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나 이거 못 읽겠어." 제목만 보고 책을 가져간 엄마는 30분도 지나지 않아 눈과 코가 발개져 돌아왔다. 온라인에는 엄마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남긴 후기가 많다. 힘들게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중도 포기했다거나, 읽다 울기를 반복하며 여러 번에 걸쳐 다 읽었다는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이매진)는 친족 성폭력 생존자가 한국 사회에 내놓은 첫 수기집이다. '목사'였던 아버지에게 9년간 성적 학대와 각종 폭력에 시달려 온 저자는, 대학교 1학년이 된 1994년 집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도움을 받아 치유 과정을 시작해 약 10년에 걸쳐 피해 사실을 글에 담았고, 이를 묶어 2012년 세상에 내놓았다.

초판 발행 8년 만에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개정판이 나왔다. 가장 큰 변화는 저자 이름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초판에서 가명을 택한 과거의 '은수연'은 개정판에서 '김영서'라는 실명을 공개했다.

친족 성폭력 피해 생존자로서, 또 다른 성폭력 피해 생존자를 상담하며 살아가는 김영서 상담사를 3월 16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처음 책을 출간했을 때부터 개정판을 발행하기까지, 그동안 다양하게 고민했던 결을 나눴다. 유사한 상황에 처한 피해자들과 함께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운동을 하게 된 이야기와 목사였던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으면서도 신앙을 놓지 않았던 이유도 들을 수 있었다.

"아직도 책을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난다"고 밝힌 김영서 상담사는 인터뷰 도중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여러 차례 눈물이 차오르며 목소리가 떨리기는 했다. 하지만 이내 담담함과 쾌활함을 오가며 인터뷰에 임했다. 재밌고 수다스럽지만 사려 깊은, 잘 알고 지내던 동네 언니를 만난 듯 편하게 대화를 나눴다. 김영서 상담사와 나눈 이야기를 정리했다.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저자 김영서 상담가는 오랜 고민 끝에 실명을 공개하게 됐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저자 김영서 상담가는 오랜 고민 끝에 실명을 공개하게 됐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성폭력 피해에서 살아남아
다른 피해자 돕는 생존자 '김영서'

"2012년에 이 책을 낸 저는 처음으로 목소리를 낸 친족 성폭력 피해자이자 생존자 '은수연'으로 살았습니다. 이제는 그 꼬리표 없이 '김영서'로 살겠습니다." (8쪽)

- 첫 출간 후 8년 만에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먼저 실명을 공개하기로 결심하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사실 본명으로 바꾸면 좋겠다는 건 1년 넘게 고민하던 일이에요. '큰일이야 나겠어' 하면서도 두려운 마음도 들어 망설이고 있었죠. 제가 하도 걱정하니까 "너무 걱정되면 그냥 하지 말라"고 하는 친구도 있었고, "어차피 이 책은 상담자나 여성운동 하는 사람들, 피해 생존자가 많이 보는 책이니 염려하지 마라"고 얘기해 주는 친구도 있었어요. 고민이 쉽게 끝나지 않더라고요.

복합적인 이유로 실명을 공개하게 됐는데요. 우선은 제가 하는 일과 관련 있어요. 현재 디지털 성범죄 피해 생존자들을 상담하고 있는데, 10~20대가 특히 많아요. 디지털 성범죄 피해 생존자들은, 어찌 됐든 자신이 영상을 찍는 데 동의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더 힘들어해요. 하지만 동의했든 안 했든 그들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다"고 계속 말하고 있어요. 제가 처음 집을 탈출해 한국성폭력상담소를 찾았을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기도 하고요. 만나는 피해자들에게, (영상 촬영) 동의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찍고, 돌려 보고, 판매한 사람이 문제라고 계속해서 이야기해요. 피해 생존자들 수치심을 조금이라도 낮추려는 거죠. 이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나도 아직 해결하지 못한 내 안의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본명을 써야겠다' 생각하고 있었어요.

성폭력 전문 상담사로 활동하면서 각종 폭력 예방 강사로 강의하러 가기도 해요. 그동안 강의하면서 강사 프로필에 책 이름을 함께 적었어요. 따로 내용을 소개하거나 하지는 않고요. 경찰, 공공 기관, 학교 등 다양한 곳에서 강의했는데, 강사로서 제 실명과 '은수연'이 썼다는 책을 동시에 언급해도 별일 안 일어나더라고요.(웃음)

먼저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해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젊은 층은 제 책을 읽었다며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해요. 한번은 인천의 한 고등학교에 강의하러 갔는데, 어떤 학생이 저에게 달려오더니 "선생님 제가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때마다 이 책을 읽었어요. 읽으면서 작가가 진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꼭 만나고 싶었는데 오늘 이렇게 우연히 만나서 정말 기뻐요"라며 펑펑 울더라고요. 책을 써 줘서 고맙다면서요. 어느 대학원에서 강의할 때도 한 대학원생이 와서 "선생님 책 잘 읽었어요"라고 조용히 언급하고 가기도 하고요. 이런 경험들이 쌓이고, 스스로도 조금 더 편안해지면서 용기를 얻게 된 것 같아요.

그러던 차, 지난해 아버지가 죽었어요. 그 사람의 죽음이 실명 공개에 큰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에요. 이제 아빠라는 사람이 더 이상 나를 물리적으로 괴롭힐 수 없게 됐잖아요. 그 사람이 죽기 전까지는 그 존재가 나에게 그렇게까지 압박을 주는지 몰랐는데, 그가 죽고 나니까 확 느껴지더라고요.

'은수연'은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식지에 글을 연재할 때 쓴 '수'라는 필명에 살을 붙인 거예요. 여린 것 같기도 하고 가상의 인물 같은 느낌도 있었죠. 하지만 김영서는 달라요. 영서는 실제로 일하고 교회도 다니는, 우리 곁에 쉽게 있을 법한 존재예요. 책에 친족 성폭력 피해 생존자는 어떤 삶을 살고 어떻게 사고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수연의 한마디'라고 적은 게 있는데요. 이제 그게 '영서의 한마디'가 되었어요. 이전보다 더 살아 있는 말처럼 느껴져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다른 피해자들도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 성폭력 피해를 향한 이상한 시선이 사라졌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실명을 공개하게 됐어요.

가해자는 아빠이자 목사
"나중에 하나님 만났을 때
고통의 의미 깨달을 수 있었으면"

- 가해자는 아버지이자 목사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을 더욱 경악하게 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신앙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면.

그 사람이 믿는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은 다르다고 늘 선을 그었어요. 가해자가 설교할 때는 그 앞에 앉아 부러 듣지 않고 성경을 읽었죠. 그래서 몇 번 맞기도 했어요. 저에게 하나님은 생존과 직결되는 하나님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마주한 이 악한 상황을 바꿔 주길 간절히 바라고 기도한 거죠. 책에도 썼지만, 어린애가 백일기도를 17번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100일씩 17번을 세면서 한 기도는 똑같았어요. 이 상황을 바꿔 달라는 것. 모든 걸 포기할 정도로 긴 시간이었지만, 기도 덕분에 제 삶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김영서 상담가는 100일 기도를 17번 연달아 하며 이를 빠지지 않고 셌다. 그는 그 기도 덕분에 삶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했다.
김영서 상담가는 100일 기도를 17번 연달아 하며 이를 빠지지 않고 셌다. 그는 그 기도 덕분에 삶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했다.

사실 제가 하나님한테 고분고분하게만 기도하는 건 아니거든요. 저는 하나님에게 욕도 해요.(웃음) 원색적으로 "내가 지금 당하는 어려움을 알고는 있어요?"라거나, "아 XX 지금 보고는 있는 거야? 내 기도 듣고는 있는 거야?" 이러기도 하죠.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하는 건 아니지만, 혼자 있을 때건 언제 건 하나님에게 묻게 되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그 상처 가운데 있을 때도 "하나님, 이 악한 시간이 끝나긴 하는 거죠?"라고 많이 물었으니까.

여전히 교회 다닌다고 하면 제가 뭔가 신앙적으로 단단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요. 저는 여전히 제 믿음 없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하나님과 씨름하며 사는 것 같아요.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답을 들으면 좋겠지만, 나중에 언제라도 하나님을 만났을 때 '아하' 이러면서 내가 왜 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 냈어야만 했는지 깨달아지면 좋겠어요. 그걸 바라면서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거고요. 그분이라면 답을 주실 수도 있지 않겠어요?

책에 아버지를 용서한다는 편지를 썼지만, 사람들에게는 "용서는 매일 다시 새롭게 갱신하는 것"이라고 말해요. 그때그때 미운 마음이 되살아나면 갱신하고 다시 결단해요. 용서의 편지 한번 썼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더라고요. 매일을 살면서 새로운 감정이 계속 생성되기 때문에 다시 한번 결단해야 하죠. 그래서 성경에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했나 봐요. 그 말씀의 의미가 생생하게 와닿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부끄러운 이야기이기도 한데요. 저는 지금 예수님 믿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어요. 어렸을 때부터 나는 왜 이렇게 힘든 삶을 살아야 하는지 고민했잖아요. 하나님에게 항상 제 삶의 의미를 물어야만 했고, 그 상태로 지금까지 버텨 온 것 같아요.

- 한동안 교회에 다니지 않다가 다시 교회에 다닌다고 들었어요. 지금의 교회에 정착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제 사정을 당시 교회 안에서 편하게 이야기하지는 못했어요. 교회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글쓰기 치유 모임 등이 더 편했죠. 교회에서 왜 이야기 꺼내기가 쉽지 않았나 생각해 보면, 교회는 '성 = 음란한 것'으로만 인식했던 것 같아요. 성폭력은 그것과 별개 문제인데도 '성'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인식한 거죠. 또 하나는, 교회는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 낼 수 있는 사람들만 다니는 축복받은 공동체여야 하는 것 같았어요. 저는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 아웃사이더가 되어 가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전 교회는 대학에 가야 대학부고, 나이가 차면 결혼해서 여선교회 부서 활동도 해야 하고, 나이가 들어서도 결혼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만드는 곳이었어요.

다행히 지금 다니는 교회는 그렇지는 않았어요. 여성 목사님이 있어서 그런지 부정적인 느낌을 많이 누그러뜨려 주는 공동체예요. 이 교회로 옮기면서 제 상황을 설명하고 신앙생활을 다시 해 보고 싶다고 솔직하게 얘기했어요.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여성 목사님에게 영성 지도를 받는데, 목사님은 제가 궁금해하는 것들, 불편해하는 지점을 다 들어 주세요. 이 과정을 거치면서 이 교회는 제가 불편하게 느끼는 지점을 이야기해도 되는, 어느 정도 안전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죠. 지금 목사님을 만나면서는 아빠라는 사람이 교회랍시고 하던 그곳에서 알던 예수와 다른 예수를 알게 됐고, 안정감을 느끼고 있어요.

그런 차원에서 한국교회 현장에서 활동하는 여성 목사가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 교인 중 여성 비율이 높은데, 그들을 치리하는 목사 대부분은 가부장적으로 사고하는 남성이잖아요. 이 시스템을 깨려는 시도 없이 교회의 변화가 가능할까 생각도 들어요.

피해자성 매몰되지 않기 위해
과거 상처와 직면해 온 지난날
"친족 성폭력은 '평범한' 가정에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
사람은 죽어도 죄는 남아
가족 악용했으니 가중처벌해야"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를 폐지하고 피해자들을 힘들게 하는 편견과 오해를 없애는 활동을 시작하려 합니다. 그런 작은 목소리에 힘을 보내려 합니다. 저는 '은수연'이라는 필명을 '김영서'라는 본명으로 바꾸고 저를 이 세상에 드러내기로 했습니다. 이제부터 있는 힘껏 말하고 다닐 작정입니다." (10쪽)

- 친족 성폭력 이야기를 좀 더 해 보면 좋겠습니다. 책날개에 보면 "성폭력이라는 문제가 '개인의 재수 없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쓰셨는데요. 깨달음을 얻기까지 가장 도움이 된 건 무엇이었나요.

(곰곰이 생각한 후)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대학교 1학년 때 집을 막 탈출했을 때는, 나에게 굉장히 재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몰랐죠. 그때는 나한테 일어난 일에 붙일 이름도 없었어요. 이름 없는 범죄는 피해자를 애매하게 만들고 개인에게 모든 잘못을 전가합니다. 분명 재수 없는 일을 겪고 있기는 한데 뭔지는 모르겠으니, 나라는 존재를 삭제해야만 문제를 없앨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했죠. 그런데 집을 나와서 보니 그 일로 죽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가해자라는 사실이 명백했어요. 가해자는 그걸 알았기 때문에 나를 그렇게 때리고 협박하면서 입을 틀어막았겠죠.

친족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은 친족 성폭력이 '평범한'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일이라고 했다.
친족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은 친족 성폭력이 '평범한'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일이라고 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쉼터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너의 잘못이 아니다"였어요. 솔직히 그때는 그 말의 뜻이 가슴까지 와닿지는 않았어요. '그래 내 잘못이 아니래' 이러면서 다짐하듯이 머리에 새겼죠.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데, 저는 한 20년 가까이 걸린 것 같아요. 피해를 겪은 시간(9년)의 두 배수는 넘게 걸렸네요. 그사이 상담 쪽 일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당한 사람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이 누구보다 이해가 가는 거예요. 그래서 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어요. 성범죄 피해 생존자들에게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려면, 제가 겪었던 일도 제 잘못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필요하더라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간 저 자신에게 굉장히 엄격했어요.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진짜 그 일이 내 잘못이 아니라고 느끼는지, 나를 통찰하려고 노력했죠. 여러 관계에서 혹시 내가 나를 피해자로 상정하고 이해받거나 배려받고 싶어 하지 않는지 부러 예민하게 돌아봤어요. 괜히 내 경험 때문에 눈앞에 놓인 현상을 삐딱하게 보는 건 아닌지 항상 점검했고요. 혹시라도 내가 감정에 얽혀 있지는 않은지, 상담하면서 내담자의 경험을 다시 나의 경험에 대입해 생각하는 건 아닌지, 또 다른 상담사에게 끊임없이 감독을 받았어요. 과거 기억을 계속 직면하는 게 힘들긴 했지만 대충 넘어가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까지도 계속 상담받고 있는데요. 덕분에 돈도 시간도 많이 들었지만, 그 시간을 호락호락하게 보내지 않았기에 진짜 제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죠. 어떻게 보면 나를 아꼈기 때문에 더 나에게 집중한 것일 수도 있어요.

- 얼마 전 SBS '그것이알고싶다'에서 친족 성폭력 문제를 다뤘습니다. 피해 생존자들이 이에 문제 제기하며 거리 플래시몹까지 했습니다. 왜 그들은 방송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건가요.

지상파 탐사 보도 프로그램이 친족 성폭력을 다룬다고 해서 다들 기대가 많았는데, 막상 방송을 보니까 너무 이상한 방식으로 다룬 거예요. 이전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어요. 진행자 김상중 씨가 계속 "여전히 믿기 힘드실 겁니다", "끔찍하실 수도 있습니다", "채널을 돌리고 싶으실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하는데요. 친족 성폭력은 '끔찍한', '충격적'인 단어로만 설명해서는 안 되는 일이에요. '평범한' 가족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일이고 그 '평범함'이 친족 성폭력을 은폐하죠. 겉으로 보이는 '평범한' 가정의 틀만 유지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우리 가정만 해도 그랬어요. 아빠가 목사인데 딸이 초등학교 5학년일 때부터 성폭행했어요. 다른 가족이 몰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엄마가 아프다가 돌아가시기는 했지만, 엄마도 딸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고… 좀 비겁했어요. 밖에서 볼 때 우리 집은 그냥 평범한 교회 목사님 가정이었어요. 나는 그냥 교회 집 딸내미, 엄마는 교회 집 아픈 사모. 밖에서 볼 때 아주 평범한 이 집을 계속 유지하는 건 가해자예요. 가해자는 자신의 폭력을 들키지 않게 교묘하게 사람을 때릴 수 있으니까요. 아빠는 엄마 얼굴은 절대 안 때렸어요. 밖에서 들키면 안 되니까. 누구는 가족들이 동조했기 때문에 이 폭력이 반복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동조라기보다 폭군 같은 가해자의 협박 아래서 어쩔 수 없이 노예처럼 살아가는 거예요.

지금 디지털 성범죄도 마찬가지예요. 디지털 성범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영상에 나오는 여성들이 왜 피해자인지 이해하지 못해요. 자기들이 직접 찍어서 업로드했는데 그게 왜 피해냐고 하는데요. 가해자들이 그들을 어떻게 노예화했는지는 모르기 때문이에요. 시대가 바뀌면서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방법도 바뀌었어요. 피해 양상이 달라졌어도, 사람을 노예화하면서 외부로는 평범함을 유지하는 방식은 같다고 봐요.

저는 정말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학교에서도 별문제 없는, 공부 잘하는 아이였어요. 좀 조용하고 말 없고 혼자 앉아 있는 학생 정도. 가해자는 늘 "어디 가서 말하면 죽여 버릴 거다"라는 말로 저를 세뇌했어요. 그러니 지금처럼 학교에 상담 선생님이 상주해도 아마 털어놓지 못했을 거예요. 내가 뭘 잘하든 잘못하든 상관없이 맞고 성폭행당하고, 그런 비정상적인 삶이 반복되면 사람이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가 없어요. 그냥 매일 지옥 같은 현실이 반복되는 거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깨닫게 되는 시점은 그 현실을 벗어난 후예요. 깨달았다고 해도 피해를 바로 증언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요. 해리성 장애가 와서 기억이 안 나고, 기억이 파편적으로 존재하는 경우도 있어요. 한참 상담받은 후에야 그동안 겪은 일이 다 떠오르는 경우도 있고요.

친족 성폭력은 이렇게 평범한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일인데, 언론은 이를 너무 자극적인 방법으로만 소비해요. 보는 사람들은 "세상에 어떻게 저런 일을 저지를 수가 있대" 이러면서 지나가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이를 외면하거나 그 안의 진짜 문제를 알려고 하지 않아요. '그것이알고싶다'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말하는 사람들 모임 - 공폐단단'이 모여 서울 시내에서 '그 평범을 깨고, 우리의 평범을 찾자'는 이름으로 행동하게 됐어요.

김영서 상담가는 또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지난해 서울 시내 곳곳을 돌며 친족 성폭력이 평범한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알렸다. 사진 제공 한국성폭력상담소·혜영
김영서 상담가는 또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지난해 서울 시내 곳곳을 돌며 친족 성폭력이 평범한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알렸다. 사진 제공 한국성폭력상담소·혜영

"그 사람이 세상에서 사라졌어도 가족 관계는 계속 남아 있습니다. 제게 새겨진 폭력의 기억은 그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지금도 존재합니다. 그 사람은 죽은지 몰라도, 그 사람이 저지른 범죄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악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악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11쪽)

-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말하는 사람들 모임 - 공폐단단'은 어떤 모임인가요.

친족 성폭력에 공소시효라는 걸 대체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사람이 죽어도 관계는 끝나지 않거든요. 저도 아빠가 죽었지만, 그 사람은 여전히 제 아빠예요. 솔직히 아버지라는 존재가 주는 압박감이 얼마나 큰지 몰랐어요. 그런데 아빠가 죽고 나니까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게 너무 좋은 거예요. 개정판 서문에도 썼지만, 그날을 '악이 사라짐'이라고 표현했어요. 독자들은 제가 책에 용서의 편지를 넣었다고 해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됐을 것이라고 생각하시기도 하는데요. 용서했다고 해서 과거 일이 다 없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용서는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거지, 절대 가해자를 위해 하는 게 아니에요. 저도 상담하면서 그렇게 얘기해요. 용서는 그 사람의 자유로움을 위해서도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서도 아닌 온전히 저를 위해 한 거거든요. 누구 한 사람을 미워하는 일도 에너지가 필요한 일인데, 저에게는 그런 일에 쓸 에너지도 없었어요.

죽고 나서도 영원히 아빠, 오빠, 삼촌인 사람들이 저지른 성폭력에 누가 감히 공소시효를 말하는 건가요. 공소시효라는 게, 이 같은 친족 성폭력 특성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제도예요. 친족 성폭력이 '심각하다', '끔찍하다'고들 말하죠. 그런데 그렇게 심각한 범죄라면서 아무 문제의식 없이 공소시효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면, 진짜 심각하다고 이해하고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어요. 만약 13세 전에 성폭력 피해를 겪었다고 가정해 봐요. 13세면 초등학생이에요. 자신이 성폭행당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고소할 용기를 내는 데까지 시간이 걸려서, 늦게서야 고소하려고 날짜를 세 보면 공소시효가 몇 개월 지난 상태예요. 그래서 신고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제 경우만 봐도, 성인이 되어도 가해자는 여전히 아빠라는 관계로 남거든요. 아빠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의식불명이 되어서 중환자실에 있을 때, 마지막으로 그를 보러 간 적 있어요. 그는 이미 의식도 없고 산소마스크를 끼고 있을 정도로 연약한 상태인데도 제 몸이 무서워하더라고요. 몸이 덜덜 떨리고 경직되고. 현실적으로 저는 그 사람보다 더 건장한 게 분명한데도 몸의 반응은 아니었어요. 아무리 제가 성인이 되어도 어릴 때 기절할 때까지 맞던 그 아이는 여전히 제 안에 살고 있죠. 산소마스크를 떼려고 마음만 먹으면 뗄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연약한 상황인데도 제 몸이 얼어 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친족 성폭력은 관계가 변하지 않기에 다른 성폭력과 다르게 다뤄야 한다고 깨달았어요.

가족 관계는 '천륜'이라 끊을 수 없다면서, 왜 공소시효는 마음대로 정하는지 모르겠어요. 가족 관계는 어떻게든 안 끊어지니까 오히려 더 가중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해자가 징역 7년을 받았는데, 저는 너무 적다고 생각했거든요. 나는 9년 동안 당했는데, 가해자가 그 배수는 감옥에서 살아야 할 것 같은데, 그것보다 적은 형을 받았으니까요. 1994년 당시 상황에서는 중형이라는 분석이 많긴 했어도, 저는 그 7년이 너무 무서웠어요. 순식간에 지나갈 것 같고…. 언제든 가해자가 나타나 제 등에 칼을 꽂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기도할 때도 항상 구석진 곳에 가서 등을 대고 기도했어요. 다른 사람에게 제 등을 보일 수가 없더라고요.

김영서 상담가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 담담하게 또 다른 피해 생존자를 도우며 살아 가겠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김영서 상담가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 담담하게 또 다른 피해 생존자를 도우며 살아가겠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 한국 사회에 바라는 점이나 앞으로 활동 계획이 있으시다면.

어떤 성폭력 피해인지 상관없이, 피해 생존자들이 자기를 드러내는 데 두려움이 없는 사회가 되면 좋겠어요. 피해자가 숨는 게 아닌 가해자가 숨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나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들이 체포되거나 신상이 드러날까 전전긍긍해야 하는 사회가 된다면, 피해자들은 굳이 숨을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성폭력은 피해자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사회 전체가 한목소리로 인정하기 시작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게 되었으면 해요.

친족 성폭력 피해는 지금까지도 저에게 현재진행형이에요. 그런데도 은수연이 아닌 '김영서'를 택한 건, 이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아니라는 점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김영서라는 이름은 아빠가 지어 준 이름이 아니고, 집을 탈출하고 몇 년 후 제가 스스로 지은 이름이에요. '영원한 서약'이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 보내는 통로가 되고 싶었어요. 그게 어떤 방식일지는 몰라도, 내가 사랑을 충분히 받았으니까 그걸 흘려 보내는 삶을 살고 싶어요. 책에도 썼지만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담담하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저는 아직도 제가 쓴 책을 보면서 많이 울어요. 눈물에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함께 분노하고 욕하고 우는데, 그런 게 사회에 자정작용을 하는 것 같아요. 이 문제에 같이 분노할 수 있는 것도 큰 힘이에요. 함께 읽으면서 친족 성폭력을 끔찍하게만 보는 것이 아니라,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식하면 좋겠어요. '피해자가 수치스러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함께 느끼고 깨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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