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 사회에서 교회의 이미지는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분명하게 나뉜다. 그만큼 교회는 코로나19 사태에서 가장 큰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전광훈 등이 주도한 8월 15일 광화문 반정부 집회로 인한 급속한 전염병 확산과 정부의 대면 예배 금지 조치에 대한 보수 기독교계 지도자들의 반발은 보통의 상식을 갖춘 그리스도인에게 큰 혼란을 안겨 주고 있다.

보수 목회자 세계에서는 어떠할지 모르나, 전광훈 유의 극단적 움직임에 50~60대 이하 그리스도인이 많이 동조할 것 같지는 않다. 한국교회 대표 행세하는 대형 교회 목회자나 교계 지도자들도 전광훈을 비판적으로 얘기하라고 한다면, 마지못해서든 진심에서든 그렇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일련의 사건 속에서 주목하는 것은 전광훈 유의 움직임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의 이름으로 터져 나오는 동시다발적인 문제의 본질을 어떻게 볼 것인가다. 이런 현상은 보수 교회가 그동안 정치적으로 누려 온 기득권을 놓친 후 생겨난 반작용일 수 있다. 예컨대, 사학법 개정 반대나 낙태죄 폐지 반대에 몰두했던 교회의 모습, 오늘날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모습은 위기의식의 반영일 수 있다.

그 연장선에서 나오는 주장이 '전광훈은 반대하지만 예배는 중요하며, 교회 문제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탄압'이라는 말이다. 이런 태도는 자신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 뜻을 행하는 존재이며, 교회가 그 중심에 있다는 신념에 근거한다. 그래서 그들은 진심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나라 vs 세속 권세'라는 구도로 몰아갈 수 있다.

개신교의 지극한 자기중심성이 모든 일의 근저에 있다. 물론 대놓고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이 세상 주권자이시며 교회가 그 뜻을 받들어야 한다", "전광훈은 반대하지만 예배는 고수해야 한다", "동성애자는 품어야 하지만 동성애는 죄다", "차별은 반대하지만 차별금지법은 반대한다" 등 신앙적으로 포장한다. 그런데 내게는 이 모든 게 다 같은 말로 들린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뜻이고 사회를 살리는 길"이라는 왜곡된 믿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2. 

좀 더 아픈 지적을 해 보자.  한국은 기독교가 국교인 국가가 아니다. 한국 사회 속에서 살아가려면 사회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문제는 교회의 사회적 감수성이 메말랐다는 데 있다. 교회는 내부 논리를 넘어서 사회가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상실했다. 내부의 신앙 논리가 압도하니 사회와의 교감을 통한 대화·타협의 여지가 없다. 이것이 전광훈 유뿐 아니라, 대부분 보수 개신교가 보여 주는 실태다.

현재 한국교회에 진정 우려되는 상황은, 온건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듯이 말하는 신학자·목회자·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이들을 보면 상황이 더 답답하게 느껴진다. 이를테면 "예배는 온라인으로 드릴 수 있지만 차별금지법은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모든 것을 신앙 구도로 환원해 뭇 그리스도인을 설득하는데, 문제는 이게 잘 통한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교회 위기가 전광훈 같은 극단적 인물 때문에 빚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솔직해지자. 이리저리 재고 따지면서 약자에게는 강하게, 강자에게는 약하게 굴고, 손해 보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면서 이익 극대화에만 집요한 교회들의 전반적인 문제가 아닌가. 이런 상황 속에서 전향적인 메시지를 기대하는 일 자체가 난센스다.

생각해 보자. 전광훈과 추종자들의 극우적 행태, 신학자들의 차별금지법 반대 서명, 동성애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재판받는 이동환 목사노회에서 출교 판결을 받은 허호익 교수 건 등 일련의 교회발 사건 중 무엇이 교회에 더 부정적 영향을 미칠까.

단기적으로는 전광훈과 사랑제일교회의 코로나19 관련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에 장기적으로 미칠 부정적 영향을 따지면, 두 번째와 세 번째 건이 더 크리라고 본다. "교회가 진심으로 미안합니다"라고 할 때, 그것이 면피성 구호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교회가 그동안 종교를 내세워 사회적 감수성에 반하게 행동해 온 것을 사과해야 한다. 이미 한국 사회 88% 이상이 찬성하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고 있는 행태, 동성애(자)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종교 재판에 걸려 축출당하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이의 제기조차 못하고 있는 현 상황에 문제의식을 지녀야 한다.

3. 

한국의 개신교는 모든 것을 신학 이데올로기로 수렴해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무감각하게 만드는 행태를 반복해 왔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반공 정서가 그 핵심이었고, 한때는 이슬람 혐오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반진화론도 여전히 그 중심에 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반동성애로 수렴하고 있다. 이 현상은 신학적 진보·보수 할 것 없이 대다수 교회에 걸쳐 있다.

제도권 교회가 제기하는 이데올로기적 주장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모든 건전한 사고 기능을 중단시키는 문제다. 현재 교회에서는 모든 유대인·이방인·문명인·야만인의 차이를 극복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빨갱이·진화론·동성애가 우위에 있다. 이는 신학적 문제가 아니라 교회 정치 문제이고, 종교심리학의 문제다.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60~70대 교계 지도자들이 과잉 대표하고 있는 한국교회 노령화 현상이다. 사회에서는 20~30대가 소위 86세대에 여러 목소리를 제기하는데, 교회 내에서는 86세대조차 목소리 내기가 버겁다. 이 낡은 감수성이 교회에서 차별금지법 반대 일변도 목소리만 들리는 이유다. 각종 포털 사이트에 '차별금지법'을 검색해 보라. 이성적 논의를 할 수 없는 선동과 구호만이 난무한다.

교회와 관련한 작금의 사태는 차별금지법 이슈를 좀 더 냉정하게 볼 수 있는 기회다. 전광훈에 동조하던 이들도 눈치껏 손을 떼는 분위기다. 이번 사태에 연루된 대부분이 극렬하게 반동성애 운동을 하고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잘못했지만 동성애 반대에 있어서는 정당하다고 따로 떼어 볼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의 사고 원칙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신앙고백이 어떤 식으로든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하는 것이라면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 상식을 공유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되더라도 부화뇌동하는 식이면 곤란하다. 이것이 성숙한 과정이다. 인권위원회 조사 결과, 차별금지법 제정에 국민 88.5%가 찬성한다고 한다. 이 정도면 사회적 합의가 대체적으로 이루어진 사안이다. 그런데도 종교적 신념과 사회·정치적 이유를 들어 반대하면 이기적·반사회적으로 비칠 뿐이다.

이는 중요한 문제다. 2000년대 초반 주 5일 근무제 도입 때도 그랬고, 지난해 낙태죄 폐지 때도 그랬다. 교회는 항상 나라가 무너져 내릴 것처럼 요란을 떨었다. 주 5일제가 되면서 교회 말처럼 전 국민이 흥청망청하게 되었는가 아니면 '워라밸'에 한 걸음 더 다가갔는가. 낙태죄 폐지 논의로 낙태가 엄청나게 늘었는가? 유감스럽게도 당시 호들갑 떨던 이들이 지금은 일언반구도 없다.

물론 종교에는 사회와 별개로 종교의 역할이 있다. 종교는 윤리와 도덕의 보루다. 낙태죄와 차별금지법도 그 선상에서 충분히 문제 제기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럼에도 왜 개신교계가 던지는 이슈는 사회 보편 정서에 공감을 얻지 못할까. 교회가 선택적 정의를 취하기 때문일 것이다. 개신교계가 부동산 불로소득 등 사회의 빈부 문제에는 쓴소리 한마디 내뱉지 못하면서 내세우는 선택적 정의는 진지하게 수용될 수 없다. 경청해야 할 종교의 목소리로 들리기 보다는 사회 기득권을 보호하는 데 급급하게만 보이기 때문이다.

4.

냉정하게 말해 보자. 교회가 사회적 합의를 얻고 진행되는 사안에 반대 목소리를 높인 결과, 교회는 반사회적 집단으로 체면을 구기고, 사회는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진리를 위한 희생이 아니었다. 교권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나라를 살리겠다고 광화문에 모여든 이들이야말로 코로나19 재확산으로 나라를 멈춰 세운 이들 아닌가. 그들이 '살리고 싶은' 그 나라는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사회는 교회를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라고 평가한다. 이러한 경험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 개신교는 '거리를 두고 싶은', '사기꾼 같은' 따위의 형용사로 수식되고 있다. 코로나19로 갑작스레 생긴 현상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진짜 수치는 밖에서 욕을 먹는 작금의 현실이 아니다. 스스로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자성하는 능력을 상실한 것이 진짜 수치스러운 일이다. 신앙고백적 틀에 갇혀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바로 이 상황 말이다.

우리는 개신교가 받고 있는 비판을 사회적 감수성을 회복할 몇 안 남은 기회로 삼아야 한다.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이 열릴 것이라 믿는다. 교회 다니는 것이 차별의 이유가 되고 있는 요즈음은 차별금지법이 얼마나 중요한 법안인지 인식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역지사지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 지금은 교회의 선언적 주장을 그대로 답습할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예수를 묵상할 때다.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도 맹목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주체적인 사고로 고민하는 그리스도인이 늘기를 바란다. 나는 "교회가 진심으로 미안합니다"라는 말의 진정성을 가늠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전향적 태도라고 본다. 그리스도인은 사회가 뭐라고 하든지 독야청청을 주장하는 자가 아니라, 사회와 더불어 살아가는 자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최종원 /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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