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을 지나면서 작금의 교회 현실과 선교 상황을 보면 우리 때문에 고난받으신 주님을 더욱더 고통스럽게 해 드리는 것 같아 송구하다. 가룟인 유다를 가리켜 하신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는 말씀이 오늘날 한국의 적지 않은 교회에 하시는 말씀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이다. 나의 이 작은 글이 가뜩이나 어려운 한국교회에 위로와 소망의 작은 등불이 될 수 있을지 망설여지지만, 몇 달째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명성교회 세습 건에 침묵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에 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께서는 불법을 저지르는 교회가 무너지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해 성전에서 돈을 교환하고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를 목도하시고서 거침없이 채찍을 드시고 그들을 쫓아내셨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생존과 번영을 교회의 본질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기업형 교회를 향해 드신 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예수를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던 기득권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의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데 결정적 단초를 제공한 사건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예루살렘성전의 장엄한 규모를 보고서 감탄할 때 그것을 거들떠보시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 13:2)고 엄중하게 말씀하셨다. 얼마 가지 않아 로마 티투스 장군에게 함락되고 마는 예루살렘성전을 향한 심판의 말씀인지, 역사의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유대 백성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시는 말씀인지, 둘 다인지 확언하기 어려우나 이 말씀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확실한 것은 이 말씀이 안정과 번영이 중요하다고 억지 주장을 펼치는 오늘날 일부 종교 지도자들에게 내리시는 엄숙한 경고와도 같다는 것이다. 교회가 언제부터 안정과 번영을 중요시했던가. 교회가 황금보다 더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자 복음이며 순교적 신앙이다.

작금의 명성교회 사태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명성교회가 무너지면 예장통합 교단이 무너지고 한국교회가 무너진다"고 엄포를 놓으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명성교회가 무너지기를 결코 바라지 않지만) 교회가 무너져야 한다면 당연히 무너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의를 저지르면 기업도 무너져야 하고 정권조차도 무너져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왜 교회만 무너져서는 안 되는가. 우리는 중세에 철옹성과 같았던 가톨릭 교권주의가 무너지고 이단이 무너지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해 오지 않았던가.

개혁 교회에서 중세 가톨릭을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갔던 개혁 의지가 사라진다면, 오히려 그것이 교회가 내적으로 무너지고 있는 징후일 것이다. 이단이나 공산주의는 추호도 용납하지 않고 "이 땅에서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그에 못지않은 불법을 저지르는 교회는 옹호하고 있다. 세습 옹호자들의 모습을 보면, 아무 원칙도 없이 한때는 '호산나'(구원해 주시옵소서)를 외치다가도 종교 지도자들의 선동에 따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무엇에 화를 내는지 스스로 알지 못한 채 소리를 지르는 성난 군중이 떠오른다.

어떤 목사는 오늘날 목회자를 구약의 제사장으로 비교하면서 "제사장도 승계를 했는데 교회가 목회직을 왜 세습하지 못하느냐"고 한다. 정말 성경을 조금이라도 읽는 사람이라면, 구약의 제사장과 개신교의 목사가 전혀 다른 부류의 사역자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구약의 제사장은 레위 지파에 한정된 직분이었으며 그들에게는 엄격한 규정 준수가 요구됐다. 심지어 그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을 내려 지성소에서 죽기도 했다.

지금은 구약시대도 아니고 목회자는 제사장으로 한정된 지파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아니다. 누구나 공부해서 신학교에 갈 수 있고, 그들의 영성과 능력에 따라 목회 현장으로 나간다. 구약 법이 아니라 (순결이나 헌신은 차치하더라도) 교회와 민주주의사회에서 요구하는 청렴과 공의의 원리에 따라 목회를 수행해야 한다. 또한 교회법은 꼭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검토를 거쳐 그 사회의 제도와 구성원의 지적 수준과 통념, 선교적 상황에 합당하게 세워지는 것이다. 교회가 하는 일이 사회적 통념에 맞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일반 대중도 교회를 향해 사회 규준이나 민주주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비판할 수 있다.

일반 대중은 선교의 대상이기에 교회 바깥의 소리라고 무시해서는 안 되며 더욱 무겁게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교회 밖의 사람이 왜 교회 일에 참견하느냐"고 불평하는 사람은 어찌하여 기업인의 불의를 지적하고 잘못을 저지른 정치인 혹은 연예인이나 판검사를 비판하는가. '하나님의 선교 신학'에서는 선교 목적이 '사회적 샬롬'에 있기에 교회는 사회적 판단과는 아무 상관없는 초역사적 존재가 아니라 생태계의 한 고리라고 지적한다. 교회는 청정 기능을 감당해야 할 핵심 기관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지녀야 하며, 어느 기관보다 높은 기준을 가져야 한다.

요즘에는 신학교 교수마저 나서서 "세습이 아니라 계승"이라고 말장난에 가담하고 있으니,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을 더욱 꼬이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의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성경에 세습이라는 말이 없으므로 '세습'이라는 용어 자체가 성경적이지 않다는 궤변은 일반인이 들어도 상식에 반하는 괴상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사이코패스'라는 말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그 용어를 쓰는 기독교 상담가들을 반성경적이라고 정죄할 것인가.

앞서 말했듯, 목사는 구약의 제사장이 아니다. 우리는 유대교가 아니라 기독교다. 그리고 교회는 이익이나 사교를 지향하는 기업이나 친목회가 아니다. 교회는 예수의 피로 세워졌다. 세상 어느 공동체보다 순결하고 합리적이며 희생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이에 반하는 세습은 세습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백 번 옳다.

세상 기준으로도 합당하지 않는 세습을 옹호하기 위해 어떤 논리를 꿰맞춘다 하더라도, 세습은 교회의 가치를 급락시키며 선교 상황을 악화하는 일이 될 것임이 자명하다. 백 번 양보해서 아들이나 사위 세습 혹은 징검다리 세습이나 교차 세습이 당장 몇몇 교회를 안정시키는 데 효율적이라도 그것은 인정될 수 없는 일이다. 교회가 추구해야 할 원리는 효율이 아니라 공의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습이 용인됐을 때 개신교는 사리사욕을 위한 수많은 세습으로 사회적으로 신용할 수 없는 집단으로 낙인찍힐 것이다.

이 때문에 교계는, 대형 교회 목사를 아버지로 두거나 변칙 세습할 수 있는 정치력 있는 목회자의 자녀, 곧 금수저 목회자와 능력이 있어도 중대형 교회에 갈 수 없는 저임금노동자 목회자로 양분될 것이다. 목회와 선교는 순수성을 상실할 것이며, 선교는 생존게임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한국교회 목회자뿐 아니라 수많은 교인에게 자괴감과 회의감을 안겨 줄 것이다. 결국 적지 않은 교인의 이탈을 불러올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발표된 한 연구를 보면,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교회나 목회자 행태에 대해 과감하게 반기를 들고 교회를 떠나는 교인이 많아졌다고 한다. 덮어놓고 믿으라 해서 믿을 시대도 아니고, 비합리적인 일을 몇몇 교회만의 문제로 덮어 둘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지금 누가 감히 세습을 허락하지 않으면 명성교회가 무너지고 교단이 무너질 것이라고 위협하는가. 명성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아닌 특정인의 교회이며, 예장통합 교단은 명성교회가 무너지면 없어질 정체성이나 사명감 없는 허약한 교단인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수술을 받아야 할 환자가 자기를 수술대에 누이면 병원이 위태로울 것이라고 큰소리치는 듯한 허무맹랑함을 느끼는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예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고 말씀하셨다. 하나님나라를 위한 순종과 헌신이 아니라, 이 세상에 영원한 제국을 세우기 위해 가옥에 가옥을, 전토에 전토를 더하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힘든 발걸음을 옮기시는 예수께 자기 십자가를 전가하는 교회와 목회자는 각성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우리 생명이시며 치료자이신 주님 앞에 치부를 드러내 놓고 겸손히 그분의 인도와 치유를 기다려야 할 때이다. 주께서 교회에 주신 은혜가 크기 때문에 명성교회를 비롯한 한국의 모든 교회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 크며, 가장 먼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호열 / 연합선교교회 목사, 국제코칭협회(GCLA) 한국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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