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슨 만델라와 함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 기여하며 '남아공의 양심'이라고 불렸던 데즈먼드 투투 성공회 명예대주교가 2021년 12월 26일(현지 시간) 향년 90세로 별세했습니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차원에서 과거 이재근 교수가 기고한 글을 재공유합니다. - 편집자 주

20세기 세계 기독교는 다채롭고 화려하다. 저명한 예일대 교회사학자 케네스 스코트 라투레트(Kenneth Scott Latourette, 1884~1968)1)는 19세기를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라 칭했다. 라투레트는 이전과는 달리, 복음이 전 세계에 편만하게 퍼진 첫 위대한 세기라는 의미에서 19세기를 위대하다고 칭했지만, 실제로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19세기 말까지 아시아와 아프리카, 태평양 도서島嶼에는 아직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은 지역이 많았다. 기독교는 여전히 서양 중심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위대한 세기'는 전 세계 구석구석에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고, 실제로 하반기에는 그 무게중심이 서양이 아니라 비서양 지역이 되는 20세기다.2) 따라서 20세기 기독교는 문자 그대로 '세계' 기독교라 칭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화려하고 다채로웠다.

그러나 그 다채로움은 확장과 성장이라는 키워드로 과시되는 성공 스토리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20세기 기독교는 핍박, 차별, 전쟁, 압제, 학살이라는 암울한 단어들로 대표되는 비극과 실패의 역사이기도 했다. 초대교회 이래 2000년 역사를 오롯이 지닌 아르메니아 기독교는 1910년대 이래 터키와 소련의 압제하에 말살과 유배를 당해야 했다. 서양 선교사들의 희망이었던 중국과 북한의 기독교는 무신론적 공산 독재 정권의 등장과 함께 현장과 역사에서 근본적으로 뿌리 뽑혔다. 모든 서양 기독교인 중 가장 냉정하고 합리적이라고 인정받던 독일 기독교인은 유대인과 집시, 소수자를 대량 학살하는 나치 정권에 충성스럽게 부역한 이들로 변모했다. 세속화한 북부와 유럽을 대신하여 순전한 신앙을 보수한다는 자기 확신에 충실했던 미국 남부와 남아프리카의 기독교인은 인종차별을 성경과 문화와 법으로 정당화하면서, 20세기라는 시대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가장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기독교를 제도화했다.

남아프리카는 이런 백인 우월주의 아파르트헤이트 기독교와 이에 대한 흑인 대중 및 기독교인의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20세기 기독교 역사상 가장 어두우면서도, 다른 한편 가장 찬란한 역설적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 역사의 중심에 선 위대한 기독교 운동가이자 지도자 중 하나가 바로 데즈먼드 음필로 투투(Desmond Mpilo Tutu, 1931~2021)였다. 투투의 생애는 20세기 남아프리카 역사의 중심축이라 할 만한 '아파르트헤이트'와 절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므로, 우선 아파르트헤이트와 남아프리카 기독교와의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3)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 자선 단체 클린턴글로벌이니셔티브 2007년 행사 현장에서 발언하는 모습. 사진 출처 플리커
1.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약 300년의 역사를 가진 남아프리카 기독교의 지형도를 형성한 큰 물줄기는 크게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주로 네덜란드인 개척자들로 구성된 개혁교회가 300여 년 전에 정착하면서 형성한 아프리카너(Afrikaners) 기독교로, 칼뱅주의적이며, 보수적이고, 무엇보다도 아파르트헤이트로 대변되는 인종차별주의를 구현한 기독교였다. 둘째는 원주민 토착 흑인들이 네덜란드인 및 영국인으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자기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이 전수된 기독교를 토착화한 흑인 기독교다. 이들 흑인 기독교인 중에는 활동한 선교사가 이식한 유럽의 전통적인 기독교 교단에 속한 이들도 있고, 백인 선교사에게서 독립된 교파나 개교회로 현지인이 창설한 집단에 속한 이들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규모와 구성원 수는 비교적 작고 적지만, 흑인 기독교인에게 아프리카너 백인 기독교 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신학적·정치적 논리와 힘을 제공한 영국계 기독교, 특히 성공회가 있다.

남아프리카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백인 아프리카너가 사용하는 언어인 아프리칸스(Afrikaans) 단어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는 '분리된 상태'(separateness)를 뜻한다. 1948년에 아프리카너가 주도하는 남아프리카 국민당(National Party)이 도입한 이 사회체제는 백인우월주의 정치 및 종교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탄생했다. 이후 20여 년에 걸쳐 인종 분리 정책이 남아프리카 전역과 생활문화 전체로 확장 적용되었다. 이런 구별이 낳은 불평등과 차별이 심해지고, 이에 따른 저항도 강해지자, 반대급부로 정부도 무력과 법으로 저항을 강제 진압하는 강도가 세졌다. 따라서 아파르트헤이트와 인종차별, 압제, 독재 등은 이 정책이 시행되던 시기에나, 이것이 종결된 1994년 이후에나 거의 동의어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1948년에 사회를 이끌어 가는 새로운 엔진으로 도입되었다. 그럼에도, 실제로 아파르트헤이트는 약 300년 전에 백인이 이 지역에 도착한 이후 흑인의 땅과 노동력을 착취하는 과정에서 이미 내면화된 인종주의를 제도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네덜란드인이 남아프리카 지역에 1652년에 도착하면서 다른 아프리카 지역과는 구별되는 개신교 '개혁파/칼뱅주의'(Reformed/Calvinist) 문화를 이식했다. 이어서 영국인이 1805년에 케이프를 장악하면서 영어권 식민지들이 차례로 형성되었다. 이렇게 이질적인 두 유럽 식민지 문화가 약 150년 동안 남아프리카에 뿌리를 내리면서, 원래의 반투 흑인 문화와 어우러져, 독특한 내적 역동성과 긴장을 만들어 냈다.

19세기 초에 남아프리카에 온 영국인 식민지 당국은 당시 모국에서 불던 노예무역 금지와 노예해방 운동 열풍에 발맞추어 남아프리카 식민지 내에 노예해방을 비롯한 여러 개혁을 도입했다. 이를 피해 '농부'라는 의미의 네덜란드 '보어인'(Boers)은 내륙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도르트 신조를 따르는 칼뱅주의자로서, 이들은 자신들의 여정을 이집트를 떠나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라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했다. 따라서 영국은 이집트, 영국 왕은 파라오, 가나안 정착을 막는 여러 흑인 부족은 가나안 족속과 마찬가지로 진멸해야 하는 부족이었고, 그들의 땅은 취해야 할 약속의 땅이라 믿었다. 이 과정에서 개혁파 신학의 독특한 유산인 언약신학을 오용하여, 흑인 부족의 진멸과 땅 정복을 하늘이 부여한 거룩한 소명이자 언약의 성취로 정당화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했다.

이어서 보어인이 차지한 내지에서 다이아몬드와 금이 다량으로 발견되자, 이를 탐낸 영국과 보어인 간에 전쟁(보어전쟁, 1899~1902)이 터졌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대영제국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자, 네덜란드계 보어인은 경제와 정치 등 모든 영역에서 주변부로 밀려났다. 물론 이들의 패배 및 배제 상황은 당시 흑인이 처한 절대적 빈곤과 차별, 고난 등의 극단적 현실에 비하면 훨씬 온건하고 상대적인 주변부 경험이었다. 그러나 당시 막 번성하기 시작한 백인종 및 아프리카너 민족 정체성 이데올로기가 자라나기에 충분히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1930년대 대공황(Great Depression)으로 닥친 경제 위기도 문화 저항 및 정치권력 신학화라는 독특한 유산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 시기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 지도자 다수가 독일에서 유학생으로 공부했는데, 이때 이 중 다수가 독일 나치즘을 탄생하게 한 인종적 순수성과 신적 소명이라는 비전을 남아프리카식으로 내면화했다. 아프리칸스어는 구별된 언어로, 국민당은 네덜란드계 민족과 백인종의 정치적 대변자로, 기독교 민족주의는 이상화된 이데올로기로 부상했다.

남아프리카 개혁교회가 성경에서 아파르트헤이트와 인종 분리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처음으로 체계화한 시도는 185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을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해석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본문으로 보았다. 즉, 흩어짐을 면하고자 인류를 하나 되게 하려 했던 인간의 시도를 하나님은 벌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을 인종별로, 민족별로, 언어별로 흩으시기를 기뻐하셨으므로, 각 인종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창조질서라는 논리였다. 자신들을 유대인과 영적으로 동일시했으므로, 유대인이 이교도이자 다른 인종인 가나안 사람과 뒤섞이지 않고 순전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성경의 명령도 문자 그대로 보어인에게 적용되었다. 사탄의 유혹에 빠져 세상에 죄를 들어오게 한 여성(창 3:16)과 노아가 저주한 아들 함과 손자 가나안의 후손으로서의 흑인(창 9:18-27)이 '저주받았다'는 창세기의 '저주' 본문들도 아파르트헤이트를 정당화하는 데 자주 활용된 해석이었다.4)

아파르트헤이트 이전의 백인 개혁교회 안에 이미 인종 구별과 차별에 대한 의식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논리도 남아프리카 기독교의 다른 진영 안에 이미 존재했다. 성경, 아프리카 문화, 토착 아프리카인의 독립 지도력 등이 결합하여 20세기 초에 탄생한 아프리카 시원/독립/기원교회(African Initiated/Independent/Instituted Churches, AICs)에서 백인 우월주의에 대응하는 신학적·문화적 논리는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대개 직접적인 정치 활동이나 물리적 시위를 벌이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식민주의 및 뒤이은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는 문화 및 신앙 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했다.

이들 흑인 지도자들이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신학적·문화적 논리를 발전시키게 된 계기는 주로 영국인 선교사가 이끌던 교회와 미션스쿨에 다니며 배운 교육, 그리고 독서 및 유학 등을 통해 다양한 영국계 기독교의 사회참여 전통을 접한 것이었다. 1910년에 탄생한 첫 흑인 조직인 남아프리카연합(Union of South Africa)은 흑인이 국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금했지만,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1912년에 탄생한 (그리고 1994년부터 2018년 현재까지 남아프리카 여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가 대표적인 단체였다. 이 시기에 영어를 사용하는 교회 일부가 이들을 지지하고 함께 연대하면서, 이후 아파르트헤이트 이슈를 두고, 백인 개혁파 아프리카너교회 대(v.s.) 흑인 교회 및 백인 영어권 교회라는 구도가 명확해졌다.

1948년에 국민당 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인종차별 정책에 대한 흑인 및 영어권 교회의 저항은 미미했다. 아직 힘을 규합하지도 못했고, 합의된 해석이나 저항 방식에 대한 통일된 견해도 없었기 때문이다. 변화의 계기는 1960년에 찾아왔다. 경찰이 통행 제한에 저항하는 흑인 시위자 69명을 살해한 샤프빌 학살 사건(Sharpeville massacre)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전 세계가 남아프리카 아프리카너 정권의 잔혹성을 알게 되면서, 이후 국제 정치계와 종교계 등이 남아프리카 상황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세계교회협의회(WCC)가 그해 12월에 요하네스버그에서 소집한 코테슬로 회의(Cottesloe Consultation)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공식 반대 성명서가 채택되었다. 아프리카너 정권의 기반인 네덜란드개혁교회(DRC)가 성명서를 '신학적으로 너무 자유주의적'이라고 비난하는 등, 수구적 반응을 보이자 이 교단 중진 중 하나이자 대회 참석자였던 베이어스 노드(Beyers Naudé, 1915~2004)5)가 1963년에 크리스천인스티튜트(Christian Institute, CI)를 설립했다. CI는 인종 간 대화, 연구, 출판을 통해 화해를 촉진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세워졌다. DRC 교단이 이 기관과 교단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자, 결국 노드는 CI를 선택했고, 이로써 목사직도 면직당했다.6) 1977년까지 존속하다가 정부가 해체시킨 CI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기독교인의 두 저항 방식을 탄생하게 한 모체였다.

전 세계에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잔혹함을 알린 계기가 된 샤프빌 학살 사건. 사진 출처 플리커

아파르트헤이트가 철저하게 백인 아프리칸스 개혁교회의 세계관이 만들어 낸 체제였으므로, 기독교인 저항자들의 저항 방식 중 첫 번째는 이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신학'을 무기로 하여 싸우는 것이었다. 노드의 CI와 1968년에 창설된 남아프리카교회협의회(South African Council of Churches, SACC)가 공동으로 '남아프리카 국민에게 전하는 메시지 Message to the People of South Africa'라는 문건7)을 발표한 것이 의미 있는 첫 저항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기독교인 간에도 인종 화해와 연합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거짓 복음이며, 성경 및 십자가와 부활에서 증언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사역을 부인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이 성명서의 핵심 주장이었다. 이 첫 저항 방식은 1970년대에 카를 바르트, 디트리히 본회퍼 등 반나치 '바르멘 선언 Barmen Declaration'(1934)에 관여한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데즈먼드 투투, 알란 부삭, 존 드 그루시 등 저명한 남아프리카 신학자들이 펼친 활동과 저술8)로 확산되었다. 이어 1982년에 부삭이 지도력을 크게 발휘한 세계개혁교회연맹(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es, WARC)이 "아파르트헤이트는 죄이며, 이를 신학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이단"이라고 선언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남아프리카 네덜란드개혁교회가 WARC 회원 교단이었기에 이 선언은 치명적이었다. 1881년에 백인 네덜란드개혁교회에서 분리된 '유색인종'(Coloured) 교단인 네덜란드개혁선교교회(DRMC)는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며 화해와 연합, 정의를 외친 '벨하 신앙고백 Belhar Confession'(1982)9)을 1986년에 공식 채택했다.

CI에서 파생된 두 번째 궤적은 주로 '기독교 정치윤리학'의 발전을 따라 움직였다. 미국 흑인신학 및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과 유사한 남아프리카 흑인신학의 등장도 이 움직임의 일부였다. 이 운동의 절정은 1985년에 주로 요하네스버그 근교 소웨토 흑인 구역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던 흑인 신학자들이 탄생시킨 '카이로스 문서 Kairos Document'10)였다. 이 문서는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 막바지에 진보적 기독교인이 연대하여 아파르트헤이트 정치와 교회 및 경건 중심 신학에 저항하며,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화해와 평화의 문을 연 도구가 되었다.

1948년부터 1994년까지 이어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이런 식으로 남아프리카 모든 국민의 삶을 지배한 실재였다. 데즈먼드 투투는 이 체제가 힘을 발휘한 시기에는 이를 무너뜨리는 저항 운동 과정에서, 체제 붕괴 이후에는 화해와 공존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과정의 중심에 서서 지도력을 발휘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인이었다. 그러나 흑인 인권 투사, 성공회 사제, 노벨평화상 수상자, 진실과화해위원회 위원장으로서의 투투의 삶은 씨실과 날실이 교차되면서 촘촘하게 짜인 직물과도 같으므로, 각각을 따로 분리해서 다루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이제 시간 순서를 따라 투사에서 평화의 사도로 변해 가는 투투의 삶의 궤적을 충실히 따라가고자 한다.11)

1986년 요하네스버그 알렉산더타운십(흑인 집단 거주지)에서 거주민들에게 연설하는 투투. 사진 출처 미국공로아카데미
2. 투쟁, 대주교, 진실과 화해

아파르트헤이트 시기

'대주교'(Archbishop)라는 직함에서 유래한 '아치'(Arch)라는 애칭으로 남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알려진 데즈먼드 음필로 투투는 1931년 10월 7일에 웨스턴트란스발(Western Transvaal, 오늘날의 North West Province)에 속한 소읍 클레르크스도르프(Klerksdorp)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재커라이아(Zachariah)는 미션계 학교에서 교육받은 후 클레르크스도르프의 한 고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일했고, 어머니 알레사 마틀헤어(Aletha Matlhare)는 가정부였다. 이들 부부는 평생 네 자녀를 낳았는데, 딸 셋, 아들 하나였다. 이미 언급한 대로, 남아프리카 역사에서 이 시기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공식 시행된 1948년 이전이었으나, 그전부터 인종 분리와 차별은 편만했다.

투투가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벤터르스도르프(Ventersdorp)에 세워진 아프리카인, 인도인, 컬러드(Coloured, 유색인종 및 혼혈)를 위한 학교로 옮겨 갔는데, 투투 역시 아버지 학교 학생이 되었다. 백인을 제외한 모든 인종이 모인 학교였으므로, 투투가 처음으로 경험한 일종의 '무지개' 공동체였을 것이다. 누이 실비아의 인도로 전 가족이 이 시기에 아프리카감리교회(Af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 다녔다. 투투도 이때 세례를 받았다. 그러다 1943년에 전 가족이 성공회로 옮기면서, 이후 투투가 명성을 얻고 영향력을 떨치는 소속 교단이 결정되었다.

아프리카너 요하네스 펜터르(Johannes Venter)가 소유한 땅에 1866년에 도시로 건설된 펜터르스도르프는 극우 인종주의 백인 정치 단체가 활발히 활동하는 지역이었다. 후에 투투는 어린 시절에 자신이 경험한 인종차별과 흑인 전반이 당한 고통을 담담히 기술한다.

"우리는 요하네스버그 서쪽에 있는 조그만 동네 벤터스도르프에 살았는데, 나중에 그곳은 신나치주의 '아프리카너저항운동'(AWB)의 본부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흑인 거주지에 살던 나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신문을 사기 위해 백인 동네로 가곤 했다. 거기서 흑인 아이들이 백인 학교 쓰레기통을 뒤져 백인 학생들이 내버린 멀쩡한 사과와 샌드위치를 꺼내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백인 학생들은 정부에서 제공하는 무료 급식보다 엄마가 싸 준 점심 도시락을 더 좋아했다. 도시락을 싸 올 여유가 있는 백인 학생들에게만 무료 급식을 제공하는 상황은 인종차별이 낳은 왜곡된 현실의 일부였다. 정작 제대로 된 음식이 절대적으로 아쉽고 도시락을 싸 올 여유조차 없는 흑인 학생들은 학교에서 무료 급식을 받지 못했다. 그들의 부모들에게는 정치적인 영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로 하인으로서 일손이 필요할 때 외에는 자신들이 태어난 땅에서 보이지도 않는 존재였다. 어린 나도 그런 상황을 알아챌 수 있었지만, 그것이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길 줄 진작부터 알았다고 할 수는 없다."12)

이후 투투의 아버지는 요하네스버스 근교 웨스턴트란스발의 루데푸르트(Roodepoort)로 이동했다. 투투 가족은 판잣집에 살만큼 가난했기에, 어머니가 에젠젤레니시각장애인학교(Ezenzeleni School of the Blind)에서 일하며 생계에도 도움을 주어야 했다. 1943년에는 크루거르스도르프(Krugersdorp)의 흑인 정착지 문시빌(Munsieville)로 다시 이사해야 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세탁으로 생계를 꾸렸기에, 어린 투투가 백인 가정을 오가며 옷을 배달하곤 했다. 여분의 돈을 벌기 위해 먼 농장에 가서 오렌지를 산 후 동네에 와서 되팔거나, 기차역에서 땅콩을 팔고, 골프장 캐디로 일한 것도 가계에 보탬이 되기 위한 투투의 어린 시절 아르바이트 경험이었다.

1945년부터 투투는 소피아타운 근교 오래된 웨스턴원주민구역(Western Native Township)에서 공립학교인 웨스턴고등학교에 다녔다. 이 시기에 1년간 결핵으로 요양 생활을 했다. 이 무렵 잉글랜드성공회 트레버 허들스턴(Trevor Huddleston, 1913~1998) 신부와 만나게 된 투투는 신부의 책을 빌려 읽으며 깊은 우정을 쌓기 시작했다. 후에 투투는 허들스턴의 교구에서 복사(server)로 신부를 도왔다. 허들스턴 신부 이외에도 마크헤네 목사(Pastor Makhene), 투투를 성공회 신자로 이끈 세크가파네 신부(Father Sekgaphane), 펜터르스도르프의 아서 블랙솔 목사(Reverend Arthur Blaxall)와 목사 부인 등이 청소년 시절에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종교인이었다.

병으로 학사에 뒤처졌지만, 교장의 배려 덕에 대학입학시험반(Matriculation class)에 조기 합류한 투투는 1950년 말에 촛불 아래 공부하며 대학 입학시험을 통과했다. 의사가 되고 싶어서 비트바테르스란트의과대학(Witwatersrand Medical School)에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장학금을 받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아버지를 따라 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이로써 투투는 1951년에 프리토리아 외곽의 반투사범대학(Bantu Normal College)에 입학해서 1954년에 학위를 받은 후, 모교 크루거르스도르프의 마디파네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1955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대학(UNISA)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대학 공부를 할 수 있게 도운 인물 중에는 로버트 망갈리소 소부크웨(Robert Mangaliso Sobukwe)가 있었는데, 그는 1959년에 결성된 남아프리카 흑인 정치조직인 범아프리카니스트회의(Pan Africanist Congress, PAC)의 초대 의장이었다.

아버지가 가르친 학생 중 가장 뛰어났던 노말리조 레아 셴샤네(Nomalizo Leah Shenxane)가 투투의 아내가 되었는데, 결혼식은 1955년 7월 2일에 있었다. 결혼 후 투투는 아버지가 여전히 교장으로 일하고 있던 문시빌고등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파르트헤이트를 1948년에 제도화한 정부가 투투의 결혼 2년 전인 1953년 3월 31일에 반투교육법(Bantu Education Act)을 흑인 교육에 도입한 일이 있었다. 흑인이 초등학교 수준까지만 교육을 받도록 제한하는 법이었다. 투투는 이 노골적인 인종차별법 이후에도 3년간 더 중학교 수준을 담당하는 교사로 가르치다가, 정부의 흑인 교육 제한에 반대하며 교사직에서 사임했다. 아마도 이 행동이 투투가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한 첫 공식 사례일 것이다.

2014년 5월 7일 남아공 총선을 맞아 투표소를 찾은 아내 레아와 데즈먼드 투투. 사진 출처 데즈먼드·레아투투레거시재단

문시빌고등학교 재직 중에 투투는 성직자가 되는 일을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결국 요하네스버그 주교의 감독 아래서 사제 훈련을 받기로 했다. 1955년에 크루거르스도르프의 차부제(sub-Deacon)가 된 후, 1958년에는 부활공동체신부회(Fathers of the Community of the Resurrection)가 운영하는 로제튼빌(Rosettenville) 소재 세인트피터스신학대학(St Peter's Theological College)에 등록했다. 학업에 두각을 나타낸 투투는 우등상 두 개를 받으며 신학 학위를 취득했다. 1960년 12월에는 요하네스버그의 세인트메리대성당에서 부제(deacon)로 안수받고, 베노니(Benoni)의 세인트올번스교회(St Albans Church)에서 처음으로 보좌신부가 되었다. 1961년 말에 사제(priest)로 안수받은 후에는 토코자(Thokoza)에 새로 세워진 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까지 투투 부부는 세 자녀의 부모였다.

신학 공부를 더 할 계획을 세운 투투는 1962년 9월 14일에 잉글랜드로 유학을 떠났다. 런던 킹스칼리지(Kings College, London)와 세계교회협의회(WCC)가 투투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는데, 이 두 기관은 투투가 나중에 성공회 사제이자 주교로서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을 할 때도 정치적·심리적·물질적으로 그를 지원한 우군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아래서 질식할 것만 같은 삶을 살던 투투 가족에게 런던은 기운을 북돋는 생활 현장이었다. 다음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런던에서 투투 가족이 처음으로 아파르트헤이트와 통행법에서 해방된 자유를 경험한 사건은 일평생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이들에게 남긴 것 같다. 그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잉글랜드에도 인종차별은 있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에 노출되지는 않았다."13) 특히 그는 나라에 언론의자유가 있다는 사실, 특히 하이드파크 한구석에 '스피커스 코너'(Speakers' Corner)가 있어서 원하는 이는 누구든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다.14) 이 경험의 가치는 남아프리카로 돌아간 후 투투 가족이 겪은 완전히 대비되는 상황에 대한 기록을 읽으면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영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가족과 남아공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중략) 우리의 목적지는 이스턴케이프주의 앨리스였다. 나는 그곳의 연방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새집에 들일 가구를 사러 이스트런던으로 갔다. 점심시간이 되자,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이 없다는 걸 알고 있던 우리는 생선과 감자튀김을 사 들고 도로에 주차해 놓은 차 안에 앉았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파리의 멋진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근사한 프랑스 요리를 즐기던 우리였다. 그러나 조국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감당하기 힘든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이스트런던의 해변으로 소풍을 가곤 했는데, 해변의 흑인 전용 구역은 바위가 많고 가장 볼품없는 곳이었다. 거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소형 기차가 있는 놀이터가 있었다. 영국에서 태어난 막내가 '아빠, 그네 타고 싶어요'라고 했을 때,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힘없이 '안 된다, 아가야, 넌 가면 안 돼'라고 대답해야 했다. (중략) 그런 순간마다 나는 죽음을 경험했고, 내가 너무도 처참하고 수치스럽고 한없이 작게 느껴져서 아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내 아버지가 어린 아들 앞에서 느꼈을 수치심이 바로 이렇지 않았을까."15)

데즈먼드 투투가 보좌신부로 사역을 시작한 세인트올번스교회.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킹스칼리지를 우등을 졸업한 투투는 당시 대학 명예총장이던 모후(Queen Mother, 엘리자베스 II세의 어머니)에게서 학위를 받았다. 위 인용문에 등장하는 넷째 아이도 1963년에 태어났다. 잉글랜드에서는 심지어 백인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기까지 했다. 런던 골더스그린(Golders Green)의 한 교회였는데, 여기서 3년간 사역한 후 서리(Surrey)로 전출되었다. 스텁스 신부(Father Stubbs)의 권유로 투투는 대학원 과정에도 등록해서 이슬람 관련 연구에 집중했고, 논문상도 받았으며, 1966년에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남아프리카로 귀국한 투투는 이스턴케이프 앨리스(Alice) 소재 연방신학교(Federal Theological Seminary)에서 가르쳤다. 신학교 교수직 외에, 그는 포트헤어대학(University of Fort Hare) 성공회 교목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 시기 투투는 남아프리카 전역에서 가장 화려한 학력과 실력을 가진 흑인 성공회 성직자였다. 1968년에는 신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잡지에 이민 노동자 신학을 주제로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인종차별 문제로 교사직을 사임하는 기개를 보여 주었던 1956년 당시의 투투 이후, 이제 글로 정책에 저항하는 저항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앨리스에서는 이슬람과 구약에 대한 관심사를 조합하여 박사 공부를 시작했지만, 불행히도 마무리 짓지는 못했다. 동시에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신학교 학생들이 인종차별주의 교육에 반대하는 저항을 시작하자, 투투도 이 대의에 함께 투신했다. 1970년에 신학교 부학장이 된 투투가 미래에 이 학교 학장이 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러나 복잡한 심정으로 그는 레소토16)의 로마에 소재한 보츠와나·레소토·스와질랜드대학교 교수로 오라는 초청을 받아들였다. 이 시기에 '흑인신학'(Black Theology)이 남아프리카에 소개되자, 투투도 이를 열렬히 수용했다. 원래 미국에서 차별받는 흑인을 위한 민권운동을 주도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목사의 사상과 운동에서 기원한 흑인신학은 제임스 콘(James Cone, 1936~2018)을 비롯한 다음 세대 흑인 신학자들의 저술 작업을 통해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당시 전 세계에서 이 신학이 탄생한 미국 남부 상황과 가장 유사한 토양을 가진 남아프리카에서 이 신학이 가장 빠르게 수용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17)

개발도상국 신학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1960년에 창설된 신학교육기금(TEF)의 책임자대행 월터 카슨 박사(Dr. Walter Carson)가 1971년 8월에 투투에게 아프리카 부대표 최종 후보자 중 하나가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을 받은 투투 가족은 1972년 1월에 다시 잉글랜드로 가서 런던 남동부에 거처를 정하고, 교육기금의 국제책임자팀과 함께 사역했다. 약 6개월간 제3세계를 돌아다니며 활동했다. 동시에 브롬리 소재 세인트어거스틴교회의 명예보좌사제로 임명되어, 교회 사역도 지속했다. 이 시기에 서방에 거주하면서 대표적인 구제 및 구호 기금과 함께 일하며 얻은 경험과 네트워크는 투투가 이후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사로서 서방 정치 및 교계, 언론의 지원을 얻게 만든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974년에 요하네스버그 주교 레슬리 스트래들링(Leslie Stradling)이 은퇴하면서 후임자로 티모시 배빈(Timothy Bavin)이 주교로 선출되었다. 배빈이 투투에게 자기 대성당의 주임사제(dean)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자, 투투는 1975년에 다시 남아프리카로 돌아가서 요하네스버그의 첫 번째 흑인 성공회 대성당 주임사제이자 요하네스버그 세인스메리대성당 교구사제(rector)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담당한 백인 교구민 일부에게는 유감스럽게도, 그는 여기서 당시 정부에 급진적으로 맞서는 투사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두 사건이 중요한 사례였다. 먼저, 1976년 5월 6일에 그는 당시 수상 발타자르 요하네스 포르스터르(Balthazar Johannes Vorster)에게 공개편지를 써서, 아프리카너들이 어떻게 자유를 획득했는지 상기하고, 특히 통행법과 인종차별 등으로 흑인들이 자기 조국에서조차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상기시켰다. 3주 후 정부는 투투의 편지 동기가 정치적 선전, 선동이라 주장하는 답장을 투투에게 보냈다. 1976년 6월 16일에는 요하네스버그 근교 흑인 집단 거주지 소웨토(SOuth WEstern TOwnships의 줄임말) 출신 학생들이 수준 낮은 교육을 강요하는 정책과 교육 언어로 아프리칸스어(Afrikaans, 네덜란드어가 토착화한 남아프리카어로, 백인 아프리카너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정책에 저항하는 광범위한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가 전국으로 퍼지면서 사상자가 600명가량에 이르렀다. 경찰이 학생들을 학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투투는 학생 및 부모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학살 사태 이후 조직된 소웨토 학부모위기위원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 일 후 투투는 레소토 주교(Bishop of Lesotho)직을 제안받고, 1976년 7월 11일에 주교가 되었다. 이 시기에 자신을 계승해서 주교가 될 레소토 국민 필립 모쿠쿠(Philip Mokuku)를 준비시켰으며,18)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며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가 남아프리카 경찰에 잡혀 구금된 상태에서 살해당한 스티브 비코(Steve Biko)의 장례식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레소토 주교가 된 지 몇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남아프리카교회협의회(SACC) 총무가 되어 달라는 요청이 오자, 투투는 이를 수락하고 1978년 3월 1일에 총무가 되었다. 1981년에는 소웨토 올랜도웨스트의 세인트어거스틴교회 교구사제가 되었고, 1982년 초에는 레바논 베이루트 폭격을 멈춰 달라는 청원을 이스라엘 총리에게 올렸다. 동시에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에게도 편지를 써서, 이스라엘의 존재에 대해 더 현실주의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짐바브웨·레소토·스와질랜드 총리들, 보츠와나·모잠비크 대통령들에게도 각각 편지를 써서, 남아프리카 난민을 받아 준 것에 감사를 표하고, 이들을 남아프리카로 돌려보내지 말아 달라고도 요청했다.

이 모든 조치가 남아프리카 보수파 백인들, 또한 때로 주류 미디어의 비판과 분노를 자아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투투는 자신이 사제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에, 투쟁뿐 아니라 실제 생활환경 개선 노력에도 경주했다. SACC에 재직하는 중에는 유색인종 차별에 저항하기 위해 1955년 5월에 조직된 비폭력 백인 여성 조직인 블랙새쉬[Black Sash, 시위할 때마다 어깨에서 반대편 허리로 검은 띠(sash)를 둘렀기 때문에 붙은 이름] 회장인 쉬나 던컨(Sheena Duncan)에게 상담소(Advice Offices)를 열어 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남아프리카 사람들이 해외에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교육기회위원회(Education Opportunities Council)도 시작했다. 물론 이 와중에 계속해서 통행법과 흑인을 강제 이주시켜 홈랜드를 조성하고 거기에만 살게 하는 홈랜드법에 저항하는 운동도 지속했다. 웨스턴트란스발에 속한 작은 모고파(Mogopa) 마을 사람들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자기네 땅에서 쫓겨나서 1983년에 보푸타츠와나(Bophuthatswana) 홈랜드로 이주해야 했을 때, 투투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연락해서 철야 집회를 열었다.

1980년 8월 7일에 투투 주교, 교회 지도자 대표단, SACC는 보타(P. W. Botha) 총리 및 각료들과 만났다. 이 역사적 만남은 남아프리카 역사에서 정부 요원이 아닌 흑인 지도자가 백인 정부 지도자를 만나 대담한 첫 사례였다. 그러나 정부가 전혀 타협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 대담에는 아무런 열매가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내외적으로 흑인의 강력한 투쟁 의지를 보이고, 아파르트헤이트 정부의 편협함을 드러냈다는 점에서는 성과를 냈다고 할 수 있었다. 같은 해에 투투와 교회 지도자들은 요하네스버그에서 구금된 목사 존 손(John Thorne)의 석방을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집회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다수 성직자가 체포되었는데, 당시 투투도 하룻밤 구금되었다. 죽이거나 폭탄을 터뜨린다는 위협, 악소문 등이 퍼졌다. 이 경험은 투투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이 시기 투투는 정부에게 끊임없는 중상모략과 사찰을 당했는데, 정부의 돈을 받고 SACC를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며 투투의 영향력을 약화하려 한 크리스천리그(Christian League) 같은 조직도 여럿 있었다.

해외 순방은 투투가 아파르트헤이트의 해악을 설득력 있게 전 세계에 전파하는 수단이었다. 그러자 정부는 1980년에 투투의 여권을 회수해 버렸다. 해외여행이 금지되자, 투투에게 수여될 예정이던 여러 상19)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예컨대, 서독 보쿰대학(Ruhr-Universität Bochum)이 그에게 1962년 대학 설립 이래 처음으로 명예박사 학위 수여를 계획했으나, 여권 발행이 거부되면서 출국할 수 없었다. 국내외의 압력 속에 정부가 1981년 1월에 투투에게 여권을 다시 돌려주면서 SACC 일로 유럽과 미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고, 이어서 1983년에는 바티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만나서 청중 앞에서 남아프리카 상황을 함께 논의했다.

데즈먼드 투투는 저명한 상과 명예 학위를 120개 넘게 받았다. 2004년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찍은 사진. 투투는 이 대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정부는 1980년대 내내 투투를 핍박했다. SACC와 이를 이끈 투투는 해외에서 엄청난 자금을 받아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다며 정부로부터 부당한 비난을 받았다. 이 비난이 사실무근임을 밝히기 위해 투투는 SACC를 정식으로 재판에 회부하라고 요청했지만, 정부는 대신 엘로프조사위원회(Eloff Commission of Enquiry)를 만들어 SACC를 감찰했다. 결론적으로, 위원회는 SACC가 해외로부터 조종당하고 있다는 증거를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여권을 다시 회수한 후 18개월이 지난 1982년 9월에 투투는 제한이 많은 '여행 문서'를 발급받았다. 이 문서로 투투 부부는 미국으로 갈 수 있었지만, 당시 미국 부통령이던 조지 부시를 비롯한 많은 이가 투투의 여권 재발급을 위해 로비를 벌였다. 투투는 미국인에게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와 올리버 탐보(Oliver Tambo)를 소개했는데, 당시 미국인 대부분은 이들에 대해 몰랐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관여하는 많은 프로젝트에 필요한 기금도 모금했다. 이때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남아프리카 상황에 대해 보고하는 연설을 했다.

1983년에는 흑인 의식 집단들의 우산 역할을 담당하는 전국포럼(National Forum)과 범아프리카주의자회의(Pan Africanist Congress, PAC) 창설에 관여했다. 그해 8월에는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 단체들의 연대 모임인 연합민주주의전선(United Democratic Front, UDF)의 수호자(Patron)로 선출되었다. 아내 레아도 남편의 운동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는데, 레아는 남아프리카 가정 노동자의 노동환경 개선에 역점을 두는 운동을 펼쳤다. 같은 해에 레아 투투는 남아프리카가정노동자협회(South African Domestic Workers Association)를 창립했다.

1984년 10월 18일에 미국에 머무는 동안 투투는 남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적인 백인 소수자 지배를 종식하고, 해방 조직들의 금지 조치를 풀고,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려던 노력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아프리카 흑인들은 이 권위 있는 특별한 수상을 축하했지만, 정부는 투투의 업적을 치하하기는커녕 아예 침묵으로 일관했다. 대중은 열렬한 찬사를 보내기도 하고, 폄하하기도 하면서 혼재된 반응을 보였다. 이어서 11월에는 요하네스버그 주교로 선출되었다. 이 선출에 대한 반응 역시 다중적이었다. 그는 이 직임을 18개월 동안 역임하다가, 1985년에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케이프타운 주교가 되었다.

1984년에 또 한 차례 미국으로 간 투투와 알란 부삭은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을 만난 후 그를 남아프리카로 초대했다. 초청을 받아들인 케네디는 1985년에 남아프리카를 찾아 오렌지자유주 브랜드포트에서 위니 만델라를 만났다. 당시 위니 만델라는 이곳으로 추방당한 상태였다. 케네디는 서로 다른 인종 집단이 한 지역에 함께 거주할 수 없다고 규정한 1950년의 집단지역법(Group Areas Act)을 무시하고 투투 가족과 함께 하룻밤을 보냈다.

1985년에 정부는 36개 행정구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투투는 경찰장관에게 이 조치를 재고하라고 요청하고, 자신은 이를 무시할 것이라 말했다. 이어서 투투는 보타 총리에게 상황을 놓고 긴급 회담을 제안하는 전보를 쳤다. 보타는 이를 거부했다. 약 1년 후 투투와 보타가 만났지만, 열매는 없었다. 투투는 또한 개인적으로 남아프리카 정부를 지지한 영국 총리 마가렛 대처와도 회담을 가졌지만 별 소득 없이 끝났다. 후에 영국 외무부장관 제프리 하우가 남아프리카 방문 시 만나자고 제안하자, 투투는 이를 아예 거부했다.

1986년 9월 7일에 투투는 케이프타운 대주교로 안수를 받으며, 남아프리카 전역 성공회를 이끄는 첫 흑인 수장이 되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축하를 받았지만, 이를 비난하는 이들도 여전히 있었다. 굿우드경기장(Goodwood Stadium)에 만 명이 넘은 사람이 모여 성찬에 참여하며 그의 영예를 기렸다. 추방당해 해외에 있던 ANC 의장 올리버 탐보 및 45인 지도자도 투투에게 축전을 보냈다.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한 가장 강력한 투사인 투투가 남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영예와 영향력을 가진 성직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핍박받는 한 유색인종 개인으로서 역사상 최악의 독재 정권에 버티며 저항한 투투의 의지와 역량이 얼마나 비범했는지를 보여 준 사건이었다. 동시에, 한 국가나 제도가 억압과 차별로 정의를 무너뜨릴 때, 세계 교회가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 이 악행에 저항하는 개인과 단체를 지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보여 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투투의 성공회 대주교 임명 이후, 1990년 2월에 남아프리카 저항 영웅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1918~2013)가 27년 만에 감옥에서 해방되고, 1991년에 아파르트헤이트 근간법이 폐지되었다. 1993년 인종 평등의 원칙에 기초하여 공동 통치를 결정한 헌법 채택, 1994년 만델라의 첫 흑인 대통령 선출로 300년 이상 지속된 백인 소수 지배가 막을 내렸다.

넬슨 만델라(가운데)는 로벤섬 감옥에서 석방된 후 1990년 2월 21일 데즈먼드 투투(왼쪽)를 찾았다. 사진 출처 미국공로아카데미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백인 소수파 통치의 종결을 상징한 1994년의 첫 민주주의 선거가 치러져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고 1년 후, 투투는 과거 역사의 잔악 행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조직된 진실과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TRC, 1995.12.~1998.10.)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투투가 TRC를 이끌며 만든 원칙과 실행 방식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찬탄을 자아냈다. 이는 아파르트헤이트 관련 백인을 일방적으로 가해자와 죄인으로 규정하여 심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들이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죄를 자백하게 한 후 사면을 허용하는 것으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평화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TRC가 해체되고 난 후 주로 이 활동을 회고하며 쓴 <용서 없이 미래 없다>에는 투투가 TRC를 운영한 원칙20)이 여러 곳에 등장한다. 의장 투투가 심판자인 법관이 아니라 목회자인 사제였기에 가능했을 원칙이었다.

"우리에겐 아파르트헤이트로 온갖 악행을 저지른 백인들의 피를 요구할 권리가 있었을 것이다. (중략) 그러나 우리나라는 또한 생존자들의 멋진 나라이며, 대단한 용서의 힘과 아량과 고상한 정신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참으로 훌륭한 사람들의 나라라고 선언해야 마땅하다. 이것은 위원회가 활동한 근 2년에 걸쳐 피해자들과 생존자들의 사연을 통해 확인한 놀라운 사실이기도 하다. 나는 아파르트헤이트 지지자들조차도 그들이 그토록 열렬하게 지지하고 집행했던 사악한 체제의 희생자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윤리적 가치판단이 부질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근본 개념인 '우분투'에서 흘러나온 판단이다. 우리의 인간성을 서로 연결되어 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의 인간성은 좋든 싫든 피해자들의 인간성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을 비인격적으로 대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해와 고통을 가하는 과정에서, 가해자도 어쩔 수 없이 인간성을 침해당하게 된다."21)

투투는 이런 TRC의 방식을 뉘른베르크 패러다임(범죄한 모든 사람을 개별 재판하여 가혹한 단죄를 받게 했던 2차 대전 전범 재판 방식)과 일괄 사면 혹은 국민적 망각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은 '제3의 길'이라 지칭했다. 물론 이 방식은 백인과 흑인 양자에게서 비난을 받으며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중용을 택했음에도, 백인에게는 너무 급진적인 마녀사냥이라고, 흑인에게는 너무 온건하다고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TRC는 만델라의 전 부인 위니 만델라도 살인 교사 혐의로 소환하는 등 흑인 인사의 범죄행위도 최대한 공정하게 처리하려고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조사 대상자 7112명 중 5392명이 처벌을 받았고, 849명이 사면받았다. 1998년 10월 위원회는 3500쪽에 이르는 보고서를 발표하고, 그 활동을 마쳤는데, 전 세계적으로 범죄적 과거에 대해 공정한 청산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22)

TRC 활동 이후에도, 투투 '은퇴' 대주교 부부는 전 세계를 무대로 인권 및 복지, 구호 활동을 지속했다. 그 중심에는 1998년에 세워진 데즈먼드투투평화센터(Desmond Tutu Peace Centre, DTPC)가 있다. 2004년 이후 런던 킹스칼리지 방문교수, 미국 에모리대학 방문교수 등 여러 대학의 방문교수를 지냈고, 데즈먼드투투에이즈재단(Desmond Tutu HIV Foundation)을 설립하여 에이즈뿐만 아니라 결핵의 예방·치료·교육도 담당하는 기관으로 확장되었다.

2007년에는 남아프리카 전직 대통령 넬슨 만델라, 미국 전직 대통령 지미 카터, 은퇴한 UN 사무총장 코피 아난, 아일랜드 전직 대통령 메리 로빈슨과 함께 '디엘더스'(The Elders)를 창설했는데, 이는 관습적인 외교 절차 바깥에서 세계의 원로 지도자들의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결성된 사적 조직이었다. 투투가 이 그룹의 첫 의장이 되었다. 모임 결성 후 카터와 투투는 함께 수단의 다르푸르, 팔레스타인 가자, 키프로스를 찾아 오래도록 지속된 갈등을 중재하려고 노력했다. 투투가 이미 성취한 평화 및 더 이루려 한 평화의 노력을 미국 정부도 인정하여,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09년에 최고 영예의 대통령자유의메달(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여했다.

2012년 디엘더스 모임에 참석한 메리 로빈슨 전 아일랜드 대통령(왼쪽부터), 윌리엄 헤이그 전 영국 외무장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공인 투투의 공식 은퇴일은 2010년 10월 7일이었다. 웨스턴케이프대학 명예총장직, UN 대학살방지위원회 고문직도 모두 내려놓았다. 그러나 은퇴 후에도 디엘더스와 노벨상 수상자 모임에 계속 참여했고, 투투평화센터도 지원했다.

80세 생일로 진입하던 주간에 투투는 다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중국 지배에 반대하는 소요를 일으킨 후 1959년부터 망명 생활을 하던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자신의 80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케이프타운에서 시작된 3일간의 데즈먼드 투투 국제 평화 강연 강사로 초청한 것이다. 남아프리카 정부는 달라이 라마에게 비자를 발급하는 문제로 고심했는데, 중국과의 연대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주저하는 정부를 종교와 정치계 여러 지도자들이 비판했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던 투투도 여당 아프리카민족회의와 제이콥 주마 대통령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달라이 라마의 남아프리카 입국 비자는 이미 2009년에도 한 차례 거부된 적이 있었다. 결국 달라이 라마는 남아프리카에 가지 못했지만, 이후 두 사람은 함께 책을 써내며 우정을 과시했다.23)

2008년 4월 15일,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열린 청소년 대상 컨퍼런스에서 이야기하면서 웃고 있는 데즈먼드 투투(오른쪽 끝)와 14대 달라이 라마(오른쪽에서 두 번째). 사진 출처 플리커

남아프리카에 사는 다양한 종족과 인종 안에 존재하는 차이의 아름다움을 묘사할 때 흔히 사용되는 유명한 '무지개 국가'(Rainbow Nation)라는 표현을 창안한 인물이 바로 데즈먼드 투투였다. 아래에서 볼 수 있듯, 이 용어는 남아프리카 흑인의 오랜 유산 '우분투' 정신을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새 남아프리카에 확장 적용한 것이었다.

"'우분투'는 서구 언어로 번역하기가 무척 어렵다. 이것은 인간됨의 본질을 뜻한다. (중략) 관대하고 호의를 베풀며 친절하고 다정하고 남을 보살필 줄 알고 자비롭다는 뜻이다.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내 인간성은 당신의 인간성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삶은 여러 사람과 한데 묶여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사람이 된다'는 말도 같은 뜻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다. '나는 속하고 참여하고 나누기 때문에 인간이다'라고 해야 마땅하다. 우분투가 있는 사람은 열려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고,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인격과 능력이 탁월한 사람 앞에서도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더 큰 전체에 속한 존재임을 아는 그에게는 온당한 자기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욕을 받거나 위축되거나, 고문이나 압제를 당하거나, 실제보다 못한 취급을 당할 때 그 자기 확신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조화·친절함·공동체는 모두 가치 있는 선이지만, 사회적 조화는 우리에게 숨뭄 보눔(summum bonum), 즉 최고선이다."24)

1) 라투레트의 기독교 역사관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보라. 이재근, 『중국 기독교 선교 역사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in China』에 나타난 케네스 스코트 라투레트의 기독교 선교관 및 역사관: '예수의 영향력 확장'으로서의 중국 선교 역사, 「한국교회사학회지」 41 (2015.9): 97-136.
2) 에든버러대학 세계기독교연구소장 브라이언 스탠리의 지적이다. http://www.cswc.div.ed.ac.uk/2014/09/10-historical-myths-about-world-christianity/.
3) 아래 몇 단락에 정리한 아파르트헤이트와 남아프리카 기독교와의 관계는 주로 Steve de Gruchy, "Apartheid," in William A. Dyrness and Veli-Matti Kärkkäinen, eds. Global Dictionary of Theology: A Resource for the Worldwide Church (Downers Grove, IL: IVP Academic, 2008), 52-55에서 발췌 및 요약했다.
4) 남아프리카에서 아파르트헤이트를 정당화하는 데 성경이 활용된 사례들을 분석한 논문으로는 다음을 보라. Elelwani B. Farisani, "Interpreting the Bible in the Context of Apartheid and Beyond: An African perspective," Studia Historiae Ecclesiasticae 40:2 (Dec. 2014): 207-225. 온라인으로도 읽을 수 있다. http://www.scielo.org.za/scielo.php?script=sci_arttext&pid=S1017-04992014000300014.
5) 전체 이름(full name)이 Christiaan Frederick Beyers Naudé인 노드는 1718년에 케이프 지역에 이민한 프랑스 위그노 가문의 후손이었다. 초기에 남아프리카로 이민하여 나중에 '아프리카너'로 불리게 되는 집단의 조상 대부분은 네덜란드계 개혁파 신자였지만, 프랑스계 위그노, 독일 및 중부 유럽 출신 이민자도 적지 않았다.
6) 노드에 대한 더 자세한 전기는 https://en.wikipedia.org/wiki/Beyers_Naud%C3%A9를 보라.
7) 전문은 다음 SAHO 페이지를 보라. https://www.sahistory.org.za/archive/a-message-to-the-people-of-south-africa-authorised-summary%2C-1968. 남아프리카역사온라인(South African History Online, SAHO)은 2001년에 구축된 이래로, 남아프리카 역사의 광범위한 주제와 인물에 대한 비평적이면서 비당파적인 글과 사료, 연구 자료를 전 세계 독자에게 제공하는데,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온라인 역사 웹 사이트다. https://www.sahistory.org.za/about-us.
8) 남아프리카의 주요 '저항적' 신학자들의 저술은 전 세계적으로 널리 읽혔지만, 한글로 번역된 저서는 많지 않다. 한글로 접할 수 있는 저서는 대표적이다. 데즈먼드 투투, 『용서 없이 미래 없다』, 홍종락 역 (서울: 홍성사, 2009); 알란 부삭, 『아프리카의 교회와 해방』, 김인주 역 (서울: 형성사, 1989); 존 W. 드 그루시, 『자유케 하는 개혁신학: 교회 일치적 논의를 위한 남아공 교회의 기여』, 이철호 역 (서울: 예영커뮤니케이션, 2008).
9) 벨하 신앙고백 한글 번역판은 다음을 보라. http://oga.pcusa.org/site_media/media/uploads/oga/pdf/belharconfession-korean.pdf. 이 고백서의 주 저자는 알란 부삭이다.
10) http://ujamaa.ukzn.ac.za/Libraries/manuals/The_Kairos_Documents.sflb.ashx. 카이로스 문서 초판, 개정판(1986), 이에 대한 반응으로 2009년까지 전 세계에서 등장한 여러 문서들을 모아 놓은 자료집이다.
11) 이하는 주로 SAHO에 실린 투투 전기에서 뼈대를 취한 후, 여러 다양한 자료로 살을 입혔다. https://www.sahistory.org.za/people/archbishop-emeritus-desmond-mpilo-tutu.
12) 투투, 『용서 없이 미래 없다』, 114f.
13) John Allen, Rabble-Rouser for Peace: The Authorised Biography of Desmond Tutu (London: Rider, 2016), 87.
14) Shirley Du Boulay, Tutu: Voice of the Voiceless (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88), 59.
15) 투투, 『용서 없이 미래 없다』, 124.
16) 레소토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둘러싸인 내륙 국가로, 1868년 영국 보호령이 되어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1966년 10월 영국식 입헌군주국으로 독립했다. 독립 후에도 지금까지 남아프리카에 경제, 문화적으로 종속되어 있는데, 같은 이유로 남아프리카 흑인 투투가 레소토 소재 대학으로 가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17) 남아프리카에서 흑인신학이 수용되고 오늘날까지 발전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다음 논문을 보라. Timothy van Aarde, "Black Theology in South Africa: A Theology of Human Dignity and Black Identity," HTS Theological Studies 72:1, 2016: 1-9. 전문을 온라인으로 읽을 수 있다. http://www.scielo.org.za/scielo.php?script=sci_arttext&pid=S0259-94222016000100033.
18) 투투는 1976년부터 1978년까지 레소토 주교였고, 필립 모쿠쿠가 투투를 이어 19년간 주교직을 맡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국토 전체를 둘러싸인 내륙국 레소토는 1966년에 영국에서 독립했다. 남아프리카 아프리카너 정권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와중에 많은 남아프리카 흑인 인권 운동가들이 레소토에서 피난처를 구했는데, 레소토가 안식처가 되는 과정에서 필립 모쿠쿠의 역할이 컸다. http://lesotho.tacosa.org/About%20Us/history-of-diocese.html.
19) 1978년부터 2017년까지 투투가 전 세계 국가, 대학, 재단, NGO 단체, 국제기관, 종교 단체 등으로부터 수상한 저명한 상과 명예 학위 등은 120개가 넘는다.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honours_for_Desmond_Tutu.
20) 한국 학자가 이 주제에 대해 연구한 가장 탁월한 결과물은 다음을 보라. 윤형철, "남아공 '진실과화해위원회(TRC)'를 통해 본 기독교적 정의와 화해 담론" 「성경과신학」 83 (2017.10): 83-117.
21) 투투, 『용서 없이 미래 없다』, 125f.
22) 두산백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진실화해위원회' 항목.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27359&cid=40942&categoryId=34513.
23) Dalai Lama, Desmond Tutu, and Douglas Carlton Abrams, The Book of Joy: Lasting Happiness in a Changing World (New York: Avery, 2016). 한글로도 번역되었다. 달라이 라마, 데즈먼드 음필로 투투, 더글러스 에이브람스 공저, 『JOY 기쁨의 발견: 달라이 라마와 투투 대주교의 마지막 깨달음』, 이민영, 장한라 역 (서울: 예담, 2017).
24) 투투, 『용서 없이 미래 없다』, 41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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