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을 사는 한국 기독교인에게 존 모트(John Raleigh Mott, 1865~1955)의 이름은 익숙지 않다. 선교 역사를 조금 공부했거나, 선교한국 같은 선교 관련 대회에서 강연을 들은 경우를 빼놓고는, 소수 신학생을 제외한 이들이 존 모트를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1950년대 이전, 즉 20세기 전반기를 산 기독교인에게는 아마도 기독교인 명사 중 가장 익숙한 이름, 가장 유명한 이름이 존 모트였을 가능성이 크다. 1945년 이후 기독교가 문자 그대로 세계화하기 이전 시기, 여전히 서유럽과 북미가 개신교 세계의 중심이었던 시절에, 서양뿐만 아니라, 서양 선교사들이 활동한 선교지를 포괄하는 신생 교회가 세워진 세계 전역에서 가장 널리 회자된 이름이 바로 존 모트였다.

존 모트가 살았던 1860~1950년대는 서양 개신교 선교 운동의 전성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18세기 초 독일 경건주의자들의 선교를 발화 시점으로, 잉글랜드인 윌리엄 캐리의 1792년 인도 선교에서 강력히 타오르기 시작한 개신교인의 세계 선교는 1860년대 이후 영미권 거의 모든 교회가 참여하는 '보편적' 운동이 된다. 이 운동은 세기 전환기의 여러 갈등 속에서 2차 세계대전과 냉전 체제의 시작 즈음에 약화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주류 교단 중심, 서양인 중심의 선교 운동에서, 독립 선교회나 전문인 선교 단체, 그리고 서양이 아닌 세계 전 지역이 동시다발적으로 참여하는 운동으로 전환된다. 1945년이 기독교 역사 전반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것처럼, 선교 운동 역시 기독교 세계라는 몸에 속한 한 지체인 만큼 공통의 운명을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존 모트는 이 점에서 20세기 전반 세계 기독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여러분, 존 모트가 죽을 때, 그를 전도자로 기억해 주세요"라고 1954년에 사람들 앞에 공적으로 등장한 마지막 자리에서 말했다.1) 그러나 그는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는 대규모 전도 집회를 이끈 전형적인 부흥사형 전도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성년이 된 이후 인생 대부분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선교사와 현지 기독교인의 필요를 채우고, 갈등을 조정하고, 함께 연합하고 동역하게 만들며, 사역과 목회에 원칙과 방향을 제시한 조정자·행정가·설계자·조언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이런 역할로 그는 서양인뿐만 아니라, 비서양 지역 현지 기독교 지도자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가장 많이 만나고 대화한 인물로 기억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모트는 기독교 선교계의 유명 인사였을 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평화와 화합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46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모트의 유산을 다음 네 가지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대표 △중재자 △세계인 △애한파.

1910년(왼쪽), 1946년 당시의 존 모트.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1. 대표
- SVM, YMCA, WSCF, Edinburgh 1910, IMC

모트만큼 '대표'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인물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는 SVM, YMCA, WSCF, Edinburgh 1910, IMC 같은 다양한 조직의 대표로 활동했다. 그가 이런 '대표적' 인물로 성장하게 된 계기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성장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트는 미국 뉴욕주 남부 설리반카운티에서 1865년 5월 25일에 태어났다. 사남매 중 셋째로, 외아들이었다. 모트가 태어난 얼마 후 가족은 중서부 아이오와주로 이사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기의 미국 선교 헌신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중서부 비옥한 토양의 신앙적 영양분을 흡수할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부모는 그 시기 미국에서 가장 뜨거운 교파 중 하나인 감리교에 속한 신실한 신자였다. 따라서 모트도 13세 무렵에 처음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했다.

모트가 청년 및 선교 활동에 관여하게 된 계기는 코넬대학 전학이었다. 그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어퍼아이오와대학에서 1년간 공부한 후 뉴욕주 이타카의 코넬로 옮겼다. 여기서 대학기독인연합(University Christian Association) 회장직을 역임한 모트는 이 대학 YMCA를 미국에서 가장 크고 활발한 학생 YMCA 지부로 성장시키는 재능을 보여 주었다. 이것이 이후 탁월한 '대표'로서의 경력 첫 출발점이었다.

모트가 한 대학 학생 기독교 조직 대표를 넘어서서, '선교'와 '세계 기독교'라는 더 큰 바다로 뛰어들 수 있게 자극을 준 인물은 J. E. K. 스터드(J. E. K. Studd, 1858~1944)였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전 크리켓선수이자, 같은 크리켓 영웅이면서 선교사로 헌신한 '케임브리지 7인'의 일원으로 유명한 C. T. 스터드(C. T. Studd, 1860~1931)의 형 J. E. K. 스터드가 1886년에 코넬을 방문해 집회를 열었다. 이때 모트는 선교에 헌신하기로 결단했다.

이 결단 직후 7월에 모트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부흥사 D. L. 무디(D. L. Moody)가 매사추세츠주 마운트허먼에서 대학생을 대상으로 주최한 여름학교에 한 달간 참석했다. 여기서 모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 해외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단하고 서명한 "마운트허먼 100인"(Mount Hermon 100)의 일원이 되었다. 이 모임은 2년 후 1888년에 공식적으로 해외 선교를 위한 학생자원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 SVM)으로 발전했다.

이후 모트는 1920년에 사임할 때까지 SVM 조직 대표, 즉 이 운동의 의장으로 32년 동안 활약했다. SVM은 1945년까지 학생 총 2만 745명을 해외 선교에 동원하는데, 이는 실제로 1888년 이후 1920년대 말까지 해외 선교에 자원한 미국 개신교 선교사의 약 70%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였다. 같은 시기 한국에 온 선교사들도 70~80%가 다양한 SVM 유관 모임을 통해 한국에 자원했다.

SVM 간판으로 활약한 모트가 한 기관에서만 평생 봉사한 것은 아니다. 당시 해외 선교, 청년-학생 활동, 사회사업, 교회 간 협력 등의 대의는 서로 긴밀한 네트워크를 갖고 얽혀 있었다. SVM 대표로서 이른 시기에 재능을 과시한 모트는 다른 기관들과의 네트워크에서도 중심에 있었다. 1887년에 코넬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1년 임기로 북미 지역 전국 대학 YMCA를 순회하는 총무로 처음 임명되었다. 그가 이 임무를 너무 잘 감당하자, 계약은 1년 연장되었다. 결국 1890년에는 미국 YMCA 전체를 총괄하는 선임학생총무가 되었다. 11년 후 1901년에는 해외부의 부총무, 1915년부터 총무로 임명된 후, 1928년이 되어서야 모든 YMCA 직무를 내려놓았다. 무려 40년간을 미국 YMCA의 간판으로 활약한 것이다.

모트는 약 40년간의 YMCA 사역과 약 30년간의 SVM 사역을 연계했다. 이로써 SVM은 YMCA의 선교 분야를 책임지는 운동으로, YMCA는 SVM의 학생 및 도시 기반 본부 역할을 하면서 상호 영향력을 주고받았다. 이 두 활동과 겹치는 시기, 즉 1895년부터 1928년까지 33년간 모트는 미국 전역의 여러 기독 학생 운동을 연합하기 위해 1890년대에 설립된 세계기독학생회총연맹(World Student Christian Federation, WSCF)의 초대 총무와 의장으로도 일했다. 이렇게 그는 일평생 꿈꾸던 개신교 학생 운동의 연합에도 기여했다.

이런 학생-청년 및 선교 운동의 연합 정신은 모트가 원숙한 장년으로 성장하면 전성기에 접어든 20세기에는 더 구체화되었다. 1910년에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 선교 대회는 한 세기 이상 진행된 개신교 세계 선교 운동이 교파별, 국가별, 선교 지역별로 각개전투하면서 이전투구하던 양상을 버린 대회, 또한 협력과 대화의 정신하에 체계화하는 기반을 마련한 대회로 평가받는다. 따라서 1910년 이전까지 세계 선교 현장과 모국 교계 모두에 끼치는 포괄적인 영향력을 갖고 존경을 받는 인물이 이 대회를 준비하고, 진행하고, 대회 후 후속 조치까지 책임지는 대표가 되어야 했다. 이 역할의 적임자에는 이견이 없었다. 모트가 영국의 J. H. 올덤(J. H. Oldham, 1874~1969)과 함께 공동의장을 맡았다. 모트가 이 대회에 남긴 특별한 흔적은, 1900년에 열린 뉴욕 선교 대회가 대규모 대중 집회였던 것과는 달리, 당대 선교 운동이 당면한 문제를 과학적으로 연구해서 발표하는 전문가들의 모임으로 에든버러 대회의 색깔을 규정한 것이다.

1910년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 선교 대회.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1910년 에든버러 대회가 선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대회로 평가받는 이유는 본 대회가 그 자체로 기념비적인 성과를 올린 것이 가장 컸다. 그러나 이후 극동과 인도를 중심으로 에든버러 후속 위원회 지역별 대회들이 계속 열리고, 이 모임들이 각국 개신교 연합 조직 창립의 산파 역할을 하게 된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결국 후속 위원회가 각국에서 벌인 활동의 결과, 단회성으로 끝나고 마는 선교 대회가 아니라, 전 세계 선교를 총괄하고 협의하는 세계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가 1921년에 창립되었다. 이 협의회 의장 자리도 역시 모트의 몫으로, 1941년까지 이 직책을 수행했다.

이후 모트는 1928년에 예루살렘 선교 대회 의장, 1938년 인도 마드라스의 탐바람 세계선교협의회에서도 대회장으로 활약했다.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창립총회에서 모트는 명예회장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모트는 선교의 톡특한 위상을 강조하는 IMC가 WCC에 통합되면서 그 역할을 상실하지는 않을까 염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IMC는 모트 사후인 1961년 WCC에 통합되었다. 모트는 선교적 에큐메니컬 운동을 통해 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1946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다.2)

2. 중재자

모트는 교파·인종·국가·지리·성별을 초월해서 모두가 한 가족이자 형제·자매로 인정받는 '보편적'(ecumenical) 신앙 공동체를 청년 시절부터 꿈꾸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이상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상은 그 자신의 성장 배경과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감리교 집안 출신인 모트는 퀘이커 전도자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다. 대학에 가서는 초교파 YMCA 전도자를 통해 학생 복음화 운동에 눈떴고, 특정 교단 소속 없이 초교파로 부흥 집회를 이끌던 복음주의자 무디의 영향하에 선교에 헌신했다.

특히 그는 19세기 말 감리교에서 파생해서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성결 운동의 성화 사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당시 성결 운동은 교단 조직을 가진 운동이 아니었다. 기원은 웨슬리파였지만, 교파와 상관없이 형식주의와 타성에 젖은 기존 신자를 갱신하는 운동이었다. 따라서 아이오와 집에서 그가 자주 읽은 성결 운동 계통 정기간행물이 자주 강조한 "다양성 속의 일치"(unity in diversity)와 보편적 기독교회가 그의 이상이 되었다. 기도의 사람으로 알려진 모트가 가장 자주 읊조린 기도는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22)였다. 이런 사상적·신앙적 기반이 '선교'라는, 즉 일치와 연합이 아니고서는 성공과 당위성을 확보할 수 없는 실천 방식과 만나면서 강력한 에큐메니즘으로 발전했다.3)

전 세계 선교 운동의 설계자이자 대변인·대표·추진자·조직자·행정가·외교관·실무자·책임자였기에, 모트는 국가별·언어별·지역별·교파별 선교 현장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과 다툼을 조율하고 조정해야 했다. 따라서 에큐메니즘에 근거한 중재 및 중용 정신은 필수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전반기에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져 개신교 세계를 두 개로 쪼개 놓은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이 발생했다. 이 논쟁이 선교의 본질과 방법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에, 선교 지도자들도 이런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 북장로교의 로버트 스피어(Robert Speer)나 A. J. 브라운(A. J. Brown) 등과 마찬가지로, 그는 대체로 중용의 길을 택했다. 세상 모든 인류가 죄 사함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구원받아야 한다고 보고,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고 전통적이었다. 그러나 교회의 하나 됨을 지키라는 명령과 효율적인 선교 운동을 위해 신학적 견해가 다른 이들과도 협력해야 한다고 믿었다는 점에서는 관용적이고 포괄적이었다. 이 때문에, 중간 어딘가에 서 있는 사람이 늘 그렇듯, 양 진영으로부터 비난과 인정을 동시에 받았다.4) 이런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주제 외에도, 그는 정치사회적인 면에서도 평화를 지속적으로 구현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그의 평화 정신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19세기 중후반 이후 개신교 해외 선교 운동이 강력한 추진력을 확보했을 때, 이 세계 선교 운동을 이끈 주역은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영어권 선교사들이었다. 그러나 영국계 선교사보다 앞서 개신교 해외 선교의 선구자가 된 경건주의자를 비롯해, 독일계 선교사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 벌인 선교 사업의 규모와 열매도 상당했다. 특히 1910년 에든버러 선교 대회 이후, 국적을 초월해서 협력하는 국제 개신교 공동체 정신과 공감대가 더 견고해졌다.

그러나 전쟁이 이 모두를 망쳤다. 1914년부터 독일이 유럽에서 1차 대전을 일으켰다. 당시 독일 선교사들은 에든버러의 에큐메니컬 정신에 따라 아프리카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자신들의 선교 활동이 방해받지 않고 계속 진행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자신들이 식민지로 차지하고 있던 지역과 독일 식민지에서 활동하던 독일계 선교사들의 활동을 통제하고, 심지어 추방했다. 독일 지도자들과 영국 지도자들 사이에서 문서를 통한 날선 공방이 벌어졌다. 이때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타협하라며 둘 사이를 중재한 인물이 바로 존 모트였다.

1917년부터 미국도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했기에, 모트 또한 전쟁 책임이 독일에 있다는 연합군의 주장에 공감했다. 그러나 선교에서는 중재자 역할을 해야만 한다고 인식했고, 실제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모두 예상할 수 있듯이, 물론 이 중재는 실패했다. 이때의 상호 적대감은 2차 대전 시기까지 이어졌고, 그 결과 영미계 선교와 독일계 선교는 상당 기간 상호 적대감을 버리지 못했다.5)

3. 세계인

빌리 그레이엄이 등장하기 이전에, 지치지 않는 에너지로 전 세계 무대를 그토록 멀리, 다양하게, 자주 누빈 인물로 모트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YMCA 순회 전도자로 임명된 23세 때부터 세계 일주는 그의 운명이었다. 점점 이름을 떨치면서부터는,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및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남미 등 세계 전역으로 활동 무대를 넓혔다. 유럽을 두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자주 방문했고, 아시아를 일곱 번, 러시아를 다섯 번, 중동을 다섯 번, 아프리카를 세 번, 오스트레일리아를 두 번, 남미를 한 번 방문했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한 첫 해가 1946년이었으므로, 이전까지 그는 주로 배와 기차를 탔는데, 이들로만 총 170만 마일(약 273만 6000km, 지구 둘레를 4만km라 할 때, 지구 둘레를 약 70번 돈 거리)을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6)

선교지 현장, 즉 선교사들이 전한 복음을 통해 지역별로 뿌리내린 토착 교회와 그 현지 지도자들에 대한 모트의 애정은 남달랐던 것 같다. 이미 1895~1897년 첫 선교지 방문 여행부터 그의 이런 성향은 두드러졌다. 예컨대, 일본 YMCA 총무로 일했던 소이치 사이토(Soichi Saito)는 모트를 "세계 젊은이들의 아버지"라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7) 1911년 신해혁명 이후 공화국이 된 중국 상하이에서 1913년에 열린 중국 전국 기독인 대회의 대회장도 놀랍게도 존 모트였다. 당시 대회는 1910년 에든버러 대회 이후 세계 각지에서 열린 에든버러 후속 대회가 각 국가별 교회 연합 조직으로 편성되는 과정을 반영했다.8) 때마침 중국에 온 모트가 세계 개신교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중국 기독교인과 현장 선교사들에게 인식되었음을 의미했다. 아시아 선교 및 연합 기관의 형성 과정에서 남긴 모트의 흔적은 한국에도 뚜렷이 새겨졌다.

1933년 예루살렘의 YMCA 새 건물 앞에서. 존 모트(왼쪽).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4. 애한파愛韓派

모트는 한국에 다섯 차례 방문했다. 첫 방문은 1907년 1월로, 한국과 일본이 을사늑약을 체결한 지 2년차이자, 역사적 평양 대부흥이 막 시작된 무렵이었다. 당시 그는 왕실과 한국 기독교인의 엄청난 환대를 받았는데, 왕실 리셉션은 무려 3일간 진행되었다. 당시 그는 서울 YMCA가 배재학당에서 1901년에 설립된 후, 한국에서 활동한 세 명의 총무, 필립 질레트(Philip L. Gillett), 프랭크 브로크먼(Frank Brockman), 조지 그레그(George Gregg)의 지도하에 회원이 900명이나 될 정도로 성장한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또한 며칠간 두 차례 오후 모임에 참석한 인원이 2500명이나 되고, 그중 한 모임은 세 시간이나 이어진 것에 놀랐다.

모트는 이 기간 중에 존 워너메이커가 서울 YMCA 건물을 지으라고 4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사실도 알렸다. 이때 받은 인상이 너무도 강렬했던 모트는 비슷한 내용의 보고서를 여러 매체에 기고했다. 차후에 이 보고서 내용 중 전 세계 선교사와 학자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는 내용이 있었다. 바로, 한국 기독교가 이런 속도로 계속 성장한다면, 한국이 비기독교 세계에서 완전히 복음화한 첫 번째이자 유일한 기독교 국가가 되리라는 언급이었다.9)

모트의 두 번째 방문은 1913년에 이루어졌다. 당시 방문은 1912~1913년에 아시아 각국, 즉 인도·중국·만주·한국·일본에서 에든버러 1910년 대회의 후속 위원회 활동이 진행되도록 지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모트는 아내와 함께 1913년 3월 25일부터 29일까지 머물렀다. 당시 모트는 1907년에 방문했을 때보다 한국교회가 더 경직되고 긴장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판단했다. 1907년과는 달리, 한국이 일본의 공식 식민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인과의 공식 행사를 진행하기 전에, 먼저 외교 채널을 통해 일본 정부 관료들을 만나야 했다.

모트는 자신이 한국에 있는 동안 몇 가지 작은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고 기록하며, 특히 중요한 한국인 지도자의 상황도 기록으로 남겼다. 당시 한국 YMCA의 유능한 총무 중 하나인 이승만은 자금 모금차 미국을 방문하고 있었고, 1907년 방문 당시 통역자이자, 1910년 에든버러 대회의 유일한 한국인 참여자였던 윤치호는 정부 전복 음모 사건(105인 사건)으로 수감 중이었다. 후속 위원회 모임도 열렸지만, 더 인상적인 것은 모트가 당시 한국인을 대상으로 전도 집회를 열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집회를 위해 큰 천막이 세워졌는데, 건장한 한국인 3000명이 참석했다. 모트는 이 집회를 "살아 있는 내내 잊지 못할 장면"이라고 했다. 이후 그는 "사랑스런 한국인의 얼굴들"이 자기 마음의 눈에 늘 보인다고도 회고했다.10)

세 번째인 1922년 방문은 베이징에서 4월에 열릴 WSCF 집회를 주목적으로 가는 길에, 일본과 한국을 잠시 거치는 방문이었다. 따라서 별로 비중이 크지 않은 방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꽉 찬 사흘을 보냈다. 서울에서 이틀을 지내며 왕실 인사와 선교사, YMCA 활동가들을 만났고, 한국인을 대상으로 집회에서 연설했다. 이번 일정에는 평양 방문도 있었는데,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아마도 장대현교회)에서 남성을 대상으로 집회를 인도했고, 동행한 아내는 다른 교회에 모인 여성을 대상으로 집회를 인도했다.11)

1925년의 네 번째 방문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문헌이 당시 상황을 전한다. 첫 번째 방문이 YMCA, 두 번째 방문이 에든버러 후속 위원회, 세 번째 방문이 WSCF 관련 일정이었다면, 이번 방문은 1921년에 창설된 IMC 의장 자격으로 찾은 방문이었다. 물론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가 여러 기관에 발을 걸치고 있었기에, 이 방문 중에도 IMC 및 YMCA 관련 인사들과의 만남이 중첩되었다. 일본을 먼저 들른 모트는 서울로 가기 전에 부산에 들러 윤치호와 하루를 보냈다. 1913년 방문 당시 윤치호가 감옥에 있던 터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편히 만난 이들은 일본 점령하 한국의 정치 및 사회, 교회 상황을 놓고 교감을 나눴다. 이어서 서울로 이동한 모트는 3일을 보냈다. 이 일정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선교사와 한국인 기독교 지도자를 포함한 60여 명이 조선호텔에 모여 한국 기독교의 현실과 상황을 놓고 토론한 일, 그리고 1928년에 예루살렘에서 IMC 대회를 개최하는 것을 한국 지도자들에게 승인받은 일이었다.12)

모트의 방문에 대한 소식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의 신문이 간략히 전했고, 조선기독교봉역자회의의 분위기와 당시 논의된 사항은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알프레드 왓슨의 기고문, 영어판 및 한글판 공식 보고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13) 왓슨의 보고서에 따르면, 회의에서 상정된 질문을 쉽게 풀어 쓰면, "한국에서 당면한 문제들이 무엇이며, 이 문제들에 당면하여, 세계 기독교인들의 경험이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특이한 점은 대개의 회의와는 달리, 이 회의의 발언자 대부분이 한국인이었고, 선교사들은 주로 듣기만 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약 20개 주제가 등장했는데, 왓슨은 이 중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것으로 판단한 일곱 가지를 보고서에 요약해 실었다.

1. 한국인의 더 나은 생활환경: 최소한의 생존에 필요한 상황이 구비되지 않으니, 복음 전파가 어렵다.
2. 교회 젊은이들의 구원: 교회 운영 학교들이 살아남기 힘들고, 기독교 정신을 잃어 가며, 학생들이 반기독교 선전으로 정신적 혼돈에 빠져 있다.
3. 선교사와 한국인 지도자 간 더 나은 이해와 협력: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인과 더 친밀한 인격적 교감과 상호 의존을 유지했으나, 차세대 선교사들은 오래된 책으로만 한국을 배우니 이런 선입견 때문에 상호 소통이 힘들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사람이 되라는 바울의 본을 따라, 선교사는 더 한국화하여야 한다.
4. 더 폭넓은 교회 프로그램과 더 간명해진 교회 사역 방법론: 교회가 자기 생존에만 급급해서 사회를 구원하는 기관 역할을 못하므로, 조직은 가볍게 하고 방법론은 더 효율적이어야 한다.
5. 한국 내 기독교 조직들의 연합: 여러 서양 선교 조직의 자금과 행정을 대표 조직 하나로 통합하자.
6.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명료한 선언문: 선교사와 목회자가 제각각 기독교 본질을 다르게 주장하므로, 기독교를 적대하는 자들에게 분명한 답을 주기가 힘들다.
7. 명목상으로만 기독교인 지역이 참된 기독교에 덧붙여 씌운 악 제거: 반기독교 운동은 선교사나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 아니라, 군사주의·자본주의·제국주의를 향한 것이다.

당시 분위기에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는 사실은 왓슨의 보고서만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읽어 낼 수 있다. 그런데 영어와 한국어 보고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후문이 1970년대 한글 문헌에 등장한다. 이 문헌에 등장하는 에피소드의 원출처를 확인하기는 힘들지만, 아마도 왓슨이 정리한 3번 항목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당시 한국인 지도자 대표 중 하나이자, 장로교 최초 7인 목사 중 하나인 한석진韓錫晋(1868∼1939)이 "선교사들이 한곳에 오랫동안 체류하면 자기가 세운 교회며 학교라는 생각으로 우월감을 가지고 영도권을 행사하려고 하게 되니, 이것은 참된 복음 정신에 위배되며 교회 발전에 방해가 될 뿐이며, 조금도 도움이 안 됩니다"라며 선교사들을 비판했다. 이에 한석진에게 세례를 주고, 자신의 조사로 일하게 했던 30년 인연의 마펫이 일어나 항의했다. 그러자 한석진이 "마 목사! 당신도 속히 이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금후에는 유해무익한 존재가 됩니다. 마 목사는 처음부터 나와 함께 일한 친구요 동지로서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고 한다.14)

이 발언의 진위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192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인 지도자와 외국인 선교사 간 역학 관계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모트는 이 회의에 대한 더 내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모트는 이전부터 현장 선교사들에 비해, 현지인 지도자에게 지도권을 이양해야 하는 시기를 대체로 더 일찍 잡는 열린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15) 이 대회에서 한국인이 주장한 내용에 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모트의 마지막이자 다섯 번째 한국 방문은 1929년에 이루어졌다. 전년도에 IMC 예루살렘 대회가 열린 후, 대회 메시지를 각 지역에 전하기 위한 1928~1929년 8개월 순회 여행 일정의 일부였다. 당시 한국 방문은 총 닷새로 이전보다 길었는데, 이번 여행의 가장 중요한 수확은 1924년 9월에 조직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주최한 대회에 참석한 일이었다. 여섯 차례 이상 설교와 연설을 했고, 한국인·일본인·미국인 기독교인이 모인 작은 대화 모임을 만들어, 당면한 문제를 상호 조정하여 해결할 수 있게 도왔다.16)

1860년대에 태어나서 1950년대에 사망한 모트는 서양 개신교 선교 운동의 중흥기 및 전성기를 오롯이 살아 낸 인물이다. 이 시기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문자 그대로 '세계' 종교로 발돋움했다. 지리적으로 서양을 넘어 비서양 곳곳으로 기독교가 퍼져 나갔다. 물론 모트는 비서양 기독교가 인구와 영향력과 실제 활동에서도 '세계'의 주역이 되는 날을 생전에 목격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모트는 기독교의 세계화와 지역화의 다채롭고도 흥미진진한 만남과 통섭의 뿌리와 줄기를 만든 인물이었다.

개별 선교사와 지역 기독교인이라는 각각의 나무가 모여 세계 기독교라는 거대한 숲을 형성한다. 모트 역시 이 숲에 뿌리박고 자란 한 그루 나무였다. 그러나 이 나무는 키가 크고, 거대한 잎과 열매를 많이 맺으며, 근간이 되는 줄기와 뿌리로 숲 전체의 모든 나무를 연결하는 나무였다. 이렇게 이 나무는 숲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가족으로 만들었다. 모트는 20세기 전반기 세계 기독교 숲의 한복판에 서 있는 가장 큰 나무였다.

1) C. Howard Hopkins, John R. Mott 1865-1955: A Biography (Grand Rapids: Eerdmans, 1979), 701.
2) 이상의 내용은 C. Howard Hopkins, "John R. Mott, 1865-1955: Architect of World Mission and Unity," in Mission Legacies: Biographical Studies of Leaders of the Modern Missionary Movement, edited by Gerald H. Anderson, Robert T. Coote, Norman A. Horner, and James M. Phillips (Maryknoll, NY: Orbis, 1994), 79-84; 루스 터커, 『선교사 열전』, 오현미 역 (서울: 복있는사람, 2014), 511-517; Brian Stanley, "존 모트," in 『복음주의 인명사전』, 이재근, 송훈 역 (서울: CLC, 2018 출간 예정)에서 요약했다.
3) Hopkins, "John R. Mott," in Mission Legacies, 80-81.
4) 터커, 515f.
5) Brian Stanley, Christianity in the Twentieth Century: A World History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8), 14-15.
6) Stanley, "존 모트," in 『복음주의 인명사전』(출간 예정).
7) Hopkins, "John R. Mott," in Mission Legacies, 83.
8) Stanley, Christianity in the Twentieth Century, 141.
9) Hopkins, John R. Mott 1865-1955: A Biography, 307-309. 모트의 보고서는 The Korea Mission Field 4 (May 1908): 65; Annual Report of the Board of Missions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1908): 10; Addresses and Papers, Vol. II: 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 (New York: Association Press, 1946): 326f에 실렸다.
10) Hopkins, John R. Mott 1865-1955: A Biography, 400f. "Copy of a Letter from John R. Mott regarding his Visit to Japan and Korea" (May 2, 1913).
11) Hopkins, John R. Mott 1865-1955: A Biography, 606f.
12) Hopkins, John R. Mott 1865-1955: A Biography, 648f.
13) Alfred Wasson, "Observations on the Mott Conference, Seoul. Dec. 28-29, 1925" The Korea Mission Field (1926.2): 31f; Conference of Representative Christian Leaders of Korea, Seoul December 28-29, 1925; 『조선기독교봉역자의회』(1925).
14) 채필근, 『한국 기독교의 개척자 한석진과 그의 시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1), 229-231.
15) Stanley, Christianity in the Twentieth Century, 185.
16) Hopkins, John R. Mott 1865-1955: A Biography, 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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