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의 '의심하는 도마'
|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가 '명화'를 주제로 연재를 합니다. 연재는 격주 수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
부활절 다음 첫 번째 주일에는 '아이처럼 새롭게 태어나는 날(Quasimodogeniti infantes)'이라는 특별한 이름이 붙습니다. 부활주일이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이라면, 이날은 그리스도인들이 새롭게 거듭나는 '작은 부활절'과 같습니다. 이날 교회력 복음서 말씀에는 의심 많은 도마의 이야기가 나오곤 하는데, 그때마다 제 머릿속에는 '거듭나는 게 뭘까'라는 질문과 함께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도마'가 떠오릅니다.
| 기이한 천재 화가 카라바조 |
카라바조의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입니다. 하지만 한 세기 앞서 태어난 불세출의 예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출신지 '카라바조'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미술사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기이한 인물입니다. 얽매이는 삶을 싫어했고, 불같은 성격 탓에 폭행과 살인 사건에 자주 휘말렸습니다. 테니스 경기 중 상대를 때려죽여 도망자가 되기도 했고, 몰타기사단과 싸워 중상을 입히고 자객들에게 쫓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무분별한 사생활에도 추기경과 고위 성직자들이 그를 구해 줄 정도로 천재적 재능을 소유한 인물입니다. 이런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했죠.
인지도 면에서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술사에서 카라바조는 부오나로티 못지않은 위대한 예술가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에는 중세 르네상스 작품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별한 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혁신적 정신을 그의 대표작 '의심하는 도마'에서 만나 봅시다. 일단, 가로세로 1m가 넘는 이 그림 앞에 서면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할 것입니다.
| 명암의 마술사 |
2008년 독일에서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경유하면서 오스트리아 국적 항공기를 이용했습니다. 갈아탈 비행기 시간이 5시간 정도 남아서 항공사가 제공하는 무료 티켓으로 공항에서 멀지 않은 비엔나 예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에 들렀습니다. 시간이나 좀 때울 생각이었는데, 거기서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Caravaggio (c.1606-7)]'이라는 카라바조 작품을 보고 기겁했습니다. 그때 저는 그림의 'ㄱ'도 모르던 때였지만, 그냥 그 그림 앞에서 몸이 얼어붙었습니다. 캔버스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강렬하고 섬뜩한 기분,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한순간 복잡하게 휘몰아쳤습니다. 일종의 종교적 체험 같은 탓에 한동안 말을 잃고 당황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제가 종교화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입니다. 그 일 후로 이 그림의 작가가 누구인지, 이 작품이 무엇인지, 그 시대는 어떤 시대인지, 질문의 폭은 점점 커졌습니다. 아직도 그때 그 체험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로 그림을 찾아 읽는 건 나의 즐거운 숙제가 되었습니다.
말이 샜네요. 카라바조 작품의 강렬함은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공감할 수 있을 겁니다. 명암이나 색감뿐 아니라 순간을 포착한 사진처럼 등장인물의 손가락과 표정, 심지어 주름과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너무 사실적이라 보는 사람을 압도합니다. 마치 캄캄한 연극 무대에 선 주인공을 강한 조명으로 비추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카라바조는 흐르는 시간과 사건을 이런 방식으로 잡아챕니다.
앞서 말한 대로,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에서 덤덤하게 골리앗의 잘린 목을 손에 들고 있는 다윗이라든지, '세례 요한의 참수'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의 그림은 보는 이들을 섬찟하게 만듭니다. 교회나 수도원에 이런 그림이 걸려 있다면, 기도하러 들어갈 맘이 나기는 할까 싶을 정도입니다. 빛과 어둠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키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은 사건을 더욱 사실적이고 극적으로 만들어 냅니다. 그가 사용한 이 기법은 후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되는데, 루벤스와 렘브란트도 그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힙니다.
| 요한복음의 도마 |
도마는 늘 그 이름 앞에 '의심 많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마태·마가·누가복음은 그의 이름만 언급할 뿐 이런 수식어를 붙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정말 의심이 많은 사람인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이에 비해 요한복음은 도마를 좀 더 자세히 묘사합니다. 세 번 정도 등장합니다. 우선, 요한복음 11장에서 도마는 죽은 나사로에게 예수님이 가려고 하자 걱정스레 바라보던 제자들에게 "우리도 함께 죽으러 갑시다"라며 용기를 독려하는 충직한 제자로 소개됩니다. 자신은 스승과 운명 공동체이니 스승과 함께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결의에 찬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는 "주님 가실 길이 어딘지 잘 모르겠다"라며 주님 앞에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이 구절이 저에겐 위로가 됩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나요? 어제까지 굳건한 신앙을 자랑하다가도, 순간순간 흔들리고 비틀거리는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큰 것'으로 성장하는 게 아니라 의심과 시련의 부침을 겪습니다. 그래서 시편의 시인들처럼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지금 이 길이 맞는 길인지 자책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 도마가 딱 그 모습입니다. 흔들리는 도마의 모습이 내 모습과 겹치기에 그리도 위로가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 번째 등장은 이 그림의 배경이 되는 요한복음 20장입니다. 안식 후 첫날 저녁 부활하신 제자들에게 주님이 찾아왔지만, 당시엔 도마가 없었지요. 제자들이 도마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전하지만, 도마는 믿지 못했습니다. 외려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 20:25)
그로부터 8일이 지납니다. 제자들이 모인 곳에 주님이 다시 나타납니다. 8일 전 도마의 그 말을 옆에서 들었던 것마냥 주님은 상처를 만져 보라고, 그래서 의심 대신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거기서 도마는 완전히 무너집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8)
이 말을 할 때 도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단순히 '감격'이라는 말로는 모자랄 것 같습니다. 의심에서 확신으로, 자기 존재의 모든 것이 무너졌다 다시 일어서는 경험, 그것이 도마가 경험한 부활 아닐까요.
| 질문하는 교회 |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풀고 나아갑시다. 요한복음 20장엔 성경 어디에도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확인했다는 구절은 없습니다. 카라바조가 그려 넣은 도마의 모습은 작가의 상상입니다. 하지만, 카라바조의 표현은 단순한 상상력을 뛰어넘습니다. 놀라운 건, 여기엔 중세 성화에서 발견되는 성스러움이나 종교적 경건, 초월성 따위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등장하는 네 인물은 지독하게 사실적이고 현세적입니다. 네 사람의 시선은 모두 한곳에 집중됩니다. 벌어진 옆구리는 날카로운 창상이 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의 가슴과 얼굴은 창백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제자들의 표정엔 스승에 대한 경외감은 고사하고 존경심도 읽히지 않습니다. 마치 외과 의사처럼 상처만 관찰합니다. 뒤의 두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찌푸린 주름으로 보아 순서가 되면 나도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는 듯 진지하게 상처 난 곳만 바라봅니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습니다. '의심은 불경한 것인가?' 못 자국 선명한 예수님의 손을 주목해 봅시다. 그분의 오른손은 상처를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당신의 옷깃을 여미고, 의심하는 도마의 손을 잡아 상처의 정확한 지점으로 인도합니다.
카라바조가 그려 낸 그리스도는 '의심을 믿음으로 이끄는 분'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카라바조의 그림 속 그리스도의 풍모는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고 피곤해 보입니다.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천재 카라바조의 신앙고백 아닐까요.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은 성육, 즉 하나님이 참인간의 모습을 입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픔, 피곤함, 보잘것없음, 이런 것들이 모두 부활의 그리스도 안에 담깁니다. 하나님의 신성을 한없이 비워 낸 분이야말로 참으로 성육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그림은 그 메시지를 담아냅니다. 중세 성화에서 이런 그리스도의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카라바조는 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이렇게 비천한 모습으로 그리고 신앙 없는 제자들의 모습으로 표현했을까요?
이 그림이 당대 교회를 향한 날 선 비판은 아니었을까요? '의심하는 도마'에 그려진 그리스도는 권력을 탐하던 교회와 성직자들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로 읽힙니다. 16세기에서 17세기로 전환되던 시기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시점입니다. 자유분방한 삶을 희구했던 카라바조의 눈에 비친 교회의 모습은 본모습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시대는 변하지만, 교회는 여전히 현세의 권력을 꾀하면서 복지부동입니다. 누군가 교회를 향해 질문하면,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불경이며 불신앙으로 판정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질문 없는 신앙은 언제나 위험합니다. 질문 없는 신앙은 자기의 옳음을 지키기 위해 다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종교든 문화든 이데올로기든 차이와 다름을 용납하지 않는 근본주의가 폭력적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모든 진리를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큼 오만한 태도가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가진 진리는 유한합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에게 질문은 미지의 세계를 여는 열쇠가 됩니다. 의심과 질문은 더 깊은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안내하는 통로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눈여겨보면, 때론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옳음과 그름이 모호할 때가 무척 많습니다. 오늘 선이었던 것이 내일 악이 될 수도 있고, 오늘의 정의가 내일의 불의가 될 수도 있는 게 우리 사는 세상이지요. 세상의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물어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을 향한 의심과 질문은 불신앙의 징표가 아니라 은총으로 가는 길이 됩니다. 질문하고 의심하는 도마의 손을 잡아 상처 깊숙한 곳으로 인도하신 그분을 잊지 맙시다. 그분이 그리스도이며, 우리의 주님입니다.
| 도마의 거듭남 |
글 앞머리에 부활절 다음 일요일이 '아이처럼 새롭게 태어나는 날(Quaisimodogeniti infantes)'이라는 설명과 함께 '거듭난다는 게 뭘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도마의 이야기에서 한 가지 답을 찾아봅니다. 우리도 도마처럼 솔직해져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주님과 함께라면 죽음도 불사할 수 있다"(요 11:16)라며 큰소리치다가도, "이 길이 맞나요? 확신이 안 서네요"(요 14:5)라고 의심하며 무너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신앙의 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회의의 숲을 지날 때, 용감히 질문합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손가락을 당신의 상처 깊은 곳으로 인도하여 의심을 풀어 주시며, 더 깊은 신앙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아이처럼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을 모아 놓고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지상명령을 주셨는데, 열두 제자 중 누가 가장 멀리 복음을 전했는지 아시나요? 수제자 베드로도 아니고, 야고보도 아니고, 사랑하는 제자로 불리던 요한도 아닙니다. 그들 모두 예루살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기껏해야 로마 정도에 그쳤습니다. (열두 제자는 아니었지만) 지중해를 중심으로 소아시아 지방까지 선교했던 바울은 그래도 조금 나은 편입니다. 그럼, 의심 많다고 깔보는 제자 도마는 어디까지 갔을까요? 성경엔 나오지 않지만 교회 전승에 따르면, 그는 제자 중 가장 먼 곳, 인도 케랄라까지 복음을 들고 나갔고, 거기서 약하고 병든 사람들을 섬기다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진리를 향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 아닐까요. 이것이 도마를 통해 건져 낸 '거듭남'의 가르침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