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한국 주요 교단들은 '퀴어신학'을 이단이라고 결의했다. 대표적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예장합동·배광식 총회장)은 2020년 "동성애를 토대로 형성된 퀴어신학은 명백히 이단이며 철저하게 배격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예장합동은 2017년 출간하지도 않은 <퀴어 성서 주석 Queer Bible Commentary·QBC>(무지개신학연구소)을 금서로 지정하고, 번역을 주도한 임보라 목사(섬돌향린교회)에게 이단성이 있다고 결의하기도 했다. 당시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서기 원철 목사는 "이 책이 출간되어도 총회 산하 노회나 교회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사용하는 것을 금하며,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의 공적 모임에서나 사적 모임에서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 옳다고 사료된다"고 했다.

QBC는 2006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됐고, 한국에서는 2015년부터 번역 작업에 들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구약 성서를 퀴어한 관점에서 해석한 '히브리 성서 편'이 2021년 세상에 나왔다. 퀴어성서주석번역출판위원회는 올해 2월, 두 번째 책 '신약 성서 편'을 출간했다. 기독교인뿐 아니라 일반 대학 연구소, 복지센터 등에서 책 주문이 이어졌다.

<뉴스앤조이>는 지난해부터 QBC 관련 강의를 소개해 왔다. 주요 교단들이 보지도 않고 이단으로 결의해 버린 퀴어신학의 내용이 도대체 무엇인지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2021년 7~8월 한신대 이영미 교수의 강의를 시작으로, 10월에는 한국퀴어신학아카데미(퀴신아·유연희 회장)의 QBC 강독 세미나 '퀴어스런 Queer Time'이 이어졌다. 올해 3~4월에도 퀴신아 '퀴어스레 신학하기 시즌7'이 열렸다.

<뉴스앤조이>는 5월 3일, 퀴신아 강사 및 QBC 번역·출판 과정에 참여한 유연희 회장, 정혜진·변영권 운영위원과 온라인으로 좌담을 진행했다. 이번 강좌에 대한 총평과 QBC가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의미 등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QBC가 급진적이라는 비판부터, 퀴어 해석이 성서의 본래 의미를 왜곡한다거나 퀴어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억지 해석'을 한다는 주장에 대한 생각도 물었다. 이들은 성서 해석사는 상상의 역사라며, 퀴어 해석이 잘못됐다는 것이야말로 '색안경'을 낀 결과라고 했다.

QBC 강독 세미나 '퀴어스레 신학하기 시즌7'을 마치고 강사들에게 강좌 총평과 QBC가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의미 등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왼쪽 상단부터 반시계방향으로 퀴신아 유연희 회장, 변영권 운영위원, 정혜진 운영위원. 뉴스앤조이 나수진
QBC 강독 세미나 '퀴어스레 신학하기 시즌7'을 마치고 강사들에게 강좌 총평과 QBC가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의미 등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왼쪽 상단부터 반시계방향으로 퀴신아 유연희 회장, 변영권 운영위원, 정혜진 운영위원. 뉴스앤조이 나수진
"성서 해석은 '객관적'일 수 없다"

- 올해 2월 QBC 신약 편이 발간되고, 한국퀴어신학아카데미에서 4주에 걸쳐 강좌를 진행했다. 강좌에 대한 총평을 한다면.

정혜진 / 난 텍스트에 근거해서 역사 비평적으로 해석하는 게 익숙한 성서신학자다. 그런데 퀴어신학은 성서 텍스트를 바탕으로 주석을 하면서도 동시에 텍스트를 뛰어넘는 영역이 있더라. 강의를 준비하면서 스스로도 공부가 많이 됐다.

유연희 / 나도 퀴어신학 전공자가 아니다 보니, 발제자로서 주석을 최대한 꼼꼼히 읽고 이해하려고 했다. 저자들이 많은 내용을 담아 놓고 어떤 것들은 언급만 하니까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새로운 해석에 도전받기도 했다. 재미있었다.

강의를 마치고 참가자들과 자체 평가를 했는데, '성서 안팎의 자유로움이 증폭된 것 같다', '머릿속에 해석의 언어들이 각인되지 않아서 안타까웠지만 꾸준히 이해를 넓히기 위한 배움을 이어 가고 싶다', '여러 해석 방법의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와 같은 코멘트가 있었다. 듣는 분들이 폭넓은 상상력과 생각을 동원해 성서를 읽었기 때문에 긍정적인 감정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변영권 / 난 다른 분들처럼 학자가 아니고, 신학에 관심 있는 목사 중 한 명이다. QBC 초벌 번역을 교정하는 일에 참여했는데 굉장히 놀랐다. 이전에도 성소수자 문제에 관심은 있었지만, 성경을 누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서 전혀 생각하지 못한 해석이 가능하더라. 물론 나 또한 기존 성서 해석에 물들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색하거나 익숙하지 않은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성서 주석이라는 게 모두 어느 정도는 신앙고백적이고 학자 개인의 경험이나 주관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데 이런 다양한 관점이 필요한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QBC는 성서의 '빈틈'을 파고들어 현대 퀴어 독자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상상한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데 익숙한 한국교회에서는 퀴어 해석이 성서의 본래 의미를 왜곡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정혜진 / 나도 그걸 경험한 사람이다. 모태 신앙이고, 목사 딸이고, 보수적인 성서 해석에 길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여성신학, 역사 비평, 이데올로기 비평처럼 성서 텍스트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눈을 하나씩 배우면서, 이제는 '잘못 해석한다'라는 말에 별로 위화감을 느끼지 않게 됐다. 성서신학을 공부하다 보면 하나의 해석에 고정될 수 없게 된다. 기존 해석 중 이게 제일 옳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고고학적으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거나 텍스트를 읽는 관점이 달라져 과거에는 주목하지 않았던 걸 주목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서 해석의 역사는 그렇게 바뀌어 왔다.

유연희 / 성서 해석사는 정답이 없는, 수많은 새로운 해석이 쏟아져 나온 역사다. 학자들은 이전 세대가 했던 연구를 받아들이고 인용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얘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학제 간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성서 전공자도 성서 밖의 학문, 예를 들면 철학이나 인문학, 영문학, 비평 이론 등을 받아들여 성서 해석에 적용하는 게 일반화했다. 이제 한국 구약학자들도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사회와 개인의 분노를 '희생양'에 쏟아 부어 사회 불안을 차단하는 매커니즘 – 기자 주) 등 성서 밖 담론을 가져다가 성서 본문을 해석하지 않나. 그럴 때마다 새로운 해석으로 인정할 뿐이지, 어느 것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지 않는다. 신학을 전공하지도,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지도 않은 사람들이 QBC 일부만 보고 그것이 마치 퀴어신학의 전부인 양 여기고, 퀴어 해석은 성서를 잘못 해석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퀴어 성서 주석>은 '히브리 성서 편'과 '신약 성서 편'으로 나뉘어 각각 지난해와 올해 출간됐다. 텀블벅 홈페이지 갈무리 
<퀴어 성서 주석>은 '히브리 성서 편'과 '신약 성서 편'으로 나뉘어 각각 지난해와 올해 출간됐다. 텀블벅 홈페이지 갈무리 

- 주로 교회에서 설교를 통해 성서 해석을 접하는 일반 교인의 경우 성서의 빈틈을 상상한다는 게 잘 와닿지 않을 것 같다.

정혜진 / 퀴어 해석에서의 상상은, 오히려 역사적 배경과 맥락을 추정하는 것이다. 성서의 빈틈을 상상한다는 말이 거북할 수 있지만, 교인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기존의 해석이 훨씬 공상의 세계에 가까울 수 있다. 예컨대, 마태복음에는 마리아가 혼전 임신을 했는데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장면을 무흠 수태라든지 동정녀 탄생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 교회의 해석이지만, 실제 남녀 관계 없이 잉태가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거다. QBC는 이를 마리아가 불운한 임신을 겪었고, 요셉이 당대의 도덕적 기준에 맞지 않게 한 가족이 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메시아를 탄생시킨 이야기로 재해석하는 식이다. 우리는 상상 이전에 고정된 해석이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실제 그 누구도 마태의 의도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상상과 상상 아닌 것을 역전시켜야 할 수도 있다.

변영권 / 성경을 읽을 때 우리 모두는 상상한다. 가령 동방박사는 세 명일 거라고 상상하지 않나. 이런 것들은 직접 상상하거나 누군가 상상한 것을 고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이지, 성경에 그대로 나와 있는 경우는 드물다. 성경 텍스트는 굉장히 평면적이고 우리에게 특정한 이미지를 제공하지 않는다. 현대 독자들이 성서로 깊이 들어가려면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끄집어내야 하는데, 그러려면 항상 어떤 이미지나 상상이 필요하다. 상상은 잘못된 게 아니다. 오히려 성경을 풍성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방식이다.

유연희 / 과거에는 역사 비평적 관점에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결론을 내려고 노력했지만, 이제는 최종적인 성경 본문을 기반으로 문학적 양식이나 본문에 대한 독자의 해석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됐다. 이걸 '독자 반응 비평'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본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각기 다른 결론이 나온 거다. 학자들도 성서 해석이 객관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정혜진 / 교회에서는 고정된 시선을 벗겨 내는 경험을 허락하지 않는다. 목사님들이 신학 공부하면서 한 번씩은 기존 해석이 뒤집히는 경험에 부딪혔을 텐데, 교인들을 대상으로 성서 해석을 할 때는 그런 여지를 열어 놓지 않는다. 한국교회와 QBC 사이의 간극은, QBC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목회자들이 특정 해석만을 주입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카라바지오(Caravaggio)가 그린 '의심하는 도마'. 변영권 목사는 대부분의 성서 해석은 상상에 기반한다고 했다. 도마가 예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는 유명한 성화 장면도 실제로는 화가들의 상상에 기반한 것이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카라바지오(Caravaggio)가 그린 '의심하는 도마'. 변영권 목사는 대부분의 성서 해석은 상상에 기반한다고 했다. 도마가 예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는 유명한 성화 장면도 실제로는 화가들의 상상에 기반한 것이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하나님이 이성애자인가?"

- 실제 QBC 내용을 소개한 <뉴스앤조이> 기사에도 악플이 많이 달렸다. "색안경 끼고 보면 다 그 색으로 보인다", "아무 상황에나 '퀴어'를 갖다 붙인다", "아예 하나님도 퀴어라고 우겨라"라는 식의 반응도 있었다.

변영권 / 예전에는 <뉴스앤조이> 기사에 무슨 악플이 달리는지 보고 답글도 달면서 지냈는데, 이번에는 강의를 진행한 당사자이기도 하고, 나이도 50세가 돼서 가만히 있었다.(웃음) 갖다 붙이는 건 다른 해석도 똑같다. 교회에서 구속사를 얼마나 열심히 꿰맞추나. 이삭을 바치려고 아브라함이 지고 간 나무까지 십자가라고 하지 않나. 구약에서 나무 쪼가리만 나오면 다 십자가고, 사람만 죽으면 다 예수님을 예언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게 사실 QBC보다 더 심한 갖다 붙이기 아닌가. 그리고 하나님이 '퀴어'지, '이성애자'인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성을 초월한 존재면 '퀴어'이지 않나. 조금만 질문을 바꾸면 자기도 답하지 못할 문제를 마치 엄청난 진리인 것처럼, 정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 QBC는 성서 속 등장인물의 성 정체성이나 인물 간 성애적 관계를 적극적으로 추론하기도 한다. 한국교회는 섹슈얼리티·젠더·퀴어와 같은 주제를 금기시하는데, 이런 내용을 소개하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나.

변영권 / 아직도 감리회에서는 이동환 목사(영광제일교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그가 안수한 사람까지 찾아가서 공격하는 분위기다. 기사를 보고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있었지만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학문적인 차원의 연구는 '자율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사가 돼서 궁금한 것을 공부하고, 배운 것을 전하는 데 눈치를 보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싶지는 않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지만, 목회를 하는 한 퀴어 문제에 있어서는 꾸준히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서 살 거다.

유연희 / 기독교인들에게는 보통 '신학'과 '신앙'이라는 두 가지 장르가 섞여 있다. 동정녀 탄생도 문자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게 신앙이다. 하지만 신학을 이야기할 때 신앙을 가져오면 대화는 평행선을 달린다. 신학이라는 학문과 성적인 것을 터부시하는 신앙은 구별해야 한다.

정혜진 / 물론 보수적인 교인들이 앞에 있다고 생각하면 부담스럽다. 하지만 나는 여성신학이나 소수자 신학을 조금이라도 경험해 본 독자들이 있다고 생각했을 때가 더 부담스럽다. 고대 문서인 성서를 가지고 이야기할 때는 페미니즘이나 퀴어 이론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보다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여성신학 강의할 때, 하갈이나 다말 이야기가 2030 여성들에게는 감질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퀴어 해석이 어떻다는 말이 많지만, 요새는 성서를 가지고 이야기한다는 기본적인 틀 자체가 이미 누군가에게는 제한적일 수도 있겠다는 고민을 하고 있다.

<퀴어 성서 주석>은 섹슈얼리티·젠더·퀴어 등 한국교회에서 금기시된 주제를 다룬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퀴어 성서 주석>은 섹슈얼리티·젠더·퀴어 등 한국교회에서 금기시된 주제를 다룬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 퀴어 해석은 너무 급진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QBC가 퀴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강화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변영권 / 반감을 심어 줄 만큼 사람들이 QBC를 읽을까? 성소수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반동성애 진영이 퍼 나르는 허위·왜곡 정보 때문에 심한 거지 QBC 탓은 아니다. 내가 아는 보수 교단 목사님들은 직접 QBC를 구입하기도 했다. 물론 교단 성향 때문에 있어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들도 있겠지만, 다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주석적이고 전혀 생각하지 못한 통찰을 줘서 성경을 읽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씀하시더라.

유연희 / 내 주변에 있는 전통적인 구약 성서학자들도, "QBC가 무조건 퀴어를 지지하는 책인 줄 알았더니 굉장히 학문적이고 설득력 있다"고 이야기한다. 비판하기 위해서는 일단 읽으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내용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읽지도 않고 평가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리고 QBC 자체가 퀴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강화한다기보다는, 한국교회가 '퀴어'라는 말이 들어가는 모든 것을 반대하기 때문에 문제라고 생각한다. 보수 교회의 프로파간다에 퀴어 혐오를 내재화하고 있는 사람들은 뭐가 나와도 반대하게 돼 있다. 이들이 과잉 대표 돼 있을 뿐이지, 대부분 교인은 그렇지 않다. 진정성과 학문성을 바탕으로 대화해 보면 마음이 열리는 것을 자주 봤다.

"새로운 시각으로 읽지 않으면, 성경은 죽는다"

- QBC 해석을 두고 "다양성을 이유로 모든 해석을 존중해야 하는가"라는 지적도 있는데.

정혜진 / 해석의 자유를 관용하는 문제와 관련해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그 해석이 이웃 사랑이라든지, 예수가 누구를 위해 죽었는지와 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와 어떻게 연결되느냐를 질문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혐오를 위한 해석이나 타자를 억압하는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해석이 정말 신앙에 근거하는지, 그리스도교 신앙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스스로 답해 봐야 한다.

변영권 / 존 도미닉 크로산의 책 <어떻게 성서를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를 보면,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항상 '역사적 예수'에 서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성서를 읽는 기준은 항상 그것을 통해서 '어떻게 사람을 더 사랑할 수 있는가', '세상을 어떻게 더 선하게 이끌어갈 수 있는가'여야 한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혐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용하고 용서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 한다. 각자 해석의 다양성을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지 생각은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사랑이 넓어지고 다른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도록 교회 문을 넓히는 방향이어야지, 그 반대로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유연희 /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하는 해석이 제일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해석의 역사가 그걸 입증했고. 예를 들면, 십자군 전쟁이나 매니페스토 운동처럼 남의 땅을 빼앗을 때도 성경을 근거로 했다. 지금의 혐오주의자들도 그렇다. 그냥 혐오하면 힘이 없으니 자기들 나름의 성서 해석에 기반한다. 문제는 서로 다른 해석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해 주면 되는데, 일부 지도자가 폭력과 혐오를 부추긴다는 것이다.

유연희 회장은 성서 해석의 다양성은 존중돼야 하지만, 폭력과 혐오를 부추겨셔는 안 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유연희 회장은 성서 해석의 다양성은 존중돼야 하지만, 폭력과 혐오를 부추겨셔는 안 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 QBC와 실제 교회 현장의 괴리를 어떻게 하면 좁힐 수 있을까.

변영권 / QBC 출애굽기 편의 모세 얘기로 설교한 적이 있다. 모세가 한 번이라도 소속감을 느낀 적이 있었을까 하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퀴어적인 관점도 아니다. 성경을 읽으면 그대로 나오는 건데 우리가 잘 몰랐던 거다. QBC라고 해서 성애적 내용만 있는 게 아니라, 일반 교인들도 공감하고 나눌 수 있는 부분이 충분히 있다. 목사들이 조금 더 용감해져야 한다. 교인들도 지금까지 늘 듣던 얘기가 아닌 새로운 것에 대한 궁금증이 있다. 물론 난데없이 새로운 것을 제시하면 거부감이 일어나니까 교회 현장 분위기와 소통 방식을 고려하는 등 기술적인 면도 필요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천천히 오랜 기간을 두고 조금씩 관점을 열어 가야겠다는 마음이 있다.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QBC가 지금 이 시대에 줄 수 있는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일까.

정혜진 / QBC는 하나의 퀴어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인종과 지역, 성 정체성을 가진 저자들이 각기 다른 삶의 현장과 시각을 보여 준다. 나는 앨라이지만, 주석을 읽으며 퀴어 경험을 다채롭게 확장할 수 있었다. 제한된 경험으로 성서를 이해하려 했던 한계를 깨닫고, 어떤 이들의 삶의 자리에서는 텍스트가 완전히 다르게 읽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준 점에서 QBC가 한국교회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연희 / 목회적 차원도 있다고 본다. 혐오가 난무하는 한국교회에서 크리스천 퀴어 당사자들이 퀴어 해석을 접하고 숨 쉴 수 있을 것 같다. 교회에 퀴어 당사자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목회자들에게도 탄탄한 자료가 될 것이다. 또 하나는 학문적인 차원이다. QBC는 학제 간 연구를 비롯해 새로운 학문적 동향을 담고 있다. 이런 자료가 번역된 것과 번역이 안 돼 있는 건 엄청난 차이다. 한국 신학계에도 기여할 거다.

변영권 / 성경을 다시 살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을 계속해서 여성 혐오적인 텍스트로 읽으면, 여성들이 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죽을 거다. 우리가 여성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고, 여성을 위한 구절을 찾아내 해석해서 성경이 시대에 뒤떨어진 옛날 문서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퀴어신학도 마찬가지다.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공포의 텍스트 몇 개를 가지고 소수자를 억압하는 용도로 읽으면 성경은 결국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문서가 될 수 있다. 이런 새로운 시각이 나오면서 성경이 여전히 생명력 있고 인간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담고 있는 말씀으로 살아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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