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님 안녕하세요. 나수진 기자입니다. 저는 지금 이 레터를 사랑스러운 고양이 두 마리가 누워 있는 책상에서 쓰고 있어요. 한 아이는 제 옆 의자에서, 한 아이는 노트북 옆자리에서 자기 팔을 베개 삼아 자고 있네요. 밤새 한바탕 폭우가 지나간 후라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도 솔솔 불어오고, 저는 여기에 눕습…. 아아, 최적의 근무 환경이 따로 없습니다.

저는 올해 만 세 살이 된 고양이를 키워 왔는데요. 세 달 전에 검정, 노랑, 흰색 털이 멋지게 섞인 아기 고양이를 입양했어요. 첫째 고양이가 나이가 들어 가면서 점점 무료해하는 모습에 동생을 만들어 주기로 결심했죠. 저도 형제가 많은 가정에서 자랐고, 바로 밑에는 세 살 터울 동생이 있거든요. 새로운 가족을 들일 준비를 마친 끝에, 꼬물이 시절 구조돼 병원에서 지내던 한 아이를 근처에서 데려왔답니다.

고양이 키우는 일을 사람 아이 키우는 일과 같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비슷한 구석이 꽤 있습니다. 매일 장난감 통에서 장난감을 하나하나 꺼내 사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는다거나, 주변을 온통 더럽히며 밥을 먹는다거나, 화장실에서 혼자 볼일을 보려 해도 따라온다거나, 새벽에 자꾸 일어나 울며 집사를 깨운다거나….

사람 아이보다 10배 빠르게 자라는 것만 빼면 비슷하답니다. 잠자는 시간 빼면 온종일 먹고, 놀고, 사고 치는 게 전부인 아이를 돌보느라 집사는 정신이 없죠. 누군가는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사람 아이를 키우는 게 더 값진 일이 아니냐고 하기도 하지만, 저는 생명을 책임지고 키우는 일은 본질적으로 같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첫째와 둘째는 사이가 좋냐고요? 제 기대와 욕심과는 다르게 둘은 성격도, 식성도, 좋아하는 것도 너무 다르네요. 마치 MBTI로 하면 극 I와 극 E랄까요. 마주치기만 하면 치고받고 싸우기 일쑤입니다. 보면서 '어린 시절 나도 동생과 저렇게 싸웠을까…' 싶어 많이 회개하고 있습니다. 서로 달라서 싸우는 둘의 모습에 속상할 때가 많지만, 지금의 갈등도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생각해 봅니다.

참, 다음 주에는 여름휴가를 다녀오려 합니다. 육아뿐 아니라 지난 5월부터 아래 소개할 '퀴어 문화 축제 방해 잔혹사' 기획에 온 힘을 쏟았거든요. 잠시 쉬면서 하반기에도 달려 나갈 힘을 채우고 돌아오겠습니다. 모쪼록 독자님께서도 무더운 날씨에 건강한 나날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편집국 수진

한국교회의 비극 '퀴어 문화 축제 방해 잔혹사'

<뉴스앤조이>에 입사한 2012년만 해도 '동성애'나 '성소수자'는 기독교계에서 큰 이슈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서울시에 학생인권조례가 발의되며 이를 반대하는 개신교인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이 내세우는 메시지가 워낙 극단적이라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대형 교회나 교단의 분쟁, 세습, 횡령 등에 더 주목했죠.

기계적인 중립 혹은 무관심

· <뉴스앤조이> 보도를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는데요. 2013년 국회에 차별금지법이 재차 발의됐을 때, 저희는 찬반 양론을 다뤘습니다. 좋게 말하면 모든 의견을 보여 주고 판단은 독자들의 영역으로 남겨 두는 것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판단을 독자에게 맡겨 둔 채 저희는 비판을 면하려는 것이었죠.
· 이런 기계적인 중립 스탠스는 2016년까지 이어졌습니다.
· 저 스스로도 성소수자가 아니고 관심도 없었다 보니 당시에는 별생각이 없었습니다.
· 모태신앙으로 보수적인 교단에 속한 교회에서 30년간 자라 왔으니, 저도 막연히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기자로서 성소수자 이슈를 대할 때는 '변방의 이슈'라고 생각했다는 게 맞을 겁니다.
· 그보다 목회자의 성범죄나 교회의 민주화 등이 훨씬 중요하다 여겼죠.

선동, 무지, 맹종이 빚은 비극
·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대형 교단과 연합 기관, 교회들이 '동성애 반대'에 점점 힘을 쏟기 시작하더군요. 이제는 연중 가장 큰 규모의 교계 행사가 '퀴어 문화 축제 반대 집회'가 됐습니다.
· 자연스럽게 <뉴스앤조이>도 성소수자 이슈를 취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저희가 좋아서 시작한 게 아닙니다…;ㅋ).
· 그러다 보니 배우게 되고 공부하게 되더라고요. 저널리즘적 관점으로 선입견을 내려놓고 사실관계를 따져 보고 의견의 타당성을 검토해 봤습니다.
· 결과는 교계에 만연한 동성애 및 차별금지법과 관련한 정보들은 거의 모든 것이 왜곡·과장됐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정보들을 근거로, 성소수자들을 핍박하고 모든 인권 증진 노력을 교회 파괴로 몰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 반동성애 강사들과 보수 교계 언론들의 선동, 목회자들의 무지, 교인들의 맹종이 빚어낸 거대한 비극이었습니다.

동성애를 죄라 생각한다 해도

· 물론 개인의 신앙관이나 그것을 형성한 신학은 시시비비를 가리기 힘든 문제입니다. 성경적으로 동성애는 죄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 그렇더라도 자신의 신앙을 근거로 남을 비방하는 행위는 괜찮은 것일까요?
· 아무리 죄라고 생각한다 해도, 남의 잔치에 가서 재를 뿌리면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 아무리 보수적인 개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 해도, '부처님 오신 날'에 절 앞에서 대규모 반대 집회를 하지 않는 것처럼요.

· 이번 저희의 기획 '퀴어 문화 축제 방해 잔혹사'는 그런 생각으로 시작하게 됐습니다.
· 애석하게도 보수 개신교계의 퀴어 문화 축제 방해 행동은 10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 2014년 신촌에서 열린 서울 퀴어 문화 축제를 시작으로, 2023년 현재까지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퀴어 문화 축제가 개신교인들의 반대 집회로 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방해의 양상도 가지가지입니다
· 축제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 집회 신고를 먼저 하려고 경찰서 앞에서 노숙을 하고,
· 축제 장소를 전날부터 밤새 점거하고, 인근에서 대규모 반대 집회를 열고,
· 퀴어 퍼레이드 때 행진 경로에 드러눕고….
· 축제 참가자들을 향한 언어 폭력과 물리적 폭력도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이 때문에 법의 처벌을 받은 사례도 있었죠. '잔혹사'라 부를 만합니다.

비록 폭력은 줄었다지만 
· 이러한 방해는 극단적이라고 생각했는지, 요새는 좀 점잖게(?) 반대 집회를 합니다.
· 퀴어 문화 축제를 따라, 여러 부스를 차리고 퍼레이드도 진행하죠. 맞불 집회가 아니라 '문화 행사'라는 점을 강조하는데요.
· 보수 교계는 퀴어 문화 축제를 깎아내리려 '문화'라는 말을 빼고 '퀴어 축제', '퀴어 행사'라고 부르는데, 정작 반대 집회 안을 들여다보면 퀴어 문화 축제를 따라 하는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 직접적인 폭력이 줄어드는 것은 다행인 일입니다만, 이 역시도 위험한 일입니다.
· '혐오'를 '문화'처럼 만들려는 것이기 때문이죠.
· 퀴어 문화 축제처럼, 보수 교계의 반대 집회에도 청년들과 아이들이 많이 보이는데요. 누군가의 존재를 혐오하고 인권 증진을 위한 각종 노력을 반대하는 행위를 문화 행사처럼 접한 아이들은 어떻게 크게 될까요.

그것이 혐오인 이유
· '혐오'라는 말이 불편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 실제로 반동성애 집회에서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이 왜 혐오냐고, 혐오가 아니라 사랑해서 반대하는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이화여대 김혜령 교수의 논문 <성소수자 혐오의 혐오성에 대한 기독교윤리학의 비판적 논증>을 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김 교수는 혐오를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해 논증합니다.

· 자신의 도덕적 가치를 지키는 것을 타자의 존재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 존재는 인정해도 공적 권리와 의무를 동일하게 부여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 사회질서 유지를 소수자들의 인권 보호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 더러움이나 역겨움과 같은 신체적 반응이 증오의 감정과 함께 나타나거나 그러한 반응을 선동한다.

· 반동성애를 외치는 보수 개신교인들은 대부분 이 네 가지 중 하나 이상 해당할 것입니다.
· 그러니 '혐오 세력'이라 불리는 것을 억울해하기 전에,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의 근거가 무엇인지,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렇게 남의 잔치를 방해해도 되는 것인지 돌아보는 게 선행돼야 할 것 같습니다.

스스로 묻지 않는 교회
· 지난주 토요일(7월 1일)에는 서울 퀴어 문화 축제와 반대 집회 '거룩한 방파제'가 동시에 열렸습니다.
· 저는 거룩한 방파제를 취재했는데, 정말 많은 개신교인이 참석했더군요. 땡볕에 몇 시간을 앉아 있는 열정이 새삼 대단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 하지만 아무리 많은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믿고 있다고 해도 거짓이 진실이 되지는 않습니다.
· 저는 개신교인이 '혐오 세력'으로 불리는 이 현상, 왜 그렇게 불리는지도 고민하지 않는 이 현상이 상당히 우려됩니다.
· 세상이 더디지만 진보하고 있다면, 언젠가 차별금지법도 제정되고 혐오표현금지법도 제정될 것입니다.
· 법으로 차별을, 혐오 표현을 금지하는 것은 중요하고 이러한 법들은 하루빨리 제정돼야 합니다.
·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말 교회가 법 때문에 혐오하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올까 봐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혐오를 멈추기 위해서는
· 혐오는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을 아프게 합니다. 개신교인들의 동성애 반대 활동으로 누군가는 삶을 포기할 정도의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삶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종교가 세상에 필요할까요?
· 정말 법 때문에 혐오하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오기 전에, 교회는 스스로 혐오를 멈춰야 합니다.
· 쉽지 않겠지만 어렵지도 않습니다.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입니다.
· 사실 교계에서 성소수자 이슈를 전할 때마다, '주변에 한 명이라도 성소수자가 있다면 이렇게까지 할 수 없을 텐데'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그들은 그냥 똑같은 사람일 뿐입니다. 이 단순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 이번 '퀴어 문화 축제 방해 잔혹사'에는 전국 8개 지역에서 퀴어 문화 축제를 준비하는, 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인터뷰가 있습니다.
· 주변에 만나서 이야기할 성소수자가 없다면, 이렇게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어떨까요?
·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하셨듯,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서 말입니다.

편집국 권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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