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주훈 목사(중앙루터교회)가 2024년 연재했던 '명화 이야기'가 돌아옵니다. 재개하는 연재에서는 명화뿐 아니라 조각상 등 예술 전반의 명작들을 돌아봅니다. 5월 10일부터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이걸 본 사람은 다른 조각상을 볼 필요가 없다!" 조르조 바자리가 극찬한 작품, 그 주인공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입니다. 1501년부터 1504년까지 단 하나의 대리석 덩어리에서 탄생한 5.2미터 높이의 걸작은 성서 속 영웅 다윗을 살아 있는 듯 생생히 재현합니다. 그러나 단지 아름다운 육체미만 보고 감탄하고 있다면, 이 조각상이 꽤나 아쉬워할 것 같습니다. 왜 이 조각상이 전 세계를 매료시키는지, 그 흥미로운 이야기를 시작해 봅시다.

버려진 돌에서 명작으로

26세의 젊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이미 로마에서 피에타로 천재성을 입증한 예술가였습니다. 1501년, 피렌체 대성당은 그에게 다윗상을 조각하라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하지만 주어진 재료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40년 전, 두 조각가(아고스티노 디 두치오와 안토니오 로셀리노)가 이 대리석을 포기했기 때문이죠. 좁고, 균열이 있으며, 심지어 다리 부분에 큰 구멍이 뚫린 이 돌은 불가능의 상징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달랐습니다. 그는 이 결함투성이 돌 속에 갇힌 형상을 해방시키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었습니다. 2년 넘게 비밀리에 작업하며, 그는 불완전한 대리석을 완벽한 예술로 바꿔냈습니다. 이 과정은 마치 연금술과도 같았죠.

도나텔로나 베로키오 같은 이전의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다윗을 골리앗의 잘린 머리를 들고 있는 전쟁 영웅으로 묘사했습니다. 그게 일반적이었지요.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과감히 다른 길을 택합니다. 그는 전투 직전, 골리앗을 마주하기 전 긴장된 순간의 다윗을 포착합니다. 그동안 누구도 생각지 못한 선택이었지만, 그의 선택이 단순한 조각을 혁명적인 예술로 만들게 됩니다. 다윗의 주름진 이마, 벌어진 콧구멍, 팽팽한 근육은 전투에 나서기 직전 엄습한 두려움과 결단력을 동시에 드러냅니다. 어깨에 걸친 물매와 손에 감춘 돌은 그의 승리가 힘이 아닌 지성과 기술에서 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다윗은 르네상스가 이상으로 삼은 '사고하는 인간'의 상징입니다. 단순한 전사가 아니라, 이성과 의지로 운명을 개척하는 르네상스 인간인 셈이죠.

다윗의 자세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 기법을 따릅니다. 이탈리아어로 '대조적인 자세'를 뜻하는 이 자세는 한쪽 다리에 체중을 싣고, 다른 다리를 살짝 앞으로 내밀어 몸통에 부드러운 S자 곡선을 만듭니다. 조각상의 이 자세는 다윗을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역동적으로 보이게 합니다. 긴장된 목과 허벅지 근육을 보면, 그가 곧 행동에 나설 준비가 된 걸 단박에 알 수 있을 겁니다.

해부학의 마법

잘 알려졌듯이, 미켈란젤로는 시체를 해부하며 인간의 몸을 깊이 연구한 예술가였습니다. 다비드상은 그의 해부학적 지식을 잘 보여 줍니다. 특히 목의 경정맥은 긴장하거나 흥분할 때만 드러나는 디테일로, 당시 과학자들이 혈액순환을 이해하기 100년 전 미켈란젤로가 이를 포착해서 조각상에 적용한 것입니다. 늘어진 오른손의 정맥은 두드러지고, 들어올린 왼손의 정맥은 섬세하게 표현되어 실제 인간의 혈류를 반영합니다. 이런 세밀함은 다비드상을 단순한 돌덩이가 아닌 살아 숨쉬는 존재로 만듭니다. 다윗의 머리와 손은 비례상 크다는 지적이 있습니다만, 이는 의도된 선택이었습니다. 원래 이 조각상은 피렌체 대성당(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지붕, 80미터 높이에 놓일 계획이었기에,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 조화롭게 보이도록 미켈란젤로가 관람자의 시선을 고려하여 비례를 미리 조정한 겁니다. 실제로 2010년, 대성당 위치에 복제품을 세웠을 때 이 비례가 완벽히 들어맞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피렌체의 상징

다비드상은 피렌체의 정체성을 대변합니다. 16세기 초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심장부이자 경제·문화 중심지로, 모직물 무역과 은행업으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국가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의 지배와 로마 교황청의 영향력 속에서 있다가, 1494년 메디치 가문이 추방되면서 피렌체는 공화국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이 신생 공화국은 강대국들 사이에서 독립을 지키려는 '약자'로서의 정체성을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에 투영하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비드상은 피렌체의 저항과 자율성을 상징하며, 로마를 향해 당당히 서 있는 저항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미켈란젤로가 다윗을 전투 전, 이성과 지혜로 준비하는 인간으로 묘사한 것은 개인의 이성과 잠재력을 중시한 르네상스 시대정신을 반영합니다. 피렌체 시민들은 이 조각에서 자신들의 도덕적·지적 우월성을 보았고, 이는 피렌체 공화국의 시민적 자부심을 강하게 만드는데 한몫했습니다. 하지만 누드 조각이라는 점이 논란을 낳기도 했습니다. 당시 공공장소에서 누드는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에게 충격이어서, 후에 구리 잎 화환이나 무화과잎으로 가려지게 되는데, 이는 당시 시민사회의 도덕적 갈등을 보여 주는 에피소드이기도 합니다.

다비드상이 제작된 시기는 루터의 종교개혁(1517년 시작) 전이지만, 저는 이 작품에서 교회의 권위에 질문하는 예언자적 감성이 느껴집니다. 다비드상은 원래 대성당을 위한 종교적 조각으로 의뢰되었지만, 세속적 공간인 광장에 놓이며 피렌체의 시민적 이상을 상징했다고 앞서 언급했습니다. 이는 교회의 예술 후원이 점차 세속적 권력과 시민 의식으로 확장되는 세계사적 전환점을 보여 줍니다. 다비드상은 이러한 교회사적 맥락에서, 종교와 세속, 예술과 권력의 경계에 놓인 상징적 작품으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 조각상은 피렌체 공화국의 시민 정신과 르네상스 인본주의를 담고 있으며, 루터의 개혁이 촉발한 종교적·사회적 변화의 다양한 전조 가운데 하나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에피소드

다비드상의 배치 결정 과정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조각이 완성된 1504년, 피렌체 당국은 그 위치를 두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미켈란젤로의 라이벌,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등장합니다. 위원회 멤버로 참여한 레오나르도는 다비드상을 시뇨리아 광장 중앙이 아닌, 덜 눈에 띄는 로지아 데이 란치(Loggia dei Lanzi)로 옮기자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단순한 의견 차이였을까요, 아니면 천재들 간의 미묘한 경쟁심이었을까요? 역사 기록은 명확히 말하지 않지만, 결국 다비드상은 광장 입구에 놓이며 피렌체의 자유와 힘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 에피소드는 두 거장의 개성과 당시 예술계의 긴장감도 엿보게 합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과 관련한 몇 가지 부정확한 정보도 정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미켈란젤로가 촛불을 모자에 달고 밤늦게 작업했다는 이야기는 후대 전기에서 과장된 낭만적 묘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작품을 향한 그의 집념은 사실이지만, 촛불 모자 이야기는 근거가 부족합니다. 다른 하나는 조각상의 다윗이 할례를 받지 않은 이유를 르네상스의 반유대적 태도와 연결 짓는 분들이 있는데, 제가 보기에 그리 타당하게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이런 모습은 르네상스 예술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의 미학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할례가 야만적이라기보다는 당시 예술적 이상에 맞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언급하자면, 다윗의 눈이 사시라는 주장도 있지만 근거가 약합니다. 눈동자의 깊은 조각은 빛과 각도에 따라 강렬한 시선을 만들어내는 기법으로, 미켈란젤로의 의도된 예술적 효과로 보는 게 적절할 겁니다.

완성된 다비드상을 광장으로 옮기는 일은 그 자체로 대단한 프로젝트였습니다. 6톤에 달하는 이 거대한 조각을 작업실에서 광장까지 옮기는 데 40명의 인부와 4일이 걸렸다고 합니다. 1504년 공개된 다비드상은 즉시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고, 당대 역사가 조르조 바사리는 "이를 본 사람은 다른 어떤 조각도 볼 필요가 없다"고 극찬했습니다. 1873년, 시뇨리아 광장 입구에 있던 다비드상은 환경 피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졌고, 1910년에는 원래 광장에 실물 크기 복제품이 세워지게 됩니다. 여러분이 피렌체 광장에서 다비드상을 보고 있다면, 그것은 복제품이겠지만, 미켈란젤로가 처음 의도한 대로, 무화과잎 부끄럼 가리개 없이 다윗의 원형을 그대로 감상할 수 있을 겁니다.

피렌체 광장의 다비드상(사진 오른쪽).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공용
피렌체 광장의 다비드상(사진 오른쪽).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공용
한계를 넘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인간의 지성과 용기, 완전을 향한 열망을 상징합니다. 천상이 아니라 땅에서 생각하며 행동하는 인간상을 구현한 혁신적 표현과 미켈란젤로의 천재적 기술은 르네상스의 정신을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피렌체에게는 저항의 상징이었고, 오늘날 전 세계인에게는 불가능에 맞서는 불굴의 보편적 메시지를 전합니다. 미켈란젤로는 1564년, 88세에 로마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다비드상은 여전히 살아 숨 쉽니다. 불완전한 대리석에서 위대한 예술을 창조한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외치는 것 같습니다.

"어떤 한계 속에서도, 위대함은 언제나 가능하다!"

최주훈 / 중앙루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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