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편견과 분별을 뛰어넘는 하나님나라의 지혜

1. 현대사회에 재현된 예수 시대의 모습들

차별금지법이 다시금 쟁점화하자 예전처럼 여러 사람이 찬반 논쟁을 벌이고 있다. 법 제정에 찬성이냐 반대냐, 옹호냐 거부냐 하며 서로 목청을 높이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유독 동성애를 겨냥하고 있다. 처음 동성애 담론을 봤을 때는 동성애가 성경적으로 죄냐 아니냐가 쟁점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는 게 차별이냐 아니냐로 확장해 논쟁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기독교 내 차별금지법과 동성애 대한 의견 대립 현상이 '동일한 기준'을 두고 나타난다는 것이다. 양편 모두 성경, 하나님의 뜻, 예수에 근거해 자기주장을 내놓는다.

차별금지법과 동성애에 대한 교회 내 의견 분별이 과열돼 서로 정죄하고 다투는 모습들은 이제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이다. 사실 우리가 기준으로 제시하는 성경 안에도 오늘날처럼 특정한 주제를 놓고 충돌하는 모습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예수 제자들의 논쟁이다.

제자들도 오늘날 우리처럼 예수를 중심에 두고 늘 서로 다른 입장으로 다투었다(막 9:34, 10:31, 마 18:1, 19:30, 20:16, 눅 9:46, 22:24). 그들의 논쟁 형태와 본질도 차별금지법과 동성애를 두고 시시비비하는 우리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결국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답을 이미 정해 두고 '우리 중 누구의 말이 옳고 틀렸는가' 언쟁하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논쟁에 대한 평가를 예수에게 직접 들을 수 있었다는 것 정도다.

각자 예수의 제자를 자처하며 "저 말이 틀리고 내 말이 옳지요?"라고 묻는 우리를 본다면 예수는 어떻게 대답했을까? 차별금지법과 동성애에 대해 찬반으로 나뉘어 다투는 우리에게 예수는 뭐라고 말할까? 예수의 행적에서 그 답을 더듬어 찾아볼 수 있다.

사진 출처 플리커
사진 출처 플리커
2. 예수의 대답과 그 방식:
사람의 편견 뒤집어
하나님나라 지혜 보여 주기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을 이해하려면, 먼저 예수가 질문에 어떠한 방식으로 반응하는지 그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제자들 질문에 "이것이다" 혹은 "저것이다" 형태로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자들이 오답이라 생각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것들을 거꾸로 치켜세워 그들의 편견을 뒤집는다. "작은 자와 그 작은 자를 위한 자가 크게 되고"(막 9:36-37, 10:43),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끝자리를 택한 자가 상석에 앉으며"(막 10:44), "종이 되어 섬기려고 하는 자가 으뜸이 된다"(막 10:44)는 식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답변은 체면‧권력‧위계‧명예를 중시하는 1세기 유대-로마 문화권에서는 꽤나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예수의 대답은 시대 상식을 비껴가며 역설적으로 나타난다.

예수는 왜 그렇게 대답했을까.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제자들의 질문과 담론, 이를 형성하는 분별, 그 결과인 다툼이 하나님나라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에게 사람의 분별과 판단,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들은 하나님나라의 풍경이 아니다. 예수가 바라본 하나님나라에는 개인의 분별과 판단에 근거해 나타나는 큰 자/작은 자, 먼저/나중, 주인/종, 으뜸/바닥, 이것/저것의 구별‧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적 분별에서 시작하는 미움과 다툼은 끼어들 틈이 없는 곳이 예수가 발견한 하나님나라였다. 그래서 예수는 사람의 분별에서 나오는 생각이 하나님나라를 이해하는 데 합당하지 않고, 오히려 역행한다는 점을 제자들에게 깨우쳐 줄 필요가 있었다. 예수는 오늘날에도 현대인이 선호하는 형태의 논리나 지식으로 말하지 않고 그것을 추월해서 말할 것이다.

둘째,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치려 한 것은 단편적 지식이 아니라 세상을 관통해 바라보는 지혜였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를 발견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다. 사람의 시대‧생각‧언어‧상식‧기준 등을 초월한 하나님나라(막 4:30)를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예수는 지혜로운 안목을 가르쳐야 했다. 하나님 눈동자에서 은혜를 발견한 사람이 올바르게 살았다고 말하는 구약처럼, 예수는 하나님나라를 선명하게 발견한 사람이 하나님 마음으로 지혜롭게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뤄지는 방법(마 6:10, 6:14-15)은 선인뿐 아니라 악인에게도 차별 없이 해를 비추는 하나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마 5:45).

예수는 지혜로운 안목을 지닌 자가 하나님 마음으로 이웃과 원수를 구별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마 5:43-48). 그래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나라를 위해 내게 사랑받기 합당한 이웃이냐"라는 율법 교사의 분별 가득한 질문에, 그가 정답이라고 생각했을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 당시 외면받던 사마리아인을 "자비 베푼 사람"으로 뒤집는다. 질문 방향 자체를 수정해 "네가 어떻게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야 하나님나라에 합당하겠는가"를 뒤집어 말하는 게 예수다(눅 10:25-37). 분별과 편견이 나오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그 마음을 넘어서 말이다.

신약성서를 보면 매우 많은 언어적·논리적 모순이 있다. 예수는 하나님나라와 그 영광을 위하는 길은 고난을 감수하다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긍정하면서도 "내가 살아 있는 게 너희에게 유익하다"(빌 1:23-24)고 말하며 하나님나라와 그 영광을 위하는 길을 살아감의 차원에서도 설명한다. 예수와 사도 바울은 같은 말을 하는가, 다른 말을 하는가. 지혜로운 역설은 사람의 언어와 편견을 넘어서는 하나님나라와 그 나라에 들어오기 합당한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가르친다.

심지어 예수의 지혜는 자신의 언어와 평가조차 초월한다. 예수는 자신에 대한 자각 없이 타인을 정죄하는 사람들을 개돼지 취급한다(마 7:1-6). 그런 이들에게는 거룩한 것을 던져 줄 필요조차 없다고 말한다(마 7:6).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개라고 깎아내린 여인이 지혜를 드러내자 본인의 판단을 뒤엎고 자비를 베푼다(마 15:21-28).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를 엿볼 수 있다. 첫째, 지혜는 유연하다. 둘째, 지혜가 없다면 짐승과 다름없다. 셋째, 지혜는 개인의 차이나 구별을 초월해 나타난다.

예수는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지혜와 조화를 요구했다. 어떤 분별된 지식과 다툼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늘 논란의 중심에서 섰다. 사람들이 자꾸만 그의 말을 어떤 지식의 단위로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의 제자를 포함해 자신을 몰이해하는 이들의 어리석음을 경멸했다. 분별‧다툼‧몰이해에서 나타나는 거부‧외면‧소외의 현실은 더욱 경멸했다. 예수의 삶은 그러한 분별과 다툼과 무지가 만들어 내는 끔찍한 현실과 투쟁하는 삶이었다. 그러한 현실의 피해자들과 자신을 일치했다.

가해자들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복음서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은 주로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율법 교사 등 유대 종교인들이었다. 예수에게 그들은 지혜 없이 단편적인 율법이나 전통으로 탐욕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마디로 '종교 위선자들'이었다.

물론 예수는 단순히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율법 교사라는 신분을 이유로 그들을 전부 싫어하거나 종교 위선자 취급하지는 않는다. 영생에 관해 이야기 나눈 니고데모도 바리새인이었고(요 3:1-21), 예수가 동의하는 사람도 율법 교사였다(눅 11:37-54). 예수에게 중요한 것은 특정한 집단 소속인지 여부가 아니라, '어떠한 삶을 사는 사람이냐'였다. 사실 그들 전부를 싸그리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것도 어느 의미에서는 편견과 차별이다. 기독교인이라고 전부 예수처럼 살지는 않잖는가.

예수가 대적한 '종교 위선자들'은 특정 종파 유대인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산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을 무덤으로 만드는 마귀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어떠한 사랑이나 정의도 없이 그저 자신들의 분별과 판단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며 특정인을 미워했다. 그들은 많은 차별을 만들어 냈다. 장애인, 세리, 매춘부, 이방인, 과부, 고아 등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거부가 대표적이다. 예수는 위선자들이 말로는 이들을 위한다고 하나, 오히려 그들 생계를 착취하고 있다고 고발했다(막 12:38~13:2, 눅 20:45~21:6). 예수와 대적하는 종교 위선자들은 자신들의 행적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뜻을 거론하며 차별금지법과 동성애를 분별하고 시시비비를 나누는 우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제자들에게 그러했듯이, 예수는 종교 위선자들에게도 역설적 언행으로 하나님 마음과 하나님나라를 드러낸다. 그들이 오답이라 여긴 것을 정답으로 만들고, 정답이라 여긴 것을 오답으로 뒤집는다. 예수는 당시 더럽고 부정한 사람들로 분별돼 거부당한 이들과 함께 교제했다. 그런 예수의 행적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들은 정당성 차원에서 비난하지만, 예수는 오히려 그들보다 "멸시받는 이들이 하나님나라에 이미 먼저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마 21:31).

예수의 태도는 자연스럽게 독자에게 현실과 현실을 뛰어넘는 하나님나라를 이중적으로 드러낸다.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너희가 아니라 너희가 외면한 사람들이다. 정작 하나님이 눈여겨보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스스로 하나님 백성이라 착각하는 너희보다 그들이 그 나라에 더 가까울 따름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분별과 정죄뿐인 너희가 어찌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사람이겠는가.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지금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

3. 예수의 진단:
"더러운 것은 너와 네 마음에서 출발한다"

예수의 냉혹한 평가와 고발이 이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오늘날 우리 현실에는 어떻게 적용될까. 무엇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두고 서로 다른 판단을 하게 만들까. 무엇이 분별‧편견‧미움‧다툼을 만들어 낼까.

예수는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것에서 문제의 근본 원인을 발견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관적인 인간 내면을 지적한다. 예수는 "너희가 말하는 그것들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만든다"고 말한다(막 7:15-23, 마 15:11-20).

예수는 현실 사회에서 나타나는 온갖 부정적인 것들을 막연히 부정하지 않는다(막 7:21-23, 마 15:2-28).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수단으로 사용할 뿐이다. 예수는 비난과 정죄가 어디서 나오는지 고발한다(막 7:5, 마 15:3). 사람들이 분별에 앞서 파악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이다(마 7:3-5). 상대방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든 생각과 기준은 마음에서 나온다.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Christ and the Adulteress ). 발렌틴 드 불로뉴(Valentin de Boulogne) 그림. 사진 출처 플리커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Christ and the Adulteress ). 발렌틴 드 불로뉴(Valentin de Boulogne) 그림. 사진 출처 플리커

예수는 종교 위선자들이 선호하는 시대적 기준이나 형태로 대상을 분별‧정죄하지 않는다. 간음해 끌려온 여인을 예수는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지 않는다(요 8:1-11, 8:15). 예수는 여인을 정죄 없이 일상으로 돌려보낸다. 예수는 어떤 남성도 보호하지 않은 여인을 그저 사랑으로 보호한다. 그는 오늘날 누군가처럼 단편적으로 죄다 아니다 구분 짓지 않는다. 예수는 죄의 유무를 넘어 그런 분별이 발생하는 상황에 처한 연약한 인간을 살려 낼 지혜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데 목적이 있다(요 17:2).

요한복음이 진정 고발하는 대상은 하나님 말씀을 운운하며 특정 대상을 분별‧정죄하고 생명까지 위협하는 종교 위선자들이다. 판단하지 않음으로 드러나는 현실 고발이 역설적으로 예수의 공의로운 판단 사례가 된다(요 7:24, 8:16). "어떠한 지혜도, 하나님의 마음도 없는 이들이 사람들을 분별해 그게 하나님 뜻이라며 사람을 죽이려 한다! 그들은 늘 이런 현실을 만들어 낸다. 정말로 정죄당해 돌로 쳐죽어 마땅한 이는 무엇인가. 무엇이 진정 하나님이 요구하는 마음인가."(요 8:5)

4. 기록된 문자 뛰어넘는 하나님 마음

율법에 따르면 성 기능 장애인은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레 21:16-20, 신 23:1). 그러나 예수는 이를 문자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그는 선천적으로 성 기능 장애가 있는 사람, 다른 사람에 의해 성 기능 장애가 생긴 사람, 하나님나라를 위해 스스로 그렇게 되기를 택한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마 19:12). 예수는 성 기능 장애인이라고 해서 어떤 분별‧차별적 편견이 발생할 가능성을 미리 방지한다. 자신의 제자들이 어떠한 장애를 비롯한 다른 문제로 하나님나라를 몰이해하는 일을 막는다.

중요한 점은 예수가 장애를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타의든 자의든, 하나님과 관련 있든 없든, 정작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윤리적이냐 아니냐는 예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예수에게 누가 하나님나라에 합당하냐 묻는다면, 그들 중 정말로 하나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사야서는 예수에 앞서, 정말로 하나님 뜻에 합당하다면 성 기능 장애인이라도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사 56:4-5). 예수의 정신을 이은 초대교회 공동체도 이방인 환관에게도 세례를 베풀어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행 8:36-38). 이렇듯 유연하게 나타나는 지혜의 모습은 오늘날 동성애를 포함한 온갖 문제에 대해 생물학적 선천/후천, 자의/타의, 유죄/무죄를 분별하며 다투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사도 바울은 성과 관련한 또 다른 현실적 요소인 '결혼'에 대해 얘기한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계시가 아니라 자기 생각에 불과하다고 먼저 언질을 하고 처녀와 과부, 결혼, 비혼, 이혼 및 재혼 문제를 풀어 간다(고전 7:25-40).

그러나 사도 바울의 주장을 준수하게 되면 역설적으로 창세기에 나오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지킬 수 없게 된다(창 1:28). 음행을 제외한 이혼을 철저히 금지한 예수의 의견과도 충돌한다(마 19:9, 그러나 요 8장의 해석적 유연함을 함께 보라). 사도 바울은 파격적이고도 유연하게 문자를 넘어 해석한다.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며 더 헌신하고 전념할 수 있게 한다는 지혜로운 결단을 보여 준다(고전 7:33-35). 이처럼 초대교회는 성을 포함해 대다수 구약 명령을 전부 문자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문자에 천착하는 종교 위선자들처럼 행동하는 일은 하나님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러한 지혜로운 해석, 유연한 적용은 오늘날에도 이미 적용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민수기에서 말하는 간통 확인 절차법(민 5:11-31)으로 간통을 확인하는 기독교인은 전무하다. 이를 언급하면 율법이 폐지됐니 완성됐니 하며 각자 입맛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희년 제도와 노예제도법은 어떠한가(레 25장). 성경이 적극적으로 거부한 적 없던 노예제도 폐지, 평등과 인권 문제도 우리는 이미 문자를 넘어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나 바울은 문자를 넘어서 존재하는 하나님 마음을 알기 원했다. 하늘의 뜻을 선명하게 파악하고 땅에서 실현하며 살아가길 원했다(마 6:9, 6:14-15, 눅 11:4). 그들에게는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며 "내가 옳고 네가 틀리다"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하나님 앞에 죄스럽고 역겨운 것이다. 분별과 정죄는 하나님 마음과 뜻을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예수의 태도였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 12:7)는 구절이 내게는 "본질을 원하고 껍데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마음을 너희가 지혜롭게 알았더라면 너희의 분별로 죄인을 만들어 내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로 들린다.

사진출처 플리커
사진출처 플리커
5. 결어: 사람의 분별 넘어서는
하나님나라의 원리

예수는 사람들에게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요구한다. 하나님나라는 사람의 말(표현)과 생각(편견)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의 후예들은 자꾸만 예수의 행적을 문자와 지식으로 못 박아 고정하길 원한다. 그것을 새로운 형태로 기준으로 삼아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고 있다. 온갖 분별 속에서 서로 미워하며 "내가 옳고 네가 틀리다"고 다투고 있다. 천국을 갈망하는 이 땅의 현실과 삶이 정작 지옥과 다름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는 껍데기를 넘어 본질을 요구하고 있다. 사람들 편견을 부수고 문제 원인이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깨우치기 위해 온갖 허상들을 거꾸로 뒤집어 실상을 고발한다. 그 깨달음이 있어서야 비로소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것과 저것 중 무엇이 옳고 그르냐는 질문에, 그러한 "질문이 어디에서 출발하고 있느냐"고 되묻는다.

예수 시대에는 하나님나라를 갈망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위선과 횡포로 이 땅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것이 예수가 파악한 유대 종교의 커다란 실태였다. 오늘날 우리처럼 말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참칭하는 그들의 신앙을 부패와 위선이라 평가한다. 위선자들의 신앙은 사람을 억압하는 지독한 거짓말이고 생각했다. 예수는 이것과 저것을 넘어섰다. 분별 기준을 만들어 약자를 소외하고 배제하는 이들을 경멸했다.

예수는 차별과 차별을 만드는 현실과 싸웠다. 현실에서 이미 차별당하고 있는 사람들과 싸우지 않았다. 가난과 가난을 만드는 현실과 싸웠다. 생계가 위태로운 사람들과 싸우지 않았다. 예수는 지식을 넘어선 지혜로 "분별과 그 결과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죄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자각해야 한다"라는 필요를 역설하는 이였다. 예수는 소외된 사람과 하나 되고, 종교 위선자들에 저항하는 생애를 살았다.

거기서 어떠한 차별도 없는 하나님나라가 출발한다. 거기서 진정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사람의 마음이 나타난다. 그러한 삶이 하나님 마음을 품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모습이다. 어떠한 분별‧다툼‧미움도 없어야 비로소 예수가 바라본 하나님나라를 회복하고 완성하는 '사랑'이 드러난다. 그래야 하나님 사랑이 내 사랑이 되고, 내 마음이 된다. 예수가 요구하는 그 경지는 이웃과 원수를 뛰어넘는 사랑이고, 그러한 구별마저 실로 무색해 다만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마 5:43-48, 눅 6:27-38, 요 13:31-35).

예수가 요구하는 하나님나라의 원리를 실천하는 것은 쉽지도 간편하지도 않다. 그 말을 따라 진실을 자각하고 온갖 잘못과 원인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은 힘든 일이다(요 8:31-32). 그 길은 너무 좁고 걸어가기도 어렵다(마 7:13-14, 눅 13:24).

우리는 질문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차별금지법 찬반과 동성애의 죄 여부를 갈라 새로운 기준‧분별‧다툼‧미움‧갈등을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그 생각은 하나님 마음에서 오는가, 사람의 마음에서 오는가. 우리 마음이 곧 하나님 마음이라고 자신하지만 정작 예수가 고발한 종교 위선자들 모습과 다름없지는 않는가.

질문이 어렵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몸소 실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감히 여쭈어보는 건 어떨까. 그러면 예수는 친절하고 재치 있게 우리의 분별과 정죄를 고발하여 하나님나라를 역설할 것이다. 예수 본인이 바라본 하나님나라와 하나님 마음을 우리에게 친히 보여 줄 것이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