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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팬데믹, 혼돈의 시간
스페인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omingo Felipe Jacinto Dalí i Domènech, 1904~1989)가 그린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스페인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omingo Felipe Jacinto Dalí i Domènech, 1904~1989)가 그린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스페인 출신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 이라는 그림이 있다. 네모난 탁자 위에 솟아 있는 나무는 이파리도 없는 앙상한 상태고, 바닥에는 물고기인지 말의 안장인지 모를 뭔가가 놓여 있다. 녹아내린 치즈 모양의 시계들도 이곳저곳 걸려 있다. 시계의 생명은 정확성이다. 그러나 이 그림의 시계들은 시간의 균질성·절대성을 포기한 듯 제각기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고, 배경에는 아스라한 수평선이 펼쳐져 있다. 시간이 멈추거나 지체되고 역류하며 서로를 부정하고 있는 느낌이다.

팬데믹 상황의 시간적 느낌은 이 그림이 주는 이미지와 흡사하다. 질서, 규율, 예측 가능성을 상징하는 시계가 굴곡진 현실에서 각기 고립되거나 멈춰 버린 듯, 사람들은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 적잖은 사람이 무력감·분노·좌절을 경험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 가운데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외형상 파편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상황을 유난히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인위적이라도 팬데믹 현상을 해석하고 방향을 찾아내고 현실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친다. 그러나 어떤 현상을 해석하는 일은 때때로 어렵고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역사의 필연성과 개연성

그리스도교의 역사관을 흔히 목적적·직선적 역사관이라고 말한다. 역사는 우연에서 우연으로 이끌리는 것이 아니고, 끝 모를 순환을 계속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나아간다는 생각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대부분 동의하는 역사관이다. 그러나 같은 목적적 역사관이라 하더라도 심층을 들여다보면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해석은 많은 이견과 갈등을 빚어 왔다. 거기에는 1세기 유대인들, 예수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들 간 충돌도 포함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유대인·성전·율법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믿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예루살렘 왕으로 추대되는 방식으로 하나님 뜻이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모든 기대를 저버리고 매우 새롭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셨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오랫동안 반복되며 부침을 거듭했던 종말론도 선대의 희망 사항이었을 뿐, 역사의 강은 지금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종교 지도자들은 흔히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역사의 필연과 목적을 독점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현실에서 역사의 필연성은 그리 파악하기 쉽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를 혁명가로 묘사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그는 인위적으로 역사를 뒤집지 않으셨다. 역사의 필연성을 추구하는 일은 일면 타당하다. 하지만 역사가 이뤄지는 방식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바와 다른 경우가 많다. 역사의 필연은 때때로 그것을 깨닫기까지 긴장과 역설을 요구한다. 역사는 수많은 우연성과 개연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획기적인 발명품이 우연한 기회에 탄생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는 사실 우연이 아니라 수만 가지 변수가 상호작용한 결과다. 그 연결 고리를 파악하지 못한 인간의 눈에 우연으로 보일 뿐이다.

전도서 기자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고 썼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혼란스럽게 보이는 현실 속에서 역사적 필연성을 지켜 나갈 뿐 아니라 허락된 모든 방법으로 개연성을 해석해 내는 것이다. 그런데 적잖은 그리스도인이 당장의 목적성과 필연성만을 고집하곤 한다.

팬데믹이 불러낸 교회의 민낯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전염병 상황에서 신자들뿐 아니라 많은 동시대인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데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자랑할 만한 전통이다. 디즈니를 수년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는 CEO 로버트 아이거(Robert Iger)는 그의 자서전에서 "종종 사람들은 부족한 일관성과 비전을 숨기는 방편으로 소소한 세부 사항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큰 그림이 엉망이라면 작은 것들은 어차피 중요하지 않다"고 썼다. 상황이 복잡하고 어려울수록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팬데믹 상황에서 어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가. 자기가 속한 교회의 생존이라는 작은 그림에만 집착하며 전체적인 선교 그림을 망가뜨리고 있지는 않은가.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신학적 대주제에 맞춰 동시대인을 어떻게 하면 위로하고 치유할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춰야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개교회의 생존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면 교회의 노래는 변주의 다양성·확장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예배가 생명이다"는 외침은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요셉은 오늘날과 같은 공중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사도 요한은 오랜 기간 밧모섬에 갇혀 있었지만 그의 예배는 신령했고,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게 된 계기도 대중 예배에서의 격려가 아니라 기도실·서재에서의 고독한 싸움이 이뤄 낸 결단이었다. 팬데믹은 이런 면에서 무기력하고도 자기 지향적인 교회의 실상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개교회의 생존과 예배는 중요하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때때로 신앙인을 건물 안이 아닌 광야로 내몰기도 하신다.

종교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는 초대교회 교인들이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전도에 열심을 내지 않았는데도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대안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곧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당대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그리스도교로 회심하는 일은 "비이성적 결단이 아니라 이성적 귀결"이었다고 말한다. 복음의 내용을 굳이 모르더라도 합리적·객관적인 시각으로 보아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가장 나은 선택지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팬데믹 같은 상황이 우리 삶을 흔들어 놓을수록 사람들은 더욱 신뢰할 만한 것을 찾게 될 것이다. 교회는 동시대인이 수긍할 만한 큰 그림을 보여 줘야 한다.

크리스천 리더십의 방향성

팬데믹은 개신교의 분열적 모습을 들춰 내 보여 줬다. 이유는 여러 가지고 변명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뢰는 논리와 변명으로 쌓아지지 않는다. 교회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험난한 과정을 견뎌 내야만 한다. 팬데믹 이후, 또다시 닥쳐올지도 모를 위기를 준비해야 하는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에게는 어떤 리더십이 요구될까.

1. 사회적 책임 의식

교회는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고 이를 마땅히 짊어지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면 교회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리더십의 핵심 중 하나는 책임 의식을 더 많이 갖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리더들은 항상 더 깊은 책임감을 갖고 살았다. 성경 속 요셉·모세·바울이 그랬고, 우리 역사 속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백범 김구도 그랬다. 책임을 도외시한 채 유체이탈식 화법을 구사하는 목회자들, 팬데믹을 하나님 심판이라고 설교하며 대중을 호도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장 먼저 심판받을 자는 누구라고 돼 있는가(벧전 4:17).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 백성들로부터 시작한다고 돼 있다.

또 우리의 삶 자체를 놓고 보면 하나님의 심판 영역이 아닌 게 어디 있는가. 질병·죽음도 심판이고 우리가 최선을 다해 내린 선택도 돌아보면 심판의 성격을 띄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심판을 선포하는 설교는 설교자 본인과 교인들 마음을 후련하게 할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는 데는 별다른 유익이 없다. 이런 설교는 오히려 교인들의 신앙적 결단과 행동을 저해한다.

"심판이 시작됐으니 한번 지켜보자"는 생각이 대체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 그보다는 어째서 이런 팬데믹이 생겨났는지, 우리가 보존해야 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대상으로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는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교회에 어떤 책임을 주시는지 물어야 한다. 책임과 헌신보다 더 중요한 생존은 있을 수 없다. 교회는 도피처나 심판자로 보냄을 받은 게 아니라 세상의 빛으로 부름을 받았다. 역사 속 예언자들의 선포는 사회를 바로 세우려는 책임 의식에서 비롯한 것이지, 시대를 경멸하려는 동기에서 나온 게 아님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비록 시대가 어지럽고 악할지라도 조롱과 심판은 교회의 몫이 아니다.

2. 과학적 태도와 창조 세계에 대한 경외

1976년 아프리카 자이레에서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창궐해 수많은 사람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고 있을 때, 얌부쿠 마을에서는 한 가톨릭 선교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마르셀라 수녀를 비롯한 몇몇 수녀들이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있었다. 그들의 수고에도 바이러스는 급속히 확산했고 병실은 신음하며 죽어 가는 환자들로 넘쳐 나게 됐다. 현장에 도착한 과학자들은 역학조사를 통해 수녀들이 사용한 주사기가 충분히 소독되지 않아 의도치 않게 병원균 확산의 근거지가 됐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병은 마을 근처에 흐르는 강 이름을 따라 '에볼라'라고 불리게 됐다. 이 사건은 아무리 신앙심을 갖고 열심히 이웃을 돕는다고 해도 과학적 의식이 결여돼 있을 때 그 결과가 어떠한지 보여 주는 극명한 사례다. 현재 팬데믹 확산으로 비난받고 있는 일부 교회 신자들이 제대로 된 방역 수칙만 철저히 지켰어도 대부분의 확산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들은 과학을 신앙과는 다른 별개 영역으로 간주하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태도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이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발현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도 현재 기술력으로는 밝혀내지 못하지만 고도의 과학적 영역에서 이뤄진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교부들은 그리스도인이 자연을 제2의 성경으로 간주하고 과학에 대해 더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봤다. '신앙적'이라는 말이 꼭 과학을 무시하거나 초월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교회가 21세기 동시대인을 품으려면 사랑의 정신과 아울러 과학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는 "사람이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공감과 직감, 곧 문제 속으로 들어가서 그 문제의 일부가 돼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이 팬데믹 현상을 교리적으로 이해·극복하려는 노력에 비해, 동시대인 고난에 동참하려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미진했음을 자성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문제 속으로 들어가려면 과학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기도만으로 위기를 이겨 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와 능력을 교회 건물 안으로 좁히는 퇴행적 행태다. 또한 현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의식과 기술 저 너머에 알지 못하는 뭔가가 존재한다는 신비감·경외감은 문명 발전과 문제 해결에 있어서 그리스도교 영성이 과학과 공유 가능한 자산이다.

3. 과잉된 자유 극복과 권위에 대한 존중 확립

개신교는 가톨릭의 획일적 교권주의에 반발했고 신앙의자유와 다양성, 선교의 역동성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사람은 신앙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다른 자유'를 추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 자유는 이름만 자유일 뿐, 사실은 자기 욕망의 표출에 불과하다. 오늘날 종교는 구교·신교를 막론하고 권력화했고 권력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주 언급돼 온 바, 교회가 투명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지적은 그저 교회 재정 장부나 의사 결정 구조의 공개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려는 음모를 최대한 배제할 수 있는 장치와 의식의 광범위한 공유를 의미한다. 오늘날 교회는 각종 정치적 이권을 추구하는 세력들로 파벌화하고 있으며, 정치 브로커들이 진을 치고 있다. 이러한 세력들이 결국 교회를 파괴한다. 그들은 선교신학이나 그리스도교 진리에는 문맹에 가까우며, 자기 권리 확보·확장에만 목을 매는 부류다. 그들은 목사일수도 있고 장로·평신도일 수도 있다.

이런 면에서 개신교회만큼 위험한 분열적 요소를 축적하고 있는 집단도 없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경험한 교훈은 종교 권력이 비대해지고 이합집산이 두드러질수록 이를 제어하기 위한 장치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개신교는 이 장치 마련이 매우 어려운 구조다. 교단은 그들만의 아성이며 교회는 하나의 왕국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제2의 종교개혁은 개신교가 가톨릭을 공격해 이뤄졌던 교리적 개혁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개신교회는 오랜 시간 단련해 온 교리·제도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인간의 세속적 욕망을 차단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새로운 개혁의 핵심은 '투명성', '자유의 포기', '권위에 대한 존중'이며 이를 범교단적으로, 전체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프랑스 정치 사상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자유와 평등의 긴장관계와 위험성에 대해 "자유민주주의는 우리가 항상 걱정하는 평등 정신을 상실할 때뿐만 아니라, 너무 많은 평등이 존재할 때, 각 시민들이 자신이 선택한 지도자와 동등하다고 생각할 때도 부패할 수 있다"고 썼다. 곧 민주주의는 평등의 정신이 상실될 때 붕괴될 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이 지도자의 권위에 선택적으로 따를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때도 마찬가지로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개신교회의 위기가 광범위한 권위의 붕괴에서 비롯하고, 개교회주의와 개인주의의 승리에 따른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의 붕괴에서 온다고 본다. 

귄위의 붕괴는 누구나 성공을 위해서는 신앙·신학조차 바꾸는 유혹에 직면하게 하는 성공주의적 신학의 필연적인 결과다. 차후 과제는 개신교회가 무제한의 자유와 세속적 욕망의 위험성을 어떻게 제어하고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하게 만드는 장치를 마련하느냐가 될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인 영국 의학자 마이클 비숍(J. Michael Bishop)은 "인간의 모든 세포는 기능을 다하면 전체 몸을 위해 스스로의 생명을 포기하는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암이란, 죽지 않고 끝까지 자기 생존을 고집하며 전체의 희생을 강요하는 나쁜 조직"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사명 중 하나는 세상 속에 성경적이고 민주적인 장치를 만들고 거기에 스스로를 복종시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복종을 말하는 일은, 신앙을 가장한 일탈이자 위선일 뿐이다.

나가며: 팬데믹을 넘어 변화와 치유의 길로

하나님께서는 혁신을 위해 파괴를 선택하는 방법을 종종 사용하셨다. 바벨탑 사건이나 노아의홍수, 예루살렘의 제자들을 흩으신 예가 있다. 비유하자면 팬데믹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파괴다. 물론 인간의 탐욕·무지가 초래한 일이지만, 크리스천 지도자들은 팬데믹 자체보다는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찾아내려 노력해야 한다. 변하는 것들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건축이 교회를 만들지 못하고, 활동이 영성을 대신하지 못하며, 교회의 생존이 선교를 보장해 주지도 못한다. 팬데믹 현상을 통해 우리 안에 흐르고 있는 반역의 피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역사는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를 봐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다(눅 17:21).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공의와 인자를 드러내려는 태도가 크리스천 리더들에게 필요하다. 동시대를 끌어안으려는 노력이 교회를 교회답게 할 것이다. 팬데믹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며 인류 역사는 전염병과 싸워 극복해 온 역사이기도 하다. 1세기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발생한 정신적 팬데믹의 희생자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 식민지 개척 시대의 제국주의적 정복 전쟁, 그리고 히틀러를 통해 나타난 가공할 만한 파괴 행위는 탈신앙적이고 이념적인 팬데믹이 실제 바이러스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것을 가르쳐 줬다. 그런 면에서 팬데믹은 세상을 향해 "어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손짓이기도 하다. 크리스천 지도자들의 사명은 공고한 제도와 왕국을 건설하고 지키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이 땅의 백성들이 주께로 나아가도록 길을 닦는 일이다.

이호열 / 백석대학교에서 선교학 및 인문학 교양을 강의하고 있다. APPLE TREE CHRISTIAN COMMUNITY 대표, 밴쿠버에 본부를 둔 글로벌코칭리더십/GCLA협회 한국 대표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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