안 논의 시기부터 얼스터 신교도들은 독립된 아일랜드가 아니라, 영국령으로 남기를 희망했다. 오늘날 북아일랜드가 아일랜드공화국이 아니라, 영국 국왕 수위권을 인정하며 일부 자치를 인정받는 영국의 일부로 남은 이유였다. 물론 널리 알려진 대로, 2006년 앤드루 협약 이전까지 영국령으로 남은 북아일랜드에서 지역 내 가톨릭 무장 조직인 아일랜드민병대(IRA)와 영국 정부군 간 선혈이 낭자한 끔찍한 전투와 테러, 고문, 살해 등의 비극이 자주 벌어졌다.

C. S. 루이스가 태어난 1898년은 아일랜드인의 이런 독립 요구가 무르익기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 피지배자로서 차별 당사자였던 가톨릭계 아일랜드인들이 지배자들에 품은 적개심이 강렬했던 만큼, 이들의 적개심에 대응하는 얼스터 개신교인들의 배타성과 우월의식이 융합된 고립주의도 그만큼 뚜렷했다. 오늘날 영국령 북아일랜드 수도이자, 아일랜드 독립 이전에도 얼스터 지방 최대 도시였던 벨파스트에서 루이스는 변호사인 아버지 알버트 제임스 루이스와 성공회 성직자의 딸인 어머니 플로렌스 어거스타 루이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웨일스 출신 보일러 제조업자였던 할아버지 리처드 루이스가 잉글랜드 리버풀 출신 아내를 데리고 북아일랜드 코크로 이주한 1850년대 초가 이 가문의 아일랜드 정착 출발점이었다. 이후 할아버지는 벨파스트로 가서 기계 및 철선 제조 사업을 벌여, 1888년에 첫 타이타닉호를 건조할 만큼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할아버지 리처드의 아들인 아버지 알버트는 부친의 길보다 더 문화적으로 세련된 직업인 변호사를 택하며, 얼스터 상류층에 확실히 진입했다. 루이스 어머니 플로렌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아일랜드국교회(성공회) 성직자였다. 플로렌스는 벨파스트 제일의 기숙형 사립학교인 메소디스트칼리지(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후에 이 학교를 다녔다)와 퀸스대학을 졸업하며 논리학과 수학에서 최고 성적을 받았다. 이는 19세기 중후반 당시 영국 여성으로는 최고 수준의 학문적 성취를 이룬 것이었다.

따라서 잉글랜드/웨일스 혈통, 성공회 배경, 변호사와 성직자 지위, 학문적 성취 등, 북아일랜드 최고 상류층 문화 한복판에서 태어나고 자란 루이스와 그의 가족은 아일랜드에 살아서 아일랜드인이기는 했지만, 정서적·문화적·종교적으로는 아일랜드인이 아닌 영국인이었다. 아일랜드라는 땅에 외따로 강력한 성채를 두르고 세워진 영국 성(British Castle), 혹은 주변 문화와 단절되어 자신들만의 세계를 형성한 영국인 구내(British Compound)가 바로 이들이 살았던 현장이었다. 이런 정체성은 루이스의 세 살 터울 형이자 유일한 형제인 워렌 해밀턴 루이스(애칭 '와니')의 회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9살이던 1914년에 샌드허스트 왕립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고 나서야 자신과 같은 사회적 수준의 가톨릭 신자와 이야기를 처음 나누었다고 회상했다. 즉, 그전까지 워렌이 만난 가톨릭 신자들은 혈통상 켈트족 아일랜드인으로서, 신분과 계급이 자신의 가족보다 낮은 가정부(집안의 요리사이자 가정부가 아일랜드 가톨릭이었다), 혹은 도시의 가난하고 험한 지역에 사는 공장 및 거리 노동자, 시골에 사는 농부들이었다. 이처럼, 루이스와 그의 가족에게 아일랜드인과 가톨릭은 '타자他者'이자, 괴이하고 위협적이고 적대적인 대상이었다.1)

그렇다고 해서 루이스 삶이 아일랜드 것을 전적으로 타자화한 외부자 요소로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아일랜드의 자연과 풍경을 자기 영혼의 안식처이자 작품과 학문이 발현하는 영감의 원천으로 생각했다. 특히 어린 시절 놀이방 창밖으로 보이던 '초록빛 언덕', 즉 캐슬래이언덕의 나지막한 능선은 성인이 된 그에게 늘 '동경'(Sehnsucht)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그의 표현에 따르면, 루이스는 "여섯 살이 채 되기 전에 미지의 푸른 꽃의 숭배자"가 되었다.2) 1915년 편지에서는 "'멀리 조선소에서 들려오는 윙윙거림', 넓게 펼쳐진 벨파스트호수, 케이브힐산, 그리고 도시 주변의 작은 협곡, 풀밭, 언덕들"을 추억했다. 1950년대 이후의 글에서도 아일랜드를 "내 나라, 내 고향"으로 부르고, 매년 아일랜드로 휴가를 갔으며, 미국인 조이 데이빗먼과 만혼晩婚한 1958년에도 신혼여행을 고향으로 떠났다. 작품에도 얼스터의 다운카운티를 연상하게 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천국과 지옥의 이혼>의 "에메랄드빛 녹색 땅"이 바로 그곳이고, <나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레거내니의 고인돌, 케이브힐산, 거인의 둑길(Giant's Causeway)는 모두 다운카운티에 실재하는 곳이다.

말하자면, 루이스가 창조한 나니아는 그가 실제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이상화한 얼스터다. 그는 "천국은 옥스퍼드를 들어다 다운카운티 한복판에 가져다 놓은 것일세"라고 옥스퍼드에 재직 중일 당시 아일랜드 출신 학생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다른 말로, 그에게 천국은 태어난 고향 얼스터의 아름다운 자연에 제2의 고향 옥스퍼드의 지적 활력이 더해진 곳이었다.3)

그러나 루이스는 아일랜드의 자치와 독립과 문화 회복 등, 아일랜드 민족과 종교, 문화를 중심으로 아일랜드성(Irishness)을 규정하려 한 움직임을 반대한 외부자(outsider)였다. "사상의 넓은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주류 학자로서, 특정 민족 및 지역 정체성에 국한되지 않은 보편성을 꿈꾸었다. 이 점에서 그의 아일랜드성은 민족과 종교가 아니라, 자연과 환경에 제한되었다. 따라서 북아일랜드 출신으로 잉글랜드 학계와 교계 및 전 영어권에서 저명한 기독교계 명사名士가 된 알리스터 맥그래스, 크리스토퍼 라이트 등과 마찬가지로, 루이스 역시 '어정쩡한 아일랜드인'(the ambivalent Irishman)으로 평생 살았다.

옥스퍼드대 모들린칼리지의 상징 그레이트타워. 루이스는 1925년부터 모들린칼리지 영문학과 연구원으로서 학생을 지도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2. '내키지 않는' 회심자

"모들린의 방에 혼자 있을 때, 일만 잠시 놓으면 그토록 피하고 싶어 했던 그분이 꾸준히,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다가오시는 것을 밤마다 느껴야 했던 내 처지를 상상해 보기 바란다. 내가 너무나도 두려워했던 그 일이 마침내 일어나고야 말았다. 1929년 여름 학기에 나는 드디어 항복했고,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으며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아마 그날 밤의 회심은 온 영국을 통틀어 가장 맥 빠진 회심이자 내키지 않는 회심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너무나도 찬란하고 선명해 보이는 그 일이 그 당시 내 눈에는 그렇게 비치지 않았다. 하나님은 얼마나 겸손하신지 이런 조건의 회심자까지 받아 주신다."4)

1916년 옥스퍼드에 고전학 장학생으로 입학한 후 1924년부터 루이스는 옥스퍼드대 유니버시티칼리지에서 철학 강의를 시작했고, 이듬해부터 같은 대학 모들린칼리지 영문학과 연구원(fellow)이 되어 학생을 지도했다. 어린 시절에 성공회 사제의 딸인 어머니 영향으로 세례를 받고 교회 출석도 했지만, 그는 중등학교에 입학한 무렵부터 신앙에 무관심해졌다. 이후 그가 회고록에서 명시한 1929년(혹은 1930년5))까지, 당대 다수 지성인들처럼 그 역시 의문의 여지가 없는 무신론자, 혹은 불가지론자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 1929년 이후 그는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로 1차로 "맥 빠지고 내키지 않는" 회심을 했고, 이어서 서서히 1932년에 구체적으로 기독교 신앙으로 회심했다.

여기서 루이스가 경험한 회심의 두 특징을 다룰 필요가 있다. 하나는 영문학계 저명 문인들에게서 받은 영향이다. 우선 잘 알려진 대로, <반지의 제왕>과 <호빗>의 창조자인 저명한 J. R. R. 톨킨(J. R. R. Tolkien, 1892~1973)의 영향이다. 루이스보다 나이가 여섯 살 많았고, 옥스퍼드 영문학과 석좌교수인데다, 이미 저명한 학자였던 톨킨은 성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루이스는 톨킨을 영문학부 교수 모임인 '영문학 티타임'에서 1926년 5월에 처음 만났다. 비록 생애 후반에 관계가 이전만 못해지기는 했지만, 톨킨은 여러 면에서 루이스의 롤모델이었다. 냉엄한 학문성이 요구되는 문헌학자로 명성을 떨쳤지만, 내면에 신화적·문학적 상상력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던 톨킨에게 루이스는 이 열정을 이해하고 지지해 준 친구였다. 그 점에서 1930년대 중반 이후에 집필하고 1950년대에 마무리하게 되는 <호빗>과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출간과 성공은 루이스와 옥스퍼드 비공식 독서 및 토론 그룹 '잉클링스'(Inklings)의 격려에 힘입은 바 컸다. 반대로, 문학자로서의 공통의 길에 더하여, 톨킨은 기독교를 '사실이 된 신화'라 주장하고, 유신론과 기독교 신앙이 엄정한 영문학 연구와 모순되지 않음을 루이스에게 확신시키면서 루이스가 회심하도록 도왔다.6)

톨킨은 루이스의 동료이자 멘토였지만, 조지 맥도널드(George Macdonald, 1824~1905)는 그에게 분명한 스승이었다. 한 세기 전 스코틀랜드 목사이자, 소설가, 동화작가였던 맥도널드를 루이스는 한 번도 개인적으로 만나 배운 적은 없지만, 그가 쓴 글을 통해 여러 회심과 전환의 시기마다 영적·문학적 조언을 얻었다. 이 빚을 갚으려는 시도가 아마도 그가 1947년에 조지 맥도널드 선집을 편집한 일일 것이다.

1920~1930년대에 영문학계 저명인사들이 연쇄적으로 기독교를 수용한 것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G. K. 체스터턴(G. K. Chesterton, 1874~1936)은 1922년,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 1904~1991)은 1926년, 에블린 워(Evelyn Waugh, 1903~1966)는 1930년에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시인 T. S. 엘리엇(T. S. Eliot, 1888~1965)는 1927년에 성공회를 받아들였는데, 루이스의 1929년(혹은 1930년) 회심도 이 흐름 안에 있었다. 이들은 모두 문학적 관심사를 계기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기독교가 인간의 이성과 상상력을 자극하고 눈에 보이는 현실과 실재 너머의 것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문학과 입장을 공유하는 우군이었기 때문이었다.7)

둘째, 이 회심은 여러 면에서 소극성으로 대변되는, 주저하는 변화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사도 바울이나 아우구스티누스처럼 갑작스럽고 즉각적인 회심을 경험한 이들이 있었고, 칼뱅처럼 눈에 띄지 않게 점진적으로 회심에 이른 이들도 있었다. 루이스의 경험은 수년에 걸친 점진적 과정이었다는 점에서는 칼뱅과 유사했다. 그는 1929(혹은 1930)년 봄 학기에 유신론으로 개종한 후, 1931년 9월 19일과 10월 1일에 각각 기독교가 '참된 신화'임을 깨닫고, 유신론에서 성경의 초자연적 진술에는 여전히 부정적인 '합리주의적' 기독교로 넘어갔다. 그러다 이듬해 6월이 되어서야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비롯한 전통적인 신앙을 수용했다.8)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사용된 용어와 그 정의 및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여전히 미궁이다. 그 과정은 지난했고, 감정적이거나 체험적이기보다는 지적이었으며, 내키지 않는 중에 심각하게 주저하며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후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합리적 확신을 하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3. '순전한' 기독교

1932년에 기독교인이 된 후 루이스는 <순례자의 귀향>(1933), <침묵의 행성 밖에서>(1938)를 통해 알레고리와 비유로 기독교를 옹호했다. 그가 직설적으로 기독교를 변증한 첫 번째 책은 2차 대전 직후인 1940년에 나온 <고통의 문제>였다. 1939년에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루이스는 국토방위대에 편입되어 한 주에 한 번씩 밤새 옥스퍼드 거리를 순찰하는, 일종의 예비군 업무에 동원되었다. 영국 상공에서 영국 공군과 독일 공군이 항공전을 치열하게 벌이던 1941년 2월에 BBC 종교방송국장 J. W. 웰치 목사가 기독교 교리를 평이한 일반인의 언어로 재진술하는 15분짜리 정규 프로그램을 시작해 보자고 루이스에게 제안했다. 당시 루이스가 지목된 이유가 있었다. 이전에도 전문 용어를 사용하는 성직자들의 방송은 많이 있었던 데다, 이전 연사들은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평화주의적이든 정치성을 너무 강하게 드러냈다. 루이스는 평신도였고, 정치 이슈에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또한 최근에 <고통의 문제>를 통해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변증가로서 주목을 받았다.9)

1941년 8월 6일에 시작된 1차 시리즈를 시작으로, 1944년 4월 4일에 끝난 4차 시리즈까지, 그는 총 네 차례 시리즈 강연을 했다. 이 강연으로 루이스는 전국구 유명 인사가 되었다. 강의에 대한 반응은 극단의 찬사에서부터 극단의 경멸까지 다채로웠다. 이는 루이스에 대한 반응이기도 했지만, 그가 다룬 주제에 대한 사람들 입장이 그만큼 다양했기 때문이었다. 이 강연은 처음에 약간의 수정을 거쳐 각각 <방송 강연 Broadcast Talks>(1942), <그리스도인의 행동 Christian Behaviour>(1943), <인격을 넘어서 Beyond Personality>(1944)로 출간되었다. 이 세 권이 1952년에 단권으로 묶여 새로운 제목으로 나온 것이 바로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였다.10)

방송, 세 권의 책, 마지막 단행본에 이르기까지, 강연과 책은 엄청난 유명세와 판매고를 올렸다. 특히 악마가 쓴 편지를 소재로 삼아 저술한 또 다른 명작 <스크루테이프의 편지>가 1942년 성공회 주간지에 연재되었다가 단행본으로 나와 베스트셀러가 되자, 루이스는 2차 대전 시기와 그 이후 영어권 최고의 대중 신학자로 부상했다. 그런데 루이스가 말한 '순전한' 기독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순전한 기독교> 서문에서 루이스는 자신이 제 교파를 분열시킨 여러 교리 논쟁 주제들을 다룰 전문가가 아니므로,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가 말한 '순전한' 기독교만을 다룰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11) 영문학자인 루이스는 17세기 청교도 학자이자 목회자인 백스터의 저작에서 이 표현을 찾아냈다. 그가 이해하고 자신의 저술에 적용한 순전한(mere) 기독교는 "당대의 논쟁들을 균형 잡힌 시각에서 보게 해 주는 명백하고 중심이 되는 기독교"였다. 루이스는 이 "기독교의 기준을 가지는 것이 새로 출간된 책들의 신학적 오류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최고의 안전망"이라고 생각했다. 잉글랜드 내전 중 성공회, 장로회, 청교도 회중교회의 신학 논쟁이 살육과 전쟁으로 연결되는 시대를 살았던 백스터는 논쟁과 분열, 당파를 초월한 공통의 신조를 따르는 "순전한 기독교, 신조, 성서"를 믿었다. 그에게 순전한 기독교는 "논쟁과 신학적 당파성에 물들지 않는" 기독교 신앙의 일반적 비전, 곧 '보편적 기독교'(Catholic Christianity)를 뜻했다.12) 루이스가 백스터에게서 빌려 와서 재정의한 순전한 기독교는 유명한 다음 비유에서 더 분명하게 확인된다.

"순전한 기독교는 여러 방으로 통하는 문들이 있는 현관 마루에 더 가깝습니다. 누군가를 이 마루로 인도할 수 있다면, 제 할 일은 다 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과 의자와 음식이 마련되어 있는 곳은 방 안이지 현관 마루가 아닙니다. 현관 마루는 기다리는 장소이자 여러 문을 열어 볼 수 있는 장소일 뿐, 계속 머물러 살 곳이 못 됩니다."13)

말하자면, 기독교의 공통되는 보편적 교리를 받아들이는 '순전한' 기독교인들은 현관 마루라는 공통의 장소에서 환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순전한 개별 기독교인은 각기 다른 세부 교리·신조·주장·입장에 따라 각 방으로 들어갈 수 있고, 실제로 들어가야 한다. 그 방은 각각 가톨릭·성공회·장로회·감리회·침례회·제자교회·성결회·퀘이커·메노나이트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그는 한방에 들어갔다고 해서, 자신과 다른 방에 들어갔거나, 아직 현관 마루에 머물러 있는 사람을 비난하거나 공격하지는 말라고 당부한다. 그것이 순전한 기독교인이 따라야 할 공통의 규칙이기 때문이다.14)

루이스의 이런 '순전한', 혹은 애매모호한 입장이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은 것은 충분히 예상할 만하다. 소설가 조지 오웰 같은 무신론자나 여러 반기독교 미디어는 공영방송인 BBC가 편협한 기독교인에게 마이크를 준 일 자체가 공정성 위반이라고 비난했다. 혹은 그의 강연이 전쟁이라는 위기 순간에 약해진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인기 영합류 헛소리라고 공격했다. 그러나 대체로 주류 언론 반응은 차분하고 긍정적이었다. 영국의 전통 유산으로서의 기독교가 이런 위기 시대에 제대로 작동한다는 기능적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종교계 간행물에 실린 글은 신학적·교리적 당파성에 좌우되었다. 가톨릭의 경우,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에 개신교와 가톨릭 간 분열선이 강조되지 않았으므로, 일부 개신교적인 구원론에 대한 우려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칭찬하는 분위기였다. 개신교의 반응에는 날카로운 진영별 분열상이 반영되었다. 영국 기독교의 전반적인 특성상 대체로 온건했던 전통주의자는 칭송하는 분위기였고, 진보적 개신교인은 루이스가 구식이자 미신적 기독교로의 퇴행을 주창한다고 비판했다.

미국의 분위기는 또 달랐다. 주류 언론과 주류 진보 기독교인은 오히려 루이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속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인간성과 전통의 가치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영국 전통주의자보다 훨씬 '근본주의적'이거나 신조주의 입장이 강했던 미국 보수 기독교인은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의심했다. 루이스가 너무 성례주의적이라거나, 천국과 지옥, 그리스도 없이 죽은 자에 대한 믿음이 불확실하다거나, 교리적으로 엉성하고 위험하다는 반응이었다.15) '중도성', '중용'이 핵심 가치인 영국식 기독교와는 달리, 맺고 끊는 구분선이 명확한 일부 미국 기독교인에게 루이스의 '현관 마루'는 어정쩡하고 두루뭉술하고 애매모호한 회색 지대일 뿐이었다.

4. '예기치 못한' 복음주의 아이콘

루이스는 먼저 기독교 변증으로 세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생애 중반기 이후와 사후에도 여전히 널리 읽히고 주목받는 인물로 남았다. 1950년부터 출간하기 시작해서 1956년에 마무리된 <나니아 연대기> 같은 판타지 문학의 성공을 통해, 성인成人뿐만 아니라 어린이까지 아우르는 전 세대에 호소력을 지닌 작가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2차 대전 이후 미국 기독교계의 변화가 오늘날 개신교 복음주의권에서 거의 '성인'聖人 수준으로 추앙받은 그의 인기를 탄생시킨 요인이기도 했다. 19세기 말부터 현대주의자들과 치열한 논쟁을 전개하다 고립과 분리의 길을 가게 된 근본주의자들의 새로운 세대는 전후戰後에 선조의 유산을 거부하며 사회적으로 진취적인 기상을 갖춘 기독교인으로 거듭나기를 갈망했다. 이렇게 탄생한 전후 '신복음주의자들'은 기독교 메시지가 가진 시공간을 초월하는 타당성을 지성과 문학, 문화의 언어로 사회에 더 효과적으로 전할 방법에 골몰했다. 이 시대적 필요에 부응하여, 루이스 스스로는 의도한 바 없었지만, 그와 그의 작품들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극렬히 추앙하는 아이콘의 지위로 올라섰다.

20세기 후반기에 미국 복음주의자 전반이 루이스에 열광했지만, 그의 이런 급속한 부상에 가장 크게 기여한 세 기관으로 휘튼칼리지, 기독학생회출판부(IVP), 잡지 <크리스채너티투데이>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복음주의권 대표 대학 휘튼칼리지의 영문학 교수 클라이드 킬비(Clyde S. Kilby)는 1950년대 후반부터 루이스에 매료되었다. 그러다 1964년에 루이스의 작품을 분석하는 <C. S. 루이스의 기독교 세계 The Christian World of C. S. Lewis>를 펴냈다. 당시 휘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수 중 하나였던 킬비가 긍정적으로 소개한 루이스는 미국 복음주의권의 루이스 이해의 표준이 되었다. 이전 시기에 코넬리우스 반틸을 비롯한 더 보수적인 신학자들이 성경관이나 사후관 등을 비판하며 루이스를 배제하려 했던 시도는 킬비의 노력으로 뒤집혔다. 전후 복음주의자들이 보기에, 루이스가 변증서와 문학 작품으로 정통 기독교 교리 전반을 옹호하며 자연주의와 무신론에 맞선 노력과 그 결과는 그의 사소한 교리적 오류 문제를 상쇄하고도 남았다. 킬비는 1965년 휘튼칼리지에 'C. S. 루이스 컬렉션'(이후 '메리언 E. 웨이드센터')을 설립하여, 루이스뿐만 아니라 그의 동료와 지적·영적 스승들 유산도 수집해 적극적으로 루이스를 알리는 데 힘썼다. 심지어 <나니아 연대기> 1권 <사자와 마녀와 옷장>의 모델이 된 루이스의 '그' 옷장도 현재 휘튼에 보관되어 있다.16)

루이스의 묘비. "인간은 죽음을 감내해야 한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휘튼의 경계를 넘어 미국 전역의 복음주의 청년 학생들에게 루이스를 널리 소개한 일등 공신은 IVF의 출판사 IVP였다. 성공회 복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영국에서 탄생한 IVF/IVP였기에, 미국 IVF/IVP는 영국인이자 성공회 신자였던 루이스가 영국을 통해 미국으로 전파되는 주요 네트워크였다. 미국 IVF 지도자 진 토머스, 테리 모리슨, IVP 밥 프라일링 등은 1940년대에 루이스가 미국에 처음 소개된 후, 1970년대에는 선교 단체 지도자 다수가 루이스를 통해 신앙을 처음 받아들이거나, 확신을 얻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세계 최고 대학 중 하나에서 무신론자로 있다가 기독교를 확신한 후 변증가와 문학 작가로 활약한 루이스의 여정은 이들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아주 강력하고 매력적인 권위를 부여했다.17)

마지막으로, 1956년 창간 이후 미국 복음주의 비공식 대변지 역할을 한 <크리스채너티투데이>(CT)의 루이스 소개 및 홍보가 주효했다. 1969년에 이 잡지는 구독자들에게 루이스 대표작 5권 합본을 사은품으로 증정했다. 이는 미국 복음주의가 루이스를 이 진영의 대표자, 혹은 안전한 저자 중 하나로 인정했음을 의미했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루이스에 대한 글을 가장 많이 실은 저널 역시 CT였다.18) 새 밀레니엄이 된 2000년에 CT가 교계 지도자들에게 20세기의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100권의 책"(Books of the Century)을 묻는 설문 조사를 진행했을 때에도, 단연 1위는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였다.19)

한국에서도 루이스의 인기가 매우 높다. 그 인기에 크게 기여한 인물 중 하나로 반드시 지목되어야 할 이는 루이스 책을 한글로 가장 많이 번역한 전문 번역자 홍종락이다. 그는 최근 루이스 번역에 오랜 기간 매진하면서 배우고 느끼고 깨닫게 된 루이스와의 만남과 대화, 애정을 <오리지널 에필로그>라는 에세이에 담아냈다.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왜 루이스인가?'를 마무리할 때, 그는 왜 루이스가 21세기가 시작된 지 20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그토록 매력적으로 소비되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면서 마지막 사족 하나를 보탠다. 개인의 '방'에서 나올 만한 사적인 감상이지만, '순전한'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루이스를 읽은 사람 대부분이 '순전히' 공감할 '현관 마루'에서 들려주는 고백과도 같으므로, 여기에 인용한다.

"사족이 분명하지만, 여기에 내 생각을 하나만 보태고 싶다. 루이스가 가진 매력은 결국 글에서 그가 전하고자 했던 바를 독자가 경험하게 해 주는 데 있다. 그는 온갖 장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야기꾼이자 교사이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그가 소개하는 기독교와 하나님, 구원의 길, 신자의 삶에 대해 설명을 듣는 데 그치지 않고, 간접적으로나마 그 속에 들어간 듯 생생하게 경험하게 된다. 루이스가 어린 독자에게 쓴 편지에서 들려준 글쓰기 조언은 본인이 실천하는 원리였던 것이다. ["(글을 쓸 때) 독자들이 느끼기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해당 형용사를 사용하지 말 것. '그 일은 끔찍했다'고 쓰지 말고 독자들이 끔찍하게 느끼도록 하라는 의미야."]"20)

1) 알리스터 맥그래스, 『C. S. 루이스: 별난 천재, 마지못해 나선 예언자』, 홍종락 역 (서울: 복있는사람, 2013), 24-31.
2) C. S. 루이스, 『예기치 못한 기쁨』, 강유나 역 (서울: 홍성사, 2003), 17f.
3) 맥그래스, 『C. S. 루이스』, 32-34.
4) 루이스, 『예기치 못한 기쁨』, 326f.
5) 맥그래스는 여러 편지들을 분석해서 루이스가 회심한 해가 1929년이 아니라 1930년의 트리니티 학기(3~6월)라고 주장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젊은 시절을 추억하며 쓴 많은 회고록에서 기억의 오류가 흔히 발견되는 점을 고려할 때, 맥그래스의 분석이 타당해 보인다. 맥그래스, 『C. S. 루이스』, 192-198.
6) 홍종락, 『오리지널 에필로그』 (서울: 홍성사, 2019), 60-62; 맥그래스, 『C. S. 루이스』, 175-178.
7) 맥그래스, 『C. S. 루이스』, 180-184.
8) 맥그래스, 『C. S. 루이스』, 205-214.
9) 조지 M. 마즈던,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전기』, 홍종락 역 (서울: 홍성사, 2018), 28-50.
10)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정경철, 이종태 역 (서울: 홍성사, 2001), 7.
11)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10.
12) 맥그래스, 『C. S. 루이스』, 287f.
13)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20.
14)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21.
15) 마즈던,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전기』, 80-101.
16) 마즈던,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전기』, 126-144.
17) 마즈던,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전기』, 144f.
18) 마즈던,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전기』, 145f.
19) "Books of the Century: Leaders and Thinkers Weigh in on Classics That Have Shaped Contemporary Religious Thought," Christianity Today, (April 24, 2000).
20) 홍종락, 『오리지널 에필로그』,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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