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개신교 국가'가 근대 발흥 후 지난 200~300년 동안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질서를 주도했기 때문에, 오늘날 사회 문화 곳곳에서 개신교의 영향력이 여전히 막강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단일 조직이 아닌데다, 나라와 민족과 신학과 지역별로 셀 수 없이 나뉠 수밖에 없는 개신교의 특성상, 개신교의 대표자를 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유럽의 동쪽에 사는 사람들의 신앙 세계를 형성한 동방정교회도 마찬가지다. 고대 교회로서 2000년의 정통성을 지켜 왔지만, 오스만튀르크가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후 연이어 이슬람 정권과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영향력을 외부로 뻗기보다는 오히려 생존 자체에 급급했다. 개신교와는 달리 단일성과 통일성이 강한 집단임에도, 총대주교 권한이 모든 지역 교회 위에 절대적으로 군림하지 않으므로, 지배적 영향력을 지닌 한 인물을 선정하기도 쉽지 않다.

이와는 달리, 로마 가톨릭은 단일 조직으로, 전 세계 곳곳에 거주하는 신도 수가 모든 기독교 종파 중 가장 많고, 여전히 영향력도 막강하다. 로마의 주교, 즉 교황1)이 실제로, 또는 최소한 상징적으로라도 이 거대한 세계 교회의 방향을 좌지우지하는 결정적 권한을 지녔다. 따라서 이 교회의 수장을 다루지 않고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에 대해 진술하는 것은 모순이다. 20세기에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주교의 자리에 앉은 교황은 총 9명이었다.

20세기 로마 가톨릭 교황 명단
교황명 원래 이름 국적 재임 기간 주요 사건
레오 13세 조아키노 빈첸초 페치 이탈리아 1878~1903 1차 세계대전
비오 10세 주세페 사르토 이탈리아 1903~1914 1차 세계대전
베네딕토 15세 자코모 델라 키에사 이탈리아 1914~1922 1차 세계대전
비오 11세 아킬레 라티 이탈리아 1922~1939 2차 세계대전
비오 12세 에우제니오 파첼리 이탈리아 1939~1958 2차 세계대전
요한 23세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 이탈리아 1958~1963 바티칸 Ⅱ
바오로 6세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 이탈리아 1963~1978 바티칸 Ⅱ
요한 바오로 1세 알비노 루차이니 이탈리아 1978 바티칸 Ⅱ 이후
요한 바오로 2세 카롤 보이티와 폴란드 1978~2005 바티칸 Ⅱ 이후

아홉 명에 해당하는 20세기 교황들의 재임기는 크게 네 가지의 중요한 역사적 분기점으로 구분될 수 있다. 레오 13세부터 베네딕토 15세까지는 서양 제국주의 전성기와 열강들의 상호 분투로 요약되는 1차 세계대전의 배경과 영향을 받은 시기였다. 비오 11세와 12세가 재위하던 시기는 중세 말기의 바벨론 포로기처럼, 가톨릭교회가 이탈리아와 독일, 일본의 파시즘에 저항하지 못하고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한 암흑기로 평가된다. 20세기 후반기의 결정적인 분기점은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 재임기에 진행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바티칸 II)였는데, 이 공의회에서 논의된 이슈와 결정 사항은 20세기뿐만 아니라, 가톨릭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혁신적인 개혁으로 평가된다. 이후 요한 바오로 1세와 2세, 그리고 21세기의 두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현직 프란치스코 교황 재임기는 바티칸 II 정신에 대한 해석과 적용을 서로 달리하는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의 현재진행형 줄다리기 상태라 할 수 있다.

20세기에 재임한 교황이 아홉 명으로 상당히 많은 것도 난제이지만, 그중 모두가 동의하는, 압도적이고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독특한 출신 배경, 최장기 재임, 가장 많은 세계 교구 방문, 상당한 인기와 영향력을 지녔던 한 인물은 충분히 다룰 가치가 있다. 따라서 455년 만에 이탈리아인이 아닌 교황2)이자 첫 슬라브계 교황, 역사상 세 번째3)로 긴 27년을 장기 재임한 교황, 재임 중 130개 나라를 방문하고 대중매체에 흔히 노출되어, 유럽만이 아니라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목자가 된 교황, 바티칸 II의 정신을 사회 이슈들에 온건하게 적용하여 평화의 사도로 널리 존경을 받은 요한 바오로 2세(Ioannes Paulus PP. II)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수장으로 선정될 자격이 있다. △폴란드인 △바티칸 II △한국천주교라는 세 키워드로 그의 생애를 요약해 보자.

1985년 당시 요한 바오로 2세.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1985년 당시 요한 바오로 2세.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1. 폴란드인

1978년 8월에 15년간 재임한 바오로 6세가 선종하자, 교황 선출 회의인 콘클라베(Conclave)는 후임자로 베네치아총대주교였던 이탈리아인 알비노 루치아니를 선출했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1세를 교황명으로 택한 그는 불행히도 즉위 34일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10월 22일에 다시 열린 콘클라베에서 선출되어 세상에 공표된 새 교황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선출된 인물은 사상 첫 슬라브계인 58세 폴란드 크라쿠프대주교로, 130년 만에 처음으로 60세 이전에 선출된 교황이었으며, 공산국가 폴란드에서 유명한 시인이자 극작가, 학자, 반공 운동가였고, 최소 6개 국어(최대 10개 국어)에 능통했고, 축구와 스키, 등산 등 스포츠에서 재능이 뛰어나고 체격이 건장한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Karol Józef Wojtyła, 1920~2005)였다.4)

요한 바오로 2세라는 교황명을 택한 이 크라쿠프대주교는 폴란드 출신이자 첫 슬라브인 주교라는 특징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폴란드인이라는 사실은 단지 그가 455년 만에 처음으로 선출된 비이탈리아인 교황이라는 점에서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폴란드인으로서 그가 당한 경험과 현실이, 한 인간으로서, 운동가로서, 종교인으로서의 그의 삶과 신앙, 사상과 행동이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점에서 카롤 보이티와의 1차 정체성은 무엇보다도 '폴란드인'이었다. 새 교황의 폴란드인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두 요소는 그가 태어나서 성장하고, 사제로 경력을 쌓던 시기의 폴란드가 2차 대전기 히틀러 치하의 독일 나치즘과 종전 후 소비에트의 공산주의였다. 이 둘은 서로 유래가 다르지만 외국에서 들어온 전체주의라는 점에서는 동일했던 외세 사상이었는데, 폴란드와 세상은 이들 때문에 심각한 파멸 위기에 직면해야 했다.

1920년 5월 18일에 폴란드 남부 마을 바도비체에서 3남매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의 아버지는 예비역 육군 장교, 어머니는 리투아니아 출신 초등학교 교사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의 나이 9살에, 큰 형이 12살에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 카롤은 1946년에 26세의 사제가 되기 전에 가족을 모두 잃었다. 특히 21살 성인이 될 때까지 그의 곁에서 삶의 멘토이자 모델 역할을 했던 아버지의 죽음이 그의 성품을 빚고 사제 서약을 하는 과정에서 끼친 영향이 컸던 것 같다. 폴란드계 이탈리아인으로, 바티칸 전문 역사가 지안 프랑코 스비데르코스키가 쓴 대중적인 전기에 따르면, 사람들에게 '대위님'이라고 불린 카롤의 아버지와 아들은 거의 일심동체였다. 군인 출신이었음에도 조금도 권위주의적이지 않았고, 아들에게 신앙을 강제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신앙과 삶의 원칙을 지키는 일에서는 타협이 없었다. 매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모습이 나중에 사제와 교황이 된 카롤에게 각인되어 있던 아버지의 이미지였다.5)

바도비체에는 유대인이 많았기에 카롤도 어릴 때부터 유대인 친구 및 이웃과 어울리는 데 익숙했다. 당시 바도비체 전체 인구 1만 8000명 중 1/3이 유대인이었다. 유럽 전역에서 중세 이후 반유대주의(Antisemitism)가 횡행했지만, 바도비체에서는 폴란드인과 유대인 관계가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종교개혁기에도 (이단이나 타 교파 신자를 화형하는) '장작더미가 없는 나라'라는 별명을 가졌던 만큼, 폴란드에는 관용과 포용이 오랜 전통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평생 그의 단짝이 된 예지 클루거는 유대인회 회장 아들이었다. 9년간의 김나지움(인문계 중고등학교, 1930~1938) 생활 중에도 그의 친한 동기생 중에는 반유대주의자 폴란드인도 있었지만, 유대인도 있었다. 이들은 서로 치열한 입씨름을 벌이기는 했지만, 친한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이 사태가 폭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6)

그러나 독일에서 히틀러가 주도한 나치즘이 창궐하기 시작하면서, 이웃 폴란드에도 이 어둠이 곧 들이닥쳤다. 나치 정권이 독일에서 유대인을 집단 추방하자, 폴란드는 처음에 이 난민을 조건 없이 수용했다. 그러나 폴란드에서도 극우 애국 단체들이 힘을 얻으면서, 김나지움과 대학을 비롯한 학교에서도 유대인을 향한 차별이 심해졌다. 결국 1939년 9월 1일, 15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약 일주일 만에 폴란드 서쪽 반을 점령했다. 동쪽의 소련은 나치를 저지한다는 명분으로 9월 17일에 동부전선을 넘어 들어와 순식간의 폴란드 동쪽 절반을 차지해 버렸다. 폴란드는 역사상 네 번째로, 독일과 러시아에 의해 동서로 분할되는 비극을 맛보았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지 이틀 후 영국과 프랑스도 독일과의 전쟁에 들어갔다. 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7)

잘 알려진 것처럼, 독일은 폴란드 침공 직후 폴란드 지식인과 고유문화를 압제하는 한편, 유대인 박멸 작전의 이상적인 실험지로 폴란드를 선택했다. 당시 카롤은 크라쿠프의 야기엘론스키대학 연극학과 학생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폴란드 침공 후 고등학교, 대학, 신문사, 예술협회, 도서관을 모두 폐쇄하고, 쇼팽을 비롯한 폴란드 민족 음악가들의 곡 연주와 청취를 금했으며, 사제를 체포하고, 교회의 성일 기념을 금하고, 교회의 모든 재산을 압류했다. 카롤은 독일 침공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1944년까지 화학 공장과 석회암 채석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이 시기 크라쿠프에서 약 60km 떨어진 곳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는데, 폴란드인이 '오시비엥침'이라 부르던 이 수용소를 독일인은 '아우슈비츠'라 불렀다. 잘 알려져 있듯, 이 수용소는 단순한 포로수용소가 아니라, 유대인 집단 학살 수용소였다.8)

서쪽의 나치 독일만 문제가 아니었다. 동쪽에서는 소련 장악 지역 총인구 1200만 명 중 최소 150만 명이 시베리아 노동 수용소로 끌려가 사상 재교육을 받았다. 독일군 못지않은 홀로코스트를 저지르기도 했다. '카틴 숲 대학살'로 알려진 대표적인 사건은 1940년 4월에 일어났다. 소련이 선전포고 없이 폴란드를 침략한 후 폴란드 정규군 장교 8000명을 포함해, 예비군 병력 25만 명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당시 소련 경찰 및 정보기관이었던 내무인민위원회(NKVD)는 이들 중 2만 2000명을 소련에 비협조적인 적군으로 분류한 후 카틴 숲과 다른 지역에서 총살한 후 구덩이에 시체를 몰아넣었다. 그뿐 아니라, 희생자 가족 6만 명을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9)

이런 어둠이 창궐하던 1942년에 카롤은 비밀 지하 신학교에 입학해서 공부한 후, 전쟁이 끝난 1946년에 사제로 서품받았다. 이어서 로마 아퀴나스교황청립대학에서 학위 공부를 한 후, 1948년에 십자가의 성 요한의 믿음 교리에 대한 논문을 쓴 후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8년에 폴란드로 귀국한 후에는 크라쿠프 근교 니에고비츠 시골 마을에서 처음 사목한 후, 크라쿠프의 성플로리아노교구로 전임되었다. 크라쿠프에서 사목하는 동안 야기엘로인스키대학과 루블린가톨릭대학에서 윤리학을 가르쳤으며, 기도, 철학 및 신학 토론, 병자 및 시각장애인 간호를 목적으로 하는 청년 모임을 조직했다. '나들이 사목' 형태로 진행된 이 모임에는 등산, 캠핑, 스키, 카누 등이 동반되었고, 캠핑장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인생의 실존과 신앙, 사회문제 등을 토론했다. 심지어 이런 모임에서는 사제복을 입지 않았던 카롤의 친밀한 분위기 덕에 청년들은 그를 신부가 아니라 '삼촌'(Wujek)이라 부르기도 했다.10)

그러나 전후 폴란드 정치 상황은 카롤의 사목 활동처럼 밝지 않았다. 전쟁으로 폴란드에서만 군인 100만 명과 민간인 500만 명이 희생되었는데, 그중 절반이 유대인이었다. 전후 폴란드 정부는 선거 결과를 조작하고 자신들의 뜻에 반대하는 이들을 숙청하는 공산당 일당독재국이 되었는데, 그 배후는 소련이었다. 공산화 과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반종교 정책도 강화되었다. 특히 동유럽의 가톨릭교회들은 바티칸과 관계를 끊으라는 요구를 끊임없이 받았고, 이를 거부하는 지도자들은 중형을 받아야 했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죽음 이후 공포정치는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바티칸이 아니라 폴란드 정부가 폴란드 내 주교와 사제를 임명하는 것으로 헌법을 개정하려 시도하자, 폴란드 주교회의가 이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는 주교 8명, 사제와 수도사 1000여 명을 체포하고, 이 중 두 사람에게는 사형을 선고했다. 가톨릭 주간지는 폐간되었고, 학교 내 종교교육이 전면 금지되고, 종교 시설에 엄청난 세금이 부과되었다. 폴란드 가톨릭 수장 바르샤바의 스테판 비신스키 추기경은 체포되어 한 수도원에 3년 이상 연금되었다.11)

카롤도 핍박의 희생자였다. 야기엘로인스키대학 기독교윤리학 조교수로 임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학부가 폐지되면서, 강사직을 잃었다. 1956년에는 소련에서 새로 집권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유산을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변화가 동유럽 위성국가들의 시민의식을 자극했다. 1956년 6월 28일에 폴란드 서부 보즈난(Poznan)의 스탈린 철강 공장에서 노동자 수천 명이 파업을 일으키며 봉기했다. 지식인, 학생, 시민이 가세하면서 10만 명으로 시위 인구가 늘어났다. 살인적 물가, 세금,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개선 요구인 동시에, 노동자를 대변한다고 포장하는 공산당 정부의 위선에 대한 시민 저항이었다. 인민위원회는 탱크 400대와 1만 명의 군대를 출동시켜 시위를 진압했다.12)

이 연대 저항에 폴란드 사제들도 함께했다. 38세가 된 1958년에 카롤은 교황 비오 12세에게 주교 서품을 받으면서, 폴란드에서 가장 젊은 주교가 되었다. 1962년에는 바티칸 II에 폴란드 대표 중 하나로 참석한 후, 1963년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크라쿠프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이어서 1967년에는 추기경으로 임명되는 등, 고속 승진했다. 주교, 대주교, 추기경으로 임명된 이 모든 과정에서 카롤 보이티와는 민중과 자유세계의 지지를 등에 업고 공산 정권에 맞서 폴란드 교회를 이끌었다. 그리고 1978년 10월 22일, 마침내 슬라브인 폴란드 추기경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는 264대 교황으로 즉위했다. 100년 전 폴란드의 대표 극작가이자 시인인 율리우시 스워바츠키(Juliusz Słowacki, 1809~1849)는 다음 시로 폴란드인 교황을 예견한 바 있었다.

"온 세상이 분쟁으로 치닫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거대한 종을 울리신다,
그분께서 슬라브인 교황에게 옥좌를 내어 주시니.

 

주님의 세상을 다시 세우는 데 큰 힘이 필요하기에,
그래서 슬라브인 교황이 오신다네,
모든 민족들의 형제로."13)

나치 독일의 인종주의와 소비에트와 폴란드의 공산 전체주의 치하에서 성장하고 사목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는 갈등과 반목이 아닌 화해와 평화, 압제를 이기는 자유가 큰 관심사였다. 따라서 폴란드에 있을 때에도, 바티칸으로 이동한 후에도 종파와 이념, 인종을 뛰어넘은 화해를 강조했고, 공산 독재 치하의 노조 및 개혁 개방 운동에 힘을 실어 주었다. 특히 분쟁 지역을 자주 찾아 화해의 사도가 되고자 노력한 점이 두드러진다. 1982년 포클랜드전쟁 당시에는 영국과 아르헨티나를 동시 방문해서 평화를 촉구했고, 1991년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 후 연이은 인종 전쟁 중에도 특사를 파견해 화해를 중재했다. 2000년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화해 조정을 위해서 힘썼다. 1993년에는 바티칸과 이스라엘 간 외교 관계를 수립했고, 개신교, 정교회, 성공회와도 교류했다. 시리아 등 이슬람 국가 방문을 요한 바오로 2세만큼 많이 한 가톨릭 지도자는 역대로 없었다. 1992년에는 갈릴레오에 대한 중세 재판이 오류였음을 인정했고, 2000년 3월에 열린 '용서의 날' 미사에서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 십자군 전쟁, 13세기 종교재판 당시 가톨릭교회의 참여와 묵인에 대해 참회했다. 1981년 5월에 터키인 청년 메흐메트 알리 아자의 암살 시도에 총탄을 맞고 중태에 빠졌다가 회복되고 2년 후에는 직접 감옥에 있던 청년을 찾아가 용서와 사면을 청했다.14)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1978년 10월 16일 성베드로대성당 발코니에 선 요한 바오로 2세.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1978년 10월 16일 성베드로대성당 발코니에 선 요한 바오로 2세.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2. '바티칸 II'

사실상, 이탈리아인이 아니었던 카롤 보이티와가 요한 바오로 2세라는 교황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바티칸 II가 닦아 놓은 기반 덕이 컸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네 차례 회기에 걸쳐 진행된 바티칸 II를 소집한 교황은 요한 23세였는데, 불과 5년밖에 재위하지 못했던 그는 추기경단 수를 70명에 제한했던 전통을 포기하고 세계 교회 규모에 맞춰 추기경단을 대폭 늘렸다. 투표권을 가진 추기경의 수가 많아진 결과, 이탈리아인이 아닌 인물이 교황에 등극할 가능성이 커졌다. 그 열매가 바로 요한 바오로 2세였다.15)

그러나 요한 23세가 가톨릭교회에 일으킨 혁명은 비이탈리아인을 교황으로 등극시킨 것에만 제한되지 않았다. 그는 가톨릭 역사상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공의회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바티칸 II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의 정신은 요한 바오로 2세를 비롯한 바티칸 II 이후 시대 교황들의 지표이기도 했다. 물론, 그 지표는 바티칸 II에서 발표된 회칙과 정신에 대한 이들의 해석과 처한 상황에 근거한 것이었다.

76세로 재위에 오른 요한 23세의 의도는 이 공의회 모토인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에 들어 있었다. 현대화(modernization), 업데이트(update) 등으로 번역되는 데서 알 수 있듯, 바티칸 II는 이전 공의회들이 시대정신에 저항하며 신앙적, 교리적, 신학적 보수화와 정통 회귀를 지향한 것과는 다른 길을 택했다. 오히려 '여기 지금'(here and now)에 초점을 맞추고, 오늘 이 세상이 변화하는 물결에 발맞추어, 복음을 이 시대의 요구와 필요에 맞게 적용하고 적응하는 과정을 교회가 수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런 개혁 정신에 따라 3년간 진행된 공의회는 그 과정도 이전과 달랐고, 결과물도 특별했다.

1962년 10월 11일에 시작된 바티칸 II는 4회기가 지속되는 동안 약 2800명이 회의와 토론에 참석한 가톨릭 역사상 최대의 공의회였다. 규모만 큰 데 머물지 않고, 이때 논의된 안건과 행사도 가톨릭교회 역사를 혁명적으로 전향시키는 사건들이었다.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 최종원 교수는 최근에 <복음과상황>에 기고한 글에서 바티칸 II에서 일어난 주목할 만한 사건과 의미를 다음 몇 가지 키워드로 요약했다.16)

첫째, 전례 수정. 미사를 드릴 때, 기존에 라틴어만을 사용했던 전통을 버리고 자국어를 사용할 수 있게 했고, 사제가 지성소, 즉 앞만 보고 미사를 집전하는 대신, 회중석에 앉은 신자를 바라보고 미사를 집전하게 했다. 또한 미사 여러 순서에서 사제 이외에 평신도도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요한 23세에 이어 교황이 된 후 바티칸 II를 이어 간 바오로 6세는 이 전례 개혁안을 토대로 <로마 미사 경본>을 작성해서 1970년에 공표했다.

둘째, 에큐메니컬 교제.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서로 싸워 분열된 이들을 '이단'이 아닌 '형제'로 규정한 첫 공의회가 바티칸 II였다. 1964년 1월에 바오로 6세는 동방정교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와 만났는데, 여기서 1054년에 서로 파문했던 역사를 뒤집었다. 종교개혁 이후 '열교裂敎', 즉 찢겨 분리된 교회로 부른 개신교도 '분리된 형제'로 새롭게 정의했다.

셋째, 평신도의 능동적 참여. 미사 중 평신도에게도 역할이 주어진 것은 평신도 사도직이라는 가톨릭 내 혁신적 신학자들의 조언을 수용한 결과였다. 주로 '만인 제사장직'이라는 표현으로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모토가 된 평신도의 적극적인 목회 참여가 가톨릭에서도 중요한 일상으로 자리 잡은 계기가 바티칸 II였다.

이 모든 과정은 결국 가톨릭교회가 교리와 신학, 교계제도 중심의 전통을 '보수'하는 데만 급급한 수구적 집단이 아니라, 현대성과 대화하며, 시대의 필요에 맞추어 '공동선'을 증진하는 조직이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1999년 6월 5일 폴란드를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 사진 출처 플리커
1999년 6월 5일 폴란드를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 사진 출처 플리커

그렇다면 요한 바오로 2세는 바티칸 II의 혁신 정신에 따라 교황직을 수행한 충실한 계승자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이기도 하고, '아니오'이기도 하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폴란드인 카롤 보이티와는 바티칸 II가 닦아 놓은 다양성과 세계성 정신 덕에 교황이 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뒤이은 독일인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아르헨티나인 현 교황 프란치스코와 함께 바티칸 II의 원리에 의해 배출된 교황이라 할 수 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전 세계를 순례하면서 다양한 민족 및 인종, 기독교의 타 교파 지도자, 타 종교인을 만나고, 사회 및 인권 문제에 거리낌 없이 발언한 것도 아조르나멘토 정신의 구현이다. 특히 소비에트 공산권 전체주의 아래 신음하던 폴란드와 동유럽의 자유 운동가와 시민들에게는 그의 존재 자체가 큰 희망이었다.

그의 이런 정신은 직접 저술한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교황 즉위 15년을 맞은 1993년에 이탈리아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기획한 인터뷰 질문지에 교황이 직접 답변을 단 원고 형태로 나온 <희망의 문턱을 넘어>는 여러 나라말로 번역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35개 주제를 담고 있는데, 가톨릭 신앙에 대한 전통적인 질문뿐만 아니라, 세계의 주요 종교, 공산주의 몰락, 인권, 여성 등에 대한 주제를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여기서 교황이 바티칸 II의 정신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내용, 즉 이전 가톨릭의 경직성과 대비되는 내용 몇 가지를 추려 보자.

1) "가톨릭교회는 이들 종교(세계의 거대 종교들 - 필자 주)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을 아무 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과 행동의 양식뿐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거짓 없는 존경심으로 대한다. (중략)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를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라는 것 (중략) 을 반드시 선포해야 한다."(바티칸 II, <비그리스도인 선언 2항>). 저는 여러 차례 이것을 확신한 적이 있습니다. 동양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특별히 역사적인 아시시 모임에서 각 종교들의 대표자들을 만나는 동안 말입니다. (중략)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토록 다양한 종교들을 낳게 하였다는 사실에 놀라기보다는, 그들 다양한 종교 안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공통점들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5장 '왜 그리 종교가 많은가?')17)

2) 남녀를 막론하고 젊은이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거저 주는 선물'이 될 때라야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는 점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모든 성소의 원천이 있습니다. 사제직이나 수도 생활뿐 아니라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도 성소입니다. 결혼 역시 하나의 소명이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19장 '젊은이에게 희망은 있는가?')18)

3) 상호 존중은 진정한 '일치 운동'의 전제 조건입니다. 저는 조국에서의 경험을 회상하면서, 폴란드를 다양한 신앙과 다양한 민족들에 대한 관용을 허용하는 사회로 만든 역사적인 사건들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서구의 역사에서 이교도를 화형에 처했던 그 시절에, 야기엘론 왕조의 마지막 왕은 이런 말을 통해 폴란드의 관용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나는 너의 양심까지 지배하는 왕은 아니다." (23장 '왜 분열되었는가?')19)

4)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런 점에서 그 이전의 공의회들과는 다릅니다. 아주 독특한 형식 때문이지요. 이 공의회는 방어 형태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 공의회에서는 파문(anathema sit)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등장시키지 않았습니다. 이 공의회는 교황 바오로 6세께서 '구원의 대화'라고 표현하신 대로, 대화를 널리 개방하는 것이 특징인 보편적인 회의였습니다. (중략) 진리는 가둬 둘 수 없습니다. 진리는 한 사람을 위함과 동시에 모두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중략) 이것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형식이었으며, 공의회 개최의 정신이었습니다. (25장 '구원의 대화')20)

요한 바오로 2세의 이런 발언들을 보면, 그는 바티칸 II의 개혁과 개방 정신의 충실한 옹호자이자 실천자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티칸 II를 더 깊은 개혁을 요구하는 시발점으로 보았던 이들은 요한 바오로 2세의 보수성을 비판한다. 예컨대, 가톨릭 내 진보적 노동 및 사회운동을 대변하는 조직으로 널리 알려진 <가톨릭일꾼>(Catholic Worker)21)의 한국어판 신문 발행 및 편집 책임을 맡고 있는 한상봉은 요한 바오로 2세를 "진보 신학을 거절한 반개혁적 인민주의자"로 평가한다. 즉, 그는 대중과 소통하고 전 세대를 만나 대화하고 널리 마음을 연 따뜻하고 친절한 인물이자, 교회 내 진보 세력에게 어느 정도 바람막이가 되어 준 '인민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사제와 수녀의 정치 개입을 반대하고, 주교에게 순명하라고 요구하며, 사회와 가난에 대한 관심은 좋지만 행동주의에 빠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한 '반개혁적' 인사였다며, 그의 이중성을 비판한다.

특히 라틴아메리카가 처한 현실에서 파생된 해방신학과 기초 공동체는 교황청의 사찰 대상이었다. 1970년대 해방신학의 아버지 구스타보 구티에레스를 이어, 1980년대 브라질에서 이 신학을 대변한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는 1984년에 교황청의 심문을 받았고, 유럽에서 이론적으로 이들을 지지한 한스 큉(Hans Küng)과 에드바르트 스힐레베익스(Edward Schillebeeckx), 요한 밥티스트 메츠(Johann Baptist Metz), 카를 라너(Karl Rahner) 등도 당시 교황청 신앙교리성장관으로 있던 요제프 라칭어 추기경(이후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교수직을 상실하거나 처벌받았다. 물론 라칭어 추기경이 요한 바오로 2세보다 더 보수적인 교리주의자라는 면이 이런 징계에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조치가 교황의 허용치 내에서 가능했다는 점에서, 가톨릭교회의 전통 개인 윤리(낙태, 콘돔 사용 및 인공피임 반대), 신학, 교리에 대한 요한 바오로 2세의 보수성도 분명했다. 특히 사회참여와 인권 운동이 공산주의에 대한 투쟁과 동일시되었던 동유럽 출신이었기에, 그로서는 라틴아메리카 등지에서 기독교인의 사회참여의 적극성이 결국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옹호 혹은 수용과 연결되는 상황을 우려했을 것이다.22)

사진 출처 플리커
사진 출처 플리커
3. '한국천주교'

요한 바오로 2세는 문자 그대로 '전 세계'의 교황이었다. 따라서 한국과도 관련이 깊었다. 한국을 찾은 첫 교황으로, 1984년과 1989년 두 차례 방문했다. 1984년은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과 천주교 서울대교구 설정(1831.9.9.) 150주년이 되는 해였다. 당시 방문해서 조선 말기 순교한 이들 중 103위를 순교복자로 시성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대내외적으로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교황 방한을 적극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대중의 구명을 위해 친서를 보낼 정도로 한국 상황을 알고 있던 교황청23)이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지지로 보일 것을 우려하여 이를 보류하자, 한국 정부는 1983년 12월에 대학 내 전투경찰 철수, 학내 데모로 제적된 학생 복교 허용, 해직 교수 복직, 정치범 석방, 민주 인사 활동 금지 해제 등의 유화 조치를 취했다. 이런 일련의 조정으로 1984년 교황의 첫 한국 방문이 이루어졌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도착 직후 공항에서 "순교자의 땅, 순교자의 땅"이라 말하며 한국 땅에 입을 맞추는 친구親口 의식을 행했고, 도착 첫 성명에서 <논어>의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불역낙호不亦樂乎'를 인용했다. 한국어로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말로 인사한 후, 마무리에서도 한국어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그리고 한반도의 온 가족에, 평화와 우의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축복이 깃들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24)

교황의 첫 행선지는 5·18민주화운동의 상처가 남아 있는 광주였다. 미사 집전 장소가 무등경기장이었지만, 교황은 광주공항에서 경기장으로 바로 가지 않고, 5·18 운동 핵심 지역인 전라남도청과 금남로를 통과해서 경기장으로 갔다. 한국에서 가장 소외된 곳을 방문하고 싶다는 교황의 뜻에 따라, 소록도로 간 교황은 한센병 환자들 머리에 하나씩 손을 얹고 축복을 베풀었다. 40만 명 정도 모인 것으로 추정되는 부산 강연에서는 노동자들의 정당한 임금 문제를 언급했고,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청년들과 가진 대화 자리에서는 최루탄 상자를 선물로 받았는데, 이는 독재정권의 폭압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응답이었다. 서울 여의도광장에서는 김대건과 정하상을 포함하여, 한국 순교복자 103위 시성식을 거행했는데, 시성식을 바티칸의 성베드로대성당이 아니라, 순교자가 발생한 현지에서 거행한 역사상 첫 번째 사례였다. 이 방문은 세계 역사를 비교해도 단기간 박해의 강도가 최고 수준이었던 아픔의 역사를 지닌 한국 천주교인에게 큰 위로를 주었다. 그뿐 아니라, 독재 정권의 폭압에 신음하나 저항을 멈추지 않은 한국민의 실상을 세계와 가톨릭교회가 어느 정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25)

1989년의 2차 방문은 당시 서울에서 열린 제2차 성체대회에 참석하며 이루어진 일정이었다. 10월 8일에 65만 명이 운집한 여의도광장 성체대회 미사에서 그는 남북 화해를 촉구하는 평화 메시지를 전했다. 직접 한국을 찾은 것은 두 차례였지만, 조국 폴란드와 유사한 슬픔의 역사를 겪었다는 공감대 때문인지 2005년에 사망하기 전까지 몇 차례 한국에 메시지를 보내고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예컨대,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 축하 메시지를 보냈고, 2002년 태풍 루사 피해,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같은 해 태풍 매미 피해 시에도 위로 메시지를 보냈다. 이전부터 관계를 유지한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3월에 바티칸을 방문해서 북한 방문을 권하자, 요한 바오로 2세도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평양에 대주교 파견, 수십만 달러 지원 등으로 물꼬를 트려 시도했다. 그러나 북한 정부가 북한 천주교 인정, 가톨릭 신부 입북을 거부하면서 최종적으로 무산되었다.26)

요한 바오로 2세는 1996년부터 파킨슨병, 만성 무릎관절염, 여러 합병증 등으로 10년 이상 시달리다 2005년에 선종했다. 2013년 7월 4일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를 공동 시성하기로 하고, 이듬해 2014년 4월 27일에 공동 시성식 미사를 거행했다.

교황 전용차에 탑승한 2004년 당시 요한 바오로 2세.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교황 전용차에 탑승한 2004년 당시 요한 바오로 2세.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1) 전통적으로 '교황敎皇'(라틴어: papa, 그리스어: πάπας, 영어: pope)이라 불리던 호칭이, 2013년 3월 21일에 명동성당에서 열린 프란치스코 교황 즉위 경축 미사 강론에서 강우일 주교회의 의장이 새 교황을 '교종敎宗'으로 지칭하면서 혼란이 생겼다. 강우일 주교는 겸손과 섬김의 사도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택한 이에게 임금이나 황제를 뜻하는 교황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취지로 이 호칭을 사용했다. 그러나 주교회의가 2000년에 펴낸 『천주교 용어집』에서 '교황'을 공식 용어로 채택했고, 강우일 주교의 강론 이후에도 여전히 교회 내외에서 교황이라는 호칭이 널리 쓰이므로, 여기서도 교황으로 사용한다. https://www.yna.co.kr/view/AKR20140716161500005.
2) 16세기 네덜란드인 교황 하드리아노 6세(재임 1522~1523)가 마지막 비이탈리아인이었다.
3) 초대 교황인 사도 베드로의 34년, 19세기 중반에 31년간 재임한 비오 9세(1846~1878)에 이어 세 번째로 길다.
4) 존 줄러어스 노리치, 『교황의 역사』,  남길영, 임지연, 유혜인 역 (서울: 바다출판사, 2014), 843.
5) 지안 프랑코 스비데르코스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 강우식 역 (서울: 가톨릭출판사, 2014), 99f.
6) 스비데르코스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 23, 38-40.
7) 스비데르코스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 45-66.
8) 스비데르코스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 67-79.
9) 스비데르코스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 80.
10) 스비데르코스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 246-272.
11) 스비데르코스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 269-277.
12) "기억할 오늘: 포즈난 봉기(6월28일)" 「한국일보」 (2017.6.28.).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706280468050964.
13) 스비데르코스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 284-301.
14) 스비데르코스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 302-306.
15) 호르스트 푸어만, 『교황의 역사: 베드로부터 베네딕토 16세까지』, 차용구 역 (서울: 2013), 258, 267.
16) 최종원, "아조르나멘토, 인간의 존엄과 사회의 공동선 : 제2차 바티칸공의회," 「복음과상황」 352 (2020.2.19.). http://gosc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826&fbclid=IwAR1j4znau22-3UCRZW0ag6F6pI6DLKLrmMnnuTFt-bqHpojs_-f4SSiyays.
17) 요한 바오로 2세, 『희망의 문턱을 넘어』, 박문수 역 (서울: 시공사, 1994), 95f.
18) 요한 바오로 2세, 『희망의 문턱을 넘어』, 135.
19) 요한 바오로 2세, 『희망의 문턱을 넘어』, 165f.
20) 요한 바오로 2세, 『희망의 문턱을 넘어』, 172f.
21) "가톨릭 일꾼 운동이란 무엇인가," 「가톨릭뉴스지금여기」 (2011.9.14.).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892.
22) 한상봉, "요한 바오로 2세, 진보 신학을 거절한 반개혁적 인민주의자," 「가톨릭일꾼」 (2019.1.21.). http://www.catholicworker.kr/news/articleView.html?idxno=2576; 푸어만, 『교황의 역사: 베드로부터 베네딕토 16세까지』, 277-281.
23) "죽음 앞둔 DJ 구한 '교황의 자비,'" 「경향신문」 (2009.5.1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5191754145&code=100203.
24) 김수환, "어둠을 밝히는 빛," in 스비데르코스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 307-316.
25) "[교황 서거] 시련의 한국 역사 폴란드와 닮아," 「동아일보」 (2005.4.3.).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050403/8175917/1.
26) "[교황 서거] 시련의 한국 역사 폴란드와 닮아," 「동아일보」 (20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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