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국 사회 배리어 프리 건축 앞장선 강 교수, 배리어 프리 하지 않은 교회에 되묻다

인터랙티브 페이지 보기: barrier-free.newsnjoy.or.kr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강병근 교수(건국대 명예)는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배리어 프리·BF)'을 한국 사회에 도입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현재 BF 인증 제도의 법적 근거가 되는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 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장애인등편의법)'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는 교통 약자를 위한 편의 시설을 설치할 게 아니라, 아예 설계 시부터 '무장애'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2021년 6월부터는 서울시 총괄건축가로 재직하고 있다.
제주 '에코랜드', 가평 '쁘띠프랑스' 등을 설계한 강병근 교수는 교회 시설도 무료로 설계해 준 바 있다. 삼척 방주교회(서승원 목사) 설계와 분당우리교회(이찬수 목사)가 만든 가평우리마을 설계를 재능 기부했다. 2023년에는 성서유니온에서 '그리스도인과 삶의 공간'이라는 주제로 생활 신앙 강좌를 진행하기도 했다.
어렵사리 연락처를 구해 이번 <뉴스앤조이>와 무지개신학교의 '교회의 문턱'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인터뷰를 요청하자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짧은 전화 통화에서 했던 "종교 시설이야말로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그의 말 한마디가 인터뷰를 더욱 기대하게 했다. 인터뷰에 앞서 서울시 종로구 교회를 대상으로 한 전수조사의 간략한 통계를 강 교수에게 보냈다. 인터뷰는 4월 2일 서울시청 총괄건축가실에서 진행했다.
|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하라 |
- 먼저 종로구 교회 편의 시설 현황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일단 종교 시설이 해야 하는 기본적인 의무가 뭘까 생각했어요. 인간이 왜 종교를 필요로 하는지 생각해 보면, 종교가 어떤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지 결정됩니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 어느 사람이라도 편안하고 안정적일 때보다는 뭔가 부족하다거나 위기라고 느낄 때,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느낄 때 종교를 찾게 됩니다. 그런 필요를 가장 많이 느끼는 사람이 누구냐. 바로 장애인입니다.
저는 장애인이라는 표현 자체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장애인·비장애인 구분은 너무 의학적으로 사람을 분류해 놓은 거예요. 모든 인간은 똑같아요.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죠. 의학적으로 장애인이 아니더라도, 두 손에 물건을 들고 출입문 앞에 섰을 때는 누구나 불편함을 느낍니다. 스스로 장애를 해제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는 차이일 뿐이죠.
종교 시설은 어떤 자격을 갖춘 사람만 찾아가는 곳이 아닙니다. 어떤 수준이 되는 사람만 오라고 한다면 그것은 종교 시설이라 볼 수 없죠. 종교 시설이라면 모든 시설 중 가장 겸손하고 낮은 곳에서 누구에게나 문을 열어 줘야 합니다. 그 기대에 부응한다고 하면, 종교 시설은 만인이 다가갈 수 있는 조건을 갖춰야겠죠. 지금처럼 몇 퍼센트만 가능하고 몇 퍼센트는 불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간판만 종교 시설일 뿐이지 않느냐"고 말해도 별로 미안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조사 중 작은 교회에서 주로 들은 이야기는 "배리어 프리는 대형 교회의 역할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작은 교회는 법적인 의무도 없고, 자본력이 어느 정도 갖춰져야 편의 시설을 갖출 수 있다는 논리였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활동하시던 시대에도 그런 문제는 있었어요. 당시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잖아요. 그 군중 속에서 예수님께 다가가는 데 장애를 느끼던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걸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삭개오처럼 나무 위로 올라갔던 거죠. 스스로 장애를 해결할 수 없었던, 누워 있어야만 했던 환자는 어떻게 했어요?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신앙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는 침상을 들고 문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지붕을 뜯고 침상을 내렸잖아요. 이게 종교입니다.
제가 되묻고 싶어요. 미처 편의 시설을 갖추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종교를 찾는 분들에게 과연 지붕을 뜯고 침상을 내리는, 그러한 정도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느냐고. '우리는 그럴 능력이 안 됩니다' 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능력이 안 될 수 있어요. 그렇다 해도 최소한 저 정도의 종교적인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다가올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찾아가서라도 예배드려 주겠다는 의지가 있나요? 저는 그게 신앙 공동체이고 종교가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또 임대로 들어간 건물이더라도 편의 시설은 갖출 수 있습니다. 그걸 위해 저희들이 건축기본법을 다 고쳤어요. 장애인 편의 시설이라고 인정받으면 그게 무엇이든 건축기본법에서 말하는 건폐율이나 용적률에 산입하지 아니한다고 이미 고쳐 놨습니다. 십수 년 전에요. 또 한 가지, 소규모 건물에는 편의 시설을 만드는 것을 면제해 준 것이지,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의무를 부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 반면, 법적인 의무가 있는 대형 교회에서도 권장 사항뿐 아니라 의무 사항도 지키지 않은 모습이 더러 있었습니다. 법적인 의무는 다 했더라도, 장애인 화장실을 창고처럼 쓰는 등 적절하게 활용되고 있지 못한 경우도 있었는데요. 무엇이 문제라고 보시나요.
법적 의무 때문에 한다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종교의 의무하고는 상관이 없는 거예요. 법적 의무 따져 가며 종교 활동 하는 사람이 있나요? 그리고 법적 의무가 없더라도 돈 되면 다 해요. '이런 분들이 오면 훨씬 장사가 잘된다'고 하면, 동네 구멍가게도 하지 말라고 해도 합니다. 꼭 법적 의무로 정해서 문턱을 낮추고 문을 넓히고 누구나 다가올 수 있게 만든다, 그러지 않아요. 내가 이걸 해서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면 법을 떠나서 다 해요.
의무가 아니어도 의무 이상으로 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종교이고 종교 시설입니다. 어떻게든 의무를 이탈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그게 자랑스럽지 않겠어요? 그런데 종교 시설이 법적 의무니까 한다? 그러니까 해놓고도 형식에 그치는 거예요. 해 보니까 안 쓰더라, 이용 빈도가 낮으니까 괜히 웃돈 들여서 만든 것 같고, 그러니까 창고로라도 쓴다, 이런 거죠. 실제로 장애인이 가서 쓰려고 하면 못 쓰는 거예요.
그간 장애인'만' 쓰게 해 달라는 요구를 한 적이 없어요. 장애인'도' 쓸 수 있게 해 달라는 요구였죠. 장애인만 쓰게 하지 말자는 건 이미 우리 사회가 합의한 내용이에요. 장애인 '전용'은 딱 하나, 주차장밖에 없습니다. 모든 장애인이 쓰는 것도 아니고 보행에 어려움이 있는 분들만 한정해서 쓰는 겁니다. 나머지 화장실, 승강기, 어떤 것도 장애인 전용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혹시 이참에 화장실에 장애인 '전용'이라고 써 놓으셨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가족 화장실', '다목적 화장실'로 이름을 바꾸시길 바라요. 그리고 같이 쓰세요. 대신 한 가지는 지켜 줘야 합니다. 줄을 늦게 섰더라도 다른 선택지가 없는 장애인에게는 양보하셔야 한다는 거죠.
- 한국 사회 고령화에 따라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고령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고령자가 다수인 시골 교회에서는 다수의 교회가 경사로를 설치하는 등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혹은 목사나 장로 등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이가 이동 약자가 되었을 때 예배당 시설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노약자가 다수가 되거나, 중책을 맡은 이가 이동 약자가 되었을 때에야 시설을 바꾸는 방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인간은 가르치지 않아도, 막 태어난 아기도 기본적으로 하는 것이 뭐냐. 자기 필요를 채우는 겁니다. 안 가르쳐도 해요. 그러면 우리가 교육을 받고 더군다나 종교를 갖고 소양을 쌓는 이유가 뭘까요. '어떻게 하면 남의 필요를 채우는 삶을 살까'가 삶의 기준이 돼야 합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생을 마칠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일이죠. 그래야지 다른 사람을 우선하는 '배려'라는 것도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나부터 하는 건 안 가르쳐도 다 해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본인 스스로 장애라는 불편한 것을 내려놓을 수 없는 사람을 위해 내가 어떤 필요를 채워 주면 될까 생각해 보는 거죠. 그걸 그분 스스로 말하면 요구가 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먼저 하게 되면 배려라고 하는 거죠. 우리 사회에 이 배려가 너무 부족해요.
인식을 바꿔야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이가 들고 노화하는 건 막을 수 없어요. 누구나 시간에 흐름에 따라 고령화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 불편한 분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미래의 자신의 필요를 미리 채우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려해야 하고 무엇을 만들어야 하고 제공해야 하는지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봐요. 돈이 아니라 생각, 인식 개선이 가장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결국 장애인 등 교통 약자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인식' 문제라고 짚어 주셨는데요. 사실 인식 개선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인식을 바꿔야 할까요.
어렵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입니다. 그게 어렵기 때문에 인간을 교육하고, 때로는 법으로, 때로는 종교로, 수없이 많은 사회 시스템으로 생각을 바꿔 주려고 하는 거죠. 그 생각이 정제되고 사회에 안착하면, 인식을 넘어 문화가 되고, 그 문화의 궤적이 역사가 되는 거잖아요. 그걸 뒤돌아보면서 찬란한 문화, 훌륭한 역사라고 자랑하는 거 아니겠어요?
사실 저는 '교회'라는 명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신앙 공동체'가 맞다고 봐요. 교회라는 말이 너무 물질화했어요. 건물이라는 물리적인 요소에 너무 집중한 거죠. 그렇다면 이 신앙 공동체가 인식을 개선해야 할 텐데, 한번 바꿔서 생각해 보면 금방 개선될 수도 있다고 봐요. 자기 필요를 위해서 신앙 공동체가 있다고 한다면, 그게 상업 시설과 뭐가 다르죠? 어디가 교인이 많고 헌금 규모가 크다, 어디가 1등이고 2등이고 3등이고…. 공동체를 이루는 목적이 '남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규모가 크든 작든 관계가 없어요.
기독교에서 철저하게 남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노력한 가장 꼭지점에는 누가 있죠? 예수 그리스도가 있죠. 그분도 자기 필요를 채우려는 욕구는 있었어요.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할 수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물려 달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나 결국 '내 뜻대로 하지 말고 당신 뜻대로 해 달라'고 하셨어요.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절대로 아니죠.
하지만 그게 바로 종교의 본질이잖아요. 인식 개선을 어떻게 할까요. 종교의 본질에 충실한다면 생각을 금방 바꾸셔야 해요. 제가 감히 말씀드리지만, 못 바꾸면 아직도 멀었어요.
| 장애물이 없으면 차별도 없다 |
- 교수님께서는 장애인등편의법 초안을 작성하셨고, BF 인증 제도 도입에도 앞장서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한국 사회가 한 걸음 나아가는 데 큰 영향을 미쳤는데요. 지금 시점에서 돌아볼 때 혹시 아쉬운 부분은 없으신지요.
지금은 그 법을 폐지해야 합니다. 제가 그 법을 정부에서 의뢰받았을 때가 1996년이거든요. 그때는 장애인이 집을 나서기도 어려웠고,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에 나가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어요. 멀리 여행을 간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이었죠. 사회적인 배려도 안 돼 있었고, 그때 세상은 온통 '장애물 정글'이었습니다. '그 정글 속에서 살아남는 건 네 능력이다' 하던 시대에 그 법을 만든 거예요.
그때는 워낙 장애물이 많다 보니, 그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필요했던 것이 부가적으로 붙어야 하는 '편의 시설'이었어요. 그래서 계단이 있으면 경사로가, 회전문이 있으면 여닫이문이라는 편의 시설이 하나 더 있어야 했죠.
그때 이후로 제가 끊임없이 사회운동을 하고 인식 개선 운동을 한 게 뭐냐면, '제발 장애물이라는 것을 만들지 마세요'라는 거예요. 장애물이 없으면 편의 시설도 필요 없어요. 제가 지하철에서 보면 옛날에 계단으로 해 놨던 곳 옆에 경사로를 많이 만들어 놨어요. 가만히 지켜봅니다. 통행하는 분들이 어디로 많이 갈까요? 경사로로 많이 가요. 그게 더 편하니까. 왜 옛날에는 불편한 걸 만들어 놓고 썼는지 사람들이 깨달은 거예요. 예전에는 아파트 입구에 다 계단을 만들어 놨지만, 요즘 지은 아파트에는 입구에 계단을 보기 힘들죠.
이제는 처음부터 장애물을 만들면 안 된다는 것으로 사회 인식이 전환됐고 만들면 손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장애인등편의법을 없애고 대신 '장애물없는생활환경법'으로 이름을 고쳐야 해요. 그래서 장애물을 치우는 데 열중해야지, 편의 시설 만드는 데 열중하게 되면 영원히 두 개가 병행하는 거예요. 장애물 만들고 추가로 돈 들여서 편의 시설 만들고, 이 구조는 사회적 낭비입니다.
장애물이 없으면 장애인도 차별받을 이유가 없어요. 괜히 대형 교회는 해야 하고 소형 교회는 안 해도 되고, 의무니까 하고 아니니까 안 하고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어요. 처음부터 장애물을 안 만들면 누구나 다 이용 가능하니까요.
- 교수님은 예전부터 "건축은 어찌 보면 장애물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건축가는 사회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해 오셨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건축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는 '피난처'예요. 옛날에는 동굴에 들어가 살았잖아요. 눈비로부터, 뜨겁고 추운 날씨로부터, 야생동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 건물이에요.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만든 것이 건물인데, 그 건물 때문에 장애물 정글이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은신처가 아니죠. 보호받으려고 집에 들어가려다가 걸려 넘어진다고 하면 억울하지 않아요?
건축을 한다면서 은신처를 만들어야지, 장애물 정글로 만든다고 하면, 그건 죄악이라고 말씀드린 거예요. 그게 건축가의 사회적 책무입니다. 건축은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이 아니고,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요소 중 하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건축가는 성직자 못지않게 사회적인 책무를 가지고 활동해야 한다고 이야기해 온 거죠.
- 조사하면서 보니, 정말 작은 교회라도 강대상이 있는 곳에는 턱이나 계단이 있는 곳이 많았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여러 교회 시설도 재능 기부로 설계해 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교회', '예배당'이란 무엇인가요.
르네상스 이전에 교권이 꼭지점에 도달했던 시대의 건축 양식을 '고딕'이라고 해요. 신본주의 시대였죠. 신이 중심이 된 시대. 인간은 신에게 다가갈 수 없는 존재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신은 멀리 있는 존재라는 걸 극대화하기 위해 모든 종교 시설의 폭을 좁히고 높이를 높게 했어요. 탑을 세울 때는 한 뼘이라도 신에게 가깝게 가려고 높이 짓되, 제단을 만들 때는 최대한 인간과 떨어지게 했죠.
아주 근본적으로 구약시대로 가면, 원래 성막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신과 인간 사이에는 경계가 없었어요. 야곱도 그냥 돌 세워 놓고 제단 삼아 예배를 드렸잖아요. 그러다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성막이 생겼고, 성막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었죠. 솔로몬 신전에도 지성소, 성소, 그 밖에 뜰이 있었고요. 사람들은 뜰에 있었고, 성소에는 제사장만,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어요.
이 장벽을 허문 사람이 누구예요? 예수 그리스도예요. 이제는 누구나 경계 없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하는 게 신약 아니에요. 그럼에도 고딕 시대 때는 인간이 감히 신에게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거죠. 우리나라 교회 건축이 지금도 거기 묶여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언덕 위에 짓고, 많은 계단을 만들고 했던 거죠.
강단을 턱을 높여 만들었던 것도 저는 중세 권위주의의 유산이라고 봐요. 그리스도가 그걸 허물려고 목숨을 내어 준 거 아니에요. 그래서 장막이 찢어지는 현상이 있었잖아요. 그렇다면 철저히 없애야죠. 왜 높은 데 올라가서 내려다보며 설교해야 하죠? 작은 곳일수록 영역을 구분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러앉아서, 같은 높이에서 예배하면 안 된다는 성경 구절이 있나요?
- 저희가 조사를 다니면서 어려웠던 점이, 교회가 너무 폐쇄적이고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가 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부분도 말씀하신 권위주의의 일환이라고 봐야 할까요.
유럽에 가면 모든 예배당이 항상 열려 있죠. 그걸 볼 때마다 부러운 게, 종교 시설이란 원래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 물론 예배당 문을 걸어잠그는 이유도 이해는 가요. 하지만 장발장처럼 촛대를 훔쳐 가는 일이 있더라도 기본적으로 교회는 언제나 만인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어느 시간에는 우리가 사회를 향해 활짝 열어 놓겠다고 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게 선교라고, 종교가 해야 할 또 다른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 본 기획물은 정부 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