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왔는데 늘 저기까지 걷는 길이 힘들어요. 마지막까지 우리 힘을 냅시다. 화이팅!"

[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목적지가 코앞이다. 부산시청을 출발한 지 24일째인 11월 4일,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도보 행진단 '#평등길1110' 앞에 '직산역'이 보였다. 앞서 걷던 미류 활동가의 말에, 함께 걷는 사람들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다시 한번 다리에 힘을 주고 발걸음을 뗐다.

도보 행진단은 10월 12일 부산시청을 출발해 김해-밀양-청도-대구-칠곡-김천-영동-옥천-대전-청주를 거쳤다. 앞으로 평택-오산-수원-안산을 지나 서울 국회 정문까지 걸어갈 계획이다. 총 500km, 30일간의 일정이다. 이들의 걸음에는 차별금지법 국민 동의 청원 심사 기한인 11월 10일까지 국회에 입법을 촉구하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도보 행진단은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미류 책임집행위원(인권운동사랑방)과 이종걸 공동대표(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가 이끌고 있다. 이들은 그동안 사흘을 제외하고 매일 6~7시간씩 20km 남짓씩 걷고 있다.

일정에 따라 인근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시민단체가 함께하고, 때로는 일반 시민도 같이 걷는다. 11월 4일에는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목정평·최인석 상임의장)·시민단체·정당·시민 16명이 함께했다. 기자는 국회 도착까지 6일을 남겨 둔 이날, 도보 행진단과 천안역-직산역 구간 8.3km를 동행 취재했다.

11월 4일,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도보 행진단 '#평등길1110'과 천안역부터 직산역을 함께 걸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11월 4일,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도보 행진단 '#평등길1110'과 천안역부터 직산역을 함께 걸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평등길 걷는 이유
"순례와도 같은 길
우리가 반드시 이길 것"

오전 9시 천안 신계초등학교를 출발한 행진단은 7.8km를 걸어 11시께 천안역 동부광장에 도착했다. 천안역에서부터 행진에 합류하는 이들이 행진단을 박수로 맞았다. 오전 행진을 마친 이들은 '차별금지법 백만 보 앞으로'라고 직힌 몸 자보를 다음 행진자들에게 건넸다. 사람들의 옷과 가방에 달린 무지개색 깃발·바람개비가 펄럭였다.

행진단은 각 지역에 도착할 때마다 시민단체와 연대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오전 행진을 함께한 임푸른 대표(충남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숨을 고르며 발언에 나섰다. 그는 정의당 충남도당 성소수자위원회에서 위원장을 맡고 있는 트랜스젠더 정치인이기도 하다.

임 대표는 "평등을 바라는 시민들의 요구는 이미 '사회적 합의'를 운운할 단계를 넘어섰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차별금지법 제정 국민 동의 청원 10만 명의 민심을 더는 외면하지 말라. 일부 혐오 세력의 눈치를 보느라 책임을 방기하지 말라. 우리는 포괄적 차별금지·평등법이 입법되는 그날까지 행진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외쳤다.

도보 행진단은 거점 지역을 지날 때마다 기자회견을 열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한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도보 행진단은 거점 지역을 지날 때마다 기자회견을 열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한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참석자들은 자유롭게 발언을 이어 갔다. 인근 대학에 재학 중인 창준 씨는 조심스럽게 보수 개신교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국회가 보수 개신교의 반대를 이유 삼아 차별금지법 제정을 머뭇거리고 있지만, 자신은 차별금지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을 많이 만났다고 했다. 곁에 서 있던 목회자들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목정평 최인석 상임의장은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며 혐오와 차별, 배제와 분리의 모습을 한 개신교 목사로서 사죄의 마음이 든다"고 했다. 그는 진정한 기독교는 시대의 배제된 자, 차별과 혐오를 당하는 자, 소수자를 환대한다고 설명했다. 국회를 향해서는 보수 기독교의 눈치를 봐서는 안 된다고 했다.

행진단은 점심 식사를 하고 잠깐의 휴식을 마친 후 직산역을 향해 출발했다. 시작부터 속도가 빨랐다. 날이 어두워지거나 지체되면 피로가 더해지니 시간당 4km를 걸어야 했다. 출발 전 틈틈이 스트레칭을 하던 미류 활동가를 따라할 걸 하는 후회가 스쳐 갔다. 잠시 신호로 걸음을 멈추자,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주변에 보이는 지명·지물을 설명해 줬다. "여기가 천안 삼거리에서 이어지는 우리나라 1번 국도예요. 위로는 서울, 아래로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르는 분기점이에요." 유쾌한 행진 길이다.

미류 활동가는 행진단에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걸으며 시내 곳곳을 두리번거린다. 눈에 잘 띄는 곳에 '평등길' 스티커를 붙이기 위해서다. 미류는 "이런 거 붙일 데 없는 길이 훨씬 많다. 지역에서 지역으로 넘어갈 때는 차도를 걸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도보 행진 24일차, 미류 활동가는 이제 발이 저절로 움직인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도보 행진 24일 차, 미류 활동가는 이제 발이 저절로 움직인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미류 활동가와 나란히 걸었다. '부산에서 여기까지 걸어 오느라 얼마나 고됐을까' 싶었다. "언제 또 이렇게 걸어 보겠어요. 이제는 발이 먼저 움직여요." 미류 활동가는 걸을수록, 지난 14년간 발의와 폐기를 반복해 온 차별금지법이 이제라도 제정돼야 한다는 마음이 간절해진다고 했다.

길을 걷다 보면 인상적인 순간도 찾아온다. 대전에서 청주를 지나던 길, 외국에서 거주한다는 한 교회 집사가 왔다. 이틀을 함께 걸었다. 그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한국 보수 개신교의 소식을 듣고, A4 60쪽에 달하는 리포트를 썼다는 이야기를 들려 줬다. 옥천에서는 실시간으로 라이브 방송을 보며 위치를 찾아온 목사도 있었다. 행진을 마친 그는 "사죄하는 마음으로 걸었다"고 말했다. 미류 활동가는 "왜 이분들이 사과해야 할까요. 사과해야 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라고 했다.

그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보수 개신교인보다 정치인이 더 문제라고 했다. "보수 개신교는 솔직하게 반대한다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국회는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사회적 합의'를 운운하고 있어요. 교회보다 국회가 더 나빠요."

이날 도보행진에는 목정평 최인석 상임의장, 이종명·정금교 공동의장, 류순권 총무도 참여했다. 이들은 목에 오색 스톨을 두르고 길을 걸었다. 각각 부산·아산·대구·서울에서 목회를 하는데, 개신교계에서도 차별금지법 제정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참석했다고 했다. 고 이한빛 PD(tvN '혼술남녀' 조연출)의 어머니 김혜영 씨도 아산에서부터 찾아와 함께 걸었다. 김 씨는 "한빛이라면 이곳에 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빛이와 함께 걷는다고 느낀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을 하며 연대의 힘을 배웠는데, 그 연대를 나누기 위해 참여했다"고 말했다.

미류·이종걸 활동가는 잠깐의 휴식 시간에도 쉬지 않고 참석자들과 차별금지법에 관해 이야기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미류·이종걸 활동가는 잠깐의 휴식 시간에도 쉬지 않고 참석자들과 차별금지법에 관해 이야기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1시간 정도 걸은 후 잠시 두정공원에서 휴식 시간을 가졌다. 벤치에 누워 다리를 풀던 미류·이종걸 활동가는 차별금지법 제정 현황과 과제를 설명하겠다며 행진단을 불러 모았다. 사람들은 바닥에 앉아 경청했다. 일부 보수 개신교계가 '성적 지향'을 이유로 법 제정을 반대하고 있지만, 차별금지법은 모든 차별에 반대하기 위한 기본법이라고 했다. 또, 대선 후보들이 '특정 영역'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는 것은 비겁하다며, 차별에 대해 단호하게 목소리 내고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했다.

"차별금지법이라고 하면 '너 차별하지 마'라고 말하는 법일 것 같잖아요. 그런데 사실 차별금지법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나 차별당했어'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거든요. 정말 많은 사람이 차별을 겪으면서 살아요. 억울하고 서럽고 부당한 차별 상황에서 '이런 게 차별이다'고 정의한 법이 아직 한국 사회에 없기 때문이에요.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고 해서 세상이 갑자기 바뀌지는 않을 거예요. 다만 사회가 어떤 시민을 배제한다는 신호를 계속 주고 그로 인해 누군가가 끊임없이 절망을 느끼는 상황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서늘한 날씨지만 행진단의 등은 땀으로 젖어 들었다. 차도를 지나 마을로 들어오니 성환천을 따라 논밭이 펼쳐졌다. 드디어 목적지가 눈앞에 보였다. 오후 3시께, 직산역에 도착한 참석자들은 역사 앞 정자에 둘러 앉았다. 땀을 닦고 겉옷을 꺼내 입는 이들도 있었다. "여기서 기차 타면 바로 서울에 갈 수 있는데…"라는 미류 활동가의 농담 섞인 이야기에 괜시리 마음이 무거워졌다.

참가자들은 행진을 마무리하며 소감을 나눴다. 한 참가자는 "지역에서는 나의 손을 잡아 줄 누군가가 있다는 연대의 경험을 하기 쉽지 않았다. 차별금지법 제정이나 성소수자 혐오·차별 반대 활동은 주로 서울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행진에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이 모여 연대를 경험할 수 있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운동은 올해가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미류 활동가는 "우리의 걸음이 반은 행진이고 반은 순례 같다고 생각한다. 배우고 깨달음을 얻게 되는 길이기도 한데, 이렇게 함께 걸어 주시는 덕분인 것 같다. 당장 눈에 가시적인 변화는 보이지 않지만 길 위에서 우리가 점점 단단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평등이 우리 눈앞에 좀 더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순간들을 보게 되는 것 같고,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하루였다"고 말했다. 종걸 활동가도 "남은 6일 동안 어떤 이들을 또 만나게 될지 궁금하다.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길을 이어 나가고 싶다"라고 했다.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도보 행진단 '#평등길1110'은 11월 10일까지 이어진다. 자세한 경로는 '#평등길1110'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도보 행진단 '#평등길1110'의 행진은 11월 10일까지 이어진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도보 행진단 '#평등길1110'의 행진은 11월 10일까지 이어진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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