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

1년 이전 기사를 검색하기 원하시면 + 버튼을 눌러 주세요.
복음주의적 확신과 에큐메니컬 포용성을 체화한 선교신학자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⑬] 레슬리 뉴비긴 - SCM·남인도교회·IMC/WCC와 1968 웁살라·복음과 우리 문화
  • 이재근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9.07.24 21:38

레슬리 뉴비긴(J. E. Lesslie Newbigin, 1909~1998)은 한국 기독교인에게 주로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1989, IVP 한국어판 1998/2007)의 저자로 유명하다. 이 책은 <크리스채너티투데이 Christianity Today>가 2000년에 '20세기를 대표하는 최고 기독교 서적 100권 Top 100 Books of the 20th Century' 중 하나로 선정할 만큼 명성을 떨쳤다.1) 같은 저널이 2006년 10월에 실시한 '복음주의 기독교인을 형성한 최고의 책 50권 Top 50 Books That Have Shaped Evangelical Christians' 안에도 당당히 자리를 잡았다.2) 뉴비긴은 이 책에서 회의주의와 종교적 다원주의가 완전한 대세가 된 1960년대 이후 탈기독교 세계(Post-Christendom)에 진입한 서양 사회에서 자신감을 잃고 살아가는 기독교인에게 복음의 사실성과 가치에 근거한 자신감을 주문했다. 서양 사회와 비슷하게 산업화와 도시화에 기반을 둔 다원적 세속주의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는 한국을 비롯한 비서양 사회의 기독교인에게도 서양에서와 마찬가지로 위기의식과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

한국 기독교인의 뉴비긴에 대한 인식은 이 책이 처음 번역된 1998년 이후, 그의 다른 책들이 속속히 번역된 2000년대 이후에 주로 형성되었다. 그러다 보니, 뉴비긴은 한국 기독교인에게 대체로 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즉, 기독교 국가 영국 출신 기독교인으로 일평생 인도에서 선교사로 일하다가 돌아와 보니, 자신을 선교사로 파견했던 기독교 모국 영국이 다원주의적인 이교도 국가가 된 것을 애통히 여기면서, 한때 기독교 국가였던 서양 사회에 대한 역선교(reverse mission)를 주창한 인물.

이런 이미지가 뉴비긴을 완전히 왜곡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고착화는 90년 평생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면서, 학생 청년 선교 단체 간사, 인도 선교사, 남인도교회 주교, 에큐메니컬 운동 조직 임원, 개혁교회 목사 및 총회장, 신학교 교수, 저술가, 탐험가, 연설가 등, 엄청나게 다채로운 영역에서 활동한 인물을 한 가지 영역에만 제한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따라서 이 글은 '경계를 조정하고 넘나든' 인물로서 뉴비긴이 가진 복음주의적 확신과 에큐메니컬 포괄성, 그리고 함께 만나기 어려운 그 이질성이 대화와 조정을 통해 하나가 되는 마법을 보여 준 유능한 실천가이자 신학자, 선교사, 운동가로서의 뉴비긴을 보여 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3)

레슬리 뉴비긴. 사진 출처 플리커

우선 뉴비긴이 일평생 맡은 굵직한 직함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그가 관여한 영역과 세계의 다채로움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뉴비긴은 1909년에 잉글랜드 북동부 노섬브리아 지역의 뉴캐슬어폰타인(Newcastle-upon-Tyne)에서 그 지역 토박이 아버지와 스코틀랜드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8년에 케임브리지대학 퀸즈칼리지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학생기독운동(Student Christian Movement, SCM)을 통해 기독교인이 되었다. 1931년 졸업 후 SCM 간사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2년간 일한 다음에는, 케임브리지에 소재한 잉글랜드장로교(Presbyterian Church of England) 목회자 양성기관인 웨스트민스터칼리지(Westminster College, Cambridge)에서 신학 훈련을 받았다. 그는 잉글랜드 장로교회 대신, 같은 장로교회이자 국교회였던, 스코틀랜드국교회(Church of Scotland) 에든버러노회에서 1936년 7월에 목사인 동시에 인도 파견 선교사로 안수를 받았다. 잉글랜드 장로교 소속 학교에서 공부했지만, 혈통상 절반은 스코틀랜드 사람인 데다, 아마도 아내와 함께 스코틀랜드에서 SCM 간사로 일하며 스코틀랜드를 향한 애정을 쌓은 탓이었을 것이다. 안수를 받은 직후 8월에 같은 SCM 스코틀랜드 지부 선배 간사이자 아일랜드 장로교회에서 파견한 인도 선교사 딸이었던 헬렌 헨더슨(Helen Henderson)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11년간 인도 칸치푸람의 농촌과 도시에서 전도를 담당하는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러다 1947년에 인도 남부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했던 성공회, 영국 감리교회, 스코틀랜드국교회, 영국 회중교회가 연합하여 결성된 남인도교회(Church of South India)의 마두라이 지역을 담당하는, 이 교단 첫 주교 중 하나가 되었다. 1959년에는 남인도교회 허락하에, 런던에서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IMC) 총무가 되어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의 중심부로 들어갔다. 이어서 1961년에 IMC가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와 통합되면서, 1965년까지 WCC 부총무가 되어 세계선교와전도위원회(Commissi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를 책임졌다. 인도로 복귀한 후에 다시 1974년까지 남인도교회 마드라스 주교로 활약하다 선교사와 주교직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 영국으로 돌아간 그는 1979년까지 신학 기관 연합체인 버밍엄 셀리오크칼리지스(Selly Oaks Colleges)에서 에큐메닉스와 선교신학 교수로 가르치면서 서양 사회의 세속화라는 새로운 주제에 눈을 떴다. 귀국 후 잉글랜드 장로교회와 회중교회의 합병으로 1972년에 세워진 연합개혁교회(United Reformed Church, URC)에 가입한 그는 1978년에 총회장이 되었고, 1989년까지 버밍엄의 작은 연합개혁교회를 담임했다. 1982년에는 영국교회협의회 지원으로 복음과 우리 문화(Gospel and Our Culture)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이것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및 일련의 시리즈 저작들에서 그가 강조한 '공적 진리로서의 복음'이 논의되고 선언된 플랫폼이었다.4) 뉴비긴이 보여 준 다채로운 여정은 그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된 다음 몇 가지 조직 및 현장과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SCM △남인도교회 △IMC/WCC와 1968 웁살라 △복음과 우리 문화.

1945년 레슬리 뉴비긴이 가족들과 찍은 사진(왼쪽)과 1947년 주교가 됐을 때(오른쪽). <Unfinished Agenda> 갈무리

1. SCM

뉴비긴은 케임브리지대학에 다니다 SCM을 통해 회심했는데, '회심'이라는 현상이 주로 복음주의권에서 강조하는 신앙 체험이라는 점에서 이례적인 경우였다. 뉴비긴과 기독교 전통이 처음 만난 현장이 케임브리지 SCM은 아니었다. 뉴비긴은 자서전에서 아버지가 "생각이 깊은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아침마다 기도하는 시간을 빠뜨리지 않고, 일하러 가기 전에 늘 침대 곁에서 겸손히 무릎을 꿇던 신자였다"고 전한다. 어머니의 신앙이나 가정이 출석한 교회에 대한 언급은 자서전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가정에서 기독교 신앙을 배운 것은 분명한 것 같다.5)

뉴비긴이 기독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첫 계기는 퀘이커계 기숙학교였던 레딩의 레이튼파크스쿨(Leighton Park School)에서 배운 성경 과목이었다. "지겹기 짝이 없던" 이 과목은 그의 신앙을 강화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버리게 만들었다. 더구나 체계화된 교리나 제도를 강조하지 않는 퀘이커 전통 특징상, 이 학교는 어떤 신앙고백도 강요하지 않았다. 규율도 느슨하고, 생활이 전반적으로 자율적이었기에, 학교에서 배운 "'하나님'은 더 이상 타당한 가설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집회 인도차 뉴캐슬을 방문한 장로교 목사 허버트 그레이6)가 선물한 책을 읽고 나서, 그는 최소한 "기독교 신앙이 비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7)

케임브리지에 입학한 뉴비긴은 학교에서 공부보다는 주로 취미 동아리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등산, 음악, 토론 클럽 등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가끔씩 주일 아침에 퀘이커 집회에 참석하고, 이들이 케임브리지 거리에서 방황하는 소년들에게 먹을 것이나 강연을 제공하면서 교화하는 프로그램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꾼 SCM과의 결정적인 만남이 곧 찾아왔다. 뉴비긴이 소속된 케임브리지대학의 퀸즈칼리지에서 그가 사귄 친구들 중에 SCM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여럿 있었다. SCM의 기원은 1889년에 탄생한 학생자원자선교연합(Student Volunteer Missionary Union, SVMU)이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1886년에 미국 대학생들이 자원하여 세계 선교에 동참하도록 격려하고 동원한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영국 버전이 SVMU였다.

1910년 에든버러 세계 선교 대회 개최 등, 세계선교와 에큐메니컬 운동의 산파 역할을 하던 이 운동은 1920년대에 이르러 신학적으로 상당히 자유로운 성향을 띠게 되었다. 이 때문에, SCM의 방향성에 동의하지 못하던 보수적인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1928년에 독립하여 기독학생회(Inter-Varsity Fellowship of Evangelical Unions, IVF8))를 결성했다. 그러나 뉴비긴은 SCM 소속 친구들의 헌신적인 기독교 신앙뿐만 아니라, 회의적이고 어려운 질문에도 늘 열려 있는 그들의 태도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자서전에서 그가 자주 묘사하듯, 그가 활동한 시기의 SCM은 자유주의적 기독교의 대표 특징인 사회적 책임에 대한 헌신만이 아니라, 경건, 기도, 전도, 믿음, 해외 선교라는 전통적인 개인 신앙도 같이 강조한, 상당히 균형 잡힌 기독교 단체였던 것 같다. 예컨대, 케임브리지 SCM 학생대표 중 한 사람이 된 2학년 이후 그는 1년에 두 차례 일주일간 열리는 스완위크 수련회에 참석한 경험을 들려준다. 여기서 기도, 설교, 공연, 소그룹 모임을 통해 수차례 느꼈던,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전율하는 경험을 그는 "일종의 변화산상 경험"으로 묘사한다. 결국 이런 경험들이 모여 전임 사역자로의 소명 의식을 형성했다. 1931년 졸업과 함께 그는 SCM 전임 간사로 헌신하여 스코틀랜드 대학 담당자로 글래스고와 에든버러에서 살았다. 이미 언급했듯이, 여기서 동료 간사로 만나 공개 연애를 시작한 뉴비긴과 헬렌 헨더슨은 적절한 훈련을 받은 후, 헬렌의 부모가 사역했던 인도에서 활동하며 선대의 유산을 계승하기로 합의했다.9)

이로써 뉴비긴은 처음부터 사망할 때까지 일평생 주류 교회 및 신학적으로 관용적인 에큐메니컬 운동권에서 활동했다. 생애 말기에 그의 영향력이 복음주의 진영으로 빠르게 확산되면서, 오늘날 그는 복음주의권 선교 및 교계에 속한 많은 이의 영혼을 지배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런 영향력에도, 그는 공식적으로는 단 한 번도 복음주의 기관에 소속된 적이 없었다.10)

2. 남인도교회

레슬리와 헬렌은 스코틀랜드에서 SCM 간사로 사역할 당시, 장로교회인 스코틀랜드국교회 해외선교회 지원자위원회 소속으로 이 교단과 동역했다. 스코틀랜드 혈통을 일부 물려받은 데다, 수백 년 신학 교육 전통을 가진 스코틀랜드 대학들에서 스코틀랜드국교회와 협력하며 일한 뉴비긴이 잉글랜드에서 신학 교육을 받기로 한 것은 의외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뉴비긴은 케임브리지의 웨스트민스터칼리지로 갈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신앙을 갖고 사역자가 되게 만들어 준 케임브리지대학 시절에 대한 애정, 뉴비긴 가족과 웨스트민스터칼리지 학장 존 오먼(John Oman)의 친분, 학비에 버금가는 장학금을 받을 가능성(실제로 장학금을 받았다!)이었다. 뉴비긴은 잉글랜드 장로교 뉴캐슬노회의 허락을 받아 웨스트민스터칼리지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했다.11)

웨스트민스터칼리지에서 뉴비긴은 세 가지 중요한 변화를 경험했다. 하나는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성취된 속죄의 중심성과 객관성을 더욱 확신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그는 구원론에서 확연하게 복음주의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둘째,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불문하고, 개혁파 신학 전통이 강한 신학교가 기도 등 경건 생활에 대체로 취약한 현상은 웨스트민스터칼리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새로 취임한 허버트 파머 교수가 경건 생활을 강조하려 했던 노력에 동참한 뉴비긴은 바쁜 사역과 학업 중에도 경건 생활을 유지할 당위성을 다시 확신했다. 셋째, 중등학교와 대학 시절에 익힌 퀘이커 전통에 따라 평화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던 그는 2차 대전 이전, 독일과 이탈리아의 움직임으로 전쟁 위협이 점점 커지던 시기에 평화주의가 일종의 도피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즉, 낭만적 평화주의가 현실 정치를 만나면, 결국 가장 무자비한 독재자와 침략자가 마음대로 활개 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평화주의 입장을 포기했다.12)

뉴비긴이 케임브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헬렌은 간사 사역을 1년 더 한 후에, 런던대학 동양학대학원에서 인도 사역에 필요한 타밀어를 공부했다. 스코틀랜드국교회는 1936년 5월에 이들을 교단의 인도 마드라스선교회(Madras Mission)에 배속하기로 결정하고 파송식을 열었다. 6월에 강도권, 7월에 파송 선교사 안수를 받은 뉴비긴은 8월에 에든버러에서 헬렌과 결혼했다. 뉴비긴 부부는 1936년부터 1959년까지의 1기 사역 23년, 1965년부터 1974년까지의 2기 사역 9년 등, 총 32년을 인도에서 보냈다. SCM 간사로 사역을 시작한 1931년부터 사망한 1998년까지, 총 67년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기간이었다.

뉴비긴이 인도 선교사로 활동한 시절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시기였다. 선교, 문화, 다원성, 공공성, 연합과 일치, 전도와 회심, 교회 등, 뉴비긴이 영국 복귀 후 저술과 강연으로 널리 알리게 되는 사상이 실제로 모양을 갖추고 실험된 현장이 바로 인도였기 때문이다. 선교사로서의 뉴비긴이 인도에 살면서 배우고 공헌한 일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 가능하다. 하나는 인도 교회에서 선교사와 인도인 동료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 '선교지 권한 이양' 문제에 기여한 점이다. 두 번째는 선교지에 세워진 여러 서양 교파를 통합하여, 조직과 교리가 일치된 '남인도교회'를 설립하는 데 힘을 보탠 점이다. 그는 이 교파의 초대 주교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1957년 SCM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뉴비긴. <Unfinished Agenda> 갈무리

먼저, 선교지 권력 이양 문제를 살펴보자. 인도에서는 이미 1710년대에 덴마크-할레선교회 소속의 독일계 경건주의 선교사들이 개신교 선교를 시작했다. 1792년 이후에는 윌리엄 캐리를 비롯한 영국계 선교사들이 기울인 노력을 시작으로, 인도는 19세기와 20세기 대규모 개신교 선교 운동의 주요 현장이 되었다. 뉴비긴이 인도에 도착한 1936년은 이 나라에 개신교가 진출한 지 200년이 훌쩍 넘은 시기였다. 따라서 인도 개신교에는 이미 현지인 지도력이 탄탄하게 구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양 선교 운동이 여전히 활발한 시기라 파송 선교사 수가 많았던 데다, 당시 인도는 영국 식민지로서, 예상치 못한 독립까지 아직 11년이나 남아 있었다. 뉴비긴은 인도 도착 직후부터 선교사와 현지 기독교인 사이의 첨예한 갈등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어느 지역, 어느 시대 선교 역사에서나 흔했던 가부장적 온정주의(paternalism) 문제였다. 즉, 선교사들이 자신들이 훈련시킨 인도인을 자라지 않는 어린 자녀로 취급하면서, 책임과 권한을 이양하기를 꺼리는 현상이었다. 뉴비긴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어디에나 인도인과 선교사 사이에 똑같은 간격이 있다. 한편에는 인도인이 책임을 맡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신념이 있고, 다른 편에는 그에 상응하는 무책임한 모습이 있다. (중략)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나란히 서서 책임을 타인에게 넘겨줄 수 있는 능력이다. 즉, 그들의 리더십 역량을 키우는 일을 성공의 첫 번째 잣대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같은 일이 수행되고 있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부분적인 이유는 과로와 인력 부족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언제나 의식하게 되는 문제는, 선교사 진영이 인도인들을 친밀한 교제권에서 확실히 배제시키고 있다는 점이다."13)

뉴비긴은 권한 이양 문제가 단지 선교사와 현지인 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영국의 인도 통치 문제와도 결합된 정치적·문화적 문제임을 잘 알고 있었다. 뉴비긴이 도착한 이후 10여 년간 이 문제가 인도 선교의 최대 이슈였다.14) 뉴비긴은 선교사 경력 내내 현지인 지도자를 양성하고, 이양을 더 효율적이고 책임 있게 하는 일에 마음을 쏟았다. 뉴비긴과 현지 기독교인의 관계, 뉴비긴이 이들을 바라본 관점도 상당히 모범적이었던 것 같다. 자서전에는 서양인의 이름만큼이나 현지인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며, 이들을 향한 비판이나 비하의 내용이 거의 나타나 있지 않다. 1950년대 이전 전 세계 개신교 선교사들의 개인 편지나 보고서 같은 문헌에, 사실상 현지 교회의 설립과 성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현지 기독교인 이름이 이니셜로 처리되거나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뉴비긴의 태도는 확실히 인상적이다.

뉴비긴이 인도 사역 중에 경험한 가장 큰 사건은 남인도교회(Church of South India) 설립이었다. 1947년에 인도 동남부 마드라스의 세인트조지교회에서 공식 탄생한 남인도교회는 창립 당시 세 교단, 즉 성공회·감리교회·남인도연합교회(South India United Church)가 연합해서 탄생했다. 그러나 남인도연합교회가 이미 1908년에 장로교회와 회중교회의 연합으로 탄생했으므로, 남인도교회는 사실상 성공회·감리교회·장로교회·회중교회, 이렇게 네 교파가 하나가 된 결과였다. 이 연합의 기원은 1910년 에든버러 세계 선교 대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회에서 선교회 간 협력을 강조한 결과로, 인도 남부에서는 서로 다른 교파 선교회들과 교회들이 모여 1918년 연합 전도 집회를 열었다. 에든버러 대회에 참석한 인도 대표이자, 인도 전 교회에 영향력이 컸던 첫 인도인 성공회 주교 도르나칼의 베다나야감 새뮤얼 아자리아(Bishop Vedanayagam Samuel Azariah of Dornakal, 1874~1945)의 주도하에 이듬해에 분열된 개신교회들 간의 일치를 논의하는 첫 대회가 열렸다. 아자리아는 인도 교회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1945년에 죽었지만, 그의 꿈은 2년 후 1947년에 이루어졌다.15)

물론 이 일치된 교회가 공식 탄생하는 데는 큰 난관이 있었다. 서로 다른 신학과 교리, 문화적, 인종적 배경을 수백 년간 이어 온 교단들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전통 일부를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뉴비긴 자서전에 따르면, '사도 계승'이라는 교회론적 강조점에 따라 주교직을 보유하지 않은 신앙 공동체를 교회로 인정하기를 꺼리는 성공회 내 고교회파 인사들과 그들의 선교회인 복음전파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 SPG)의 연합 반대가 심했다.16) 그러나 전 세계에서 성공회가 다른 교단과 연합할 때 따라야 할 기준으로 1888년에 제정된 램버스-시카고 4개 조항(Lambeth-Chicago Quadrilateral)을 네 교단이 논란 끝에 모두 수용하기로 동의하면서, 남인도교회가 탄생했다. 네 개 조항은 △계시된 말씀으로서의 66권 성경 수용 △신조로서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 수용 △성사로서 세례와 성찬 수용 △역사적 주교직(episcopate) 수용이었다. 남인도교회는 주교제를 채택한 교회와 그렇지 않은 교회들이 연합한 후, 주교제를 교회 정치제도로 채택한 역사상 첫 사례였다.17)

뉴비긴은 남인도연합교회 추천으로 신생 남인도교회의 첫 14인 주교 중 하나로 선출되어, 타밀주의 중심지인 마두라이 지방 책임자가 되었다. 서로 다른 신앙 색깔을 가진 교파와 교회가 연합하여 창설된 교회의 지도자로서, 이들 모두를 아우르는 통일성을 만들어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뉴비긴은 주교인 자신을 행정가보다는 전도자이자 목사로 인식했기에, 교구 내 700개 교회를 할 수 있는 대로 찾아 심방하고자 했다. 그는 서로 다른 전통에 속한 신자들을 통합하는 과업을 떠맡은 과정에서 경험한 낯설고도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당시의 인도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도 교회의 이름보다도 자신들이 가입되어 있는 해외 선교회의 이름에 두고 있었다. 1947년이 지나서야 일반 교인들이 비로소 스스로를 '남인도교회'의 멤버로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중략) 마을에서는 이 두 단체(성공회 고교회 선교회인 SPG와 성공회 복음주의 선교회인 CMS)가 전혀 다른 종교처럼 보이곤 했었다. SPG 지역에서는 진흙으로 지은 가장 보잘것없는 채플이라도 그 제단이 온갖 장식품으로 꾸며져 있는 반면에, CMS 지역에서는 성찬대 위에 십자가만 있어도 그것을 우상숭배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럼에도 양자는 제각기 강점을 갖고 있었으며, 나는 그것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미국해외선교회(회중교회)가 관할하는 그보다 훨씬 더 넓은 지역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그 단체 선교사들은 미국 프로테스탄티즘 중에서도 매우 자유주의적인 진영 출신이었다. (중략) 예배는 경건하기보다는 실험적인 분위기를 풍겼고 때로는 엉성하기까지 했다. (중략) 흔히 '의장 개회사'로 시작해 '감사의 결의'로 끝났으며 성경 낭독은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교회는 예배 처소라기보다는 오히려 공동체 운동에 더 가까운 듯 보였다."18)

1960년 가족들과 함께. <Unfinished Agenda> 갈무리

3. IMC/WCC와 1968 웁살라

SCM과 남인도교회는 뉴비긴이 처음 신앙을 가질 때부터 내면 깊숙이 뿌리박혔던 에큐메니컬 정신이 구현된 실체였다. 따라서 선교 운동으로 탄생한 에큐메니컬 지도자들이 40대 후반 중견 운동가 뉴비긴을 주목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인도에서 사역한 지 21년째인 1957년 말에 뉴비긴은 국제선교협의회(IMC) 총무직을 제안받았다. IMC는 1910년 에든버러 세계 선교 대회에서 논의된 바 있는 세계 선교 운동에서의 효율적인 연합과 조율을 의도하며 1921년에 조직된 개신교계의 대표적인 선교적 에큐메니컬 기구였다. 뉴비긴이 총무로 추천받은 시기에 IMC가 당면한 두 과제는 비서양 세계의 기독교 지도자 양성을 돕는 400만 달러 신학교육기금(Theological Education Fund, TEF) 출범과 1948년에 출범한 WCC와의 통합 문제였다. 당시 총무였던 찰스 란슨이 TEF를 책임지는 대신, 새로 임명되는 총무가 WCC와의 통합 문제를 담당하는 조건이었다. 남인도교회는 뉴비긴에게 1959년 7월부터 5년간 "교구 책임을 맡지 않는 남인도교회 주교로서 국제선교협의회에서 일할 수 있다"고 허락했다. 이렇게 해서 뉴비긴은 인도를 떠나 IMC 본부가 있던 런던으로 이동했다. 맡겨진 과업을 수행한 결과, 뉴비긴의 IMC는 1961년에 WCC와 통합되었다. 뉴비긴은 WCC 내의 세계선교와전도분과(Division of World Mission and Evangelism, DWME) 초대 총무이자, WCC 부총무가 되었다. WCC에서 활동하게 된 후에는 본부가 있는 제네바로 이주했다.

뉴비긴은 에큐메니컬 운동의 주창자이자 핵심 일꾼이었는데도, WCC와의 통합 논의 초기부터 이 조직이 전통적인 선교 사역을 종교적 제국주의 및 식민주의로 폄하하고 거부하는 것에 깊은 우려를 표했다.19) WCC와의 통합 이후에 뉴비긴은 조직 내부에서 선교적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내는 대변자가 되기로 작정했다. 이 작업은 쉽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1960년대 세속주의 도래와 함께, 선교 사상에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 하나님께서 일하는 현장이라는 인식하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회심과 세례에 이르도록 하는 활동은 비난을 받고, 정의와 개발이 선교 활동의 주요 내용이 되었다. 1962년에 성공회 신학자 존 로빈슨이 쓴, 하나님을 비인격적 존재로 보고 실존성을 부인한 <신에게 솔직히>가 출간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뉴비긴은 로빈슨의 신학이 전통적 기독교 해석을 무너뜨린다는 판단하에 삼위일체 교리에 근거한 선교학을 정립하려는 글을 썼다.20) 당시의 이 시도를 20년 뒤에 확장해서 출간한 책이 <오픈 시크릿>21)이었다.

뉴비긴이 WCC에 있는 동안 전통적인 의미의 선교적 관심을 조직 안에 유지시키려고 노력한 마지막 시도는 's'를 둘러싼 싸움이었다. WCC에 있던 1960년대 전반에 뉴비긴은 1910년 에든버러 선교 대회의 결과로 1912년에 탄생한 역사상 첫 선교 저널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s>의 편집을 맡고 있었다. 당시 WCC를 비롯한 세계 선교 운동 지도자 다수는 Mission의 뒤에 붙은 s를 제거하고, 저널의 이름을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으로 바꾸라고 뉴비긴에게 압력을 넣었다. 뉴비긴은 교회가 복음을 전해서 불신자들을 기독교인이 되게 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교회 선교들(missions) 및 그 활동을 담당하는 선교회들(missions)의 중요성을 여전히 믿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나의 우주적 보편 교회를 통해 '세상'에서 이미 하고 계신 선교(Mission, Missio Dei)를 강조하면서, 교회의 전도 활동을 약화하는 흐름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뉴비긴이 1965년에 WCC를 떠난 지 4년 후인 1969년부터 결국 저널명에서 s가 빠졌다.22)

WCC의 네 번째 총회인 1968년 웁살라 총회는 뉴비긴이 WCC가 지향하는 길을 함께 걷기를 거부한 전환점이었다. 뉴비긴은 "하나님과의 화해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인간화를 강조한 여러 세속주의 선교신학이 교회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간다고 확신하게" 되었다.23)

"웁살라 대회는 여러 면에서 나를 산산이 부숴 버린 모임이었다. 전체 집회는 온통 경제적 불의와 인종적 불의의 문제로 채색되어 있었다. 분위기는 분노로 가득했다. (중략) 복음의 메시지는 거의 들을 수 없었다. 단, 작은 구세군 밴드가 찬송을 부를 때 그것이 무언의 소리로 들렸을 뿐이었다. 이보다 더 주목을 끈 것은 피터 시거가 기독교 복음을 조롱하는 그 유명한 가사―'당신이 죽을 때는 하늘에 파이가 있을 것이네'―가 담긴 노래를 부르는 순간이었다. 모두들 입을 다문 채 열심히 그 노래를 듣다가 마치 새로운 진리가 계시된 것처럼 박수를 치는 것이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그룹이 그처럼 쉽게 세뇌당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몰려왔다."24)

레슬리 뉴비긴이 1960년 IMC 총무로 재직할 당시. <Unfinished Agenda> 갈무리

4. 복음과 우리 문화

에큐메니컬 운동의 주역 중 하나였던 뉴비긴은 이렇게 생애 후반기에 반대급부로 정통 개혁파 혹은 복음주의 입장을 더 강조하는 인물로 변모했다. 뉴비긴은 65세가 되던 1974년에 남인도교회 주교직을 은퇴했다. 은퇴해서 영국으로 돌아간 뉴비긴은 에든버러에 세 달간 머물다가, 셀리오크칼리지스 선교신학 및 에큐메니컬 연구 과정 담당 교수로 초대받아 버밍엄으로 이주했다. 이때부터 그는 영국 문화의 세속주의 현상을 더 분명하게 목격했다. 더구나 옛 영국 식민지 출신의 노동 이민자들과 그들 가족이 대거 이민하여 민족 및 종교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고 있던 공업 도시 버밍엄의 다원주의적 특징도 새로운 현상이었다. 인권 감수성이 예민한 기독교인은 자신들이 이들 새로운 이웃에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인종차별로 간주될 만한 행위를 하지는 않을지 노심초사했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이들 중 일부는 소수 종교 및 인종 공동체에 속한 이들을 존중하려면, 그들에게 자기 종교를 전해서도 안 된다는 논리를 폈다. 당시 한 신학자가 기독교인의 전도 행위를 '신학적 인종차별'이라고 비판하자, 뉴비긴이 그에게 '신학적 간음'을 조심하라고 충고했다는 에피소드는 널리 알려져 있다.25)

뉴비긴이 1974년에 선교 사역에서 은퇴한 후 1998년 사망할 때까지 '다원주의적 서양 사회로 다시 파견된 선교사'라는 제2의 경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는 배경이 바로 이것이었다. 특히 고도의 혼합주의에 빠진 서양의 다원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분석과 비평을 체계화하게 된 계기는 영국교회협의회(BCC)의 후원하에 뉴비긴이 주도한 '복음과 우리 문화'(Gospel and Our Culture)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 결과로 오늘날 널리 알려진 그의 작품들이 속속 빛을 보았다. 그중 가장 유명한 세 권이 <서구 기독교의 위기 The Other Side of 1984: Questions for the Churches>(1983),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Foolishness to the Greeks: The Gospel and Western Culture>(1986),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The Gospel in a Pluralistic Society>(1989)이었다.26)

캐나다 트리니티웨스턴대학의 세계관 및 종교학 교수 마이클 고힌은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한국어 개정판에 대한 해설을 썼다. 이 해설에서 고힌은 뉴비긴의 위 작품들을 관통하는 작업이 고도의 다원주의적 혼합주의에 빠진 서구 문화의 중심에 있는 종교적 신념을 복음과 선교의 틀로 파헤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작업은 사중적인데, 각각 문화적·신학적·교회적·인식론적 작업이다. 먼저, 문화적 작업이란 선교사가 선교지 문화를 분석하는 것이 필수이듯, 서양 문화도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과학과 이성은 객관적 사실의 영역으로, 기독교는 주관적이고 사적인 가치의 영역으로 환원하는 이원론이 오늘날 서양 문화의 왜곡된 세계관이다. 둘째, 신학적 작업이다. 이 작업을 통해 복음이 단순히 사적 진리가 아니라 공적 진리, 즉 역사와 사회와 문화의 전 영역에 영향을 끼치는 총체적 진리임을 인식시켜야 한다. 셋째, 교회적 작업이다. 뉴비긴은 성경 복음의 권위와 구원의 맛을 의심으로 가득한 서양 세계에 제대로 보여 주고 알릴 수 있는 유일한 대리자로서의 교회를 강조한다. 예수는 무함마드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해 경전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한 공동체를 형성하시고, 이 공동체에 세상을 맡기셨다(요 20:21). 따라서 선교는 교회에 속한 일부 개인의 과제가 아니라, 교회 자체의 존재 이유다. 마지막으로, 인식론적 작업이다. 이성은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의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이성은 세상을 이해하는 데 사용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능력 중 하나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성은 하나님을 비롯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기준이자 신이 되었다. 이 위상을 교정할 때에야 인간과 세상, 우주와 생명에 대한 바른 인식이 가능하다.27)

1968년 마드라스에서. 인도 기독교인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뉴비긴. <Unfinished Agenda> 갈무리

에큐메니컬 진영에서 회심을 경험하고 신자와 목회자, 선교사가 된 뉴비긴은 교회 일치와 기독교 신앙의 포괄성과 공공성이라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유산을 몸소 익히고 구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생애 후반기의 뉴비긴은 회의주의적 탈기독교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에게 역사적 유산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라고 권면하면서 복음의 절대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성을 강조했다. 복음주의자들은 뜨겁게 성원했다. 데이비드 네프는 지금까지 나온 복음주의 선교 및 신앙 선언문의 최종판이라 할 수 있는 2010년의 케이프타운 서약은 1974년 로잔언약을 발표한 이후의 복음주의가 뉴비긴의 사상을 치열하게 연구하고 적용한 결과 탄생한 작품이라고 주장했다.28) 브라이언 스탠리도 "뉴비긴이 1998년에 사망할 즈음이 되면, 한때 WCC를 이끄는 빛이었던 그가 이제는 복음주의 진영에 속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인물이 되어 있었다"고 평가한다.29) 그러나 뉴비긴은 어느 한 진영이 독점적으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지금도 은퇴하지 않고 우리 안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다.

1) https://www.christianitytoday.com/ct/2000/april24/5.92.htmlhttps://www.librarything.com/bookaward/Christianity+Today%27s+Books+of+the+Century
2) https://www.christianitytoday.com/ct/2006/october/23.51.html.
3) 실제로 이런 뉴비긴의 다면적인 영향력을 인식한 신학자이자 역사가 제프리 웨인라이트(Geoffrey Wainwright)는 뉴비긴을 20세기 교회사를 작성할 때,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인 혹은 12인 안에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Michael W. Goheen, "The Significance of Lesslie Newbigin for Mission in the New Millennium" Third Millennium 2004: 99;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개정판, 홍병룡 역 (서울: IVP, 2007)에 실린마이클 고힌의 한국어판 해설("참으로 해방된 복음: 레슬리 뉴비긴이 20세기 교회에 준 선물," 461-470)의 461에도 나온다.
4) 생애 구분은 다음 세 문헌에서 도움을 받았다. Charles C. West, "James Edward Lesslie Newbigin," in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ristian Missions, edited by Gerald H. Anderson (Grand Rapids, MI: Eerdmans, 1998), 491; 레슬리 뉴비긴, 『아직 끝나지 않은 길』, 홍병룡 역 (서울: 복있는사람, 2011), 10-11에 실린 목차;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개정판, 홍병룡 역 (서울: IVP, 2007)의 485-486에 실린 저자 연보.
5) 뉴비긴, 『아직 끝나지 않은 길』, 40-42, 45.
6)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목사이자, 결혼 및 가정 관련 저술로 알려진 아서 허버트 그레이(Arthur Herbert Gray, 1868–1956)인 것 같다. 그러나 뉴비긴이 선물받은 책이 어떤 책이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https://www.oxforddnb.com/view/10.1093/ref:odnb/9780198614128.001.0001/odnb-9780198614128-e-102454.
7) 뉴비긴, 『아직 끝나지 않은 길』, 42-47.
8) 1928년에 Inter-Varsity Fellowship of Evangelical Unions로 설립되었지만, 이후 공식 명칭이 Universities and Colleges Christian Fellowship(UCCF)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여전히 여러 나라에서 두 이름이 혼용된다. 한국에서는 IVF로 활동한다.
9) 뉴비긴, 『아직 끝나지 않은 길』, 54-86.
10) 브라이언 스탠리, 『복음주의 세계 확산: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의 시대』, 이재근 역 (서울: CLC, 2014), 222.
11) 뉴비긴, 『아직 끝나지 않은 길』, 81-84.
12) 뉴비긴, 『아직 끝나지 않은 길』, 90-100.
13) 뉴비긴, 『아직 끝나지 않은 길』, 111f.
14) 뉴비긴, 『아직 끝나지 않은 길』, 112.
15) J. Russell Chandran, "Church of South India," in A Dictionary of Asian Christianity, Edited by Scott W. Sunquist (Grand Rapids, MI: Eerdmans, 2001), 175.
16) 뉴비긴, 『아직 끝나지 않은 길』, 192-202.
17) Chandran, "Church of South India," in A Dictionary of Asian Christianity, 175.
18) 뉴비긴, 『아직 끝나지 않은 길』, 218f.
19) 뉴비긴, 『아직 끝나지 않은 길』, 345, 352f, 389.
20) 이 시도는 『레슬리 뉴비긴의 삼위일체적 선교』, 최형근 역 (서울: 바울, 2015)로 출간되었다.
21) 레슬리 뉴비긴, 『오픈 시크릿: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의 비밀, 선교 (개정판)』, 홍병룡 역 (서울: 복있는사람, 2012). 원서는 초판이 1978년, 개정판이 1995년에 나왔다.
22) 뉴비긴, 『아직 끝나지 않은 길』, 395, 544.
23) 스탠리, 『복음주의 세계 확산』, 222; Brian Stanley, Christianity in the Twentieth Century: A World History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8), 208-210.
24) 뉴비긴, 『아직 끝나지 않은 길』, 453f.
25) 뉴비긴, 『아직 끝나지 않은 길』, 476f.
26) 스탠리, 『복음주의 세계 확산』, 223.
27) 고힌, "참으로 해방된 복음: 레슬리 뉴비긴이 20세기 교회에 준 선물," 463-465.
28) 데이비드 네프, "사랑의 언어: 새로운 로잔언약은 우리 자신을 평가해 보도록 촉구한다," 「크리스채너티투데이」 한글판 (2010.12): 59. http://www.ctkorea.net/news/articleView.html?idxno=819. 변진석(한국선교훈련원 원장)의 해설의 글(13-28), in 뉴비긴, 『아직 끝나지 않은 길』, 27에서 재인용.
29) 스탠리, 『복음주의 세계 확산』, 226.

※필자 소개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재근의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 전체 기사 목록을 보실 수 있습니다.

뉴스앤조이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http://www.newsnjoy.or.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재근의 다른기사 보기

관련기사

line '소명' 키워드로 읽어 내는 기독교 신앙과 세계관 '소명' 키워드로 읽어 내는 기독교 신앙과 세계관
line 빈민 구제와 협동조합 운동을 이끈 평화의 사도 빈민 구제와 협동조합 운동을 이끈 평화의 사도
line '가난한 이들 중 가장 가난한 이' 안에서 예수를 발견한 콜카타의 성녀 '가난한 이들 중 가장 가난한 이' 안에서 예수를 발견한 콜카타의 성녀
line 하나님과 사람, 교회와 세상, 인간과 자연 모두를 사랑하고 사랑받은 엉클 존 하나님과 사람, 교회와 세상, 인간과 자연 모두를 사랑하고 사랑받은 엉클 존
line 미국 흑인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비폭력 저항 민권운동의 모세 미국 흑인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비폭력 저항 민권운동의 모세
line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켈러, 루이스, 얀시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켈러, 루이스, 얀시가 필요하다
line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아버지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아버지
line 세계기독교학의 북극성 세계기독교학의 북극성
line '오래되고도 새로운' 20세기 복음주의 지성과 양심의 대변자 '오래되고도 새로운' 20세기 복음주의 지성과 양심의 대변자

추천기사

line 교회·복지관·신학교, 손잡고 '모래 놀이 치료 상담실' 개소 교회·복지관·신학교, 손잡고 '모래 놀이 치료 상담실' 개소
line 대한민국 건국 연도 논란 대한민국 건국 연도 논란
line 총회 재판국 "명성교회가 예장통합 소속인 이상 세습금지법 지킬 의무·책임 있어" 총회 재판국
기사 댓글 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