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교 집단 신천지에 대한 동영상이나 정보가 꽤 충격적이다. 신천지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만 포섭 대상으로 삼아 접근하고, 젊은이들 비율이 매우 높다는 것이 놀랍다. 기성 교회 타락과 세습, 성적 추문 등에 대한 실망, 교회에서 보듬지 못하는 문제를 안고 있거나 소외된 상황, 성도들 질문을 막거나, 답을 주지 못하는 교회에 대한 회의 등이 신천지에 걸려드는 이유라고 한다.

그렇다면, 교회가 도덕과 윤리를 회복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잘 보듬고, 궁금증에 질문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올바로 성경을 가르쳐 주는 것이 해결책이겠다. 그런데 위에 열거한 내용은 신천지에 빠지는 이유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제도 교회를 떠나 이른바 가나안 성도가 되거나, 신앙을 떠나는 이유와도 같다.

신천지가 활개 치게 된 원인에 기성 교회가 한몫했다는 것을 원칙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이유에 대해서는 좀 더 들여다볼 부분도 있을 듯하다.

2.

다소 조심스럽지만, 기성 교회에서 이탈하여 이단이나 사이비 종파로 들어가는 경우는 대부분 지나치게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믿는다는 것을, 혹은 더 잘 믿는다는 것을 마치 숨겨진 비밀을 깨달아 고차원의 세계에 들어가는 유물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일견 순수한 종교적인 동기로 보이지만, 철저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것이다. 더 깊은 비밀을 알아 선택받은 자의 무리에 들고자 하는 욕구는, 그 길을 알고 이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 앞에 맹목적인 복종을 하는 것으로 변할 수 있다. 신앙이 일상에서 살아 내는 것이라는 관념은 이 속에 존재할 수 없다. 오로지 더 우월한 깨달음의 경지, 선택받은 자의 무리 속에 들기 위한 욕망이 삶을 추동한다. 그런데 그 욕망이 요구하는 대가는 주체의 죽음이다. 교주에게, 또는 그가 이끄는 공동체에 몸과 정신과 영혼을 빼앗길 뿐이다.

과도하게 신앙적 열심을 내지만 늘 충족되지 않는 사람들이나, 요즘 젊은 세대처럼 삶의 불확실성에 억눌린 이들에게는 공통적으로 '확신'·'확실성'이라는 단어는 약한 고리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이들에게 뭔가 눈에 보이고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을 가졌노라고 명확하게 제시하는 주장은 눈을 뻔뜩이게 하기 쉽다.

계시록의 비밀을 깨달아 구원의 비밀을 아노라고 하는 이들은 이 인간의 지극한 이기심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해 주는 것이다. 그 집단이 수개월간 사람에게 공을 들여 포섭하는 것은 실제로는 사람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기보다는, 여전히 불안한 상태에서 선택받은 무리에 더 확실하게 들어가기 위한 이기적 몸부림에 불과하다. 무법과 거짓말과 부도덕에 둔감하며, 오히려 더 큰 목표를 위한 선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그 동기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임을 입증한다.

한번 맹목을 선택한 이들은 더 큰 맹목을 선택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종교를 이기심 충족을 위해 극도로 사사화했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사회에 대한 감수성은 원천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신앙의 사회성에 대한 고민은 없고 깨달음과 선택과 구원이라는 개인적인 것으로만 환원하는 것이 사이비의 특성이다.

3.

사이비 종교가 교회에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바른' 성경 해석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이 개인의 성취와 발전에 머물러 사사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도록 신앙의 성찰성을 얘기하는 것이다.

사회 이성과 비판적 사고에 대한 공감이 약하고 모든 것을 신앙으로 환원하는 경향이 한국교회에 깊게 자리하고 있다. 이것이 더 확실한, 그러나 허황된 약속을 하는 사이비들이 들어오는 틈이다. 그런 점에서 정통 기독교와 사이비 종교는 경계가 생각보다 좁을 수 있다. 교회가 성경 공부를 안 했기 때문이기보다는 성경 공부에만 그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안주하고 신앙의 성찰에 관심 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앙은 비록 작은 믿음일지라도, 살아 내는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채워 줄 확신을 추구하기보다, 두렵고 떨림 속에 한 발, 한 발 신뢰를 가지고 걸어가야 한다. 그 길을 걸을 용기가 없이 값싼 성취를 추구한다면, 거짓 선지자가 약속한 구원의 대가로 삶과 신앙의 주체를 내줄 수도 있다. 그게 바로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이다.

4.

성경은 비밀을 깨닫고 해석하는 데 머물지 않고, 우리로 살아 낼 것을 요청한다. 종교의 이름으로 극한의 이기심 충족을 약속하고, 성경이 그를 추동하는 도구로 오용되는 한, 성경이 주역·정감록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래서 성경에 대한 모든 질문이 좋은 질문일지도 고민이 된다. 성경을 그 어떤 것보다 복잡다단한 삶의 다양한 질문에 쾌도난마와 같은 해답을 주는 책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그 답은 정통 교회 목회자이건, 사이비 교주이건, 권위 있는 자가 제시해 줄 성격의 것이 아니다.

명쾌한 답을 깨닫고 발견하기 위한 질문보다는, 스스로 고민하며 답을 찾아 나가는 근육을 키우기 위한 질문이어야 한다. 바른 질문은 호기심을 충족하는 용도이기 보다는,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 없는 신앙의 신비를 체험하는 통로로 연결되어야 한다. 인간의 이해로 풀어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더 이상 그 신앙에서 신비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화할 수 없는 것을 절대화하여 답이 있는 양, 확실히 아는 양 제시하는 것은 늘 문제를 낳는다.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주체를 내어 주고라도 평안을 희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지나치면, 신천지 사례에서 보듯 세뇌당하기 쉽다. 잘못된 질문은 주체를 상실시키지만, 좋은 질문은 성찰적으로 삶과 신앙을 고민하며 참된 자기를 찾는 길을 열어 줄 수 있다. 이게 정통 교회의 신앙이어야 하지 않을까.

최종원 /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교수

*최종원 교수 페이스북에 3월 4일 게재된 글입니다(클릭하시면 원문으로 이동합니다). 허락을 받아 전문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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