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이정배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은퇴)가 기독교대한감리회(감리회·이철 감독회장)가 발행하는 잡지 <기독교세계>에 투고했다가 게재를 거부당한 글입니다. 2023년 1월부터 신학 코너를 맡아 글을 연재해 오던 이정배 교수는 9월 <기독교세계> 지령 1100호를 맞아 이동환 목사(영광제일교회) 종교재판을 우려하는 글을 썼습니다. 이 교수는 동성애 문제로 교단이 갈등을 겪고 있고, 젊은 목회자를 정죄하는 대신 토론과 성찰을 해 달라며 <기독교세계>의 역할을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감리회는 민감한 이슈라는 이유로 게재를 거부했습니다.

이정배 교수는 9월 5일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감리회에 대화와 토론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해 격려의 마음을 담아 글을 썼는데 이 정도조차 수용하지 못하는 태도가 아쉽다"고 말했고, 더 이상 <기독교세계>에 글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정배 교수의 허락을 받아 원고 전문을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한걸음씩 내딛는 일은 사소한 듯 보이나 그 힘을 이길 장수가 없다. 연약한 물방울이 결국에 바위를 뚫듯이 지속되면 말이다. 어떤 일도 멈춤 없이 계속될 때 그것은 하느님의 일이 될 수 있다. <기독교세계> 1100호 출간 역시 사람의 계획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닐 것이다. 연수로 100년 이상의 시간을 어찌 인간이 홀로 감당할 수 있었을까? 하느님 보시기에도 '참 좋았'을 것이다. 나의 글이 이 지면의 일부가 된 것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물론 그간 (한국)전쟁으로 멈춘 적도 있었겠고 내외부적 이유로 폐간에 직면한 순간도 있었겠다. 세상과 교회로부터 찬사를 받은 적도 반대로 비난에 처했던 경우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수록 지속성에 대한 감사와 감탄과 함께 <기독교세계>의 처음 취지와 뜻이 여전한지도 살펴야 옳다. 창간 정신을 잃으면 시대적 소임 역시 희미해질 것이니 말이다. 하느님도 당신이 만들어 그렇게 좋았던 피조물을 보며 괜히 만들었음을 탄식하지 않으셨던가?

기독교를 원죄(Original Sin)의 종교라 가르치며 강요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인간의 타락과 죄를 강조해야 구원代贖의 종교인 기독교의 위상이 돋보여서 그런 것인가? 창세기 첫 장의 내용을 보면 죄에 대한 언급이 없고 하느님의 환호와 찬사로 가득 차 있다. 선악과 사건, 곧 인간 타락 이야기는 2장의 핵심 내용이다. 창세기 2장(J 문서)이 전 장(P 문서)보다 수백 년 앞서 기록된 만큼 원죄 교리를 앞세워도 무방하겠다. 하지만 성서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좋으심'을 강조하는 제사장(P) 문서를 앞세운 사실 또한 대단히 의미 깊다. 이를 비롯한 여러 이유에서 창세기가 원죄보다 원복(Original Blessing)을 강조한다는 설이 점차 힘을 받고 있다. 당신이 지은 세상이 조화와 균형 속에서 유지, 존속되는 현상에 대한 하느님의 환호, 곧 원복原福을 우선할 경우, 원죄론에 입각한 구원관을 비롯한 뭇 교리, 교회 역할도 상당 부분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들어 알게 된 이야기 한 토막을 전하겠다. 나이가 든 분들은 소설 <오발탄誤發彈>의 작가 이범선을 기억할 것이다. 아주 오래전 그는 기독교 계열의 고등학교 국어 교사였다. 정직하고자 애쓰며 살았으나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한 무능한 가장家長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한국전쟁 와중에서 홀어머니는 미쳤고 아내는 출산 중 죽었으며 남은 자식들은 영양실조에 걸린 상태였다. 신앙의 힘으로 정직하게 살았으나 자신에게 닥쳐온 현실을 감당할 수 없어 절망했다. 급기야 주인공은 이런 현실에 무능력한 자신을 '神의 오발탄'이라 불렀다. 이 말로 작가 이범선은 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오발탄'이란 말로 하느님의 전능성을 능멸했다는 이유에서였다. 神의 전능성과 앞서 말한 창조에 대한 하느님의 환호는 같지 않다. 개체의 연약함이 전체적 관계성 속에서 치유·회복되도록 하느님은 세상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하느님이 좋아하신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교리(전능)를 앞세워 약자(차이)를 약자(차이)로 인정치 않는 일들이 교회 안팎에서 여전하다. 세상은 달라졌는데 기독교가 변하지 않은 탓이다.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스퐁 감독의 책이 벌써 20년 전에 출판되었음에도 말이다.

<기독교세계> 1100호를 축하하는 지면인 만큼 전해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하여 서술코자 한다. 오래전 소천하신 장기천 감독이 이 잡지 편집 책임자로 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당시 주요 일간 신문들이 <기독교세계>의 내용을 받아 기사화하곤 했다고 한다. 이승만·박정희로 이어지는 서슬 퍼런 독재 시절 <기독교세계>는 한국 사회의 중요한 '입'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런 적이 있었겠는가 싶겠지만 진정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당시 장기천 목사는 불교계에서 글쟁이로 살았던 법정 스님과도 깊이 교감했다. 소속 기관지의 편집자로서 서로 글들을 주고받았기에 급기야 법정 스님을 교회 강대상에 초청하는 일도 생겼다. 강대상에 올랐던 당시 스님의 말을 들었던 그대로를 적어 본다. "나 같은 중놈을 이곳에 세우다니 여러분들이 믿는 하느님은 얼마나 '쎈' 존재이신가요?" 이렇듯 자신을 한껏 낮추며 정작 강대상 밑으로 말씀을 전했다고 한다. 오랜 역사를 상징하는 큰 숫자인 '1100호'를 기념코자 한다면 이런 류의 기억들을 많이 소환해야 할 것이다. 세상을 감동케 하는 사건들 말이다. 과거만도 못한 오늘의 상태로 숫자와 연수를 자랑할 수만은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지난 역사 속에서 감리교단은 적공積功도 있었지만 치명적 잘못도 범했다. 한국 기독교사를 부끄럽게 만든 종교재판이 바로 그중 하나이다. 어떤 교단에도 없었던 누를 범했다. 30년 전에는 종교다원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등 시대정신과 사상을 정죄했고, 목하 진행 중인 종교재판은 동성애를 겨냥하고 있다. 자기부정 대신 타자 부정을 앞세운 일탈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10월 종교개혁의 날에 시청 앞 프레스센터에서 종교재판 30년 역사를 냉철하게 회고·성찰하는 모임이 있었다. 당시 강연을 기초로 발표·기고된 글을 모아 <그때도, 지금도 그가 옳다>(동연, 2023)는 책을 출판했다. 신학대학 교수들, 목회자들, 감독들을 비롯하여 동시대의 사상가들, 이웃 종교인(학자)들의 글 40여 편이 수록되었다. 저마다 글 형식은 달랐으나 담긴 뜻은 일치했다. 책 제목이 바로 그것을 적시하고 있다.

'종교재판 30년 백서'도 새롭게 세상과 교계에 선보일 것이다. 당시 종교 권력이, 구체적으로 누가 어떤 목적, 무슨 이유로 종교재판이란 난장亂場을 벌였는지 명백하게 밝혀지길 기대한다. 미진한 것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공론의 장을 만들면 그뿐이다. 어느 쪽이 교회를 어렵게 했고 신학대학의 학문성을 해쳤는지도 토론할 주제이다. 1100호에 이른 <기독교세계>가 그때 이 사건을 어떻게 다뤘는지도 궁금하다. 기회 있으면 당시의 <기독교세계>를 들춰 볼 계획이다.

종교재판의 망령이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니 걱정이다. 주지하듯 동성애 문제는 인습화된 기독교에 큰 도전일 수밖에 없다. 미국 연합감리교회(UMC)에서조차 이 문제로 분열의 아픔을 겪고 있으니 소식 접하는 것만으로 가슴 아프다. 그러면서도 연합감리교회의 위대성을 본다. 분리·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지킬 것은 지키는 그들 열린 입장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한국교회 내부에서도 신학적 입장 차가 크고 찬반의 논의가 있다. 지난한 토론과 논의 과정이 필요한 주제일 것인데 교단은 이를 종교재판에 회부했다. 누가, 무엇으로 소신 있는 젊은 목회자를 기독교, 아니 예수의 이름으로 정죄할 수 있겠는가? 절차상 문제로 재판 자체가 순연荀連되고 거듭 미뤄지는 것을 보면 분노가 일어날 정도이다. 재판위원들 스스로도 본 재판을 '뜨거운 감자'로 여긴 방증이 아닐까 싶다. 본 주제는 물론 어떤 사안으로도 종교재판을 재현시키는 일은 이제 그쳐야 옳다.

기독교를 원복原福의 종교로 재구성한 신부 신학자 매튜 폭스(Matthew Fox)의 강의를 명동성당에서 들은 적 있다. 그는 기독교의 창조 영성을 연구한 신학 전문가로 알려졌다. 한 청년이 강의 후에 자신을 가톨릭 신자로서 게이라 소개하며 '내가 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강사에게 물었다. 거의 울먹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절규하듯 질문한 것이다. 신부·수녀로 구성된 청중은 술렁였으나 강사는 그 청년의 질문을 기쁘게 받았다. "That's good Question!"이라 한 것이다. 게이 청년 물음에 답한 그의 말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폭스는 동성애를 종교(기독교)보다 과학 차원에서 접근할 주제라 여겼다. 천·지동설 초기 논쟁이 본디 성서에 근거해서 시작되었으나 지금은 그런 시도 자체가 어불성설이듯 말이다. 성서 속 어느 구절을 앞세워 논쟁하며 답을 찾고 얻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문자지상至上(성서무오無誤)주의를 앞세우는 상황에서 말이다. 원복의 저자답게 그는 우주 속에 - 사람과 짐승, 심지어 식물에 이르기까지 - 동성애 성향의 존재들이 대략 10% 남짓 있다고 전제했다. 우주 안에서의 이들 역할이 본연(자연)의 상태에서 대단히 중하다고까지 역설했다. 그들이 잘못된 상태로 태어났다는 기존 종교적 편견을 단박에 허문 것이다. 동성애 성향을 저주스럽게 여기며 그 상태를 의술로, 심리학적으로 고칠 수 있다는 기독교의 시각 - 나름의 사랑(?) 표현 - 을 오히려 폭력이라 봤다.

일부 기독교인의 주장대로라면 동성애자들 모두는 하느님의 '오발탄'들인 셈이다. 그럴수록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의 질문을 복기해 볼 필요도 있겠다. 누구의 죄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 영광' 때문이란 예수 답변을 곱씹을 시점이다. 물론 후천적 요인으로 성 정체성이 달라진 경우도 의당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경우를 분리해서 살필 지혜가 종교인들에게 필요하다. 사춘기 자녀들에게서 어느 순간 동성애 성향을 발견한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보자. 자식들 일기를 훔쳐 보며 먼저 커밍아웃(Coming Out) 해 주기를 노심초사 바라는 부모들이었다. 혹시라도 그 성향을 고칠 수 있을까 싶어 백방으로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했던 분들이었다. 죽을 듯 힘든 일이었으나, 서로를 있는 그대로 수용했을 때 이들 모두가 행복해졌음을 부모와 자식 모두가 고백했다.

이런 존재의 '곁'이 되었고, 되고자 했기에 종교재판을 받는다면 <기독교세계>가 2000호 지령이 되었을 무렵 교단과 잡지가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지 두려울 뿐이다. 해서 1100호를 맞는 <기독교세계>에게 논쟁을 피하거나 두려워 말고 시대 이슈를 맘껏 토론하는 장이 되어 주기를 요청한다. 한때 <기독교세계>가 시대를 앞선 생각들로 장안의 화제가 된 적도 있었음을 기억하면 힘이 날 것이다. 오늘 글의 부제처럼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을 앞서 기억하고 더 넓고 풍요로운 신앙적 시각으로 시대를 해석해 주길 기대하며 그간의 노고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