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도 법 제정 필요성 언급했지만 심사 연기…차별 명시하는 법 없으면 사회에 각종 차별 이어질 것

[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2021년을 어떤 해로 기억하시나요? 누군가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변이를 거듭하며 전 세계를 잠식한 해로, 누군가는 20대 대선을 앞두고 거대 양당 후보가 접전을 벌인 해로 기억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올해를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지 않은 해'로 기억하고 싶습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노력은 14년째 이어지고 있는데요. 올해는 그 움직임이 유독 가열찼습니다. 작년 6월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차별금지법을 대표 발의하고, 국가인권위원회가 평등법 시안을 발표한 데 이어, 올해는 더불어민주당 이상민·박주민·권인숙 의원도 차별금지법·평등법을 대표 발의했습니다.

법 제정을 위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에, 시민사회단체 161곳의 연대체인 차별금지법제정연대(차제연)는 전국을 순회하며 토론회와 시민 공청회를 열었고, 매주 목요일 국회 앞에 섰습니다. 그러는 사이 국민 10만 명이 법 제정 청원에 동의하면서 법안은 최초로 국회 심사 테이블 위에 올랐습니다. 활동가들은 법 제정을 촉구하며 30일간 500km를 걷는 '평등길' 도보 행진을 하기도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차별금지법 제정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물살을 타는가 싶었지만, 정작 법안을 심사해야 하는 법제사법위원회는 21대 국회 임기 마지막 날인 2024년 5월 29일까지 심사 기한을 연장해 버렸습니다. 부산에서 여의도 국회 앞까지 걸어온 차제연 미류 책임집행위원은 서울에 도착하던 날 "논란이 있다고 해서 해설을 해 줬고, 토론이 필요하다고 해서 토론을 해 줬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해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왔다. 그동안 국회는 무엇을 했나. 국민 동의 청원을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10만 명의 서명을 모아 오라고 했느냐"고 비판했습니다.

올해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국회 국민 동의 청원이 10만 명의 동의를 얻었지만, 국회는 청원 심사 기한을 2024년 5월까지 연기했다. 차제연 활동가들은 부산부터 서울까지 100만 보를 걸으며 법 제정을 촉구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올해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국회 국민 동의 청원이 10만 명의 동의를 얻었지만, 국회는 청원 심사 기한을 2024년 5월까지 연기했다. 차제연 활동가들은 부산부터 서울까지 100만 보를 걸으며 법 제정을 촉구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정치권이 '나중에'를 말하며 법 제정을 미루는 구실에는 보수 개신교계가 있습니다. 교계 반동성애 진영은 올해도 '성적 지향' 조항을 중심으로 허위·왜곡 정보를 양산하며 법 취지를 왜곡하고, 차별금지법 논의를 성소수자 이슈에만 가뒀습니다. 11월 25일 첫 번째 더불어민주당 토론회에 참석한 이들은 또다시 성소수자 혐오와 근거 없는 우려를 늘어놓았습니다.

차별금지법은 성소수자만뿐만 아니라 노동자·장애인·이주민 등 우리 사회 각 영역의 소수자를 비롯해 고용·재화·용역·교육·행정 서비스 이용 과정에서 차별받을 수 있는 모든 국민을 위한 법입니다. 그런데도 과잉 대표된 보수 개신교 반동성애 세력은 오로지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 이야기만 부각하며 법 제정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대선을 앞둔 후보들도 표 계산에 몰두하며 보수 교계와 뜻을 같이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는 한교총을 찾아 "당면한 현안 해결을 위한 긴급한 사안이라면 모르겠지만"이라며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도 "법으로 강제하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아서 좀 더 검토해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의당 심상정 대선 후보만이 차별금지법은 반드시 필요하다며, 법 제정에 힘을 실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차별금지법이 하루속히 제정돼야 하는 이유는 혐오와 차별로 희생당하는 이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 변희수 육군 하사, 김기홍 활동가가 세상을 떠났고, 한 청년은 채용 과정에서 성차별 질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차별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법이 없다면, 우리 사회에 각종 차별이 끝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국회 앞에는 52일째를 맞은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 농성장이 있습니다. 비 내리던 가을날, 활동가들이 온몸으로 비닐을 뒤집어쓰고 지탱하며 손수 지은 곳입니다. 텐트 뒤편 감나무에 매달린 열매는 하나둘 까치밥이 되어 사라지더니 이제 가지만 앙상하게 남았습니다.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과 1월 10일 임시 국회 회기 내 처리도 사실상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예수의 사랑으로 모든 차별에 반대하고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기독교인들의 목소리가 더욱 절실합니다. 내년도 올해와 같이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지 않은 해'라는 오명으로 기억될지, 아니면 법 제정으로 '대한민국 인권사에 가장 빛나는 해'가 될지 지켜봐야겠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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