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신학(modern theology)은 현대성(modernity)의 맥락에서 하나님에 관해 사유하는 것으로, 여기서 현대성은 계몽주의에서 유래한 문화적 정신이다."1)

로저 올슨은 1992년 스탠리 그렌츠와 함께 지난 세대 영어권에서 가장 널리 활용된 현대 신학 교과서 <20세기 신학 20th-Century Theology: God and the World in a Transitional Age2)을 썼다. 이 책은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 중 어느 것을 더 강조하느냐' 또 '어떤 방식으로 강조하느냐'를 기준으로 19세기 중반 이후 현대 신학의 흐름을 주요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정리해서 큰 호응을 받았다.

2005년 공저자 중 하나인 그렌츠가 갑작스런 뇌동맥류로 사망했기 때문에, 홀로 남은 올슨은 2013년 이 책의 20주년 기념 개정판을 펴냈다. 두 사람의 이전 저작이 현대 신학을 양극화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강조라는, 다소 작위적인 공식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 했다는 비판을 의식해서였는지, 올슨은 완전히 새로 쓰다시피 한 개정판의 키워드를 '현대성'으로 수정했다. 위 인용한 문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는 17세기 이래 등장한 계몽주의 및 합리주의 철학과 과학에서 유래한 "현대성 및 그에 대한 신학적 대응들"이 현대 신학과 그 주창자들을 구분해서 설명하기 위한 좋은 도구라고 판단했다.3)

제임스 번(James M. Byrne)의 글을 인용하여, 올슨은 신비와 종교를 세속화, 비신화화, 비신비화하는 현대성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①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진실을 발견하는 '이성'의 능력에 대한 강조" ② "과거의 덕망 있던 제도와 전통에 대한 회의" ③ "과학적 사고방식의 출현."4) 현대 신학은 기독교의 전통적인 복음·신학·신앙을 이런 계몽주의 이후의 '현대성'에 적응시키려는 여러 학자들의 시도 속에서 태어난 일련의 신학 작업과 그 결과물을 일컫는다.

여러 면에서, 카를 바르트는 20세기 신학계에서 키가 제일 큰 거인이자 교부로 인정받는다. 조직신학의 거의 모든 주제를 광범위하게 다뤘고, 한 시대를 풍미한 신학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는 여러 이정표를 만들었으며, 거의 모든 신학자에게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강력한 추종자 집단과 과격한 비판자 집단을 동시에 양산했으며, 거의 모두가 이름을 들어 알고 있고, 자신이 활동했던 독일어권 스위스와 독일 및 개혁파 진영을 넘어, 유럽의 다른 언어권, 다른 대륙, 비서양 지역, 다른 교파, 심지어 로마가톨릭에까지 영향을 끼치며 논란을 불러일으킨 인물이었다.

카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카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예컨대, 20세기 영어권 조직신학 세계의 지형도를 보여 주기 위해 조직신학의 14가지 주제를 저명한 학자들이 각각 맡아 저술한 글을 모은 <현대 신학 지형도: 조직신학 각 주제에 대한 현대적 개관>(새물결플러스)은 독자들에게 마치 바르트 신학 해설서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 13명 중에는 '복음주의' 신학자도 있고, 바르트의 영향을 받은 소위 '신정통주의자'도 있고, 이들보다 더 폭이 넓은 신학적 '주류' 교단 소속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자기 주제를 다루면서 압도적인 분량으로 인용한 현대 신학자는 예외 없이 공통적으로 '카를 바르트'였다.5) 한마디로, 그를 영웅이나 성인으로 숭배하고 경외하든, 수구적 반동주의자로 폄하하고 멸시하든, 정통으로 위장한 자유주의자로 혐오하고 비난하든, 바르트는 명실상부 20세기 신학계를 '평정한 거인'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고, 누구나 한마디씩 거들고 있음에도(혹은 바로 그 때문에), 사실상 바르트만큼 다양한 꼬리표를 달고 오해를 산 인물도 많지 않을 것이다. 바르트 자신도 그런 오해를 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내가 수많은 사람들의 공상 속에서 (중략) 편리한 대로 서둘러 받아들여져 무수히 베껴지는, 물론 또 그만큼 쉽게 버려지는 - 대개는 어떤 사람이 어느 때 황급히 그려 내는 그림들이 대부분 백발인 형태로만 존재한다는 - 인상을 받는다면 내가 속는 것인가?"6)

사도 바울,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루터, 칼뱅이 그랬듯, 교회와 세상의 역사 흐름을 뒤바꾼 거대한 인물이 어쩔 수 없이 겪는 수난(혹은 영광)을 바르트도 당했다. 20세기 세계 기독교의 지성사 영역에서 바르트의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본 글에서는 그의 신학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그가 20세기 세계 교회 역사의 흐름을 바꾸게 된 사건과 배경을 '바젤', '놀이터 폭탄, '바르멘 선언'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설명하려고 한다.

스위스 바젤

카를 바르트는 1886년 5월 10일 스위스 바젤에서 목사이자 신학자인 아버지 요한 프리드리히 바르트와 안나 카타리나 바르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바르트 부모의 양가는 바젤 및 근교 독일어권 스위스의 유서 깊은 개혁파 목회자 집안으로 유명했다. 양 집안은 19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친증조부와 외증조부 시대부터 신학자·목회자·대학교수를 수없이 배출한 집안이었다. 카를 바르트가 태어나던 때 아버지 프리드리히('프리츠') 바르트도 바젤의 자유교회신학원 교수로 활동하고 있었고, 아버지의 세 형제도 목사나 신학자였다.

카를 바르트는 태어난 지 3년 만에 아버지가 베른대학교 조직신학 교수로 임용되면서 바젤을 떠나게 됐다. 그러나 베른에서 보낸 어린 시절 내내 집에서 '바젤 독일어'를 사용했고, 자신의 가문과 사랑하는 조부모 및 친척들의 유산이 서려 있는 바젤로 방학마다 찾아가 '천국'에서 '축제'를 즐기고 있다고 느낄 만큼, 바젤을 평생 '고향'으로 인식하고 그리워했다. 48세이던 1934년 독일에서 교수직을 박탈당한 후, 그는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가 바젤대학 교수로 가르치다 은퇴했고 1968년 8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바르트의 노년기 제자이자 조교로서 바르트에 대한 가장 방대하고 권위 있는 전기를 집필한 에버하르트 부쉬는 바르트의 자전적인 기록들과 회고록을 토대로 바젤에 대한 바르트의 유대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바젤에서 사람들은 '특별한 공기'를 '마시고 산다.' 이곳에는 아주 특이한, '아마도 (중략) 저승과도 같은 정신의 전통'이 지배하고 있다. 언젠가 칼 바르트가 그 당시 바젤의 신학, '어쩌면 지구 최후의 날까지 그런 식으로 지속될' 바젤의 신학에 대해서 한 말이 전형적인 바젤 사람의 정신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즉 바젤 사람은 '선천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보수적인데 (중략) 그러면서도 타인의 극단적이고 과격한 모습에 대해서는 왠지 모를 비밀스러운 관심, 공감 어린 관심을 보인다. (중략) 하지만 그런 모습에 대해서는 지독하게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조심스럽다.' 바젤 사람이 오른쪽으로 기우는 것을 막아 주는 것은 '이른바 태생적인, 살짝 인본주의적인 의심'이다. '끊임없는 관찰로 습득한 삶의 지혜'는 바젤 사람이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지켜 준다. 그는 이러한 극단의 중간 어딘가에 머물려고 하고, 조금 자유로운 사상을 조용히 따르거나, 조금 경건한 열광주의도 조용히 따르기는 하지만, 겉으로는 자유와 절제를 건강하게 아우른 이미지를 항상 유지한다."7)

바르트는 바젤의 정신이 "극단의 중간 어딘가에 머물러", "겉으로 자유와 절제를 건강하게 아우른 이미지를 항상 유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바르트의 이 표현은 극단의 권위주의와 부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가톨릭교회를 비웃고 저격하면서도, 전통과 질서를 해체하는 것처럼 보인 마르틴 루터의 개혁에는 동참하기를 거부한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를 상기시킨다. 바젤은 네덜란드 로테르담 출신이지만 바젤에서 활동하며 사망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보낸 에라스뮈스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한때 빠져들었던 합리주의적 자유주의, 그리고 그 반대편 끝에 있는 문자적 보수주의를 결국에는 모두 거부한 바르트의 '중도(via media)' 또한 "자유와 절제를 건강하게 아우르고" "극단의 중간 어딘가에 머무는" 바젤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독일에서 발행된 카를 바르트 기념 우표.
독일에서 발행된 카를 바르트 기념 우표.
놀이터 폭탄

바젤을 이토록 그리워하고 사랑했음에도, 바르트는 태어난 후 바젤에서 채 3년을 살지 못하고 스위스와 독일의 다른 지역을 유목민처럼 떠돌다 48살이 돼서야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 45년의 중간기는 그가 살았던 시대만큼이나 파란만장했다.

당시 독일어권 신학계에서 '전통주의자'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던 '실증주의자' 아돌프 슐라터(Adolf Schlatter, 1852~1938)의 후임 조직신학 교수로 지목된 아버지 프리츠는 1889년 4월부터 베른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베른대학에서 가르치는 동시에, 초기 '레르버학교'로 불리다 나중에는 '자유김나지움'으로 교명을 바꾼 기독교계 '실증주의' 학교의 종교 교사와 운영이사로도 활동했다.

카를은 6살이던 1892년부터 고등학교 과정을 졸업한 1904년까지 약 12년 동안 이 학교에서 소년 및 청소년기를 보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독서와 희곡 습작 등 인문학·문학에 두각을 나타냈다. 카를은 1901~1902년 로베트르 에쉬바허 목사의 견신례(입교) 수업을 "나를 완전히 매료시켰던 사건, 거의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사건"으로 기억한다. 그는 1902년 3월 23일 견신례를 받으면서 신학자가 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결정적인 경험은 견신례 교육이었지만, 일평생 그가 지극히 존경했던 아버지의 신앙과 삶, 인격이 그의 결단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8)

1904년부터 카를은 아버지의 조언을 따라 처음에는 아버지가 가르치던 베른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실증주의자이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열린' 실증주의자였고, 무엇보다 아들이 지식이나 신앙, 진로 등 모든 면에서 스스로 내리는 판단을 존중했다. 신학 신입생 카를은 베른에서 신학을 하던 이른 시기에는 아버지의 보수적인 신앙에 별로 공감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 시기에 그는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1804)를 읽으며 거의 '회심 체험'과 유사한 감동을 맛보았다.9)

1906년 10월 예비시험을 1등급으로 통과한 바르트는 시험 통과 학생에게 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스위스 학제를 따라 베를린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는 당대 최첨단 신학으로 더 유명했던 마르부르크로 가고 싶어 했지만, 아버지가 보수적인 할레나 그라이프스발트에 가라고 권하자, 중도 대안으로 베를린을 택했다. 그러나 베를린에도 당대 최고의 교회사가들인 라인홀트 제베르크, 카를 홀, 아돌프 폰 하르낙, 교의학자 율리우스 카프탄, 구약학자 헤르만 궁켈 등이 가르치고 있었다.

베를린에서 젊은 바르트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는 교리사학자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이었다. 그는 고대 교회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그리스철학의 옷을 입은 것이라고 가르쳤다. 하르낙의 인격과 강의에 너무나 매료된 나머지, 바르트는 베를린의 유명한 박물관, 극장, 콘서트홀에는 아예 가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하르낙을 보고 들었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보고 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를린에서 바르트가 추종하게 된 또 한 명의 인물은 빌헬름 헤르만(J. G. Wilhelm Hermann, 1846~1922)이다. 바르트는 당시 마르부르크에서 가르치고 있던 그의 책 <윤리학 Ethik>(1901)을 베를린에서 입수했다. 책을 읽은 바르트는 "이 책에서 영원한 움직임으로 이어질 하나의 자극을 받았다." 아버지가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던 마르부르크를 향한 열망이 결국 베를린에서 불타오르고 만 것이다. 아버지는 다시 아들을 튀빙엔으로 보내 실증주의자 아돌프 쉴라터의 강의를 듣게 했으나, 이미 첨단 현대 신학의 세례를 듬뿍 받은 카를에게 쉴라터는 "격렬한 저항감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결국 1908년 4월 아버지는 강제로 막는 것보다는 "아예 양동이째로 들이키게 놔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베른대학을 졸업한 아들의 마르부르크행을 허락했다.10)

마르부르크에도 유명한 학자들이 많았으나, 바르트는 "나의 대학생 시절 최고의 신학 교사"는 단 한 사람이라고 고백할 만큼 헤르만을 경외했다. 바르트는 칸트와 초기 슐라이어마허의 제자인 "헤르만의 강의를 온 몸으로 빨아들였다." 마르부르크에서 바르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전통적인 신앙을 완전히 버리고, 현대적인 신학, 다른 말로 슐라이어마허와 리츨이 창시한 신학의 추종자로 전적으로 거듭났다. 마르부르크에서 바르트는 1908년 가을부터 또 다른 교수 마르틴 라데가 발행하던 신학 잡지 <그리스도교 세계 Christliche Welt>의 편집조교로 일했다. 그해 11월 아버지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 베른에 다녀온 후 이듬해 8월까지 그는 마르부르크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특히 이 시기에 그는 "트뢸치, 부세, 베른데, 궁켈 같은 대가들의 원고도 일단 나의 검열을 거쳐야 했고, 제일 마지막으로 그 원고를 검토하는 것도 내가 아니었던가!"라며 기고만장해진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11)

안수를 받은 바르트는 이제 목회를 해야 했다. 그의 첫 목회지는 개혁파 신학의 교부 장 칼뱅이 종교개혁을 주도하고 목회한 스위스 제네바였다. 그는 프랑스어가 주요 언어인 제네바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회중을 대상으로 목회하는 수련목회자가 됐다. 그러나 칼뱅의 강당, 칼뱅의 설교단, 칼뱅과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 존 녹스가 설교한 생피에르대성당 옆 강단에서 바르트는 전혀 칼뱅의 것을 닮지 않은, 철저하게 학문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설교를 하고, 견신례 교육을 실시했다. 이 시기 그에게 목회보다 더 의미 있었던 사건은 그가 견신례 교육에서 가르친 18살의 여성 넬리 호프만과 약혼한 일이었다. 그는 2년 뒤에 호프만과 결혼한다.12)

제네바에서 1년 반 정도를 보낸 1911년 4월 2일, 바르트는 스위스 아라우 주의 작은 마을 자펜빌에서 설교 초대를 받았다.이어서 5월에는 자펜빌교회 목사로 청빙됐다. 부임 당시 바르트 자신도 예상치 못했겠지만, 10년간의 자펜빌 목회는 슐라이어마허·리츨·하르낙·헤르만을 전적으로 추종하던 자유주의 목사 바르트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는 몇 가지 결정적 전기가 마련되는 시기였다. 

① 시골 노동자 목회

자펜빌에서 바르트는 자신이 목회자라는 사실을 철저히 자각하게 됐다. 훗날 고백한 대로, "나의 신학은 내가 수업을 지도하고, 설교하고, 약간의 목회 상담도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자펜빌 목회 10년 동안 그는 약 500차례 설교했는데, 매번 사소한 것 하나 빠뜨리지 않고 꼼꼼히 원고를 작성했다. 초기 설교는 그가 신학교에서 배운 학문의 내용과 특징을 반영했는데 이것이 그를 좌절에 빠뜨렸다. "나는 언제나 벽에다 대고 소리치는 기분이었다." 자펜빌 주민들은 전반적으로 신앙에 별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그의 설교와 자펜빌 사람들의 정서는 전혀 맞지 않았다. "내가 자펜빌의 목사로서 결국 처절하게 실패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괴롭다"는 것이 바르트의 심정이었다.

1910년 당시 자펜빌은 247가구 1625명이 살던 소도시로, 그중 개신교인이 1487명이었고, 취학 아동은 318명이 있었다. 원래 시골 농촌이었으나, 이 당시 급속히 진행된 산업화로 전기가 들어오고 농사짓는 사람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바르트가 얼마 후 사회주의 노동조합운동에 투신하게 되는 계기도 이 산업화와 그로 인한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이론적이기만 한 자유주의신학 담론은 별로 활용될 여지가 없었다. 그는 공장주·지주들에게는 '자펜빌의 빨갱이 목사'라는 험담을 들었고, 노동자들에게는 '목사 동지'로 불렸다. 그러나 목회 현장의 필요 때문에 노동자 편에 서서 노동운동을 했을 뿐이지, 그는 궁극적으로 사회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었다. 다만, 그가 빠져들었던 자유주의신학이 목회 현장에서는 공허하고 무력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13)

② 아버지의 죽음

자펜빌에 온 지 반 년 정도 지난 1912년 2월, 55세 밖에 되지 않은 아버지가 갑작스런 패혈증으로 사망한 사건이 준 충격도 그의 방향 전환에 어느 정도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얼마 전까지 베를린과 베른에서 강의를 했고, 아들의 안수식을 직접 인도한 아버지의 임종 침상에서 부자는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냈다. 아버지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다. "주 예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전부다. 학문도 아니고, 교육도 아니고, 비판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만 한다." 사실상 이때까지도 그는 아버지의 신학 유산에 거의 공감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언과 그의 목회 현장, 그리고 독일에서 1차 대전과 연관돼 일어난 사건이 서로 연계되어, 그가 다른 방향으로 '회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14)

③ 거인들의 타락

바르트의 완전한 방향 전환에 방점을 찍은 사건은 그가 거의 성인군자처럼 추앙하던 현대 신학 스승들이 모국 독일의 '악한' 전쟁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한 일이었다. 1914년 8월 1일 전쟁 발발 당일, 독일 지성인 93명이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수상 베트만-홀베크의 전쟁 결정에 찬성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런데 이 93명 명단에, 마르틴 라데를 제외하고는 그가 존경한 독일인 스승의 이름이 모두 들어 있었다. 바르트는 그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어떻게 종교와 학문이 '모조리 지성의 42cm 대포'로 둔갑하는 지를 보았을 때, '나는 이른바 신들의 황혼을 경험했다.' '(나는) 독일에 있는 나의 모든 스승들, 그 위대한 신학자들의 가르침에 의심을 품게 되었다. 나는 그들이 전쟁 이데올로기 앞에서 실패했다고 느꼈으며, 그 실패로 인해 그들은 그야말로 구제불능의 나락에 떨어져 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윤리적 실패'는 '그들의 성서주석학과 교의학의 전제도 올바른 상태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그래서 '내가 그때까지 철저하게 신뢰할 만한 것으로 여겼던 세계, 곧 성서 주석, 윤리, 교의학, 설교의 세계 전체가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당시 독일의 다른 신학자들이 주장하던 내용의 진실성도 덩달아 흔들리게 되었다.'"

이는 성명서를 발표한 당대 독일 신학자들에 대한 실망과 비판이었지만, 결국 이 신뢰 상실은 자유주의신학의 창시자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 성명서를 통해, 그리고 그 이후에 (심지어 그리스도교 세계에도) 나타난 모든 것을 통해 정체가 드러난 그 신학의 기초를 세우고, 그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이 바로 그(슐라이어마허)다!"15)

④ <로마서>

독일 스승들의 신학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된 바르트는 이제 설교, 교육, 심방을 위해 전적으로 다른 기초를 찾아내야만 했다. 자펜빌 부임 이후 둘도 없는 친구가 된 동향 친구이자 이웃 마을 로이트빌 목사이기도 했던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과의 오래되고 진솔한 대화를 통해, 바르트는 성경 자체가 말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후 그는 목사관 근처 사과나무 아래에 앉아서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로마서를 읽고 또 읽고, 마음에 떠오른 것을 계속해서 적어 나갔다. 바르트는 갓 서른이 된 1916년 시작한 이 작업을 자신의 변화를 해명하기 위한 '글쓰기 연습'이라고 지칭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얼마 전까지 거부했던 아버지의 신학이 가진 진정성과 가치를 재발견하고 책의 1판 서문에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존경했던 토비아스 베크의 주석도 그에게 가이드가 됐다. 마침내 1918년 8월 16일 완성된 원고는 이듬해 1월 책으로 정식 발행됐다.

바르트의 <로마서> 제2판은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던진 폭탄'으로 불리며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국내에도 번역· 출간됐다. <로마서> / 칼 바르트 지음 / 손성현 옮김 / 복있는사람 펴냄 / 1124쪽 /6만 원
바르트의 <로마서> 제2판은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던진 폭탄'으로 불리며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국내에도 번역· 출간됐다. <로마서> / 칼 바르트 지음 / 손성현 옮김 / 복있는사람 펴냄 / 1124쪽 /6만 원

이 책이 독일어권 전역에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출간 후 책은 주로 스위스에서만 유통됐다. 스위스 작은 마을 자펜빌의 젊은 개혁파 목사를 아는 독일인은 거의 없었다. 변화의 계기는 그 해 9월 독일 튀링겐 주 탐바흐에서 열린 종교사회주의자 대회였다. 100여 명이 참석한 그 대회에서 더 이상 종교사회주의자가 아닌 바르트가 '사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제목으로 한 강연이 유례없는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듬해 2월 뮌헨에서 루터파 목사이자 렘프 출판사(Verlag Lempp) 책임자인 게오르크 메르츠(Georg Merz, 1892~1959)가 바르트를 독일 학자 및 출판인들에게 소개했다. 특히 크리스티안카이저 출판사 소유주 알베르트 렘프가 <로마서>의 스위스 출판사 판권을 계승한 후, 독일에서 남은 재고를 모두 팔았다. 이후 독일 신약학자 아돌프 율리허, 카를 루트비히 슈미트, 루돌프 불트만, 발터 쾰러, 심지어 하르낙의 서평이 쏟아졌다. 대개는 바르트의 견해를 고대 이단 마르키온, 열광주의 갱신 운동, 급진 종교개혁자 슈벵크펠트, 토마스 뮌처 등의 견해와 유사한 급진적인 입장이라고 비판하는 내용이었다.16)

초판의 열광적인 반응에 바르트는 신속히 제2판 개정 작업을 시작했다. 초판 발행 이후 11개월만인 1921년 9월 집필이 완료된 제2판은 "피상적이고 과장되고 애매모호한" 것 같았던 초판과는 달리, 더욱 선명하고 본질적으로 '절대타자'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함으로써,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인 구원의 계시를 선포하는 신학을 제시했다.17) 널리 알려진 이 책에 대한 묘사는 가톨릭 신학자 카를 아담의 책에 등장한다. 

"바르트의 <로마서>는 처음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마치 (중략)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터진 폭탄과 같았고, 그 후에 끼친 영향은 교황 비오 10세가 1907년 9월 7일에 반포한 '주님의 양떼의 사목'의 반현대주의적 교서에 비견할 만하다."18)

바르멘 선언

현대 독일 자유주의신학자들이 놀던 놀이터에 <로마서>라는 고성능 폭탄을 던진 바르트는 이제 주변부에서 적진 중심부로 이동한 후 전투력을 더 강화했다. 1921년 괴팅엔대학 개혁신학 담당교수로 옮긴 그는 칼뱅, 츠빙글리, 개혁파 신앙고백 등을 연구하고 강의하며 무기를 보강했다. 4년 뒤인 1925년 뮌스터대학 개신교신학부로 옮겨 교의학·신약을 강의했고, 1930년 본대학으로 이동했다. 본에 있을 때는 중세 신학자 안셀무스를 읽으며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이라는 명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카를 바르트가 저술한 <교회교의학> 독일어판.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카를 바르트가 저술한 <교회교의학> 독일어판.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본대학 시절 바르트는 그의 필생의 역작이 될 <교회교의학>을 집필해 자신의 사상을 통합·정리할 준비가 됐다. 실제로 그는 1968년 사망할 때까지 이 대작 중 13권을 집필하지만, 결국 미완성으로 그쳤다. 그러나 1차 대전에서와 마찬가지로, 1930년대 다시 한번 독일 학계와 주류 교계가 독일 민족주의와 독일 문명을 기독교적 이상과 동일시하는 상황을 목격했다. 저명한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1933년 5월 하이델베르크대학 총장 취임 연설에서, 1933년 1월 독일 수상이 된 아돌프 히틀러를 열렬히 옹호했다. 파울 알트하우스, 에마뉴엘 히르쉬, 게르하르트 키텔 같은 저명한 신학자들도 이미 오래 전부터 히틀러와 그의 국가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1934년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바르멘 게마르케교회에서 이 분위기에 저항하는 소수파 독일 개신교인들의 연대 회의가 열렸는데, 이를 독일 개신교교회의 제1차 '고백교회' 총회라 부른다. 이 회의에 독일 전체에서 대표단 138명이 모여 교회를 이끌 '제국형제단' 12명을 선출하고, 신학 선언문을 채택했다. 이 '바르멘 선언'은 두 사람의 루터파 대표와 한 사람의 개혁파 대표, 즉 바르트가 모여서 작성한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바르트가 대부분 작성했다.19)

바르멘 선언이 실제로 나치 정권에 대한 독일 교회의 저항을 이끌어 정권의 종교 정책에 어떤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르트 자신은 자기가 작성한 이 선언의 정신을 가능한 영역에서 실천했다. 예컨대, 그는 1934년 11월 본대학에서 총통에게 충성 서약을 하고, 수업 시작 전에 히틀러식 경례를 하라는 정부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따라 12월 해직 명령을 받고, 독일 내 모든 종류의 강연 금지 명령을 받은 그는 이듬해 5월 스위스로 돌아갔다. 다행히 7월부터 바젤대학 교수로 초청받으면서, 남은 33년 생애를 고향에서 마무리할 수 있었다.20)

바젤로 돌아간 바르트는 대학에서 가르치며 <교회교의학>을 비롯한 여러 책을 쓰고 교회·교도소에서 정기적으로 설교했다. 어릴 적부터 사랑했던 모차르트의 음악을 글 쓰는 내내 들었을 뿐 아니라 그를 따로 연구하기도 했다. 영어권에서도 큰 명성을 얻었기에, 영국·미국 등지 학생들이 바젤로 가서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1962년 교수직에서 은퇴한 후에는 미국으로 강연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21)

1962년 4월 20일 미국 <타임>지 커버를 장식한 카를 바르트. 사진 출처 TIME magazine
1962년 4월 20일 미국 <타임>지 커버를 장식한 카를 바르트. 사진 출처 TIME magazine

거대한 산과 같은 학자였던 만큼, 그에게는 추종자도 많았고 비판자도 많았다. 이미 언급한 대로, 자유주의 진영은 그가 근대 이전의 무지한 초자연주의로 돌아갔다고 비난했다. 보수주의, 특히 미국 근본주의 진영에서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날카롭게 구별해 성경의 무오성을 거부했다고 비난했다. 1960년대에는 그가 젊은 시절 빠져든 것보다 더 급진적인 신학들이 부상하면서 그를 좌절시키기도 했다.

그 과격한 10년이 채 가기도 전인 1968년 12월 9일 밤, 바르트는 수면 중에 기도하듯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조용히 사망했다. 아내가 남편을 깨우기 위해 매일 아침 틀었던 모차르트의 음악은 그날 아침에도 울려 퍼졌다. 이렇게 그는 '삶의 경주(Lebenslauf)'를 끝마쳤다. 추모식이 열린 14일 바젤대성당에는 독일 신학자 대표 헬무트 골비처, 동구권 대표 요제프 로마드카, 가톨릭 대표 한스 큉, 젊은 신학자 대표 에버하르트 융엘, 세계교회협의회 대표 빌름 피르스트 호프트가 참석해서 조사를 읽었다. 이 자리에서도 모차르트의 플루트 협주곡 G장조 1악장이 연주됐다.22)

1) 로저 올슨, <현대 신학이란 무엇인가>, 김의식 역 (서울: IVP, 2021), 21. 원서(The Journey of Modern Theology, IVP)는 2013년에 발간됐다. 
2) 스탠리 그렌츠, 로저 올슨, <20세기 신학>(서울: IVP, 1997). 원서는 1992년에 미국 IVP가 발간했다.
3) 올슨, <현대 신학이란 무엇인가>, 15f.
4) James M. Byrne, Religion and Enlightenment: From Descartes To Kant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6), 5-10. 올슨, <현대 신학이란 무엇인가>, 31-33에서 재인용.
5) 켈리 M. 케이픽, 브루스 L. 맥코맥 편, <현대 신학 지형도: 조직신학 각 주제에 대한 현대적 개관>, 박찬호 역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 669-678에 실린 색인을 보라. 바르트에 대한 색인은 672쪽에 나오는데, 한 쪽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와 경쟁할 만한 유일한 현대 신학자는 현대 자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인데, 그에 대한 색인도 바르트의 2/3 분량밖에는 안 된다.
6) Karl Barth, "Foreword to the English Translation," in Otto Weber, Karl Barth’s Church Dogmatics (London: Lutterworth, 1953), 7. 마이클 리브스, <처음 읽는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칼 바르트까지>, 장호준 역 (서울: 복있는사람, 2018), 338f에서 재인용. 
7) 에버하르트 부쉬, <칼 바르트>, 손성현 역 (서울: 복있는사람, 2014), 40, 58-63.
8) 부쉬, <칼 바르트>, 63-74.
9) 부쉬, 81-83.
10) 부쉬, 89-92.
11) 부쉬, 98-107.
12) 부쉬, 107-120.
13) 부쉬, 125-177.
14) 부쉬, 137f. 
15) 부쉬, 157-159. 
16) 부쉬, 178-212.
17) 부쉬, 212-218.
18) K. Adam, Die Theologie der Krisis, Hochland 23/II (1925/1926), 271-286, 276f, in Gesammelte Aufsätze zur Dogmengeschichte und Theologie der Gegenwart, hg. von F. Hofmann, Augsburg 1936, 319–337. 칼 바르트, <로마서 (제2판, 1922)>, 손성현 역 (서울: 복있는사람, 2017), 40에서 재인용.
19) 부쉬, 420-425.
20) 부쉬, 437-457.
21) 올슨, <현대 신학이란 무엇인가>, 409f. 
22) 부쉬, 849-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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