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C.S. 루이스 이후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라 불리던 라비 재커라이어스(Ravi Zacharias, 1946~2020)가 살아 있을 때 다수의 여성에게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재커라이어스는 <믿음의 이유>·<오직 예수>(두란노), <기독교가 당신을 실망시켰다면>·<무신론의 진짜 얼굴>·<이성의 끝에서 믿음을 찾다>(에센티아) 등의 저서로 한국교회에도 알려져 있다. 2016년과 2019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해 올림픽홀·온누리교회 등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로 존경받던 재커라이어스의 성폭력은, 그가 설립하고 총재로 일하던 라비재커라이어스국제사역센터(RZIM·Ravi Zacharias International Ministries)가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센터는 12월 23일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재커라이어스를 향해 제기된 다수의 성폭력 의혹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재커라이어스의 성폭력 의혹을 처음 제기한 곳은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 매거진 <크리스채너티투데이>다. <크리스채너티투데이>는 재커라이어스가 세상을 떠난 지 4개월 후인 올해 9월, 재커라이어스에게 지속적으로 성추행당한 여성 3명을 수개월간 인터뷰해 그가 어떤 방식으로 이들에게 성폭력을 가했는지 자세히 보도했다.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추앙받던 라비 재커라이어스. 올해 5월 사망한 지 4개월 만에 성폭력 의혹이 불거졌다.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추앙받던 라비 재커라이어스. 올해 5월 사망한 지 4개월 만에 성폭력 의혹이 불거졌다.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보도 내용을 종합해 보면, 재커라이어스는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게 아니었다. 성폭력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스파에서 일하던 직원들을 성추행하거나, 일부 직원에게는 성관계를 요구하기도 했다. 부적절한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자위행위하기도 했다고 <크리스채너티투데이>는 보도했다.

RZIM은 <크리스채너티투데이>가 사건을 보도하기 한 달 전인 8월에 이미 재커라이어스를 둘러싼 의혹을 접했다고 했다. 당사자가 사망한 후였기 때문에 RZIM은 성폭력 사건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외부 법률사무소에 조사를 맡겼고, 최종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어떠한 의견도 표명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후 법률사무소가 작성한 중간 보고서를 전달받은 RZIM은 12월 23일 재커라이어스가 저지른 성폭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단체는 보고서 전문을 공개하며 "결과를 접한 우리 마음은 비통하지만, 직원·후원자·지지자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투명하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중간 보고서에는 <크리스채너티투데이> 기사에 나온 내용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한 수위의 성폭력이 지속됐다는 사실도 적혀 있었다. 최종 보고서는 2021년 초 나올 예정이다.

내부 문제 제기 묵살한 후
더 큰 사건으로 드러나는 양상
"교육 통해 성폭력 인식 개선해야"

재커라이어스의 성폭력은 갑자기 터져 나온 게 아니었다. 그가 살아 있을 당시에도 비슷한 문제 제기가 있었지만, RZIM은 피해자의 주장에 귀 기울이기보다 재커라이어스의 변명만 신뢰했다.

2017년, 캐나다에 사는 '톰슨'이라는 여성은 재커라이어스가 자신과의 '섹스팅'(섹스와 문자를 합성한 단어로 성적으로 문란한 사진, 글 등을 보내는 것을 의미 - 기자 주)을 즐겼다고 폭로했다. 재커라이어스는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은 사실은 인정했지만, 부적절한 사진을 요청한 적은 없다고 했다. 재커라이어스와 이 여성은 비밀 유지 계약(NDA·Non Disclosure Agreement)을 맺는 것으로 사건을 매듭지었고, RZIM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이런 경향은 윌로우크릭교회를 설립한 빌 하이벨스(Bill Hybels) 목사 사건에서도 나타났다. 하이벨스가 성폭력 의혹으로 조기 은퇴를 발표한 건 2018년 4월이다. 당회가 하이벨스의 성폭력을 처음 접수한 때는 2014년이다. 이후 하이벨스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는 추가 폭로가 이어졌다. 만약 처음 문제가 제기됐을 때 제대로 조사했다면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재커라이어스와 하이벨스 사례는 교회 성폭력 또한 권력의 불균형이 있는 곳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현상은 그를 견제할 세력의 부재를 의미하기도 한다. RZIM에는 이사회가, 윌로우크릭교회에는 당회가 있었지만 두 곳 다 설립자를 옹호하는 우를 범했다.

미국 덴버신학교에서 신약을 가르친 주디 디엘(Judy A. Diehl) 박사는 재커라이어스의 성폭력 사건 이후 <크리스채너티투데이>에 '성경적 리더십과 영적 학대'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향한 문제 제기이기 때문에 피해자의 증언을 속단하는 경우가 많다. (중략) 한 사람 혹은 몇몇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목회자 중심주의 교회에서는 '영적 학대'가 고개를 들게 되는데 이는 매우 파괴적"이라며 "리더십은 오늘날 교회에서 재평가와 변화가 가장 시급한 분야 중 하나"라고 했다.

한국교회에서 발생하는 성폭력도 대부분 권력을 쥔 목사와 그에게 종속된 신도 사이에서 벌어진다. 예방을 위해서는 성폭력은 권력의 불균형 상황에서 발생하기 쉽다는 사실을 교회 구성원 모두가 인지하는 게 필요하다. 기독교반성폭력센터 노경신 사무국장은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교회 역시 오랜 가부장 문화가 지배하고 있고, 이 문화에 익숙한 많은 기독교인은 성폭력을 바라보는 인식이 후진적이다. 교회가 좀 더 안전한 공간이 될 수 있도록 구성원들의 성폭력 의식·문화 수준을 바꿀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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