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5:1-6, 시 33:12-22, 히 11:1-3, 8-16, 눅 12:32-40
| 청어람ARMC가 '세속성자 주일예배'라는 이름으로 매주 예배문을 연재합니다. 청어람ARMC에서 구성한 필진이 교회력에 따라 본문을 선정하고, 묵상을 나누며, 기도 제목을 공유합니다. 연재는 해당 주일 이틀 전인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
성령강림절 후 아홉째 주일, 입추가 지난 주일입니다. 두려움을 내려놓고 깨어 기다리는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로 나아갑시다.
| 본기도 |
영원하신 하나님, 주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늘의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이 이루시기까지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우리가 두려움과 조급함을 이겨 내고 하늘의 고향을 소망하며 깨어 기다리게 하소서. 날마다 성령으로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찬양 |
누구나 삶의 시작은 작구나 / 나의 갈 길 다 가도록(찬 384)
시편 33편 12-22절
12 주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한 나라 곧 주 하나님이 그의 기업으로 선택한 백성은 복이 있다. 13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사람들을 낱낱이 살펴보신다. 14 계시는 그 곳에서 땅 위에 사는 사람을 지켜 보신다. 15 주님은 사람의 마음을 지으신 분, 사람의 행위를 모두 아시는 분이시다. 16 군대가 많다고 해서 왕이 나라를 구하는 것은 아니며, 힘이 세다고 해서 용사가 제 목숨을 건지는 것은 아니다. 17 나라를 구하는 데 군마가 필요한 것은 아니며, 목숨을 건지는 데 많은 군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18 그렇다. 주님의 눈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살펴보시며, 한결같은 사랑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살펴보시고, 19 그들의 목숨을 죽을 자리에서 건져내시고, 굶주릴 때에 살려 주신다. 20 주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요, 우리의 방패이시니, 우리가 주님을 기다립니다. 21 우리가 그 거룩한 이름을 의지하기에 우리 마음이 그분 때문에 기쁩니다. 22 우리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 우리에게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 말씀 |
창세기 15장 1-6절
1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2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뿐입니다. 3 주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말씀드리니, 4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5 주님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히브리서 11장 1-3절, 8-16절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2 선조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으로 증언되었습니다.
3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에서 된 것이 아닙니다. ..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고, 장차 자기 몫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 것입니다. 9 믿음으로 그는, 약속하신 땅에서 타국에 몸 붙여 사는 나그네처럼 거류하였으며,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을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10 그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바랐던 것입니다. 11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가 지나서 수태할 수 없는 몸이었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가 약속하신 분을 신실하신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2 그래서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한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많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셀 수 없는, 많은 자손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13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14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네가 고향을 찾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15 그들이 만일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16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더 좋은 곳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늘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누가복음 12장 32-40절
32 두려워하지 말아라. 적은 무리여, 너희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33 너희 소유를 팔아서,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고, 하늘에다가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도둑이나 좀의 피해가 없다. 34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36 마치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곧 열어 주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되어라. 37 주인이 와서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이 허리를 동이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나 새벽에 오더라도,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다. 39 너희는 이것을 알아라. 집주인이 언제 도둑이 들지 알았더라면, 그는 도둑이 그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 두려워하지 말아라 적은 무리여 |
전쟁과 학살이 멈출 줄 모릅니다. 경제적 불평등은 일상의 가장 평범한 틈까지 스며들었습니다. 기후는 이미 이 세계가 얼마나 깊이 붕괴되었는지를, 그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또렷이 드러내고 있지요. 무엇보다 거짓과 기만이 너무도 팽배한 시대, "믿음"이라는 단어는 종교적 안락함이나 사적 위안보다 낯설고 고통스러운 물음을 던집니다. "지금 이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으며, 그 믿음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
그래서일까요. "두려워하지 말아라. 적은 무리여,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눅 12:32)라는, 다정하지만 단호한 예수의 말씀이 묵직하게 울립니다. 신앙의 경지를 넘어서, 현실 속으로 깊이 스며듭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불의와 폭력에 침묵하지 않는 자들을 향한 선언이자, 세상의 중심이 아닌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주어진 약속일 겁니다. 하나님나라는 권력의 손에 있지 않으며, 오히려 두려움 속에서도 눈을 감지 않는 이들, 무력함 속에서도 진실을 붙드는 이들, 그리고 불의한 현실에 침묵하지 않는 이들에게 주어지리라는 희망처럼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말하는 믿음은 맹목적 신뢰나 추상적 신념일 리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언어를 빌리자면, 그것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로, 그저 마음속에 간직된 어떤 개념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끌어오고 현실을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체념과 무력감에 굴복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다른 가능성이 있다고 믿으며, 그 가능성을 향해 감히 행동하는 용기, 그것이 믿음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자손이 없는 현실 앞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하늘의 별을 가리키며 말씀하십니다.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막막한 현실 속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었던 태도가 믿음의 본질을 일러 줍니다. 히브리서는 이 믿음을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바랐던 행위로 해석합니다. 그는 익숙한 세계와 안정된 질서, 자기 가족 중심의 보호망을 떠나 이름조차 없는 땅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여기에서도 미래를 꿈꾸는 것, 보이지 않는 본향을 향해 발을 내딛는 용기, 그 결단이야말로 믿음임을 선명하게 알려줍니다.
이처럼 믿음은 본질적으로 불편함을 동반합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눅 12:35) 단순한 종말론적 경계심에 머물지 않고 깨어서 하나님나라를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는 것처럼, 하나님나라도 예고 없이 임하기에, 늘 준비하자는 겁니다. 그 준비는 어렵고 복잡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곳이 하나님나라인 듯, 미리 그 나라를 우리가 살아보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하늘에서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깨어 있는 자들의 실천 속에서 차근차근 다가오는, 구체적인 현실을 통한 전환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33편은 말합니다. "주 하나님이 그의 기업으로 선택한 백성은 복이 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그 복은 군마의 수나 무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한결같은 사랑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온다는 것입니다. 복된 나라는 강대국이 아닙니다. 정의와 자비를 향한 윤리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환대를 이미 겪어 알기에 그 통치가 지금 여기에 있길 바라는 이들의 움직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는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울 줄 아는 사람들, 연대를 실천하고 기꺼이 불편을 감수할 줄 아는 공동체 속에서 시작됩니다.
결국 우리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옵니다. "지금, 이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으며, 그 믿음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
믿음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다림이 아니라 행동이며,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라 오늘의 실천입니다. 지금 이 순간 깨어 있는 자들이야말로 이 땅의 희망이며, 깨어 있는 중에 하나님나라는 이미 이곳에 도래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지금도 적은 무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외롭고, 소외당하고, 때로는 실패해 보이지만, 믿음으로 인해 끝내 눈을 감지 않으려는 사람들. 그들에게서 하나님나라는 시작됩니다.
이민희 / 옥바라지선교센터
| 적용 질문 |
- 읽은 말씀에서 내 마음에 가장 선명하게 새겨진 한 구절은 무엇인가요? 왜 그렇게 느껴졌나요?
- 일상 속에서 나의 믿음은 어떤 구체적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나요? 그리고 그 행동은 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있고, 어떤 미래를 만들어 내고 있나요?
| 세속성자의 기도 |
우리가 깨어 기다리게 하소서
주님, 사는 게 힘들면 마음의 힘이 빠집니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품었던 꿈들도 부질없게 보이고, 이쯤에서 적당히 안주하고 싶어집니다. 스스로를 힐난하고 남들을 질투하는 우리의 못난 모습을 마주하게 되기도 합니다. 죽음뿐인 땅에서 하늘을 상상하게 하신 주님, 성공과 소유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날에도 우리를 살게 하는 생명의 근원을 바라보게 하소서. 때로 초라하게 느껴지는 우리 자신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갖지 못한 내 이웃의 얼굴에서 하늘의 보화를 발견하게 하소서. 지치고 절망스러운 날들을 서성일 때에도 서로를 사랑함으로, 더욱 큰 세상을 향한 소망을 간직하는 은혜를 주소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밝히듯 늘 깨어, 의연히 주님을 기다리게 하소서. 아멘.
기아 위기에 처한 가자지구 시민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하나님,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봉쇄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아사하고 있다는 고통스러운 뉴스를 연일 듣습니다. 가자지구 주민들의 3분의 1이 며칠째 굶고 있다며 유엔이 심각한 경고를 발행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일부 지도자조차, 자국의 봉쇄 정책을 규탄하며 국제사회가 제재에 나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바다에 곡물이 든 통을 던져 가자에 닿게 하는 이집트 시민들이 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이 모든 소식을 하나님도 듣고 계시지요? 무엇보다 하나님은 굶어죽어 가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을 직접 듣고 계시지요? 그런데, 하나님. 왜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왜 아직도 기다리고 계십니까? 왜 전쟁을 멈추지 않으십니까? 왜 평화를 주시지 않습니까? 왜 가자지구에 기본적인 식량조차 주지 않으십니까? 도대체 왜입니까, 하나님. 왜입니까?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들과 유가족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모든 삶과 죽음이 주님의 손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어떤 죽음에 대해서도 우리가 함부로 판단하거나 말할 수 없고, 다만 주님께서 그 생을 거두어 주시고 위로해 주시기만을 구할 뿐입니다. 깊은 슬픔과 절망 속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들을 주님의 크신 자비로 품어 주소서. 그들이 겪었을 고통과 외로움을 주께서 아시니, 주님의 품 안에서 평안히 쉬게 하소서. 사랑하는 이를 갑작스럽게 떠나보낸 유가족들의 아픔을 위로해 주소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슬픔과 자책을 어루만져 주시고, 남은 삶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더해 주소서. 한국사회의 자살율이 너무 높습니다. 우리가 이 아픔을 외면하지 않게 하시고, 함부로 정죄하지 않게 하시며, 섬세한 사랑과 관심으로 함께하며 생명을 격려하게 하소서. 오늘도 깊은 슬픔의 굴레에 빠져 있는 이들을 평화로 감싸 주시고 죽지 않고 살아낼 힘을 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