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에로니무스 보스, 쾌락의 정원

쾌락의 정원: 천국과 지옥 사이
쾌락의 정원. 히에로니무스 보스. 오크 패널에 유화.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소장. 사진 출커 위키미디어공용
쾌락의 정원, 히에로니무스 보스. 오크 패널에 유화.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소장.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공용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의 '쾌락의 정원'.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지구인이 맞나 싶습니다. 화폭에 창조한 세계는 무의식 깊은 곳에서 올라온 원형적 이미지 같아서 감상자 입장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새 머리 괴물이 인간을 삼키고, 거대한 과일 속에서 사람들이 희롱하며, 음악을 인간의 몸에 새기며 음악으로 괴롭히는 악마가 등장합니다. 이 모든 상상이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단순한 상상의 유희일까요, 아니면 더 깊은 영적 통찰이 숨어있는 것일까요?

보스의 삶을 살펴보면, 생뚱맞습니다. 그림만큼 전혀 파격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네덜란드 덴보스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할아버지부터 아버지까지 이어진 3대 화가 집안의 전통 아래 체계적인 예술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20대 후반 부유한 상인 가문의 딸과 결혼한 보스는 상류층에 속하는 경제적 안정을 누렸습니다. 이러한 여유는 그림을 팔아 생계를 연명하던 당대 예술인과 달리 순수한 예술적 탐구에 몰두할 수 있게 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보스가 깊은 신앙심을 가진 정통 가톨릭 신자였다는 사실입니다. 1488년 '성모형제회'라는 지역의 가장 권위 있는 종교 단체의 정회원이 되었는데, 이는 그가 종교적으로도 헌신적인 사람이었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경건한 신앙인이 기괴하고 충격적인 그림을 그렸을까요? 보스가 13세이던 1463년 6월 13일, 덴보스를 휩쓴 대화재가 일어납니다. 가옥 4000여 채가 잿더미로 변한 이 참사는 어린 보스의 마음 깊은 곳에 지울 수 없는 상처와 트라우마를 남겼을 겁니다. 그 흔적이 그의 작품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불타는 도시, 지옥의 참혹함, 종말의 파괴적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이런 재앙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여겨졌고, 어린 보스에게도 이러한 종교적 해석이 깊이 각인되어 그의 작품에 담겼을 겁니다.

보스의 대표작 '쾌락의 정원'은 헨드릭 3세 나사우 백작의 주문으로 제작된 세 폭 제단화입니다. 세 개의 패널로 구성된 이 작품은 창조에서 심판까지, 인류 전체의 영적 여정을 담아냅니다. 

좌측 패널: 예고된 에덴의 타락

좌측 패널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와를 소개하는 성스러운 순간을 목격합니다. 그러나 보스는 에덴동산의 전통적인 묘사에서 과감히 탈출합니다. 화폭 중앙 분홍빛 분수대는 생명의 근원을 상징하지만, 그 주변으로 기묘한 징조들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친숙한 동물들 사이에 상상에나 나올 법한 생명체들이 섞여 있습니다. 에덴엔 이미 타락의 가능성이 숨어 있다는 암시로 읽힙니다. 화폭 하단 두 다리로 서서 걷는 개처럼 보이는 괴물, 물속에서 솟아오르는 다중 머리 파충류, 개구리 머리 새가 두꺼비를 삼키는 장면 등은 자연의 질서가 미묘하게 엉킨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화폭 좌측 하단 고양이가 쥐를 입에 물고 있는 장면이 도드라집니다. 이는 에덴에서조차 약육강식이라는 비정한 법칙이 작동하고 있다는, 즉 완전한 조화는 이미 깨어져 있다는 표식입니다. 보스가 왜 이런 식으로 그렸을까 멈춰 생각해 봅니다. 아마, 인간의 타락이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창조 질서 안에 이미 숨겨져 있던 가능성이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 세계가 오늘 이리도 엉망이 되어 버린 걸 설명할 길이 없으니까요.

중앙 패널: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

중앙 패널을 봅시다. 가히 압도적입니다. 220×195cm의 화폭에 수백 명의 나체 인간들이 무성한 정원에서 온갖 쾌락에 탐닉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성경적 역사에선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보스만의 독창적 공간입니다. 이곳에서 인간들은 아무런 죄의식이나 도덕의 굴레 없이 그저 본능에만 따라 행동하는 가상의 세계입니다.

화폭 곳곳에 등장하는 거대한 딸기, 체리, 블랙베리들은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보여 주는 열쇠입니다. 이 과일들은 성적 쾌락과 관능적 욕망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 덧없음을 상징합니다. 딸기만 해도 그렇지요. 달콤하지만 금세 썩어 버리는 특성 탓에 육체의 쾌락이 일시적이라는 걸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됩니다. 과일뿐 아니라 여기 그려진 조개와 생선 같은 것도 욕망의 노예가 되어 버린 인간의 현실을 고발합니다. 이곳은 온갖 풍요로움이 가득합니다. 인간이 꿈꾸는 욕망의 유토피아 같지만, 혼란스럽습니다. 질서 없는 풍요가 어떤 것인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건축물들도 기묘합니다. 중앙의 푸른 분수는 좋게 말해 '사랑의 분수'입니다. 그 주변을 도는 기사들의 행렬은 구애 의식을 상징합니다. 우측의 수정 같은 구조물들과 분홍빛 탑들은 꿈과 환상의 세계를 시각화한 것으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인간의 욕망을 묘사합니다. 

이 정원에서는 자연 질서가 온통 뒤죽박죽입니다. 거대한 새들이 사람을 등에 태우고, 물고기가 육지를 헤엄치며, 인간보다 큰 곤충들이 등장합니다. 이는 우화적 표현입니다. 인간이 이성을 잃고 동물적 본능에 지배당하는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지요. 이곳은 그야말로 브레이크 없는 타락의 동산입니다. 

보스는 직접적인 성적 묘사 대신 상징을 통해 성적 욕망을 담아냅니다. 거대한 달걀 껍질 안에 들어가 있는 인간들, 투명한 구슬 속 연인들, 새의 부리나 물고기로 몸을 덮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성적 결합과 쾌락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들입니다. 

우측 패널: 지옥도

우측 패널의 지옥도는 정말 독특합니다. 화폭 상단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성이 섬뜩한 섬광 속에 잔해를 드러냅니다. 도성을 포위하고 중무장한 군대가 도성 안으로 진격하자 사람들이 놀라 불 못에 빠져 소리를 지릅니다. 중앙엔 잘려 나간 거대한 귀를 관통한 식칼, 사람들을 사냥하는 군대와 괴이한 형상의 동물들이 뒤섞여 있고, 더 아래로 가면, 불구덩이 대신 차가운 얼음이 뒤덮은 세계가 보입니다. 이는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죄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고통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장면도 보입니다. 보스에게 음악은 고문이었을까요? 하단 한쪽 구석은 온통 음악으로 고문하는 장면으로 가득합니다. 하프에 매달린 사람, 악기에 깔리거나 박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 악마가 사람 엉덩이에 악보를 새기는 장면은 이상하다 못해 기괴합니다. 이는 세속적 쾌락(음악)이 영혼을 타락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보스의 음악 이해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실제로 현대 연구자들이 이 '엉덩이 악보'를 해독하여 연주해본 결과, 불협화음과 불안정한 선율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는 죄의 결과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청각적으로도 표현한 발상입니다.

화폭 중앙에 자리한 '나무 인간'은 이 작품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대목입니다. 속이 비어있는 달걀 형태의 몸에 나무 다리를 가진 이 괴물은 뒤돌아보며 관람자를 응시합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 얼굴을 보스의 자화상으로 해석하는데, 만약 그 해석이 맞다면 작가 자신도 욕망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겸손하게 고백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겁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지옥의 악마들에게 동물의 특징이 보입니다. 새 머리 악마가 인간을 삼켜 아래쪽 구덩이로 배설하는 장면, 수녀복 입은 돼지가 사람들에게 악마와 계약서에 서명하게 하는 장면 등이 그것입니다. 이런 장면은 중세 시대부터 내려온 도덕 교육 방식에서 비롯되었을 겁니다. 특정 동물을 인간의 악덕과 연결해서 교훈 말입니다. 예를 들어, 돼지는 탐욕과 더러움을, 새는 영혼을 낚아채는 악마를 상징합니다. 이런 상징을 통해 사람들에게 죄의 무서운 결과를 생생하게 보여주려 했던 것이지요. 

지옥도를 그린 이 오른쪽 패널은 인간의 욕망과 쾌락이 필연적으로 몰고오는 결말을 상징합니다. 

외측 패널: 창조 3일차 원시 세계

세 폭 제단화를 닫으면 또 다른 그림이 보이기도 합니다. 이를 외측 패널이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엔 회색조로 그려진 원시 지구의 모습이 보입니다. 보스는 여기에 인간이 등장하기 전 순수한 창조 세계의 상태를 그려 넣습니다. 창세기에선 하나님의 창조 3일째에 해당합니다. 창조주는 육지와 바다를 나누고 최초의 식물들을 만드신 순간입니다. 화폭 상단에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편 33:9)라는 성경 구절이 적혀 있어, 이 모든 이야기가 하나님의 창조 계획 안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밝힙니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 보스는 세 폭 제단화에 완전한 신학적 순환 구조를 만들어 냅니다. 보스의 세계관에 따르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욕망의 노예일 수밖에 없습니다. 음탕하고 절제할 수 없고 위험합니다. 그 때문에 이 제단화는 창조의 순수함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타락과 쾌락 추구를 거쳐 최종적인 심판에 이르는 과정이 한 화폭 안에 압축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명화란

5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사람들이 이 작품을 찾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작품이 인간 존재의 근본적 조건들—욕망과 두려움, 죄책감과 구원에 대한 갈망—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다양한 대상들에게 중독되고 사로잡힌 현대인의 모습에서 보스의 그림 속에 있던 군상들을 발견합니다. 환경 파괴로 신음하는 지구에서 우리는 그가 경고했던 종말론적 풍경을 목격하고, 물질 숭배 사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가 우려했던 영적 황폐화를 체험합니다.

보스의 작품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어떤 정원에서 살고 있습니까? 당신이 추구하는 것들은 정말 가치 있습니까? 순간의 쾌락을 위해 더 소중한 것을 잃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속적 쾌락의 정원'은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실물 앞에 서면 감상자를 압도하고도 남을 겁니다. 스페인 갈 여유가 없다고 미리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초고해상도 이미지를 온라인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화면을 확대해 가며 디테일 하나하나 탐험할 수 있습니다. 보스의 그림은 볼 때마다 새로운 발견을 선사합니다. 마치 끝없는 미로처럼, 각각의 장면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더 큰 의미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이는 보스가 맥각균 중독으로 정신질환자였다고 설명하지만, 그렇다해도 그의 상상력은 울림이 있습니다. 그 기괴한 상상력 이면에는 깊은 종교적 성찰과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인류에 대한 사랑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5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보스의 메시지는 조금도 빛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물질문명의 극치를 달리는 현대에 그의 목소리는 더욱 절실하게 들려옵니다. 오늘 잠시 시간을 내어 찬찬히 이 작품을 음미해 보시길 권합니다. 몽환적이면서도 살벌한 그림 속에서 감상자의 모습이 겹쳐 보이치는 대목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발견은 분명 당신의 삶을 더욱 깊이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 될 것입니다.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명화'라는 게 바로 그런 것 아닐까요?

최주훈 / 중앙루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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