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스 크라나흐와 익명의 제작자들이 그린 '천지창조', 루터 성경(1534)의 첫 삽화

루터성경 창세기 1장 부분. 사진 제공 최주훈
루터성경 창세기 1장 부분. 사진 제공 최주훈

책을 펼치면 그 안에 들어 있는 그림이 글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 줄 때가 있습니다. 한 장의 삽화가 시대의 숨결과 신앙의 본질을 고스란히 전해 주는 창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오늘 우리는 그런 특별한 삽화 하나를 감상해 보려고 합니다. 소개할 그림은 1534년,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신구약성경에 실린 첫 번째 삽화입니다. 창세기의 창조와 타락 이야기가 담긴 이 작품은 단순한 장식 요소가 아니라 성경의 메시지와 종교개혁의 열망을 조화롭게 엮어 냅니다. 

종교개혁의 바람

16세기 초, 유럽은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로 들어갑니다. 비텐베르크의 수도사였던 루터는 중세 교회의 관행에 의문을 제기하며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피게 됩니다. 1517년 "사면증에 관한 95개 논제"를 시작으로 개혁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은 루터가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보급한 일입니다.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사건은 단순한 언어적 전환이 아닙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겠지만, 당시에 성경 번역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로 여겨져 파문과 화형에 처할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런 사례도 역사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 위험을 알고도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했다는 건 용기와 확신이 필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루터의 성경 번역은 신앙의 문턱을 낮추고, 모든 이에게 말씀의 문을 열어 주는 혁명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일종의 신앙의 민주화를 추구한 것이지요. 그 시대까지 성경은 라틴어로만 존재했고, 일반 신도들은 그저 성직자의 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루터는 '오직 성경'이라는 원칙을 내세우며, 모든 신자가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의 독일어 성경은 바로 이런 신념의 결실입니다. 1521년 신약성경을 번역한 바 있지만, 신구약 전체가 자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된 건 한참 뒤인 1534년입니다. 

이 역사적인 성경에는 총 117개의 채색 목판화 삽화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크리스티안 되링의 의뢰로 인쇄업자 한스 루프트가 인쇄한 이 삽화들은 곧 개신교 가정에서 거의 정경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들은 성경의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강력한 도구라서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해당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귀중한 성경 속 삽화들이 크라나흐 공방에서 탄생합니다. 고증에 따르면, 이 그림을 그린 작가를 누구로 특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루카스 크라나흐의 작업실은 여러 예술가들이 함께 일하는 창의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그림에는 크라나흐의 예술적 감각과 루터의 신학적 통찰이 통일성 있게 녹아 있습니다.

크라나흐와 루터는 단순한 예술가와 신학자, 또는 종교개혁의 동반자 관계를 넘어 깊은 우정을 나눈 절친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루터의 아내인 카타리나 폰 보라를 중매한 장본인이기도 하고, 서로 자녀들의 대부(Godfather) 자격으로 유아세례에 동행했고,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크라나흐가 루터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루터의 눈빛을 "하늘의 별과 같다"고 표현했다고 할 정도로 애틋한 관계였습니다. 이런 깊은 교감이 있었기에 크라나흐의 공방은 루터의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데 이상적인 파트너였을 것입니다.

루터성경에 실린 천지창조, 루카스 크라나흐와 익명의 제작자. 사진 제공 최주훈
루터성경에 실린 천지창조, 루카스 크라나흐와 익명의 제작자. 사진 제공 최주훈
창세기 삽화에 우주를 담다

이제 그림을 봅시다. 창세기의 첫 삽화는 상단과 하단으로 나뉘어, 천상과 지상의 세계를 보여 줍니다. 각 요소마다 깊은 상징과 의미가 담겨 있어, 그림을 들여다볼수록 더 많은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상단에는 붉은 망토를 두른 하나님이 황금빛 후광에 둘러싸여 계십니다. 선명한 붉은색은 신의 권위와 창조의 열정을 상징합니다. 이 강렬한 색채는 보는 이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며, 창조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황금빛 후광은 신의 영광과 초월성을 나타내는 전통적인 표현 방식으로, 빛이 방사형으로 퍼져 나가는 모습은 그분의 영향력이 우주 전체로 확장됨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손동작은 창조와 축복을 동시에 나타냅니다. 두 손가락을 들어 올린 자세는 당시 종교 예술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축복의 제스처로, 이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창세기의 구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단순한 손짓 하나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며, 신과 인간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하단에는 에덴동산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나체로 서 있는 모습은 원죄 이전의 순수함과 무죄함을 보여 줍니다. 그들의 자연스러운 자세와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주변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평화롭게 공존합니다. 사자와 양이 함께 있고, 새들이 나무에 앉아 있는 모습은 창조 세계의 조화와 평화를 상징합니다. 이 동물들은 놀랍도록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창조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한 구석에 뱀이 위협적으로 머리를 들고 꼿꼿이 서 있습니다. 이는 평화로운 풍경이 곧 흔들릴 것임을 암시합니다. 에덴동산을 둘러싼 푸른 물결과 별들은 우주의 질서를 표현합니다. 푸른색은 생명의 근원이자 하늘과 바다를 상징하고 곡선으로 표현된 물결은 자연의 흐름과 순환을 보여 줍니다. 별들은 하늘의 질서를 나타내는데, 하나님의 창조가 지상에만 국한되지 않고 온 우주를 아우른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루터성경에 실린 천지창조 중 에덴동산 부분. 사진 제공 최주훈
루터성경에 실린 천지창조 중 에덴동산 부분. 사진 제공 최주훈
중세 신학 뒤엎기

이 삽화에는 중세 철학과 신학에 대한 루터의 혁명적인 도전이 시각적으로 표현됩니다. 중세 교회에서 하나님은 주로 엄격한 심판자로 묘사되었고, 신자들은 성직자의 중재 없이는 하나님께 직접 다가갈 수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하나님은 심판자가 아닌 자비로운 창조자이자 축복의 존재로 표현됩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지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떤 중재자도 없다는 대목입니다. 이는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을 시각화한 것으로, 모든 신자가 성직자의 중재 없이 직접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다는 종교개혁의 핵심 가르침을 보여 줍니다. 중세 성화에서는 흔히 성인이나 성직자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위치합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그런 중간 매개체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나란히 서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호흡으로 창조된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정신을 암시합니다. 중세 교회에선 여성이 더 유혹에 약하고 영적으로 열등하다는 관념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남녀 모두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존엄성을 가진다고 보았습니다. 이 그림에서 아담과 하와는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데, 루터가 창세기를 독일어로 번역한 본문에 '작은 남자(menlin)'와 '작은 여자(frewlin)'로 친근하게 표현한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중세 시대에는 성경의 이야기가 제단화나 조각 또는 스테인드글라스같이 예배당 내부에 자리하고 있어서 오직 성직자의 해석을 통해서만 일반인이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이미지를 구현하며 이를 교육적 도구로 적극 활용하게 됩니다. 이 삽화가 개인 성경에 포함되어 각 가정에서 직접 볼 수 있게 한 것은 신앙의 개인화와 민주화를 상징합니다. 이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종교개혁의 슬로건이 시각적으로 구현된 것입니다.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도 주목할 만한 주제입니다. 중세 신학에서 자연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부패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 그림에서 자연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로 아름답게 묘사됩니다. 이는 루터가 강조한 '창조 세계의 선함'과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 얼마나 고귀하고 거룩한 것인지 돌아보게 합니다. 중세 수도원 전통이 세속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을 이상화했다면, 루터는 일상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복음의 특징이며 그리스도인의 자유라고 가르쳤습니다. 

르네상스와 교회 개혁

이 삽화는 르네상스 예술과 종교개혁 정신이 절묘하게 만난 결실입니다. 르네상스 시대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난 시기였습니다. 예술가들은 성경을 다루면서도 인간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자연의 세밀한 묘사와 인간 신체의 사실적 표현은 르네상스 예술의 관심을 보여 줍니다. 나뭇잎 하나, 동물의 털 한 가닥까지 정교하게 그려진 모습은 자연에 대한 깊은 관찰과 경외심의 산물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나체는 단순한 성경 이야기나 신학적 상징을 넘어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르네상스적 시각을 담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 삽화는 종교개혁의 핵심 가치를 시각화합니다. 앞서 언급했듯, 루터는 교회의 중재 없이도 개인이 직접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그림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직접 마주하는 구도는 그런 신앙관을 반영합니다. 이와 더불어 하단의 에덴동산이 상세하게 묘사된 것은 성경 이야기를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는 루터의 의도와 일치합니다. 크라나흐 공방의 이 작품은 중세적 상징성과 르네상스적 사실성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룬 사례입니다. 상단의 하나님 묘사는 전통적인 종교 도상을 따르면서도, 하단의 자연과 인간 묘사는 새로운 르네상스 기법을 적용합니다. 이런 조화는 전통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시대의 가치를 수용했던 루터의 개혁 방식과도 닮아 있습니다.

루터성경에 본문에 실린 여러 삽화. 사진 제공 최주훈 
루터성경에 본문에 실린 여러 삽화. 사진 제공 최주훈 
오늘 우리에게 

5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 삽화가 여운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루터 성경의 117개 삽화 중 첫 번째를 장식한 이 그림은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묻습니다. 근원적 질문이지요. 그리고는 분주함 속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잠시 멈춰 보라면서, 자연과의 조화, 나-너-우리가 존재하는 의미,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의 신비를 돌아보라고 속삭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는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소통이 점점 단절되어 갑니다. 디지털 연결성은 늘어났지만 내밀한 교감은 줄어든 역설적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속에 갇힌 채 옆 사람과의 대화는 잊어 버리고, 콘크리트 숲속에서 자연의 소리를 듣지 못하며, 흙 대신 아스팔트가 익숙한 일상에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시간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단절된 세계에서 루터 성경의 첫 삽화는 근원적 관계의 회복을 일깨웁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를 마주 보며 대화하는 모습, 동물들과 조화롭게 어울리는 장면, 하나님의 축복하는 손길은 우리가 잊고 있던 연결의 가치를 상기시킵니다. 타인을 경쟁자가 아닌 동반자로 보는 시선,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생태계로 인식하는 관점, 삶의, 혹은 우주의 신비에 대한 경외심을 되찾는 일이 오늘의 우리에게 얼마나 절실한지 이 그림은 조용히 말해 줍니다.

서로를 보듬어 안아 주는 일, 다른 존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시간, 자연의 숨결을 느끼는 여유는 결코 낭만적인 사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본질적인 과정입니다. 루터와 크라나흐 공방이 우리에게 남긴 이 유산은 500년이란 시간을 뛰어넘어, 단절과 고립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연결과 포용의 가치를 일깨우는 창이 되어 줍니다. 서로를 바라보고, 자연을 품고, 삶의 신비 앞에 겸손해지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창조의 회복'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주훈 / 중앙루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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