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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세계 전투적 기독교 근본주의의 대명사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④] 칼 매킨타이어 - 분리주의자·국제 투사·집한파
  • 이재근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8.08.14 11:37

20세기 개신교 역사를 대표하는 중요한 키워드 하나를 선정하라고 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분열'이다. 개신교에는 태생부터 분열 DNA가 있었다. 1517년에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을 때, 교회의 분열을 의도하지는 않았다. 그저 부패한 교회의 회복과 개혁을 원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주창한 '전 신자 사제론'('만인제사장론')에 담긴 혁명적 요소 때문에, 개신교 내부 분열은 사실상 정당화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신자가 스스로 자기 말로 된 성경을 읽고, 스스로 성경을 해석하고, 안수 받은 교회의 권위자인 사제 없이도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일대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보증은 기독교적 민주주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분열을 통제하고, 분리주의를 막으려는 여러 원리가 제시되었음에도, 가톨릭교회를 지탱한 제도적·기관적 통일성이 붕괴된 개신교가 민족, 지역, 성경 해석, 권위자에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하는 현상은 필연이었다.

사안에 따라 어떤 분열은 필연적이기도 했고, 정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 분열 안에도 그 분열을 유발한 요인은 복합적이다. 분열을 결정하는 요인이 다양하므로, 그 요인 하나하나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진지하게 평가해야 한다. 그 요인들이 상호 교통하며 복합적으로 존재할 때 판단은 더욱 어려워진다. 분열은 신학적이기도 하고, 정치적이기도 하고, 문화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개는 이 모든 것이 결합하여 일어난다. 요컨대, 분열 당사자도, 주변 관찰자도, 후대 역사가도 각 분열 및 분리에 대한 빠르고 단정적인 판정은 유보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교회사를 보면, 이토록 결정하기 어려운 갈등과 긴장 사안이 있을 때마다, 다른 이들에 비해 훨씬 일관되고 확고한 선택을 한 이들이 있었다. 이들 '분리주의자'(separatist, 분열주의자)는 위기와 분쟁의 시기에 분리를 필연적 선택으로, 혹은 최소한 우선적 선택으로 고려하는 이들이다. 일치(unity)와 조정보다는 순결(purity)을 신앙 및 교회 정체성의 1순위로 놓고, 그 판단의 기준이 되는 교리나 윤리 항목에 배치된다고 판단할 때에는 분리(separation) 및 분열(division, schism)을 정당화하는 성향을 지닌다. 교회사에서 분리주의자로 평가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나 전통으로는 4세기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주의자(Donatists), 16세기 유럽 종교개혁기의 다양한 아나뱁티스트(Anabaptists, 재세례파), 17세기 잉글랜드 및 뉴잉글랜드의 분리파 청교도(Puritans, purity에서 유래한 이름), 20세기 초의 근본주의자(Fundamentals)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마지막에 이름이 오른 '근본주의자'는 189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주로 미국을 중심으로 영미권에서 진행된 소위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Fundamentalist-Modernist Controversy) 시기에 하나의 결속된 힘을 보여 준 이들에게 붙은 이름이다. 물론 이 논쟁은 이 30여 년 안에서만 갑자기 등장했다가 이후 사라진 운동은 아니다. 근본주의의 기원과 탄생, 전개, 분화, 재발흥 등에 대한 이야기는 워낙 복잡다단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획일화해서는 안 된다.1) 같은 이유로, 어떤 특정 인물이나 진영을 근본주의자로 간단하게 이름 붙이고 희화화해서도 안 된다. 근본주의자라는 이름에는 이중성이 있고, 역사성이 있다. 이 이름이 처음 등장한 맥락처럼, 자랑스러워하며 스스로 붙이는 이름이기도 하고, 오늘날 대체로 그렇듯, 반대자들이 비웃으며 조롱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또한 근본주의자들은 공통의 적에 맞서 서로 협력하고 연대하기도 했지만, 한편 서로를 대적으로 여기며 더 치열하게 공격하며 싸우기도 했다. 또한 근본주의자들의 세계에도 시공간의 영역이 있었다. 미국 남부, 중서부, 캐나다, 남아프리카 등 특정 지역에서만 힘을 발휘한 인물, 장로교나 침례교 등 크고 작은 특정 교단에서만 지도력을 가진 인물, 영어·중국어·네덜란드어 등 특정 언어권에서만 세력을 형성한 인물, 특정 기간에만 명성을 얻은 인물 등.

근본주의의 대명사 칼 매킨타이어. 1970년 연설을 하는 모습. 사진 출처 플리커

이런 모든 변수를 고려할 때, 칼 매킨타이어(Carl McIntire, 1906~2002)는 20세기 세계를 대표하는 근본주의자 및 분리주의자로 불릴 만한 단연 독보적인 인물이다. 성인이 되어 교계에 입문한 1920년대부터 거의 100세가 되어 사망한 2002년까지, 20세기 거의 전체를 오롯이 일관된 분리주의적 근본주의자로서 한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유력한 근본주의자들과는 달리, 특정 교단이나 지역·언어권을 뛰어넘어, 문자 그대로 '세계'를 무대로 영향력을 퍼뜨리며 활약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매킨타이어는 반공주의 및 교회 분열 등, 해방 후 한국 개신교의 여러 특징이 형성되는 과정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매킨타이어를 가장 잘 규정할 만한 세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분리주의자 △국제 투사鬪士 △집한파執韓派.

1. 분리주의자
- 전천년주의와 절대 금주 근본주의

매킨타이어는 20세기가 시작된 직후 1906년 5월 17일에 미국 중서부 미시건주 입실랜티의 목회자 및 교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찰스 커티스 매킨타이어가 장로교 목사, 어머니 헤티가 교사이자 사서, 할머니가 오클라호마에서 촉토 인디언(Choctaws)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벌인 선교사였던 경건하고 지성적인 중산층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외적으로 견실해 보이는 가정이었음에도, 내적으로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가정의 기둥이었던 아버지가 환상을 보는 등, 정신 질환으로 1914년부터 1919년까지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어머니 홀로 네 아들을 키워야 했다. 결국 가족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부부는 이혼했고, 어머니는 1922년에 이혼한 후 오클라호마에서 한 대학의 여성 학감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이런 충격과 상처가 매킨타이어의 극단적으로 전투적이고 독재적인 성격 형성에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겠다. 청소년기를 보낸 매킨타이어는 우선 가족이 거주하던 오클라호마주에 소재한 사우스이스턴주립칼리지에 다니다가, 좀 더 나은 교육 환경의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소재 파크칼리지로 전학했다.2)

파크칼리지3)는 장로교 계열 학교로, 처음에는 주로 미국 중서부 지역 장로교 선교사 후보자 교육을 위해 1875년에 세워졌다. 선천 신성중학교와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한 인물로 유명한 조지 매큔(George Shannon McCune, 윤산온, 1872~1941) 선교사, 그의 제자이자 한국교회사의 선구적 학자로 연세대 총장을 역임한 백낙준(1895~1985)도 이 학교 출신이었다. 중서부 지역의 신실한 장로교 가문 출신 학생이 선교사, 또는 교육자나 목회자, 변호사, 의사 등의 전문 직업으로 진출하기 전에 전형적으로 거치는 지역 기독교 배경 대학 교육을 매킨타이어도 밟았다.4) 실제 그는 교사 교육을 전공으로 1927년에 졸업했고, 법학과 신학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1928년에 프린스턴신학교에 입학했다.

매킨타이어를 강한 분리주의 성향의 근본주의자로 제련한 용광로는 바로 프린스턴신학교였다. 1학년에 입학하자마자 학년 대표로 선출된 데서 알 수 있듯, 매킨타이어는 리더십이 강했다. 이 당시 프린스턴신학교는 1890년대부터 시작된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이 가장 뜨겁게 달아오른 전국구 전투장이었다. 장로교는 미국에서 가장 큰 교파는 아니었다. 그러나 유럽 개신교 이민자들이 북미에 정착한 17세기 초기에 성공회, 청교도 회중교회에 이어 뿌리내리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 역사적 교파였다. 더구나 성공회와 회중교회가 19세기 중후반 이래 신학적 현대주의를 폭넓게 수용하게 된 것과는 달리, 장로교는 찰스 하지, 벤자민 워필드 등 북장로교 구프린스턴학파(Old Princeton School)의 주역들을 통해 역사적 개혁파 신앙의 '근본'(fundamentals)을 지켰다. 이렇게 미국 장로교는 침례교 및 다른 보수 전통 교단들에 전통 신앙의 지적 자양분을 공급한 보수 신앙의 수원이기도 했다. 이 학교가 1920년대 내내 심각한 논쟁에 휩싸였는데, 당시 근본주의 진영의 독보적 대변자 역할을 하던 인물이 바로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쓴 신약학자 그레셤 메이첸(Gresham Machen, 1881~1937)이었다.5)

매킨타이어가 입학한 1928년은 이 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부각되어, 사실상 학교가 두 개로 쪼개지기 직전이었다. 다음 해 1929년 신학적 자유주의가 프린스턴신학교 이사진을 지배한다고 판단한 메이첸은 프린스턴을 떠나 펜실베이니아주 체스터힐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웠다. 입학 직후부터 메이첸을 가장 충실히 따르던 제자 중 하나였던 매킨타이어는 메이첸을 따라 웨스트민스터로 이동해서 1931년에 졸업했다. 졸업 직후에는 텍사스주 출신의 페어리 유니스 데이비스와 결혼했다.

학교는 두 개로 분열되었지만, 새로운 교파로는 아직 분열되지 않은 1931년 6월 4일에 매킨타이어는 북장로교 목사로 안수 받았다. 안수 후 그는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 소재 첼시장로교회 목사로 청빙받았는데, 이 교회는 전임 목사가 자살로 삶을 마감한 상태였다. 특유의 넘치는 에너지로 해변 길가에서 설교하고 전도한 결과, 이 교회는 2년 안에 약 200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이어서 1933년 9월 28일에는 교인 수가 1000명에 이르는 대형 교회이자, 당시 북장로교의 대표적 근본주의 교회 중 하나였던 뉴저지주 콜링스우드 소재 콜링스우드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청빙받았다. 여기서 그는 이후 66년간 목사직을 수행하는데, 이 시기에 이 교회는 미국에서 가장 전투적인 근본주의 장로교회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6)

메이첸과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여전히 북장로교 안에 남아 있기는 했지만, 갈등은 지속되었다. 북장로교 해외선교부(PBFM)가 자유주의자를 선교사로 용인한다고 판단한 메이첸이 1933년에 교단의 통제에서 벗어난 장로교 독립해외선교부(IBPFM)를 설립하자, 매킨타이어도 이 선교부에 합류했다. 북장로교 총회는 메이첸과 매킨타이어 등을 교회의 무질서를 조장했다는 이유로 북장로교 총회 재판에 회부하고, 결국 그 해 6월에 교단에서 추방했다. 이 싸움 와중에 매킨타이어는 지역 필라델피아 라디오방송에 자기가 교회에서 설교한 내용을 내보내고, 이후 50년 동안 발행하게 되는 주간신문 <더크리스천비컨The Christian Beacon>에 글을 실어 맞섰다. 추방된 이들이 즉각 미국장로교[PCA, 곧 정통장로교회(OPC)로 명칭 변경]를 창설하는 것으로, 신학교 분열에 이은 교단 분열이 완료되었다.

1957년 당시 매킨타이어. 그는 라디오방송을 통해 자신의 설교를 내보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그러나 정통장로교회의 탄생은 연쇄 분열의 시작이었다. 우선은 신학교와 교단을 포함하여, 이 진영의 영혼이라 할 만한 메이첸이 1937년 새해 첫날 예상치 못하게 급사하면서, 대표 지도력에 공백이 발생했다. 메이첸 사후 이 작은 보수파 장로교 진영의 모든 분쟁의 근원이 된 인물이 바로 당시 31세였던 젊은 매킨타이어였다. 메이첸 사망 후 6개월 안에 새 교단은 두 주요 계파로 갈라졌는데, 이 계파를 '고백주의파'(혹은 역사적 개혁주의파)와 '근본주의파'(분리주의파)로 구분할 수 있다. 쟁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종말론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문제였다. 고백주의자는 역사적 개혁파 신앙고백과 신조에 충실했기에, 주로 무천년주의자였다. 또는 심지어 무천년론자가 아니더라도, 특정 종말론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 근본주의자는 반드시 (세대주의 유형이든, 역사적 전천년설 유형이든) 전천년설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메이첸의 후계자들은 술과 담배 등은 각 그리스도인이 양심에 따라 판단할 사안이라 법적으로 금지할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지만, 근본주의파는 술을 반드시 절대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16세기 이래의 역사적 개혁주의를 따라야 하느냐, 19세기 말 이후 새로이 부상한 전투적 근본주의에 충실해야 하느냐를 놓고 벌어진 갈등이었다.

매킨타이어는 메이첸이 사망하기 전인 1936년 11월에 열린 장로교 독립해외선교부 회의에서 이미 근본주의파와 무당파 중립 인사들을 규합하여 메이첸을 독립해외선교부 의장직에서 쫓아낸 바 있었다. 정통장로교회의 1937년 3차 총회에서, 또 다른 근본주의 지도자 올리버 버스웰이 '사교 음주'(social drinking)를 금하지 않으면 교단을 탈퇴하겠다고 위협했다. 총회가 이를 거부하자, 결국 버스웰은 매킨타이어를 포함한 14명의 목사와 3명의 장로와 함께 총회를 떠나 1938년에 성경장로교회[Bible Presbyterian Synod(Church), BPC]를 세웠다.

독립해외선교부를 장악하기는 했지만,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빼앗는 데는 실패한 성경장로교회는 교단 목회자 양성 학교로 페이스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를 세웠다. 설립 초창기부터 신생 교단과 신학교도 최고 권력자 매킨타이어의 지독한 전투성과 독단적 성격 때문에 극도로 불안정했다. 특히 비록 개혁파 고백주의를 강조한 정통장로교회와 결별하기는 했지만, 장로교 교회론에 충실하고자 했던 인사들은 매킨타이어가 전투적 근본주의를 바탕으로 다른 교파 근본주의자들과 협력하는 것, 선교 활동을 교단 치리회(노회 혹은 총회)가 책임지지 않고 독립 조직을 통해 회중주의적으로 운영하는 것에 반대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1956년에 성경장로교회에서 또다시 내부 분열이 일어나, 교단 내 40%에 달하는 매킨타이어 반대자들이 또 하나의 성경장로교회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바로 5년 후 1961년에 교단 명칭을 복음주의장로교회(Evangelical Presbyterian Church, EPC)로 바꾸고, 교단 신학교로 커버넌트신학교를 열었다.7) 19세기 말에 자유주의와 현대주의에 맞서는 대항마로 탄생한 근본주의 진영 전체에서 가장 독단적이고 전투적인 분리주의를 지향한 매킨타이어는 20세기 미국 장로교회 분열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흔적을 남긴 인물이었다.8)

2. 국제 '반공·반WCC·반가톨릭·반복음주의' 투사戰士
- ACCC와 ICCC

1933년에 매킨타이어가 북장로교에서 추방되자, 그가 목회하던 콜링스우드장로교회에서도 교단에 남을 것인지, 매킨타이어를 따를 것인지를 놓고 회의가 열렸다.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던 덕에, 여덟 명을 제외한 교인 모두가 자발적으로 북장로교를 떠나 매킨타이어를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법원이 교회 건물 소유권이 북장로교단에 있다고 판결하자, 이들은 새로운 건물을 짓고 교회 이름을 콜링스우드성경장로교회라 불렀다. 이름에 '성경'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데서 알 수 있듯, 성경 무오 교리에 근거한 근본주의 교회임을 표방하는 선언이었다.

이런 식으로 매킨타이어는 교회, 신학교, 교단을 독보적으로 장악했다. 매킨타이어의 전투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일환으로 1948년에 세계교회협의회(WCC)가 결성되고, 1950년에 전미교회협의회(NCC)가 이 국제기구의 미국 지부 기능으로 결성되었다. 매킨타이어는 이미 1941년에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ACCC)를 결성해서, 신학적으로 좀 더 개방적인 미국 주류 교회들의 연합체로 1908년에 설립된 전미연방교회협의회(Federal Council of Churches, 1950년에 FCC가 NCC에 통합)에 대응한 바 있었다. 그런데 1948년에 WCC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설립되자, 그는 이제 이 조직에 맞대응한다는 명분으로 같은 해에 국제기독교교회협의회(ICCC)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설립했다. 위치에 의미가 있듯, 명칭에도 분명한 의미가 있었다. WCC(World Council of Churches)는 그저 전 세계 교회들의 협의체였지만, ICCC(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는 국제 '기독교' 교회들의 협의회였다. 즉, 매킨타이어가 보기에, WCC는 기독교인의 조직이 아니었다.9)

ACCC와 ICCC가 박멸을 목표로 맞서 싸웠던 주적은 크게 네 가지였다. 공산주의, WCC와 에큐메니컬 운동, 로마 가톨릭, 그리고 신복음주의였다.

매킨타이어가 발행한 '어떤 차이가 있는가?'(What is difference between) 팸플릿 시리즈10) 중 하나인 'NCC와 ACCC 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실린 내용을 보면, 매킨타이어와 ACCC, ICCC가 지향하는 바와 WCC 및 NCC에 반대하는 내용과 이유가 무엇인지를 그가 활용한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NCC는 포괄주의자, 현대주의자이며, 사회복음을 지지한다. ACCC는 분리주의자, 근본주의자이며, NCC의 주장이 '개신교의 목소리'라는 것과 미국 기독교인을 대변한다는 주장에 도전한다. (중략) NCC의 목표와 목적은 에큐메니컬 운동을 촉진하고 하나의 세계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 17장의 예수의 기도의 성취라고 주장한다. (중략) ACCC는 이런 꿈을 종말의 때에 적그리스도의 신부와 창녀 교회가 있으리라는 계시록의 예언의 성취로 본다. (중략) NCC는 사회복음을 촉진한다. 우리 구주께서 선포하신 하나님나라는 마르크스주의 원리 위에 세워진 사회 체계로 환원되며. (중략) NCC는 하나의 세계정부 건설을 돕고 있다. (중략) NCC 지도부는 중공을 인정하라고, 공산주의와의 평화로운 공존을 요청해 왔으며, NCC는 (중략) 그 일부는 소련의 비밀경찰 요원으로 판명된 철의 장막 뒤에 숨어 있는 교회 지도자들을 공식적으로 미국으로 데려왔다. ACCC는 전투적인 반공주의이며, '동과 서의 화합'이라고 그들이 말할 이 영역에서의 NCC의 활동을 폭로하고 있다. ACCC는 신 없는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화해, 무신론 마르크스주의와 하나님이 자유를 만드신 사회 간의 화해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11)

위에 인용한 팸플릿은 매킨타이어가 1955년 3월 7일부터 펜실베이니아주 체스터 소재 WCVH 방송국에서 방송하기 시작한 30분짜리 라디오 프로그램 '20세기 종교개혁의 시간'(20th Century Reformation Hour)에서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그는 이 방송에서 거의 매일 배교와 공산주의를 이중 위협으로 보고 거칠게 비난했다. 1950~1980년대 냉전 시대에 이 방송은 인기를 끌었다. 1955년 시작부터 5년 안에 전국 600개 이상의 방송국이 매킨타이어의 목소리를 송출했고, 2000만 명 가까운 청취자가 보낸 기부금이 1년에 200만 달러에 달했다. 여기서 번 돈으로 뉴저지주 케이프메이에 호텔 몇 채를 구입해서, 이곳들을 근본주의자들이 모이는 집회소로 개조했다. 추가로 1964년에는 성경 학교였던 쉘턴칼리지를 인수하고, 1968년에는 중등학교, 1973년에는 초등학교도 세웠다.12)

1963년 구입한 크리스천애드미럴호텔. 케이프메이 해변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ACCC 및 ICCC와 관련한 집회를 비롯해 각종 기독교 대회를 열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매킨타이어는 '빨갱이 색출'로 유명한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Joseph R. McCarthy, 1908~1957) 및 상원 반미활동조사위원회가 공산주의자로 의심한 성직자를 색출하는 일에도 긴밀히 관여했다. 실제로 매킨타이어는 매카시가 미국 정계에서 한 일을 교계에서 한 인물로 유명했다. 결국 매킨타이어의 이 사례는 20세기 후반에 미국에서 국가의 개입을 반대하고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시장주의, 복지 반대주의를 기독교 신앙과 결합한 종교적 우파(Religious Right)가 등장하는 기원이 되었다.13) 1970년과 1971년에는 최소 5만 명을 동원하여 베트남전을 지지하는 일련의 '승리 행진'을 주도하며 전국 언론의 주목을 끌었는데, 베트남전 반대 운동을 일종의 용공 활동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매킨타이어의 적은 공산주의와 신학적 자유주의만이 아니었다. 1945년에 매킨타이어는 개신교 근본주의 진영 거의 전체의 공유된 의견이라고 할 만한 발언을 했다.

"우리가 전후 세계로 진입하면서,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자유와 해방의 가장 큰 적은 로마 가톨릭 체제입니다. 그렇습니다. 러시아에는 공산주의가 있고, 거기서는 모든 것이 그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중략) 로마가톨릭교회의 파시스트 체제에 사느니 차라리 공산주의 사회에 사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중략) 미국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공포에 직면해야 합니다. 미국 기독교인이 그 위험에 눈을 뜨는 것이 더 빠르면 빠를수록 우리나라는 더욱 안전해질 것입니다."14)

매킨타이어는 공산주의 체제가 가톨릭 체제보다는 낫다며, 가톨릭을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의 가치를 파괴하는 파시스트로 규정하며 경계했다. 이전부터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그가 이 시기에는 더 강력한 적을 가톨릭교회로 인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1969년에는 발언의 기조가 조금 바뀐다. "나는 동정녀 탄생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개신교보다 그것을 믿는다는 점에서 가톨릭 신자에 좀 더 가깝다."15) 이 발언은 미국 가톨릭교회가 1960년대 이후 사회주의, 동성애, 낙태 같은 주제에서 정치사회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던 상황, 즉 근본주의 개신교 진영의 대의와 공유하는 것이 많아진 상황에서 등장했다. 또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년) 이후, 이전과는 달리 개신교 신앙의 여러 요소를 좀 더 긍정적으로 수용한 시대 분위기를 반영한다. 그러나 개신교 보수 진영 내부에서도 자신이 강조하는 몇 가지 신앙 조항을 수용하지 않는 이들과는 결별을 불사한 매킨타이어가 가톨릭을 동지로 인식했을 리 만무하다.

매킨타이어가 1947년 이후 신복음주의자를 대한 태도에서도 그의 근본주의적 전투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전미복음주의협회(NAE), 빌리 그레이엄 및 다른 소위 "신복음주의자"가 비근본주의자와의 분리를 단행하지 않는 '회색분자'(the gray)라는 이유로 지치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다.16) 이런 비난은 신복음주의자들이 스스로 자초한 면도 있었다. NAE는 이전 시대 근본주의자들의 전투적 분리주의와 고립주의를 탈피하고자 했던 새로운 세대의 젊은 근본주의자들이 1942년에 설립한 조직이었다. 이때 이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FCC와 ACCC 사이에 놓으면서, 의도적으로 ACCC보다 넓고 열린 보수 신앙을 지향하며 근본주의와 거리를 두려 했기 때문이다.17)

1970년 매킨타이어는 '승리 행진'을 이끌었다. 워싱턴기념탑 앞에 모인 사람들(빨간 원이 매킨타이어). 5만여 명이 운집했다. 사진 출처 플리커

1971년 반전 시위를 하는 전쟁에반대하는베트남참전군인회(Vietnam Veterans Against the War)의 대변인(왼쪽)과 매킨타이어(오른쪽). 사진 출처 플리커

3. 집한파執韓派

매킨타이어가 한국 개신교와 관계 맺은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그가 남긴 흔적은 깊고 짙었다. 매킨타이어는 한국을 사랑한 애한파, 한국을 잘 알았던 지한파라기보다는, 한국에 집착한 집한파에 가까웠다. 매킨타이어가 한국에 집착한 이유는 그가 미국에서 경험한 장로교 분열 역사와 한국 장로교 분열 역사가 깊게 맞물려 있는 데다, 1940년대 이후 투신한 공산주의와의 투쟁이 한국 현대사 및 교회사에서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매킨타이어와 그가 설립한 ICCC와 한국교회를 연결하는 고리를 만든 인물은 장로교 독립해외선교부 소속 선교사 드와이트 말스배리(Dwight R. Malsbary, 마두원, 1899~1977)였다. 말스배리는 원래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해방 전 1922년부터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다가, 1940년에 영미권 선교사 대부분이 귀향할 때 미국으로 돌아갔다. 귀국한 그는 매킨타이어가 세운 성경장로교회의 페이스신학교를 졸업한 후 해방 후 1948년에 다시 내한했다. 1946년에 설립된 고려신학교에서 가르치며, 1952년에 탄생한 예장고신 교단과 연관을 맺었다. 1959년에는 ICCC 한국 지부장 및 ICCC 국제 본부의 부회장직을 맡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었다.18) 말스배리의 중재 덕에 고려신학교는 ICCC로부터 수년간에 걸쳐 많은 금액을 지원받았는데, 아마도 성경장로교회와 고신 교단, 페이스신학교와 고려신학교가 신학 입장 및 모교단에서 분리된 소수파라는 의식 및 지향성 등에서 유사한 면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말스배리 외에, 한국인으로서 한국교회에 ICCC를 공식 소개한 첫 인물은 박윤선이었다. 그는 1950년에 ICCC가 WCC에 대항할 수 있는 기구로서, 전통적인 복음 신학을 선양하는 진리의 깃발을 들고, 26개국 61개 교단이 참여하는 조직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19) 1953년 10월에는 고려신학교 교수진[한국인 교수: 한상동, 박윤선, 박손혁, 외국인 교수: 헌트, 해밀턴, 치숌(이상 OPC 소속), 말스배리(BPC 소속)]과 학생 일동이 학교의 교리 선언문을 영어로 작성하고 서명하여 ICCC에 보냈는데, 아마도 ICCC에 연결된 말스배리의 중재 때문이었을 것이다.20)

1954년에는 고려신학교 관련 인사들인 박윤선, 한상동, 이약신, 박손혁 목사가 8월 3일부터 18일까지 미국에서 열린 ICCC 제2차 총회에 옵서버로 초청받아 참석했다. 회의 참석 후 이들은 정통장로교회, 성경장로교회, 북미주개혁교회(CRC) 교단을 방문해 교제하고 연설한 후 10월에 귀국했다. 놀랍게도, 페이스신학교는 한상동과 박윤선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기까지 했다. 이런 호의는 성경장로교회와 갈등 관계에 있던 정통장로교회의 선교부 총무 갈브레이드에게도 지나치게 보였던지, 그는 고려파 대표들이 "거기에서 두드러지게 많은 근본주의자에게 삼켜질까 두렵다"고 걱정하기도 했다.21) 1959년 4월에는 고신의 김경래 장로과 함께, 중국인 성도 네 명이 ICCC의 초청으로 미국을 찾아 중공과 북한의 실체를 알리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22)

이 시기까지 매킨타이어 및 ICCC와 한국교회의 관계는 고신 교단에만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해 5월부터 예수교장로회 총회 경기노회가 에큐메니컬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다투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된 매킨타이어는 <더크리스천비컨>에 10월 22일 호부터 매번 WCC와 싸우고 있는 복음주의자들을 위해 기도하자는 호소를 실었다. 그러다 급기야 말스배리 선교사를 대동한 매킨타이어 및 ICCC 지도부 4인이 한국을 찾았다. 이들은 전국을 순회하며 집회를 인도했는데, 매 강연에 수천 명이 몰렸다. 11월에 미국으로 돌아간 이들은 한국 반WCC 교회의 투쟁과 고아 상황을 알리며 '한국 크리스마스 기금'(Korean Christmas Fund) 10만 달러를 모금했다. 이 기금이 1960년에 한국으로 보내진 후, 일부는 고아를 위해, 일부는 1959년 분열 이후 대부분 WCC 회원 교단 소속인 미국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호주 및 캐나다 선교사들의 후원을 상실한 '승동 측'(합동)을 위해 남산(용산)에 신학교를 짓는 비용으로 활용되었다.23)

그러나 ICCC 및 매킨타이어와 관계를 맺은 장로교 보수 진영인 고신과 승동(합동)은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61년에 ICCC와의 관계를 공식 단절한다. 1960년 12월에 고신과 승동이 전격 통합된 후 1961년 9월 21~22일 열린 제46차 총회에서, 고신 출신의 당시 총회장 한상동은 "회장이 총회 산하에 있는 개인이나 단체로 ICCC에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없음을 선언한다"고 공표했다. 이 선언은 지나치게 극단적인 분리주의와 공격에 혈안이 된 ICCC와의 관계 단절을 요청하는 청원이 당시 총회에 올라온 후, 정치부와 총회에서 깊은 논의를 거쳐 결정된 사안이었다. 다음 해 47차 총회에서는 ICCC 국제 대회에 참석하고 귀국한 인사들이 공개 사과하는 일이 있었고, ICCC와 우호 관계를 지속한 회원에 대해서는 권면위원 3인이 설득하고 권면하기로 하는 결정이 내려지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합동은 1961년부로 공식적으로 ICCC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합동의 관계 단절 이후에도 신학적으로 보수적이면서, 재정 상태가 취약한 장로교 및 성결교 교단이 ICCC와의 관계를 얼마간 더 유지했다. 그러나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에서 1962년에 이탈한 후 ICCC와 관계를 유지하던 예수교대한성결교회는 1965년, 예장대신 교단의 전신인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는 1968년, 환원 후 ICCC의 도움을 다시 받던 고신은 1971년에 각각 ICCC와 단절하면서, 한국 개신교회와 ICCC와의 공식 관계는 1971년으로 완전히 정리되었다.24)

그러나 공식 관계가 단절되었다고 해서, 매킨타이어와 ICCC가 한국교회, 특히 보수 장로교 진영에 물려준 유산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특히 한국 보수 장로교 신학계의 두 기둥이라 할 만한 박윤선과 박형룡의 근본주의에 대한 태도는 상당히 달랐다. 예컨대, 박윤선은 총신대학원장으로 있던 1979년에 쓴 논문에서, 1950년대 초에 보였던 우호적인 태도와는 달리, 총신과 합동 교단이 따라야 할 신앙 사조는 역사적 개혁주의지, 근본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근본주의의 문제로 ①교리의 균형 상실, ②단편적이고 경건주의적인 성경관, ③신구약의 연속성 교리 부재를 지적한다.25) 이와는 달리, 박형룡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장동민에 따르면, 박형룡은 1950년대 이래 반공, 반자유주의(반WCC), 반복음주의(반NAE·반WEF·반RES) 등, 매킨타이어가 적으로 간주하고 투쟁한 주제와 태도를 거의 그대로 답습했다. 심지어 교회론과 종말론에서도 1970년대에 이르면 역사적 개혁주의와는 달리, 근본주의와 세대주의의 분리주의 교회관, 또한 (비록 세대주의는 아니지만) 역사적 전천년주의에 근거한 종말론에 집착했다. 마치 메이첸과 매킨타이어, 정통장로교회와 성경장로교회,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페이스신학교가 미국 보수 장로교 안에 서로 상당히 다른 두 흐름을 만들어 낸 것처럼, 박윤선과 박형룡은 모두 한국 장로교 보수 진영의 추앙받는 두 거두였음에도, 한 진영 안에 역사적이고 총체적인 개혁주의('고백주의') 대(vs) 근본주의적 분리주의라는 두 흐름이 공존하는 독특한 한국 장로교 지형을 빚어냈다.

1983년 벤쿠버 WCC 총회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내는 매킨타이어. 사진 출처 플리커

여느 독재자가 그렇듯, 매킨타이어는 추한 말년을 보냈다. 1971년 이후 교계에서 영향력이 크게 쇠퇴했다. 1971년에 페이스신학교는 매킨타이어의 독재에 반대하는 총장과 직원, 학생의 대거 이탈로 또 한 번 크게 흔들렸다. 1996년에는 재정 문제로 페이스신학교를 닫았다. 현존하는 같은 이름의 학교는 역사적으로 이전 학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수년간 라디오방송국 WXUR 허가 문제를 놓고 연방언론위원회와 싸웠다. 쉘턴칼리지는 인가 문제를 둘러싸고 뉴저지주와 20년 동안 다툼을 벌이다 거의 폐교 직전 상태가 되었다. 불치의 질병을 가지고도 1990년대까지 공산주의 및 에큐메니컬 운동과 계속해서 치열하게 싸웠지만,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아내가 1992년에 사망했다. <더크리스천비컨>도 곧 정간되었다. 1999년에는 콜링스우드성경장로교회에서 은퇴를 거부하며 버티다가 결국 강제로 쫓겨났다. 노년을 쓸쓸하게 보내던 그는 2002년 3월 19일에 9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26)

1) 이 시기 영미권, 특히 미국 근본주의에 대한 표준 연구서로는 조지 마스든, 『근본주의와 미국 문화』, 박용규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7)이 있다. 이 책은 1980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동시에 근본주의 연구의 독보적 걸작으로 평가받았고, 오늘날까지도 이를 능가하는 책은 나오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저자 마스든이 옥스퍼드대학출판사를 통해 2006년에 한 장을 추가한 개정판을 발간했으나, 한국에서는 이 장이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2) D. K. Larsen, "칼 매킨타이어," in 『복음주의 인명사전』, 이재근, 송훈 역 (서울: CLC, 2018 출간 예정).
3) 1875년에 Park College로 세워졌다가, 2000년에 Park University가 되었다.
4) 이 학교의 상세한 역사는 다음을 보라. http://kalathos.metro.inter.edu/Num_13/Park_College.pdf. 이 학교에는 더 이상 종교 배경이 없기에, 학교 공식 홈페이지에는 이런 상세한 역사에 대한 설명이 없다.
5) 북장로교 내부에서 1920년대까지 진행된 첨예한 논쟁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흥미진진하게 기술한 책으로 브래들리 J. 롱필드, 『미국 장로교회 논쟁』, 이은선 역 (서울: 아가페문화사, 1992)이 있다.
6) D. K. Larsen, "칼 매킨타이어," in 『복음주의 인명사전』.
7) EPC는 1965년에 개혁장로교회(Reformed Presbyterian Church, RPC), 1973년에는 미국 남장로교(PCUS)에서 분리된 미국장로교(PCA)와 합동했다. 이로써 미국장로교(PCA)는 1861년에 북장로교(PCUSA)와 남장로교(PCUS)가 분리된 이래, 최초로 남북이 통합된 (보수파) 장로교 전국 조직이 되었다. 1983년에는 북장로교와 남장로교가 미합중국장로회(PCUSA)로 통합하여, 122년에 이르는 남북 분열을 종식했다.
8) 20세기 중후반기 미국 장로교 분열사 전체를 간명하게 보여 주는 문헌으로는 데이빗 비일, 『근본주의의 역사』, 김효성 역 (서울: CLC, 1994), 341-356; 숀 마이클 루카스, 『장로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김찬영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267-289를 보라.
9) Brian Stanley, Christianity in the Twentieth Century: A World Histor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8), 130f.
10) 이 시리즈 팸플릿 12권 목록은 다음과 같다.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① Communism and Socialism? ② Capitalism and Communism? ③ Fundamentalism and Modernism? ④ Fundamentalism and New Evangelicalism? ⑤ The American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and the Nation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the U.S.A.? ⑥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and 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⑦ The Bible Presbyterian Church and 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⑧ The General Association of Regular Baptist Churches and the American Baptist Convention? ⑨ The Protestant and the Roman Catholic? ⑩ The Saved and Lost? ⑪ The Christian Beacon and the Christian Century? ⑫ Marxism and Christianity? 목록과 사본은 http://www.carlmcintire.org/booklets.php에서 볼 수 있다.
11) http://www.carlmcintire.org/booklets-acccVnccc.php.
12) D. K. Larsen, "칼 매킨타이어," in 『복음주의 인명사전』.
13) George M. Mars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New Edi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232. The Gospel Coalition에 실린 다음 글도 보라. Bobby G. Griffith Jr., "The Founding Father of the Religious Right" (JANUARY 20, 2016) |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reviews/fighting-fundamentalist-carl-mcintire/
14) 마크 놀, 캐롤린 나이스트롬, 『종교개혁은 끝났는가?: 현대 로마 가톨릭 신앙에 대한 복음주의의 평가』, 이재근 역 (서울: CLC, 2012), 72에서 재인용.
15) 위의 책, 68에서 재인용.
16) http://www.carlmcintire.org/booklets-fundamentalismVnewevangelicalism.php.
17) 브라이언 스탠리, 『복음주의 세계 확산: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의 시대』, 이재근 역 (서울: CLC, 2014), 59.
18) 장동민, 『박형룡의 신학 연구』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8), 384. 1977년 7월 30일에 강원도에서 사고로 사망한 말스배리의 부고 기사는 다음을 보라. https://news.joins.com/article/1465148.
19) 서영일, 『박윤선의 개혁 신학 연구』 (서울: 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268; 장동민, 『박형룡의 신학 연구』 , 384.
20) "A Faithful Declaration; Faculty and Students of Koryu Theological Seminary State Position: Faculty's Letter to ICCC," Bible Magazine (October 1953): 29f. 박응규, 『가장 한국적인 미국 선교사 한부선 평전』 (서울: 그리심, 2003), 350, n.4.
21) 서영일, 268-270.
22) 장동민, 384.
23) 장동민, 359, 385, 412; 서영일, 268. 5년 뒤에 사당동에 세워진 총신대학교 캠퍼스 부지도 매킨타이어의 도움으로 구입했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 박용규는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한다. 박용규, "ICCC, WCC, 그리고 WEF/WEA(세계복음주의연맹)의 역사적 평가," 「신학지남」 85:1 (2018.3): 206f.
24) 박용규, 205-207.
25) 박윤선, "개혁주의 소고," 「신학지남」 46:3 (1979년 가을): 13-24. 같은 호에 실린 총신 교수들의 신학 입장 해설도 참고하라. "총신의 신학적 입장," 「신학지남」 46:3 (1979년 가을): 6-12. 박용규, 208.
26) D. K. Larsen, "칼 매킨타이어," in 『복음주의 인명사전』.

이재근 교수가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연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기사(바로 가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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