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자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이 2018년 2월 21일에 자택이 있던 노스캐롤라이나 산악 지대 몬트리트에서 사망했다. 1918년 11월 7일에 태어났으니, 99세, 한국식으로 계산한다면 정확히 100년을 채우고 별세했다. 미국 남부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 소재한 빌리그레이엄도서관에 시신이 안치되었다가, 2월 28일부터 3월 1일까지는 워싱턴D.C. 국회의사당에서 명예 조문을 받았고, 다시 샬럿으로 돌아간 3월 2일에 장례식이 열렸다.

장례식은 빌리그레이엄도서관 근교에서 임시 제작한 2601㎡ 크기의 대형 천막에서 진행되었다. 이 천막은 빌리 그레이엄이 전국구 인사로 부상한 상징적인 집회 1949년 LA 집회에서 사용한 천막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 트럼프 대통령 내외, 펜스 부통령 내외 등 2000여 명의 주요 미국 정치인과 종교인이 참석했고, 한국에서는 1973년 서울 집회 당시 통역을 맡았던 김장환 목사가 참석해서 추모사를 읽었다.

빌리 그레이엄이 사망한 직후 전 세계 주요 언론이 그의 죽음을 빠르게 기사로 타전했다. 일반 언론의 발 빠른 행보에 이어, 주요 기독교 언론들도 기사와 기고문을 통해 빌리 그레이엄의 100년 생애와 사역이 미국 기독교, 세계 기독교, 미국 사회에 끼친 영향을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했다. 빌리 그레이엄이 2005년에 설교자 활동을 그만두고 은퇴했을 당시 그의 나이가 이미 87세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때부터 주요 언론이나 매체는 그가 사망했을 때 보도할 기사를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그는 태어난 해(1918)의 마지막 두 숫자가 중복되는 해(2018)에 사망함으로써, 드물게 한 세기, 즉 100년을 산 '세기적 인물'이라는 두드러진 호칭도 얻게 되었다.

빌리 그레이엄의 생애와 업적을 평가하는 글이 미국과 다른 서양 국가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여럿 나왔다. 따라서 필자는 조금 늦은 현 시점에서 전혀 새로운 내용을 다루기보다는, 지난 수십 년간 발간된 문헌과 최근 나온 여러 기사를 바탕으로 다섯 가지 키워드로 그의 생애와 사역을 평가하고자 한다. 다섯 가지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복음전도자 △복음주의자 △미국인 △세계인 △정치인.

빌리 그레이엄을 5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 홈페이지 갈무리

1. 복음전도자(evangelist)

빌리 그레이엄에게 붙을 수 있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그러나 그는 그 무엇보다도 복음전도자로 기억되어야 하며, 그 스스로도 이를 원했다. 미국 남부 장로교 중산층 집안에서 자란 빌리 그레이엄을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세계적인 전도자로 만든 가장 중요한 사건은 그가 대학에 진학하기 전, 16세 생일 직전에 일어났다. 당시 미국 남부 문화를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전통 중 하나가 대형 부흥회였다. 장로교 배경에서 엄숙하고 절제된 신앙생활을 하던 그레이엄은 죄와 지옥을 강조하는 소위 '유황불' 설교로 유명한 전도자 모디카이 햄(Mordecai Ham)의 집회에 참석한 후 처음으로 '회심'을 경험했다. 다음 해에는 역시 유명한 부흥사였던 밥 존스(Bob Jones)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해서 추가로 영적 결단을 한 후 그가 세운 근본주의 기관 밥존스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그레이엄이 밥존스대학의 극단적인 분리주의적 근본주의 분위기에 환멸을 느끼고 학교를 일찌감치 떠났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후 남부 근본주의의 고립주의를 떠났다고는 해도, 그가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남부에서 경험하고 전수받은 가장 중요한 유산은 결국 그의 일평생을 이끈 엔진이 되었다. 야외 집회 현장의 작렬하는 태양빛 아래서 유황과 불로 가득한 지옥을 설교하는 열정적인 설교자, 그리고 그 앞에서 울부짖으며 죄를 회개하고, 자백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로 결단하는 회심. 이것이 전도자 그레이엄을 만든 가장 중요한 유산이었다.

1949년 LA 집회와 1950년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BGEA) 결성 이래로 빌리 그레이엄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2억 명이 넘는 사람에게 '직접' 복음을 전했다. 방송과 위성이라는 '간접' 수단을 통해서는 22억 명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이 중 약 300만 명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하겠다"는 결신을 이끌어 냈다. 이 점에서 그는 인류 역사상 존재한 그 누구보다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 바로 '그 전도자'(The Evangelist)라 불릴 만하다. 그러나 그가 이런 대형 집회 부흥 전도자 전통의 창시자는 아니었다. 빌리 그레이엄은 이 점에서 거대한 역사적 전도자들의 '반열'에 선 계승자요 후계자였다.

18세기에 복음주의 부흥 운동을 설교자의 대형 야외 집회 전통으로 정착하게 한 조지 휫필드 이래로, 19세기 전반기에는 찰스 피니, 후반기에는 D. L. 무디, 20세기 전반기에는 빌리 선데이가 이 전도자 전통의 주요 계승자였다. 이런 주류 계보에 이름을 올린 이들 외에 수많은 다른 전도자도 '영혼 구원'이라는 같은 목적 아래 비슷한 형식과 내용, 프로그램으로 전도의 시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1940년대에 빌리 그레이엄이 등장한 이후, 개인적인 매력과 능력에다, 교통‧통신‧네트워크 혁명이라는 최첨단 과학 문명의 발전을 힘입어 그레이엄은 그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전도의 열매와 유산을 남긴 인물이 되었다. 그와 동시대, 혹은 조금 더 젊은 세대 전도자들인 제리 폴웰과 짐 베이커, 팻 로버트슨이 정치 및 성 추문으로 뒤로 물러날 때에도 그는 여전히 건재했다.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자 유산에는 양면이 공존한다. 18세기 복음주의 부흥 이래 교회가 꾸준히 견지한 복음의 핵심, 즉 모든 인간이 죄인이며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전했다는 것은 밝은 측면이다. 그러나 그가 전한 개인 중심의 영혼 구원 메시지가 기독교 복음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그가 이 메시지를 전하는 과정에서 활용한 즉흥적이고 도취적이고 소비적인 자본주의 문화의 도구들이 그가 전한 복음의 무게를 한없이 가볍게 보이게 했다는 사실은 어두운 측면이다.

2. 복음주의자(evangelical)

빌리 그레이엄에게 흔히 붙는 또 하나의 수식어는 '복음주의의 대부'다. 여러 의미에서 빌리 그레이엄은 20세기 복음주의의 대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미국', '복음주의'라는 세 단어가 결합되어야 그에게 붙은 이 수식어의 의미를 더 명확히 할 수 있다. 20세기 복음주의는 16세기 복음주의 및 18세기 복음주의와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지닌다.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성경 및 십자가 중심주의와 회중 중심주의를 계승했다는 점에서 16세기 복음주의와 연속성이 있다. 신앙을 형식이나 관습보다는 체험과 경건으로 체화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18세기 복음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20세기 복음주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을 중심으로 첨예한 갈등을 유발한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이 낳은 유산이라는 점에서, 이전 두 복음주의 전통과 불연속성을 지닌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1947년을 상징적 기점으로 탄생한 미국 (신)복음주의는 신앙고백적인 면에서 근본주의의 정통성을 보수하되, 사회와 세상, 지성에 대한 태도에서는 개방성과 통합성을 강조하는 지극히 20세기적이고, 지극히 미국적인 사조이자 운동이었다.

빌리 그레이엄은 이 운동의 지성, 언론, 기관, 전파 및 홍보 영역 중 네 번째, 즉 전파 및 홍보 영역을 대표한 인물로 규정할 수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레이엄은 원래 남부 근본주의 부흥사 밥 존스가 세운 전투적 근본주의 대학에 입학해서 첫 성년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 학교의 극단적 폐쇄성에 염증을 느끼고, 플로리다주 탬파의 플로리다성경학교(Florida Bible Institute)로 전학했다. 기독교선교연맹(C&MA)이 세운 보수적인 학교이기는 했지만, 이 학교는 밥존스대학과는 달리 여러 다양한 교파의 학생들이 어울려 연합 정신에 따라 따뜻한 교제를 유지하는 학교였다. 이 학교의 분위기가 밥존스보다 훨씬 그레이엄에게 잘 맞았다. 신앙의 근본 색깔은 여전히 보수적이지만, 고립과 단절, 분리보다는 연합과 관용, 열정을 더 지향하는 복음주의와 만난 첫 접점이었다.

이어서 이동한 일리노이주의 휘튼칼리지는 그레이엄을 말 그대로 '복음주의의 대부'로 키우는 가장 중요한 자양분을 제공한 현장이었다. '복음주의의 메카'라는 별칭에 걸맞게, 지성적 복음주의, 전도와 선교에 대한 열정,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컬 연합 등이 휘튼이 대변한 정신이었는데, 이것이 이후 그레이엄의 정체성이 된다.

이후 그가 대중 전도자로 첫 데뷔한 십대선교회(YFC)도 중요한 복음주의 기관이었다. 십대선교회는 십자가 중심주의와 회심주의, 행동주의에 충실한 대중 전도 운동을 그가 경험하고 자기 기관을 설립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했다. 1949년 LA 집회에 이어 1950년에 자신의 이름을 딴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를 만들 수 있었던 요인은 이런 주요 복음주의 기관들에서 배우고 익힌 신앙과 학문, 몸으로 익힌 복음주의 분위기와 정신, 그리고 특유의 친화력으로 쌓은 인적 네트워크였다. 이후 2005년에 은퇴할 때까지 그레이엄은 미국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인사로 차곡차곡 경력을 쌓아 간다.

1949년 LA 집회 당시 천막.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 홈페이지 갈무리

그렇다면 빌리 그레이엄의 20세기 미국 복음주의가 가진 특징이 무엇일까. 이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그가 안팎에서 받은 비판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더 명확해진다. 그레이엄의 복음주의를 비판한 이들은 크게 세 부류로 분류된다.

첫째, 근본주의자들이다. 그레이엄이 원래 근본주의에 속해 있다가 그 진영을 떠나 소위 신복음주의 탄생에 산파 역할을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근본주의자들은 그레이엄을 일종의 배교자로 인식했다. 1957년 뉴욕 집회가 결정적인 계기였다. 당시 근본주의자들이 자유주의적 배교 집단으로 인식하던 뉴욕시 개신교협의회가 그레이엄에게 뉴욕에서 집회를 열어 달라고 요청하면서, 재정과 인력 등을 대량으로 지원했다. 그레이엄은 여기서 결신한 수많은 이에게 협회에 가입된 교회에 등록하라고 권했다. 그레이엄에게 근본주의자라는 딱지 대신에 복음주의자라는 칭호를 붙이게 된 분수령이 바로 이 집회라고 판단하는 학자도 있다. 빌리 그레이엄이 밥존스대학 근교 도시에서 집회를 열었을 때 학교 당국은 대학 학생들에게 집회 참석 금지령을 내렸다. 이들이 그레이엄을 자기 학교를 떠났을 뿐 아니라 근본주의 전체를 떠난 이탈자로 인식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다.

1970년대 이후 기존 근본주의 내부에서 미국 사회의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한 인사들이 신근본주의라는 새 명칭 아래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 등, 극우 도덕 운동 및 정치 운동을 일으켰을 때에도 그레이엄은 이 운동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이들은 그가 소련이나 중국, 북한 등 공산권을 방문했을 때에 적그리스도를 대변하는 공산주의를 비판하지 않고 우호 제스처만 취하고 왔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기독교계의 다양한 분화 현상을 잘 알지 못하는 많은 이가 복음주의와 근본주의를 하나로 뭉뚱그려 취급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레이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실제로는 이 두 진영이 노골적인 상호 적대감을 표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둘째, 종교개혁의 개혁파 신학을 따르는 정통 개혁주의자들이다. 이 진영이 그레이엄을 비판한 내용은 한편으로는 근본주의와 겹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근본주의와는 다른 면모를 띤다. 예컨대, 영국 개혁파 복음주의자 이언 머리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그레이엄의 열정이 교리적 순결성이나 교파적 충성심까지 다 내다버리고, 문제가 많은 에큐메니컬 연합에 헌신하게 만들었다고 비난한다. 즉, 그가 수치도 모르는 실용주의에 오염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근본주의자와 개혁주의자가 그레이엄에게 가한 비난을 공유하는 지점이다.

비슷하기는 하지만, 개혁파 설교자 마틴 로이드-존스가 한 비판은 조금 결이 다르다. 그의 비판은 한층 신학적이다. 빌리 그레이엄이 전도 집회에서 사용하는 회심 초청이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즉 오직 하나님만이 죄인을 중생케 하는 역사를 왜곡하며, 초청에 응하는 것 자체를 회심으로 오해하게 만들며, 이런 반응이 개인의 영적 상태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잘못된 위안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개혁파 구원론의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위반하는 신인협력주의적 요소가 문제라는 지적이었다. 이들은 대형 집회의 감정적 격앙, 대중 동원, 즉흥 설교 및 반응, 음악 등을 이용한 인위적 자극 같은 문제도 동시에 지적했다. 이는 19세기에 찰스 피니가 장로교 목사였지만, 결국 이런 비판 때문에 회중교회로 적을 옮긴 상황을 상기한다.

세 번째 비판자들은 진보적인 사회 의제를 따르는 에큐메니컬 진영 기독교인과 기독교 외부 인사들이다. 그레이엄이 뉴욕에서 에큐메니컬 인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은 이미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가 이 진영이 흔히 정체성으로 추구한 정의와 평화, 인권 같은 가치를 증진하는 운동에 직접 동참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레이엄이 말과 행동으로 비교적 개혁적인 목소리를 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예컨대, 그는 전도자 경력 초기의 조심스런 접근과는 달리, 1960년대 민권 운동이 시작되기도 전인 1952년부터 남부에서 열린 집회에서 흑인과 백인이 앉는 공간을 가르는 것을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 실제 스스로 두 공간을 가르는 밧줄을 치우는 용기를 보여 주기도 했다. 대법원이 학교 내 인종 구별이 헌법에 위반된다고 결정하기 이전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단 한 차례, 즉 1973년에만 집회를 인도했는데, 이 집회는 이 나라 역사상 흑백이 함께 모인 첫 집회였다. 이 집회를 제외하고는 남아프리카에서 온 초청은 전부 거절했다. 인종차별 정책에 대한 노골적인 반대 때문이었다.

이런 전향적인 태도에도 그레이엄은 진보 진영의 비판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인종차별을 반대하면서도 인종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흑인 민권운동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보편 인권의 진보를 추구하는 캠페인을 자기 복음 전도 운동의 영역에 포함하기를 주저했기 때문이다. 냉전기 1950년대와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반공을 기치로 내세운 보수 정권과 긴밀한 연결 고리를 유지하면서, 인권 운동을 주도하는 진보 진영과 거리를 둔 것도 당연히 비판받았다.

복음 전도와 사회참여를 복음주의 신앙과 선교의 양 날개로 제시한 1974년 로잔 대회와 로잔언약은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가 만들어 낸 성과로 흔히 인정된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면밀히 분석한 글을 보면, 그레이엄은 대회의 주창자요 가장 중요한 후원자이기는 했지만, 이 대회에서 사회정의와 인권 주제가 힘을 얻으며, 미국 등 서양 교회에 비판이 집중되는 것에는 우려를 표했다. 복음주의 내부의 더 진보적인 인사나 남미 등 제3세계 출신에게는 이 점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결국 이 세 진영이 그레이엄에게 가한 비판은 각 진영의 대의와 반대되는 길을 걸은 그레이엄에 대한 정죄이기에 각각 독립적이고 구별된다. 그러나 이 세 비판에도 공통점이 있다. 그레이엄의 색깔이 어중간하고 타협적이라는 지적이다. 즉 근본주의가 볼 때 그레이엄은 너무 진보적이며, 에큐메니컬이 볼 때에는 너무 보수적이며, 개혁파가 볼 때는 너무 인간 중심적이고 세속적이며, 또한 자유주의자가 볼 때는 너무 영적이다. 이는 '복음주의'라는 역사적 운동과 사조가 대체로 사방에서 욱여쌈을 당하며 받는 전형적인 비판에 다름 아니다. 그레이엄은 이 점에서 20세기 미국 복음주의자의 운명을 몸소 짊어진 상징적인 인사였다.

중년기의 빌리 그레이엄(1966년 4월 11일).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공용

3. 미국인(American)

그레이엄에게는 '미국의 목사'(America’s pastor)라는 별칭도 있다. '미국의 목사'는 2007년에 조지 부시(George H. W. Bush,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이 그레이엄에게 붙인 별명으로, 그가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고 영향력 있는 개신교 목회자라는 칭송이었다. 실제로 그레이엄은 소위 '미국식' 기독교를 표준화하는 데, 또한 세계화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말로 '미국식' 기독교가 존재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 질문을 어떻게 범주화하느냐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유럽 기독교와는 다른 형식과 외양으로 발달한 미국식 기독교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대략적인 느낌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미국교회사가 마크 놀(Mark A. Noll)은 이 특징을 좀 더 분석적으로 제시하는데, 요약하면 다섯 가지다. 첫째, 전통이나 역사보다 성경과 개인의 양심, 둘째, 형식과 교의보다 실용과 상식, 셋째, 위계에 의한 임명보다 자수성가형 성공, 넷째, 전통적 전수보다 자발적 창의성, 다섯째, 통제된 경제활동보다 자유로운 시장. 언뜻 보면, 미국 종교보다는 미국 문화나 사회 및 경제 구조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한 사회의 종교는 그 사회의 다른 영역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에, 이 특징은 사실상 미국 기독교를 유럽 기독교와 구별 짓는 차이점이다. 즉, 개인‧창의‧자유‧실용‧상식‧자력 등이 미국 기독교를 대변하는 가치다. 그레이엄이 주도한 대형 복음 전도 집회는 대체로 이 정신을 한 세트 안에 구현한 압축적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빌리 그레이엄이 이런 미국식 기독교를 창조하고 형성한 단 한 사람은 아니다. 이미 북미에 유럽 열강의 식민지가 형성되고 이민자들이 자신들의 기독교를 신대륙으로 가지고 온 17세기부터, 국교 제도와 전통적 계급 구조에 기반하여 존속하던 유럽 기독교의 특징은 해체되기 시작했다. 연이은 서부 개척 시대와 대각성 운동, 독립혁명과 미국식 민주주의 발전 등이 20세기 미국식 기독교를 만들어 낸 300년 유산이었다. 결국 빌리 그레이엄은 이렇게 태동하고 성장한 미국형 기독교를 20세기에 일종의 표준화한 패키지로 만들어 낸 인물이라 평할 수 있다. 물론 그는 이 패키지를 세계로 가져가서 세계화함으로써, 결국 미국 기독교의 세계화를 이끈 가장 중요한 주역이었다.

4. 세계인(cosmopolitan)

그레이엄을 '미국의 목사'라 칭한 조지 부시의 발언에는 분명 타당한 논리가 있었다. 그러나 간단히 언급했듯이,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를 세계화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도 그레이엄이었다. 그 점에서 그는 세계인이었다. 실제로 그레이엄은 20세기 후반기에 세계적 기독교인 명사(celebrity)라는 영예를 누릴 만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직간접 수단으로 전 세계 무려 22억 명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물리적으로도 전 세계 모든 대륙과 모든 문명권, 심지어 북한 등 공산주의권에서도 복음을 전한 유일한 인사였다.

그레이엄이 주최한 전도 집회에 이정표가 되는 세 단계 전기가 있다고 흔히 말한다. 즉, 1949년 LA 집회가 그를 미국에서 전국구 인사로 만든 계기였고, 1954년의 런던 집회가 그를 유럽에서도 통하는 국제적 인사로 만들었으며, 1957년의 뉴욕 집회가 그를 복음주의 진영을 넘어서는 개신교 보편 교회 인사로 등극하게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레이엄이 일생 진행한 집회 중 가장 많은 인원이 모인 집회는 하루에 112만 명이 모였고, 대회 총 참석 인원이 321만 명이었다고 추정하는 1973년 서울 대회였다. 그레이엄이 주창해서 열린 1974년 로잔 대회도 선교 대회 역사상 다양성과 국제성이 가장 짙은 대회였다. 최종 참석 인원 2473명이 150개국, 135개 교단에서 왔는데, 이 중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약 1000명이 비서양 세계에서 참석했다.

개신교 복음주의권에는 바티칸 교황청이라는 단일한 기구가 있는 가톨릭이나, WCC라는 세계 교회 연합 기구를 가진 에큐메니컬 진영 같은 소통 채널이 일원화한 통합 구조가 없었다. 이 점에서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는,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와 함께, 상대적으로 결속력이 약했던 세계 복음주의 진영을 네트워크화하는 데 기여했다.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는 각 지역 지부에서 현지인을 지도자로 임명하면서, 복음 전도 운동의 토착화도 지원했다. 심지어 여기서 발굴한 인사가 세계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다. 예컨대, 1956년 인도 뉴델리 집회 당시 통역자로 지명된 아크바르 압둘 하크(Akbar Abdul-Haqq)는 1957년 이후 자신만의 전도 집회를 인도와 세계 여러 곳에서 연 저명 부흥사가 된다. 심지어 1960~1970년대에는 북미 대학과 신학교에서 정기 집회 강사로 자주 초대받아 설교했다. 이는 오늘날 유럽 및 서양에서 복음을 전하는 비서양 출신 선교사들의 활동을 일컫는 '역선교'(reverse mission)의 초기 모델이었다. 이런 비서양 출신 전도자들의 부상을 도운 그레이엄의 열린 정신은 긍정적인 평가의 대상이다. 그레이엄은 오늘날 세계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세력 중 하나인 범복음주의(pan-evangelicalism) 건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5. 정치인(statesman)

마지막으로 그레이엄에게는 '정치인'이라는 별칭도 자주 따라 붙는다. 여기서 사용된 영어 단어 statesman은 흔히 정치인, 정치가로 자주 번역된다. 직업적인 전문 정치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일반명사로도 자주 사용된다. 즉, 대변자‧대표자‧대언자 등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것처럼, 그레이엄은 미국 및 세계, 20세기, 복음주의 등을 대변하고 대표하고 대언하는 기독교인이었다. 그 점에서 그는 탁월한 statesman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실제로 미국 정치에 관여한 정치적 인물이기도 했다. 트루먼과 아이젠하워 시절부터 부시와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그는 그 시기 미국의 모든 대통령의 영적 조언자 역할을 맡았다. 미국의 어떤 영향력 있고 유명한 성직자도 그처럼 역대 대통령들과의 깊고 다양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누리지 못했고, 그만큼 대통령들의 존경을 받지도 못했다. 무엇보다도 역대 대통령이 속한 당과 정치적 성향, 신앙 색깔이 다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우정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많은 사람에게 매력적인 인물이었음을 역설한다.

2010년 4월, 빌리 그레이엄을 찾은 오바마 대통령.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공용

단지 역대 대통령들과 친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정치적인 인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레이엄의 정치적 입장과 태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변화를 겪었다. 젊은 시절이라 경험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반공 및 냉전 시대 미국식 사고의 전형이기도 했고, 보수적인 남부 출신이기도 했기 때문에, 초기의 그레이엄은 오른쪽으로 급격히 기울어 있는 보수파 인사였다. 따라서 비록 케네디 같은 민주당 대통령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융통성을 보이기는 했지만, 보수 지도자들과 더 친밀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닉슨 대통령과 지나치게 가까이 지내던 와중에 터진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로, 그는 정치권에 지나치게 밀착되는 것의 위험과 부담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신중한 비정파 조언자 역할에 머문다.

복음주의자로서 근본주의와 에큐메니컬 사이에 다리를 놓은 역할을 꾸준히 감당했던 것처럼, 미국의 진보와 보수 양 진영 사이에서 대화를 추진하는 역할도 맡고, 소련‧중국 등 공산권 지도국과 미국 간 핵 억제와 협상을 중재하는 평화의 사도직도 수행했다. 이 점에서 그는 전문 정치인(politician)은 아니지만, 존경받는 종교인으로의 자기 지위에 가장 걸맞은 정치력을 발휘한 대변자(statesman) 역할은 상당히 잘 수행했다고 평가받을 수 있다.

빌리 그레이엄 사망 이후 한 미국 언론이 이 주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기고문 하나를 실었다. 보스턴대학교(BU) 종교학과에서 가르치는 스티븐 프로테로(Stephen Prothero)가 한 정치 잡지에 실은 '빌리 그레이엄은 한 운동을 건설했다. 지금 그의 아들은 그 운동을 붕괴시키고 있다'는 제목의 글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인 성공회에서 자라고, 역시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신학을 가르치는 학교 중 하나에서 교수하는 그에게도 빌리 그레이엄은 상당히 긍정적인 신앙과 삶의 모범을 보여 준 기독교인이었던 것 같다.

그는 빌리 그레이엄이 보수 문화와 정치를 상당 부분 대변했고, 인종 및 인권, 사회정의 문제에서도 만족스런 행보를 보여 주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런 약점에도, 극우 보수 세력의 '혐오' 정치 문화와는 거리를 두며, 통합‧상생‧공존‧평화의 가치를 말과 행동으로 주장하고 실천하려 했다는 점을 칭찬한다. 또한 수십 년간 그토록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있었음에도, 겸손한 말과 행실을 보여 주었고, 그 흔한 추문 하나 없이 건실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그레이엄의 사망은 단지 유명한 전도자 한 사람의 소천이 아니라, 믿음‧소망‧사랑에 근거하여 세워진 건전한 복음주의의 종말을 뜻한다고 슬퍼했다. 이유는 바로 아버지를 계승한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이 믿음‧소망‧사랑 대신에, 타자 및 소수자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무기 삼아 미국 복음주의의 질을 급격하게 떨어뜨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프로테로는 아들 그레이엄을 혐오 정치 및 음모론을 퍼뜨려 미국 백인 복음주의자 대다수가 트럼프를 지지하도록 만든 정치 협잡꾼이라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빌리 그레이엄이 구축한 균형 잡히고 단정한 20세기 복음주의 건축물을 프랭클린 그레이엄이 붕괴시키고 있고, 아버지의 영적 유산을 정치적 사업으로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그레이엄의 이름은 이제 전도자에서 혐오자로, 그 이름을 딴 운동은 이제 영적 운동에서 정치 운동으로 변질되었다고 애통해한다.

어느 누구도 모든 사람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을 수는 없다. 더구나 유명할수록, 영향력이 클수록, 오래 살고, 삶의 농도가 짙을수록,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고, 또 극단적으로 상반될 가능성도 크다. 빌리 그레이엄도 그런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한 평가도 그만큼 다채로울 수밖에 없다. 평가는 이제 시작이다. 그 평가는 유산을 직접 계승한 미국인에게서 가장 많이 나올 수밖에 없겠지만, 그가 세계인이었던 만큼, 한국 교계와 사회 또한 빌리 그레이엄이 우리에게 남긴 것에 대한 반성적 숙고를 시작해야 한다.

참고한 글

1. "Billy Graham (1918–2018): Prophet of World Christianity?" http://www.cswc.div.ed.ac.uk/2018/03/billy-graham-1918-2018-prophet-of-world-christianity/
2. "Noll, Moore, and George on the Legacy of Billy Graham"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podcasts/tgc-podcast/noll-moore-and-george-on-the-legacy-of-billy-graham/
3. "An Interview with Mark Noll and George Marsden on Billy Graham"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blogs/evangelical-history/interview-mark-noll-george-marsden-billy-graham/
4. "Billy Graham Built a Movement. Now His Son Is Dismantling It." https://www.politico.com/magazine/story/2018/02/24/billy-graham-evangelical-decline-franklin-graham-217077
5. "세기의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 별세"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6062
6. "빌리 그레이엄의 명과 암: [대담] 배덕만 교수와 이강일 소장, '미국의 목사'를 말하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6315
7. "빌리 그레이엄, 그는 여행을 끝내고 천국에 계십니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11001&code=23111115&cp=nv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11001&code=23111115&cp=nv
8. 브라이언 스탠리, 『복음주의 세계 확산: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의 시대』, 이재근 역 (CLC, 2014)
9. 이재근,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세계 기독교 관점에서 보는 복음주의 역사』 (복있는사람, 2015)
10. 마크 놀, 『복음주의와 세계 기독교의 형성: 미국 기독교는 어떻게 세계 종교가 되었는가?』, 박세혁 역, 이재근 해설 (IVP, 2015)
11. 티모시 라슨 편, 『복음주의 인명사전』, 이재근·송훈 역 (CLC, 2018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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