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사는 현대인이 기독교에 대해 품은 가장 보편적이고 큰 오해가 하나 있다. 이 오해는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큰 차이가 없는데, 기독교를 주로 서양과 연결 지어 생각하는 습관이다. 우리는 19세기 말 이후 선교사들이 전해 준 형식으로 기독교를 처음 접했다. 그 기독교가 서유럽 및 미국 문명의 이기인 학교·병원과 한 세트로 묶여 전파되었으니 이런 인식은 더욱 자연스럽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이 아닌 지역에 기독교가 처음 존재한 것은 가톨릭이 전파된 15세기, 개신교가 전파된 18세기 이후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서양이라 부르는 지역의 중심부, 즉 북서유럽은 4~5세기에야 처음으로 기독교를 접했다. 기독교의 시작점은 아시아 지역인 팔레스타인이었고, 여기서 시작된 기독교가 소아시아와 시리아, 그리스, 로마, 북아프리카, 페르시아, 중동, 에티오피아, 인도, 중국 등으로 차례로 전파되어 나갔다. 그리스와 로마를 제외한 이 지역들은 예나 지금이나 서양이 아니다. 기독교는 그 기원과 성격상 처음부터 서양의 종교가 아니었다. 기독교가 서양 종교로 인식된 계기는 대항해시대 이후, 스페인·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프랑스·독일 등 서유럽 국가와 그들의 후손인 미국이 주도한 서양의 제국주의적 세계 진출이었다. 서양이 기독교 세계의 중심이 되기 이전부터,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 중요한 기독교 전통과 유산이 존재했다.

인도는 이 점에서 특히 주목해야 하는 지역이다. 인도 기독교의 기원은 사도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열두제자 중 하나인 사도 도마가 인도로 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구전으로 오래도록 전수되었다. 그러나 이 전설 같은 이야기에 대한 역사적 증거는 사실상 다른 사도들이 브리튼(오늘날의 영국)이나 골(오늘날의 프랑스)에 도달했다는 증거보다 오히려 더 탄탄하다고 학자들은 증언한다. 도마가 인도에 갔다는 언급은 이미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암브로시우스 등 초기 교부들의 증언에 일관되게 등장한다.

실제 16세기에 유럽 탐험가들과 선교사들이 인도 남서부 말리바르 해안에 도착했을 때, 이들은 가톨릭 전통과는 다른 모습의 현지 기독교인들을 만났다. 이들은 도마에게 복음을 전수받은 이들이라 자처했다. 또한 도마와 관련한 민요, 교회, 기적 문헌 등도 이미 상당히 존재했다. 사도 도마에서 이름이 유래한 '마르토마'(Mar Thoma) 기독교인은 인도 남서부를 중심으로 오늘날에도 상당한 세력을 과시한다.1) 따라서 지난 세기까지 서양 선교사들이 자신들이 선교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지역의 교회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어린 교회'(younger churches)라는 표현은 인도나 시리아, 페르시아, 이라크, 에티오피아 등지의 교회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인도 기독교의 역사가 서양 기독교 역사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단순한 사실로도 서양 중심 기독교 역사 서술에 맹점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서양 선교사들의 활동을 기점으로 교회사를 재구성해서 현대교회사와 선교 역사를 기술하는 작업의 의의를 인정한다 해도, 인도가 지닌 역사적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마르토마교회 이외에도, 5세기라는 이른 시기에 이미 시리아와 페르시아 지역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 인도로 이주하거나, 혹은 선교를 통해 독특한 기독교 전통을 형성했다.

16세기 가톨릭 최초의 해외 선교사 중 하나로 인정되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가 선교한 첫 해외 지역도 인도의 고아였다. 개신교 최초 선교사들인 독일계 경건주의자 바르톨로매우스 치겐발크(Bartholomäus Ziegenbalg)와 하인리히 플뤼챠우(Heinrich Plütschau)가 1707년에 처음 선교한 지역도 인도 타밀 지방의 트란케바르(Tranquebar, 오늘날의 Tharangambadi)였다. 1893년 이후 영미권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가 된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의 첫 선교지도 인도 벵골 지역의 세람포르(Serampore)였다. 즉, 기독교 선교 역사와 관련해서, '처음'에 해당하는 거의 모든 것은 인도 몫이었다.

판디타 라마바이(Pandita Ramabai, 1858~1922)도 그 '처음'에 해당하는 유산을 만든 인물이다. 브라만 계급에 속한 데다 최고의 산스크리트 문헌 해석자로 명성을 날리던 여성이 19세기 후반에 기독교로 개종한 드문 사례를 만들었다. 개종한 후에는 거의 최초의 인도 여성해방 운동가로 활약하면서, 전 세계 여성운동 지도자들의 모델이 되었다. 묵티선교회를 만들어 인도 여성 및 고아들의 대모가 되었는데, 이 선교회를 중심으로 성장한 공동체의 최고 지도자는 인도인 라마바이였고, 서양 선교사가 그를 보조했다. 현지 기독교인이 상관이고 서양인 선교사가 보조인 이런 선교 현장은 20세기 중반 이전에는 세상 어느 곳에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판디타 라마바이. 1887년 사진.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라마바이는 20세기 초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부흥의 원류 중 하나로, 평양 대부흥에도 영향을 끼친 1905년 묵티 부흥의 주역이었다. 또한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후에도, 라마바이는 서양 문화 자체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아님을 간파했다. 따라서 19세기 말이라는 이른 시기에, 신앙은 기독교인이되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인도인(Hindu) 정체성을 지켜 내며, 이 둘을 조화하려 무던히도 고민하고 애쓴 선교신학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이런 라마바이가 남긴 독특한 유산은 다음 다섯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다: △판디타/사라스바티 △구도자/순례자 △개혁가 △인도인 △여성주의자.

1. 판디타/사라스바티(Pandita/Saraswati)

라마바이는 1858년에 브라만 계급 부모의 막내로 태어났다. 19세기 중반 인도 남성이 지닌 관점과는 극히 다른 예외적 여성관을 지닌 학구적이고 개혁적인 인물이었던 아버지는 아내에게 고대 인도의 학문 언어이자 신성 언어인 산스크리트어 문헌 및 경전 읽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남편에게 산스크리트어를 배운 아내는 이를 딸에게도 전수했는데, 이로써 인도 카스트제도 최상층 지식인 가문의 영예를 전 가족이 누릴 수 있었다.

라마바이는 어린 시절 인도의 가르나타카 지방의 강가물 숲에서 자랐다. 그곳에서 라마바이의 아버지는 학교를 운영하며 쌀농사를 지었다. 딸이 자라자 신실한 브라만 계층에 속한 가족은 막내 라마바이를 동반하고 수시로 성지순례에 참여했다. 이들은 사람들이 돈을 주면 최소한의 생계 비용을 제외한 전 금액을 바로 브라만 계급 성인들에게 나눠 주었다. 전 가족이 거대한 인도 대륙을 걸으면서 성지를 방문하고, 경전을 암송하며, 아무것도 없는 빈궁한 상태에서 신앙으로 고난을 이긴 당시 경험은 이후 라마바이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어린 시절부터 딸을 아들과 차별 없이 교육하고, 정략으로 조혼하던 당시의 관습에 저항한 부모 덕에 라마바이는 신앙 의식뿐만 아니라 사회의식도 남다르게 키울 수 있었다. 부모는 영국 통치기인 마드라스 행정부(Madras presidency, 1652~1947) 시절에 불어닥친 엄청난 기근으로 1874년에 사망했다. 언니도 결혼한 후 콜레라로 1875년에 죽었다. 이제 남은 가족은 오빠 쉬리니바스 샤스트리(Shrinivas Shastri)와 라마바이 둘뿐이었다. 아직 10대였던 둘은 심한 굶주림을 겪으면서도 인도 순례를 지속했다.

이미 16세 무렵부터 여성 교육에 대한 강연을 시작했고, 여러 인도 지역어를 포함해 총 6개 언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진 라마바이와 오빠에 대한 기사가 여러 신문에 나는 등, 이들은 이미 유명 인사였다. 1878년에 라마바이와 샤스트리는 인도 동부 끝 캘커타에 도착했다. 이때 대학에서 연구하는 학자들이 이들을 초청했다. 강연과 대화를 통해 라마바이의 범상치 않은 지성을 알게 된 이들은 그에게 '판디타'와 '사라스바티'(Pandita and Sarasvati)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 판디타는 현인(wise person), 사라스바티는 학식의 여신이라는 뜻이었다. 이후 라마바이에게는 늘 '판디타'라는 별칭이 따라 붙으며, 판디타 라마바이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2)

주로 신앙 구도자이자 사회 개혁자로 더 많이 활동하며 이름을 떨친 라마바이가 언어적·학문적 천재성을 발휘한 영역은 성경 번역이었다. 인생 마지막 20년이 시작되는 1900년 무렵부터 라마바이는 지역 언어인 마라티어(Marathi)로 된 성경전서를 번역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거의 전적으로 시간을 투자했다. 라마바이는, 지역 평신도 선교사들이 다른 언어를 알지 못하는 현지 주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시작한 이 성경 번역을 완료한 지 8개월이 지난 1922년 4월 2일에 사망했다. 결국 이 성경은 라마바이가 자기 민족에게 남겨 준 가장 큰 신앙 유산이었다. 라마바이는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어원에 기초해서 마라티어 용어 사전을 편집하기도 했다.

성경을 번역하고 있는 라마바이. 사진 출처 <Pandita Ramabai Sarasvati - Pioneer in the Movement for the Education of the Child-widow of India

2. 구도자/순례자(Seeker/Pilgrim)

사실상 태어난 직후부터 순례자 가족의 일원으로 구도자로서 살기 시작한 라마바이의 전 생애는 문자 그대로 순례의 삶이었다. 힌두교 순례자에서 기독교 구도자로, 기독교 구도자에서 회심한 신앙인으로, 이후에는 서양 전통에 속한 기독교인에서 인도의 얼굴을 가진 토착 기독교 신앙인이자 사회 개혁가로, 또한 형식적이고 전통적인 신앙인에서 갱신과 부흥을 경험하고 촉진하는 부흥 운동가로, 라마바이의 삶은 구도와 순례의 연속체였다.

이미 살펴본 대로, 신앙과 전통에 충실한 힌두교 브라만 계급 출신 가문답게, 라마바이의 부모는 딸이 태어나서 걷기 시작한 직후부터 남은 모든 생애를 성지순례에 투신했다. 이 때문에 라마바이 또한 거대한 인도 대륙 전역을 한 성지에서 다른 성지로 거의 성년이 이르기까지 순례하면서, 힌두교 신앙의 깊이와 넓이를 경험할 수 있는 최대치만큼 체험했다. 더구나 어린 시절부터 신성 산스크리트어로 경전을 완벽하게 읽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전수받고 익힌 덕에, 당대의 학자들로부터 '학식의 여신'(판디타, 사라스바티)이라 불릴 만큼 힌두교 신학과 고전에도 능숙했다.

이런 라마바이가 기독교 신앙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1880년에 하나 남은 혈육인 오빠마저 콜레라로 사망하기 직전인 캘커타 시절이었다. 기독교에 대한 첫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다. "의자, 소파, 탁자, 램프가 있었는데, 이 모두가 우리에게는 새로웠다. 인도 사람들이 잉글랜드인 남녀처럼 기괴하게 옷을 입고 있었다. (중략) 이들은 잉글랜드 사람들과 함께 빵과 비스킷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다과를 들어 보라고 권하면서 우리를 경악케 했다. (중략) 이들은 신에게 기도했지만 (중략) 마치 자신들이 앞에 두고 무릎 꿇고 있는 의자에 경의를 표하는 것처럼 보였다. (중략) 우리는 칼리 유가(Kali Yuga), 즉 다툼, 어둠, 불신앙의 마지막 시대가 캘커타에서 통치 영역을 굳건히 구축했다고 생각했다."3)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아직 깊이 이해하지 못한 라마바이에게는 기독교인이 된 인도인들이 영국, 혹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 서양인의 관습, 의복, 식사, 행동을 따르는 것, 즉 기독교와 서양 문명, 또는 기독교인과 서양인을 동일시하는 전형적 행태가 낯설게 느껴졌음에 틀림없다. 이런 의문은 훗날 라마바이가 기독교인이 된 후에도 토론과 논쟁 주제가 되었다. 이는 나중에 그가 내면은 기독교이되, 외면은 인도인으로 사는 인도 토착 기독교를 주창하는 계기가 된다.

오빠가 캘커타에서 사망한 1880년에 판디타는 다른 계급에 속한 남녀는 결혼할 수 없다는 카스트제도의 규율을 깨고 오빠의 벵골인 친구이자 수드라(평민) 계급 출신의 비핀 베하리 다스 메드하비와 결혼했다. 이 부부는 동북부 아삼주 코차르(Kochar, Assam) 지방에 터전을 잡고 2년 동안 행복하게 살았지만, 남편도 곧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콜레라로 세상을 떴다. 이 짧은 시기에 젊은 부부는 근교에서 사역하던 잉글랜드 침례교 선교사 아이작 앨런(Issac Allen)을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기독교에 대한 인상을 개선해 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남편은 어린 시절 이미 선교계 학교에 다니면서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갖고 신앙을 거부한 전력이 있었다.

남편이 죽고 난 후 라마바이는 어린 딸과 함께 다시 대륙을 가로질러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출생지에서 가까운 푸네(Pune) 지방에 정착했다. 도착 직후부터 힌두 사회에서 억압받던 여성의 해방을 위해 일하기 시작한 라마바이는 여기서 동정녀마리아공동체(Community of Saint Mary the Virgin)에 속한 성공회 수녀 선교사들 및 브라만 계급 출신 인도인 사제 니허마이어 고레(Nehemiah Goreh) 신부와 접촉했다. 이 만남을 계기로 라마바이는 잉글랜드로 가서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면서, 동시에 기독교에 대해 더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판디타 라마바이와 그의 딸. 1886년 처음 미국을 방문했을 때. 사진 출처 <Pandita Ramabai Sarasvati - Pioneer in the Movement for the Education of the Child-widow of India

잉글랜드 생활은 라마바이에게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잉글랜드 원티지(Wantage)에서 성공회 수녀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배우던 와중에 그는 자발적으로 신앙을 고백했다. 이어서 1883년 9월 29일에는 딸 마노라마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이는 구도자求道者 판디타가 찾아 헤매던 도를 발견한 행복이었다. 또한 그들의 대모이자 영적 가이드가 된 제랄딘 수녀(Sister Geraldine)와 일평생 대화 및 기도의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도 큰 축복이었다. 그러나 불행도 있었다. 바라 마지않던 의학 공부는 청력 문제 때문에 입학 자체가 거부되었다. 인도에서부터 함께 동행했던 동료 아난디바이 바가트(Anandibai Bhagat)는 정신 질환에 시달리다 라마바이가 보는 앞에서 사망했다.4) 제랄딘 수녀와 주고받은 편지에 따르면, 비록 회심했음에도, 잉글랜드국교회(Church of England, 성공회)의 체계에도 거부감이 있었다.

"제가 그리스도의 교회 일원인 것은 사실이지만, 사제나 주교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 한마디 한마디를 다 받아들일 의무는 없습니다. (중략) 저는 무진 애를 쓴 끝에 인도의 사제 지파의 멍에에서 이제 막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현재로서는 사제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지존하신 분의 권위 있는 명령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과거와 비슷한 또 하나의 멍에를 맬 생각이 없습니다."5)

이 문구를 보면, 라마바이는 기독교 신앙으로 회심한 후에도, 자신이 속한 잉글랜드국교회 내의 잉글랜드적인 요소, 즉 잉글랜드 문화와 문명이 신앙과 정체성을 대표하는 표징인 양 취급되는 것에 불편을 느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힌두교 카스트제도의 계급주의와 사제주의에 지쳐 거기에서 막 해방되었는데, 그렇게 해방된 후 들어간 교회가 개신교에서 가장 권위적인 상하 계층주의 제도를 보유한 인상을 주는 성공회였다는 것도 문제였을 수 있다. 이미 언급했듯, 기독교를 처음 만날 때부터 이 신앙의 내면과 외면, 알맹이와 껍질을 예민하게 구별할 수 있었던 라마바이는, 개종과 회심을 경험하면서도 전수받은 새로운 전통을 전적으로 순전한 본질로 수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라마바이의 구도求道는 이미 성취되었으면서도(already),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not yet).

실제로 라마바이의 회심 여정은 몇 단계를 거쳤다. 아이작 앨런과의 대화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탐구하기로 결심하고(1881), 영국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후(1883), 미국을 들러 몇 차례 강연하고 나서 1889년에 인도로 돌아갔다. 인도 뭄바이(봄베이) 지역에서 그는 카스트 상류층 출신 과부들을 위한 학교와 생활 공동체 샤라다사단(Sharada Sadan, 배움의 집)을 설립했다. 본격적인 사회 개혁자로서의 경력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또다시 1891년에 라마바이는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개인 회심을 경험했다.

"내가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중략) 이때 내가 알았던 것 한 가지는 내게 필요한 것이 그리스도이지, 단지 그의 종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중략)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내 내면의 믿음을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깨닫지 못했다. 나는 마침내 내 자아의 끝에 도착했으며, 자신을 구세주에게 무조건적으로 내어놓고, 그분께 내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나의 의와 구속이 되어 주셔서, 내 죄를 모두 가져가 달라고 요청했다."6)

이렇게 깊은 내면의 회심 및 이로 인한 확신을 경험한 라마바이에게 찾아온 또 한 차례의 깊은 구도적 순례 경험은 1905년에 있었다. 묵티 부흥(Mukti Revival)이라 불리는 사건이었다. 1889년에 설립된 배움의 집은 다음 해에 학생 40여 명과 함께 푸네(Pune)로 옮겨 갔다가, 1896~1897년 마드야 프라데시 기근 이후 구출된 300여 소녀, 이후 1900~1901년 구자라트 기근 이후 2000여 명이 더해지면서 거대한 공동체가 되었다. 이 공동체는 푸네 근처 케드가온(Kedgaon)의 40만㎡ 부지로 마지막으로 이전하는데, 1898년 9월 24일부터 명칭을 '자유'라는 의미를 지닌 묵티선교회(Mukti Mission)로 바꾸었다.7)

1905년 6월 9일부터 시작된 묵티 부흥의 신앙적 배경은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우선, 라마바이가 영적 부흥의 필요성을 긍정하는 19세기 후반 이래의 성결 운동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영국에 있을 때 성공회에서 회심하고 세례를 받은 라마바이는 미국과 인도에서 부흥 집회, 캠프 집회, 개인 대화, 독서 등을 통해 드와이트 펜테코스트를 포함한 순회 전도자와 잉글랜드 케직 운동을 통해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 성결"과 "승리하는 삶" 교리 등을 배우고 수용했다. 1898년에 라마바이협회 사업 진행 사항을 보고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뉴욕주 로체스터 근교의 성결 학교로, 훗날 로버츠웨슬리파대학(Roberts Wesleyan College)으로 발전하게 되는 학교에 자기 딸과 젊은 인도인 과부들을 등록하게 했다. 성결과 갱신, 제2의 축복을 강조하는 이런 웨슬리파 성결 전통이 묵티 부흥의 원천이었다.8)

둘째는, 같은 해 3월에 웨일스와 북동부 인도 카시아 및 자얀티아 고원지대에서 부흥이 일어났다는 소문이었다. 한국의 원산 및 평양 대부흥, 미국 로스앤젤레스 아주사 스트리트 부흥이 웨일스 및 인도 부흥의 소식을 듣고 같은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망하며 기도한 후에 일어났듯이, 묵티 부흥은 이들을 더 이른 시기의 웨일스 및 북인도 부흥과 연결하는 연쇄 현상이었다.9)

그러나 20세기 부흥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인정받는 이 부흥에는 구별되는 두 가지 단계가 있었다. 1905년 6월에 시작된 부흥이 1단계였고, 1907년 2월에 시작된 부흥이 2단계였다. 뜨거운 기도, 깊은 통회와 공개 죄 고백, 통성기도와 찬양, 복음 전도 등, 부흥에 이어지는 현상은 둘 모두 공통적이었으나, 2단계에는 방언이라는 특이한 현상이 등장했다. 라마바이는 방언을, 비록 주저하기는 했지만, 성령의 역사로 인정했다. 그를 돕던 미국 북감리교 출신 선교사 미니 에이브럼스(Minnie F. Abrams, 1859~1912)는 더 적극적으로 이 현상을 지지하고, 이를 촉진하기 위해 노력했다.10) 라마바이의 신앙 순례는 이 점에서 크게 보아 4단계, 즉 힌두교→주류 개신교(성공회)→복음주의 성결 운동→오순절 부흥 신앙의 진화를 거쳤다고 판단할 수 있다.

묵티선교회 채플과 학교 건물. 사진 출처 <Pandita Ramabai Sarasvati - Pioneer in the Movement for the Education of the Child-widow of India

3. 개혁가(Reformer)

라마바이가 기독교로 회심하기 이전 힌두교 성지순례 기간이던 16살 때부터 이미 여성 교육을 주제로 강연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했다. 모두가 인식할 수 있듯이, 이는 당대 카스트제도의 여성 비하 사조에 반대해서 아내와 딸에게도 남성과 동일한 교육을 시킨 아버지 덕이었다. '판디타'와 '사라스바티'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획득한 라마바이가 개혁을 말로만 떠들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옮긴 이른 시기의 중요한 사례는 사망한 오빠의 친구 비핀 베하리 다스 메드하비와의 결혼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카스트 내 서로 다른 계층과의 통혼이 사회적 금기로 남아 있는 인도 사회에서, 19세기 말에 브라만 여성이 평민 수드라 계층의 남성과 결혼한 것은 가히 혁명이었다. 안타깝게도, 남편의 때 이른 죽음으로 이 결혼은 2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인도에서부터 품고 있던 이런 기본 개혁성을 강화한 계기는 영국을 떠나 미국에서 보낸 1년간의 공부였다. 이 기간에 라마바이는 독일 교육자 프리드리히 프뢰벨의 교육철학을 집중 공부했고, 귀국한 후에는 프뢰벨의 저술을 번역해서 교재로 사용하고, 이 철학을 자신의 학교 커리큘럼에 적용했다. 라마바이가 인식한 이 철학의 핵심 원리는 남녀 모두에 대한 존중, 의지의 자유 및 양심의 자유였다. 특히 미국 시기에 쓴 책 한 권이 이후 오래도록 유명세를 타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라마바이가 미국 전역에서 했던 강연과 연설 모음집이었다. <카스트 상류층 힌두 여성 The High Caste Hindu Woman>(1888)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이 책에는 인도 여성이 일상에서 경험하던 차별과 학대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몇 가지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 아버지와 이웃 사람 및 친구가 모여 아내가 출산 중인 아이를 기다리다가, 태어난 아기가 아들이면 함께 춤추며 기뻐하지만, 딸이면 아버지가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았다"고 알린다. 이때 친구들은 모두 침묵 속에 집으로 돌아간다.
● 여자 아기를 죽이는 것은 아버지의 책임으로, 소량의 아편으로 아이를 조용히 시킨 후, "목구멍에 손톱을 집어넣기"로 알려진 기술을 사용하여 아기 목을 누른다.
● 아홉 살 혹은 그보다 어린 신부가 시아버지의 집으로 보내지는데, 거기서 "어린 신부의 영혼을 부수는 것이 시댁에서 반드시 받아야 하는 훈련이다."
● 소녀는 대개 출생 후 아홉 살 이전에 결혼하는데, 남편이 죽거나, 신부를 거부하거나, 부모의 노예로 주어 버리거나, 다른 아내 십여 명 혹은 백여 명과 결혼한 경우라면, 일평생 과부가 된다.
● 책이 집필되던 시기에 인도에는 20세 이하 과부가 50만 명이 넘었는데, 이 중 7만 9000명은 아홉 살 아래였다.
● 결혼한 소녀가 과부가 되면, 여자가 이전 생애에서 끔찍한 죄를 지었기 때문인 것으로 인식되므로, 과부가 벌을 받아야 한다.
● 자신을 구원하는 가장 명예로운 방법은 남편이 화장될 때 몸을 던져 함께 타 죽는 것이다.
● 아들이 있으면, 모든 재산은 아들에게 귀속된다.
● 남자 후손을 남기지 못한 남성은 천국에서 있을 자리가 없다.
● 여성이 영원한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미래의 어느 때에 브라만 계급 남성으로 환생하는 것이다.11)

여성 차별이 극심했던 조선 시대 유교 질서에서 조선 여성들이 경험한 것보다 더 끔찍한 이런 힌두교 카스트 사회의 문제를 일찌감치 인식했기에, 라마바이는 학대받는 여성, 특히 카스트제도의 부조리에 희생된 과부를 구제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1898년에 라마바이협회가 발족했다. 에드워드 에버릿 헤일, 필립스 브룩스, 프랜시스 윌라드 같은 미국인이 처음부터 창단 임원에 포함되었다. 이 협회는 라마바이에게 10년 동안 자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영미권에서 조직된 여성기독교금주연합(WCTU)이 라마바이의 사역과 연대했다. 19세기 말 서양에서 여성 기독교인들이 가장 활발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여성 및 가정 가치와 인권을 신장할 수 있는 곳이 세계 선교와 금주 및 절제 운동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WCTU 국제 네트워크에서 라마바이에게 지도자 역할을 맡기는 동시에, WCTU의 각 지역별 모임에 라마바이서클(Ramabai Circle)을 조직해서 그녀를 지원하기로 서약했다.

여러 차례 이동 끝에 케드가온에 최종 정착한 묵티선교회는 1900년에만 여자 어린이 고아와 과부 2000명, 버려진 남자아이 수백 명을 지원했다. 음식을 자급할 수 있도록 농장도 경영했고, 봉제·농사 등 실용적인 교육을 통해 개인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4. 인도인(Hindu/Indian)

기독교를 받아들인 인도인들이 마치 잉글랜드 사람인 것처럼 옷을 입고, 잉글랜드 음식과 차를 마시는 모습을 처음 보고 위화감을 느꼈던 라마바이는 문화적 감수성이 남다른 인물이었다. 잉글랜드에서 회심한 후에도 잉글랜드와 서양 문화가 기독교의 본질 자체는 아니라고 인식했던 라마바이와 서양 기독교인 간에는 늘 어느 정도 갈등이 있었다. 그는 종교적으로는 신앙고백적 기독교인이었지만,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인도인, 즉 힌두였다. 그리고 그 둘이 갈등 관계에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귀국 후 인도에서 사역하면서, 라마바이가 인도 전통을 완전히 버리지 않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 이들이 있었다. 특히 라마바이는 자신을 '힌두 기독교인'(Hindu Christian)이라 칭했다. 여전히 주변 힌두교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힌두교 행사에서도 초청이 오면 강연했다. 힌두교 경전에도 지혜가 담겨 있다며 가끔 읽었고, 자신의 학교에서도 학생이 힌두교 경전을 읽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12)

1889년에 샤라다사단(배움의 집)을 시작했을 때, 라마바이는 학생들이 원하는 대로 어떤 종교든 선택할 수 있게 하고, 기독교 신앙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기독교인뿐 아니라 힌두교인에게도 재정 후원을 받았다. 그러나 문을 열어 놓고 자신의 딸에게는 큰 소리로 성경을 읽어 주었는데, 이는 자신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자기 신앙을 유지하고 표현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상징적 행동이었다. 즉, 강요의 방식이 아니라 모범의 방식으로 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상류층 카스트 출신 여성들에게 기독교를 지나치게 강요하다가 이웃 사회에 반감을 일으켜, 폭력적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고 염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보인 학생들에게는 기독교를 소개하고 가르치며, 일부에게 세례를 받으라고 권했다. 이것이 주변 힌두교 이웃에게는 문제가 되어, 항의로 학생이 학교를 강제로나 자의로 그만두는 일도 있었다. 말하자면, 기독교인에게도, 힌두교인에게도 문제시된 관용적 기독교 정책이었다.

이 정책하에서도 기독교 신앙으로의 회심은 자주 일어났다. 1890년에 학교를 푸네로 옮기면서부터는 학교의 기독교 색채를 분명히 했다. 1898년에 묵티선교회로 확장된 이 공동체는 '선교회'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분명한 기독교 공동체였다. 안식처를 찾아온 수천 명은 분명한 기독교 복음을 들었다. 선교회를 상징하는 이미지는 자유의 종(Liberty Bell)으로, 이는 미국이 1776년에 독립을 선언하며 필라델피아에서 울린 바로 그 종이었다.13)

라마바이의 생애에서 또 하나 특별한 점은 선교사와 현지인 기독교인 지도자 간의 위계질서가 바뀐 현상이었다. 묵티선교회 최고 지도자는 창립자이자 인도 기독교인 여성의 지주였던 판디타였다. 이 선교회가 인도에서 활발한 사역을 하는 과정, 특히 부흥의 발화점으로 세계에 알려지는 과정에 미니 에이브럼스가 한 기여는 지대했다. 라마바이와 미니가 상호 보완하여 엄청난 시너지가 발생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미니는 판디타를 돕는 행정보좌관이었다. 2차 대전으로 서양 선교사들이 비서양 선교지에서 철수하면서 힘을 잃기 이전까지, 남녀를 막론하고, 서양 선교사가 현지 지도자 밑에서 보좌한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첫 선교 후 몇 세대가 지나서 선교 활동에 이양이 일어나도, 그것은 서양 선교사의 지도력을 현지인이 위임받아 대체하는 것이지, 서양인이 현지인 밑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이 점에서, 20세기가 되기도 전인 1898년부터 1912년에 사망하기까지 판디타와 미니가 형성한 관계는 가히 혁명적이었다.14)

1989년 인도 정부가 발행한 우표. 라마바이 얼굴 왼쪽에 그가 세운 샤라다사단이 보인다.

5. 여성주의자(Feminist)

사회운동가로서의 라마바이를 다른 이들과 구별 짓는 중요한 요소는 그가 여성이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인으로서든, 사회 개혁자로서든, 한국에서 라마바이를 소개하는 글은 극히 적다. 그런데 이런 얼마 안 되는 희귀한 몇 글이 라마바이에게 붙이는 수식어는 "여성운동의 선구자,"15) "여성 담론의 주체성"을 담지한 "신여성"16)이다. 이들은 모두 라마바이를 20세기 페미니즘 운동의 선구자로 묘사한다. 특히 1997년에 창간된 후 2006년에 저널 발간을 완료하고, 이제는 웹진과 팟캐스트 중심으로 활약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if>도 라마바이를 교육가이자 여성운동가로 높이 평가한다.17)

남녀평등이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상당 수준으로 실현된 오늘날에도 여성은 여전히 유리 천장에 막혀, 개인 능력과 상관없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제약에 갇혀 있다. 19세기에는 전 세계 모든 여성이 철저히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았다. 서양에서도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투표권을 행사하며,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그러나 제도적 차별을 넘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 취급을 받던 인도 출신의 라마바이가, 20세기가 시작되는 전환기라는 이른 시기에, 기독교 및 세속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전 세계 모든 여성이 따르고 우러르는 '판디타'이자 '사라스바티'가 되었다.

1922년에 사망하기 3년 전인 1919년, 라마바이는 인도 사회에 남긴 뛰어난 공헌을 인정받아 카이저-이-힌드(Kaiser-I-Hind) 메달을 수여받았다. 영어로 'Emperor of India', 즉 '인도의 황제'라는 이름을 가진 이 메달은 1900년에서 1947년까지 영국 국왕이 수여한 영예로운 상이었다. 20세기 전반기에 인도에서 활약하며 기독교 신앙의 해방성·보편성·총체성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 준 판디타 라마바이는 제3세계 출신 여성 기독교인이 이루어 낼 수 있는 최고의 업적을 남겼다. 오늘날에도 인도 묵티선교회는 활발하게 사역하며 라마바이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다.

1) 토머스 E. 슈미트, 『사도행전 그 이후』, 윤종석 역 (서울: 아바서원, 2014), 253-263.
2) Edith Blumhofer, "판디타 라마바이," in 『복음주의 인명사전』, 이재근·송훈 역 (서울: CLC, 2018 출간 예정); 루스 터커, 『선교사 열전』, 오현미 역 (서울: 복있는사람, 2014), 678f; Mark A. Noll and Carolyn Nystrom, Clouds of Witnesses: Christian Voices from Africa and Asia (Downers Grove, Ill.: IVP, 2011), 127-131.
3) Noll and Nystrom, 131.
4) Noll and Nystrom, 132f.
5) Shamsundar Manohar Adhav, Pandita Ramabai (Madras: Christian Literature Society, 1979), 31. 터커, 『선교사 열전』, 680에서 재인용.
6) Noll and Nystrom, 138.
7) Noll and Nystrom, 136-137; 김창환, "은혜의 소나기 - 20세기 초 인도 카시아 고원과 묵티선교회의 부흥 운동," in 서원모, 장로회신학대학교 제5회 국제 학술 대회 준비위원회 편, 『20세기 개신교 신앙 부흥과 평양 대각성 운동』(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6), 126f.
8) Edith Blumhofer, "판디타 라마바이," in 『복음주의 인명사전』.
9) 김창환, 129f.
10) 김창환, 132-135.
11) Noll and Nystrom, 134-136.
12) 터커, 『선교사 열전』, 681.
13) Noll and Nystrom, 136f.
14) 미니 에이브럼스에 대한 간략한 전기는 다음을 보라. http://www.bu.edu/missiology/missionary-biography/a-c/abrams-minnie-f-1859-1912/
15) 공영수, "여성 운동의 선구자, 판디타 라마바이" http://igoindol.net/siteagent/100.daum.net/encyclopedia/view/133XX51100024
16) 박금표, "인도 여성 담론의 주체성과 신여성의 특성," 「남아시아연구」 21:3 (2016.2): 53-84.
17) 이지은, "'학식 높은 여사제' 판디타 라마바이 1" http://blog.ohmynews.com/feminif/369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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