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동방송(김장환 이사장)은 한국 크리스천들이 즐겨 듣는 라디오 방송입니다. 한국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와 라디오 미디어가 발전하던 시기가 맞물려, 극동방송 또한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라디오가 쇠퇴하는 현 시기에도 극동방송은 건재합니다.

무려 40여 년간 극동방송을 이끈 이사장 김장환 목사가 연로해질수록(올해 86세), 차기 이사장이 누가 될지 관심이 쏠립니다. 김장환 목사가 교회는 세습하지 않았지만, 극동방송은 세습할 수 있다는 어두운 전망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김장환 목사의 자녀들이 모두 극동방송과 연관된 곳에 이름을 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뉴스앤조이>는 극동방송의 현주소를 조명하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극동방송은 어떻게 초대형 방송사가 될 수 있었는지김장환 목사 자녀들은 어디에 포진해 있는지 살펴봤습니다. 또 김장환 목사와 보수 정치계와의 관계를 돌아보고, 저널리즘 관점에서 극동방송의 콘텐츠를 정리해 봤습니다.

한국교회 교인들의 헌금으로 성장한 극동방송. 과연 그만큼 공공성 있는 방송사일까요. -편집자 주

'정치 목사'로 불리는 김장환 목사는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들과 교류해 왔다. 2008년 제40회 국가조찬기도회에서 김장환 목사가 축도하고 있다. 사진 출처 청와대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한국교회 목회자 중 김장환 목사만큼 정치권과 가까운 인물은 없을 것이다. 김 목사의 인맥은 국회의원이나 장관뿐 아니라 역대 대통령들까지 닿았다. 때로는 미국 정치권과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한미 양국 가교 역할도 감당했다.

교회와 정치를 넘나드는 광폭廣幅 행보에, 일각에서는 '정치 목사'라는 비판을 넘어 'CIA'나 '프리메이슨' 아니냐는 의혹이 일 정도였다. 김장환 목사는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은 '전도의 사명'을 받아 활동할 뿐이라고 일축했다. 복음을 전하고 기도해 주기 위해 정치인을 만나지, 다른 의도나 목적이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김장환 목사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하우스보이로 지내던 중 우연한 기회를 얻어 미국에 건너갔다. 근본주의 성향 기독교 학교에서 공부했고, 1959년 침례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김 목사는 안수 직후 '복음 전도자'가 되기 위해 한국에 돌아왔다.

청소년 사역에 집중해 온 김 목사는 1966년 1월 수원중앙침례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12명밖에 안 되던 교회는 급성장했다. 웅변가 스타일의 설교에 미국에서 공부를 했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교회를 찾는 이가 많아졌다. 김 목사는 자신이 나온 밥존스대학교의 인맥을 활용, 해외 사역도 꾸준히 진행했다. 인지도를 쌓아 가던 김 목사는 1973년 3월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BGEA) 서울 대회 통역을 맡으면서 유명 인사가 됐다.

김장환 목사가 처음부터 정치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건 아니다. 귀국 이후 10년간 청소년 선교에 힘쓰던 김 목사는 일본에 있는 극동방송 송신소를 제주도로 이전하는 일에 깊이 관여했다. 밥존스대학교 동기의 부탁을 받은 김 목사는 통역을 하며 알게 된 공화당 윤치영 의장에게 송신소 이전을 부탁했고, 일은 그대로 처리됐다. 이 일을 계기로 김 목사는 미국 FEBC(Far East Broadcasting Company) 본사 로버트 보우만 총재와도 가까워졌다.

김장환 목사는 미국 집회에 갈 때마다 FEBC를 통해 상원의원·하원의원·주지사·장성 등과 교류했다. 대표적인 예로 지미 카터 대통령을 들 수 있다. 지미 카터는 조지아주 주지사 시절 김 목사를 알게 됐다. 두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을 전도하려 힘쓰기도 했다. 김 목사는 통역으로 친해진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통해 미국 정치권과의 단단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2012년 발간한 자서전 <섬기며 사는 기쁨>(나침반)에서, 김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에서 의회를 움직이려면 먼저 유권자를 움직여야 하고, 그 유권자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유명 목사를 움직여야 한다. 이런 메커니즘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36페이지)

"박정희 대통령, 다정다감한 분"
5·18 때 전두환 부탁받아 광주 실사 
노태우 "김 목사 생각하면 고통 사라져"
이명박 정권 때는 'MB 멘토'
박근혜 국정 농단 때 청와대서 조언

김장환 목사는 '보수'를 지향한다. 그가 교류하는 인사 대다수는 정치적으로 보수 인사다. 오랫동안 김 목사를 수행해 온 B 목사는 "BK(김장환 목사의 영어 이름 Billy Kim의 약자)는 보수 중에서도 극보수다. 공개 석상에서 보수 정당을 찍으라고 할 정도였다. 당연히 보수 성향 대통령과 사이가 좋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할 당시 김장환 목사는 수시로 미국을 찾았다. 미국 집회를 인도하던 당시만 해도 미국 안에는 반한 감정이 컸다. 미국의 원조를 받는 한국의 대통령이 종교를 탄압하고 인권을 유린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급기야 미국 정치권에서는 주한미군을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당시 김장환 목사는 정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그는 미국 지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들은 복음 증거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견 때문에 투옥되었다"며 유신 정권을 옹호했다. 만약 박정희 대통령이 목사들을 탄압했다면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 서울 대회도 개최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순수 복음을 전파할 때는 정권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한국 상황을 긍정적으로 홍보하고 다녔고, 박 대통령도 이 사실을 알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 목사를 청와대로 불러 감사 인사를 전했다. 김 목사는 박 대통령의 손을 잡고 기도해 줬다. 김 목사는 2000년 출판한 자서전 <그를 만나면 마음에 평안이 온다 下>(조선일보사)에서 "여러 가지 비판이 많지만 우리 국민을 잘살게 하겠다는 신념만큼은 강했던 분이다. 박 대통령을 무섭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직접 만났을 때 굉장히 다정다감하고 세밀한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썼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김장환 목사와 사이가 돈독했다. 2006년 5월 극동방송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전 전 대통령.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김장환 목사는 신군부와 인연이 깊었다. 특히 전두환 대통령과 사이가 각별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 대통령의 부탁을 받아 광주에 다녀오기도 했다. 당시 김 목사는 광주에서 목사·장로 80여 명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는 김 목사가 데려온 군목도 있었다. 사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참석자들은 그가 군인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군목은 광주 실상을 전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 대통령이 백담사에 머물 때도 찾아가 만났다. 김장환 목사의 자서전에는 전 대통령이 김 목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세히 나와 있다. 전 대통령은 "김 목사는 내가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히 인정과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라 그늘진 곳은 어디든 찾아가 빛을 비추고 어려움과 고통을 겪는 사람이면 누구든 다가가 도움을 주는 분"이라고 추어올렸다.

김장환 목사 역시 전두환 대통령을 높이 평가했다. 김 목사는 <섬기며 사는 기쁨>에서 "주변 사람들은 전두환 대통령을 말할 때 광주 항쟁과 비자금 문제를 거론하면서 가까이하지 말라고 말한다.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에 대해서 끝까지 비판하고 나쁘게 말하는 것도 편협한 일이다. 한 인간을 어떤 사건 때문에 끝까지 미워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다. 지나간 일에 대한 평가로 한 사람을 정죄하고 미워하는 것도 잘못이다. 광주 문제로 감옥에도 갔다 오고 사과를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외면하고 저주하면 친구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극동방송'으로 사이가 가까워졌다. 노 대통령은 극동방송이 북한·중국 등에 방송을 내보내는 걸 높게 여겼다. 중국에 방송 수신이 잘되도록 출력을 50kW에서 100kW로 증강해 줬다. 대전극동방송 설립을 허가해 주기도 했다. 김 목사의 자서전에서, 노 대통령은 "김장환 목사를 볼 때면 항상 하나님과 함께 있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내가 어려움을 겪거나 마음에 고통을 안고 있을 때 항상 김장환 목사가 생각난다. 김장환 목사를 떠올리면 고통스러운 게 없어지고 위로가 된다"고 했다.

김장환 목사는 전두환 대통령에 이어 노태우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민주화의 토양을 마련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 목사는 <섬기며 사는 기쁨>에서 "전두환 대통령 이후에 바로 김영삼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이 권좌에 올랐더라면 엄청난 혼란이 있었을 것이다. 군인 출신이지만 온화한 성격의 노태우 대통령이 적당한 때에 통치권을 잡은 것은 잘된 일이며 나는 이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2000년 김장환 목사의 <그를 만나면 마음에 평안이 온다> 출판기념회에 나란히 참석하기도 했다.

김장환 목사는 장로 출신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했을 때 절친 조용기 원로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와 자주 청와대를 찾았다고 한다. 두 목사는 첨예한 정치적 국면이 벌어졌을 때는 김 대통령에게 결단을 촉구하기도 했다.

조용기 목사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동방송 FM을 허가해 달라고 부탁했다. 극동방송이 지방으로 확장을 시도할 때, 조 목사가 문화관광부 장관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지방 방송국을 내 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 때 김장환 목사는 'MB 멘토'로 불릴 정도로 이 대통령과 사이가 가까웠다. 청와대 방문은 물론이고 바쁠 때는 전화로 기도까지 해 줬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로 이 대통령이 궁지에 몰릴 때는 인터뷰를 통해 이 대통령을 옹호하기도 했다.

김 목사는 2009년 9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이 대통령은 외국에 나가면 대접받고 인기가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만 들어오면 이렇게 공격을 받는다. (중략) 지난번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 때 500만 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같은 식으로 보면 4200만 명은 참석을 안 한 거다. 사람들이 왜 그런 걸 모르는지 답답하다"고 말했다.

김장환 목사는 권력에서 물러난 이들을 끝까지 챙겼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수감 중일 때는 각각 13회씩 면회를 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교회에 초대해 신앙 간증 집회를 열기도 했다. 최근에는 구치소에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찾아가기도 했다. 지난해 극동방송 직원 예배에서 김 목사가 "일국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무슨 죄가 그렇게 많았기에 20년 구형을 받게 되느냐"고 말한 사실이 알려져 비판을 받기도 했다. 

김장환 목사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 당시 청와대를 찾기도 했다. 사진 출처 청와대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농단'이 드러난 2016년 11월, 박 대통령이 김장환 목사와 김삼환 목사(명성교회 원로)를 만난 일도 유명하다. 두 김 목사는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을 만나 위로하며 로마서 12장을 읽어 줬다. 박 대통령을 만나고 온 김장환 목사는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사랑의교회(오정현 목사)에서 개최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김 목사가 박사모 정광용 회장을 만난 게 알려졌고, 구국 기도회가 아니라 관제 기도회를 준비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결국 기도회는 무산됐다.

보수 정권 대통령들과의 친분은 김장환 목사의 자서전이나 각종 매체들을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반면, 김대중·노무현 대통령과의 친분이나 교류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김장환 목사 자서전에는, 2000년 김 목사가 침례교세계연맹(BWA) 총회장에 당선됐을 때 김대중 대통령이 축전을 보낸 일화와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이 김 목사의 소개를 받아 릭 워렌 목사를 만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정치 목사'라는 오명에도 김장환 목사는 정치인들과의 만남을 피하지 않았다. 김장환 목사를 수행했던 B 목사는 "옆에서 지켜봤을 때 '정치 목사'로 규정하기에는 그릇이 맞지 않다. 그렇다고 BK가 순수하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정치인을 만나는 것도 아니다. 과연 만날 때마다 '예수 믿으라'는 말만 했을까. 그냥 그들과의 만남 자체를 좋아했다. BK가 미국과의 네트워크가 있다는 걸 역대 대통령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수 개신교 + 보수 정치인 = 극동포럼?
황교안, 총리 사임 이후 전국 돌며 강연

김장환 목사와 보수 정치계의 연결점을 이야기할 때 '극동포럼'(정연훈 회장)을 빼놓을 수 없다. 김 목사가 2003년 만든 극동포럼은 극동방송의 방송 선교 사업을 돕는 유관 기관이자, 각 분야의 전문가를 초청해 포럼을 열고 교류하는 장으로 소개된다. 현재 김 목사는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실제로는 '방송 선교'를 돕는다기 보다, 보수 정치계 거물급 인사들이 강연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2003년 9월 리언 라포트 한미연합사령관이 강사로 나선 데 이어 황장엽, 이명박, 조갑제, 이회창, 김영삼, 한승수, 정운찬, 김장수, 김무성, 김황식 등 정치인과 대북 전문가들이 강사진에 이름을 올렸다.

강연자로 나선 이들은 극동포럼에서 정치적 신념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2006년 4월 극동포럼에서, 참여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며 보수 결집을 촉구했다. 이 전 총재는 "2007년 대선은 분열적이고 친북적 좌파 주축 세력 대 비좌파 세력의 대결 양상으로 갈 수밖에 없다. 자유 민주 세력이 중심이 돼 비좌파 세력의 대연합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장 재직 시절부터 극동포럼에 참여해 온 이명박 전 대통령은 강연에서 자신의 업적을 자찬하기도 했다. 이 전 대통령은 2016년 1월 극동포럼에서 "4대강 사업은 녹색 성장을 주도하고 경제 침체를 극복하는 데 이바지한 성공한 정책으로 생각하고 있다. 다소 논란은 있었지만 세계적으로 경제가 위기인 시기에 4대강 사업이 우리 경제를 살리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자유한국당 대표 선거에 뛰어든 황교안 전 총리. 황 전 총리는 지난 1년간 극동포럼에서 5번이나 강연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최근 극동포럼 강사 중에 눈에 띄는 인사가 있다. 자유한국당 대표 출마를 선언한 황교안 전 총리다. 황 전 총리는 2017년 10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5번에 걸쳐 서울·대구·부산·제주·동해 등 전국을 돌며 강연했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역할', '위기를 기회를 만들자'라는 주제로 강연했는데, 같은 기간 황 전 총리만큼 자주 등장한 인사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황교안 전 총리는 가장 최근 열린 2018년 12월 극동포럼에서 "(메르스 사태 당시) 내가 컨트롤타워가 되어 책임진다는 것은 도전이었다. 사태가 악화되면 공직 생활을 내려놔야 했다. 하지만 믿음으로 도전했더니 18일 만에 메르스가 잡히게 (하나님이) 도우셨다"고 말했다. 이날 김장환 목사는 황 전 총리에게 감사장을 수여했다.

황 전 총리는 2017년 10월 극동포럼에서 보수 개신교가 반대하는 동성애와 차별금지법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동성애 문제가 공공연하게 퍼져 가고 있다. 다행히 이런 것이 포함된 차별금지법이 여러 번 입법 시도됐지만 통과되지 않았다. 여러분의 역할이 아주 컸다"고 말했다.

매번 보수 정치계 거물들을 강단에 세우는 극동포럼은 보수 개신교계와 정치계의 사교의 장인 듯한 인상을 준다. 김장환 목사가 보여 왔던 정치적 성향과 잘 어울린다. 그렇다면 김 목사가 40여 년간 이끌어 온 극동방송의 콘텐츠는 어떨까. 다음 기사에서는 극동방송 콘텐츠의 편향성에 대해 다룬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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