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독의 시간] <종교개혁의 표어들>(비아)

대화로의 초대

어떤 책은 한 번 읽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어떤 책은 손에서 놓았다가도 다시 펼쳐 들게 된다. 로버트 젠슨의 <종교개혁의 표어들 - 올바른 사용과 오용에 관하여>(비아)는 후자에 속한다. 줄을 그어 가며 두 번 정독하는 동안, 이 책이 단순히 종교개혁의 명제들을 해설하는 차원을 넘어서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젠슨은 우리가 무심코 반복해 온 표어를 하나하나 해체하고 재조립하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생명력을 잃고 이데올로기로 굳어졌는지를 냉정하게 드러낸다. 1517년 가을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Schlosskirche) 문짝에 게시된 95개조 논제가 유럽 전체를 뒤흔들었던 그 혁명적 순간으로부터 50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과연 루터의 본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가? 젠슨의 물음은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다.

젠슨은 루터교 신학자이면서도 에큐메니컬 관점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다. 이는 장점이자 때로는 긴장을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의 핵심 명제들을 다루면서도 그는 로마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를 향한 비난을 삼간다. 그보다는 개신교 내부에서 종교개혁의 표어들이 어떻게 왜곡되고 남용되어 왔는지를 더 날카롭게 비판한다. 이러한 태도는 루터교 정통주의자들에게는 불편할 수 있겠지만, 진정한 개혁 정신은 자기 전통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에서 나온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물론 모든 논지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특정 표어들을 해석하는 방식에서 젠슨의 에큐메니컬한 입장이 지나치게 전면에 나서는 순간들이 있다. 특히 교회 전통과 주교직의 역할을 강조할 때, 루터가 그토록 천명했던 '만인제사장' 원리가 다소 희석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그의 신학적 정직성과 일관성을 고려하면, 이는 비판이라기보다는 대화의 초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신학이란 본래 단일한 목소리가 아니라 다성적 화음이어야 하지 않던가.

로버트 젠슨. 사진 출처 JASON GORONCY
로버트 젠슨. 사진 출처 JASON GORONCY
'오직 성경'

내가 보기에 젠슨의 분석이 가장 예리하게 빛을 발하는 지점은 바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표어를 다룰 때다. 그는 이 표어가 종교개혁 이후 끊임없는 분열의 씨앗이 되어 온 역사를 추적하면서 충격적인 진단을 내놓는다. 이 진단을 좀 더 잘 새기기 위해서는 먼저 루터의 시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5세기 중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은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식의 민주화였다. 성경이 라틴어로 수도원과 교회에 갇혀 있던 시대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을 수 있는 시대로의 전환이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 정신과 맞물려 개인의 양심과 이성이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직 성경'은 단순한 신학 명제가 아니라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루터가 외쳤던 "나는 성경과 명백한 이성에 근거하지 않는 한 철회할 수 없다"는 선언은 개인의 양심이 외부 권위에 맹종해서는 안 된다는 근대적 자아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였다.

젠슨이 포착한 것은 이 혁명적 표어의 비극적 변질이다. 다수의 해석자는 '오직 성경'을 "성경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교회 전통도, 신조도, 신학적 가르침도 필요 없다는 식이다. 성경이 스스로 자신을 해석하므로 각 개인이 성경을 읽기만 하면 진리를 알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 젠슨은 이를 "평면적 읽기"라고 비판한다. 복잡한 서사와 역사적 맥락을 지닌 성경을, 마치 교리 증명을 위한 문장 모음집처럼 다루는 태도를 뜻한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젠슨의 표현을 빌리면 "끝없는 분파적 변형"이었다. 모두가 자기만의 성경 해석이 옳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교단을 만들어 냈다. 미국 개신교의 수천 개 교단이 바로 이 현상을 증명한다. 한국이라고 다를 바 없다. 오죽하면 오직 성경만을 외치는 한국 개신교단의 수를 하나님도 모른다고 했던가. 보수주의자들은 문자적 해석을 고집했고, 진보주의자들은 다양한 비평의 도구를 손에 쥐고 성경을 해체했다. 양쪽 모두 '오직 성경'을 내세웠으나, 서로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올바른 이해는 무엇인가. 젠슨은 루터가 의도한 본래 의미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직 성경'은 성경이 "규범의 규범"(norma normans), 즉 최종 규범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성경은 교회의 다른 모든 가르침과 전통을 판단하는 최종 기준이지, 그것들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증언하는 유일한 문헌이기에, 모든 신학적 논의의 최종 심판자 역할을 수행한다.

젠슨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성경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교회의 전통과 신앙고백의 맥락 속에서 읽혀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특정한 이야기, 즉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서사를 담고 있다. 이 서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2000년 교회가 쌓아 온 해석의 지혜를 무시할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예리한 통찰이 빛을 발한다. 그러나 동시에 루터의 신학과 긴장도 발생한다. 루터에게 '오직 성경'은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이었다. 그는 성경을 "유일한 무오한 권위"로 규정하였고, 교황권이나 공의회도 성경 위에 설 수 없다고 단호히 선언하였다. 물론 루터도 성경이 진공 상태에서 읽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사도신경과 초대교회 신앙고백을 존중하였고, 교회 전통을 "부차적 권위"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핵심은 이것이다. 전통은 성경을 해석하는 도구이지, 성경과 동등한 권위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젠슨의 해석과 긴장이 발생한다. 젠슨이 분파주의를 '오직 성경' 표어의 필연적 귀결처럼 묘사하는 것은 루터의 의도를 다소 오해한 것일 수 있다. 루터는 결코 교회 분열을 원하지 않았다. 분파가 생긴 것은 표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죄성과 교만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 아래 겸손하게 성경을 읽는다면, 본질적 진리에서는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루터는 믿었다.

'오직 성경'은 성경이 "규범의 규범"norma normans(최종 규범)이라는 뜻이다. 사진 출처 Unsplash
'오직 성경'은 성경이 "규범의 규범"(norma normans)이라는 뜻이다. 사진 출처 Unsplash
예민한 질문들, 미완의 여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때때로 예민한 이슈를 건드렸다가 충분히 마무리하지 않고 넘어간다는 점이다. 독자로서는 아쉬운 대목이지만, 이는 아마도 책의 분량과 구성상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젠슨이 던진 질문들은 각각이 한 권의 책으로 확장될 수 있는 무게를 지니고 있다. 어쩌면 그는 의도적으로 질문을 열어둔 채로 남겨놓았는지도 모른다. 신학적 사유란 완결된 답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물음에서 자라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균형이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되, 그것을 고립된 개인주의적 읽기로 환원하지 않는 지혜다. 교회 전통을 존중하되, 그것이 성경의 권위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자세다. 성경은 명백하지만, 그 명백함은 성령의 조명과 공동체의 담론 속에서 빛을 발한다. 젠슨의 경고는 분명 귀 기울일 가치가 있다. 현대 개신교는 실제로 성경을 파편화된 증거 구절들의 모음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소셜미디어 시대에 맥락 없이 떠도는 성경 구절들,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선택적으로 인용되는 본문들을 보면, 젠슨의 "평면적 읽기" 비판이 얼마나 적절한지 알 수 있다.

부록에 담긴 또 하나의 서사

흥미롭게도 이 책의 가치는 본문에만 머물지 않는다. 부록에 실린 젠슨의 신학 여정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다. 현 세기 최고의 루터신학자로 꼽히는 칼 브라텐과 하이델베르크 길거리에서 언성을 높이며 신학 논쟁을 벌였다는 일화는 진귀한 전설처럼 들린다. 무심하게 툭툭 내뱉는 말 속엔 똑똑한 동료를 견디지 못하는 대학교수들의 좁은 속내, 교단 정치꾼들의 추태, 신학교의 절망적인 현실에 대한 회고가 담겨 있다. 그의 온기 없는 말투가 솔직하고도 뼈아프다.

이 대목들을 읽으면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것은 비단 미국 신학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신학교와 교단에서도 이와 유사한 풍경들이 반복되고 있지 않은가. 학문적 탁월성보다는 파벌의 논리가, 신학적 성찰보다는 제도의 보존이 우선시되는 현실. 젠슨의 고백은 대양을 건너 이곳에서도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서글프면서도 위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진정한 신학은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표어들 - 올바른 사용과 오용에 관하여>
<종교개혁의 표어들 - 올바른 사용과 오용에 관하여>
좋은 책, 곱씹을 책

<종교개혁의 표어들>은 단순히 '읽는' 책이 아니라 '씹는' 책이다. 줄을 긋고, 메모를 남기고, 다시 펼쳐 보아야 할 책이다. 젠슨이 제시하는 해답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그가 던지는 질문들은 피할 수 없다. 종교개혁의 표어들이 오늘날 어떻게 살아 숨 쉬어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생명력을 잃고 박제되는지에 대한 그의 성찰은 현대 개신교가 직면한 가장 근본적인 물음들을 건드린다.

루터가 오백 년 전 외쳤던 '오직 성경'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한 원리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끊임없는 신학적 성찰과 영적 겸손을 요구하는 살아 있는 과제다. 성경과 전통, 개인과 공동체, 자유와 책임 사이의 긴장을 지혜롭게 유지하는 것, 그것이 종교개혁의 후예인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신학적 책무다. 이 긴장을 창조적으로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개혁교회가 늘 개혁되어야 한다는 원리의 실천이다.

매우 좋은 책이라는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읽을 가치가 충분하고도 남는 책이다. 신학을 진지하게 사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종교개혁 전통이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앙의 언어가 되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젠슨의 목소리는 때로 불편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 속에서 진정한 신학적 대화가 시작된다. 조직신학자가 이렇게 간결하고 명쾌한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놀랍고 부럽기만 하다. 살짝 부러운 정도가 아니다. 당분간 이 책은 손에서 안 떠날 것 같다.

최주훈 / 루터대학교 신학과와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레겐스부르크대학교에서 조직신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앙루터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저서로는 <모두를 위한 루터>, <최주훈의 명화 이야기>, <하나님이 일하신다>, <예배란 무엇인가>, <고요한 저녁 묵상>, <루터의 재발견>이 있고, <마르틴 루터 대교리문답>, <마르틴 루터 소교리문답 해설>, <마르틴 루터 95개 논제>, <프로테스탄트의 기도>, <기독교와 현대사회>를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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