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의 '상처 입은 식탁'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가 '명화'를 주제로 연재를 합니다. 연재는 격주 수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유다에게 배신당하던 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십니다. 원래 이 만찬은 가족끼리 모이는 유대인의 유월절 식사였지만, 예수님은 그 자리에 가족이 아닌 제자들을 초대하셨고, 이들이 하나님나라의 새 가족이 됩니다. 그래서 성찬을 나눌 때마다 우리는 그날 일을 기억하며 하나님나라의 가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다짐합니다. 하지만 그날의 식탁은 기쁜 환대만 가득한 날이 아닙니다. 그날은 가장 가까운 이에게 배반당하는 배신의 밤, 죽음으로 가는 길목이었다고 성경이 가르칩니다. 

날이 저물어 제자들이 만찬의 자리에 모두 모이자 예수님이 뜬금없이 이렇게 입을 떼십니다. "너희 중 한 명이 나를 팔 것이다."(막 14:18) 제자들이 놀라 한 사람씩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 저는 아니지요? 저는 아니지요? 배신할 사람이!" 하지만 그 반응 끝에 예수님은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막 14:27)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 우리도 매일, 매시간, 모든 곳에서 배신하고 배신당하며 삽니다. 

상처 입은 식탁
프리다 칼로, '상처 입은 식탁'. 사진 출처 wikipedia.org
프리다 칼로, '상처 입은 식탁'. 사진 출처 wikipedia.org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의 작품 중 '상처 입은 식탁 La mesa herida'(1940)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만찬'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바뀌어 있습니다. 식탁 중앙 예수님이 앉아 있는 곳에 자기 자신을 그려 넣고는 배신당한 예수님처럼 자신도 배신당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녀의 왼쪽엔 해골만 남은 사람이 앉아 있고, 오른쪽에는 멜빵바지를 입은 인물이 앉아 있는데, 그 모습이 기괴합니다. 몸은 괴상하게 부풀어 있고, 얼굴은 '크리스마스의 유령'에나 나올 것 같은 유령의 모습입니다. 얼굴과 몸에서 피가 낭자하고 몸 곳곳에 링거가 꽂혀 있습니다. 그가 여인(프리다)의 어깨에 왼팔을 둘러 끌어안습니다. 그렇게 둘은 부부처럼 중앙에 앉아 있습니다. 게다가 여인의 잘린 오른팔은 나무 의자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여인의 오른편에 앉은 기괴한 멜빵바지 차림의 인물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작가인 프리다 칼로의 갈매기 눈썹이 그 사람에게도 보입니다. 그 남자도 프리다 칼로입니다. 작가는 이렇게 자신을 예수와 배신자 유다의 자리에 모두 그려 넣습니다. 

그런 다음 프리다 칼로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배신당했습니다. 내 몸에게 배신당했고, 사람들에게도 배신당했습니다. (예수처럼) 가까운 이를 위해 삶을 바쳤지만, 그에게 배신당했습니다.' 실제로 그녀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녀는 6세에 소아마비가 생겨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고, 17세 꿈 많던 소녀 시절 하굣길에서 전차와 버스가 충돌하는 사고로 승객용 손잡이가 달려 있던 쇠 파이프가 가슴과 척추, 골반, 자궁을 관통하는 끔찍한 교통사고 한가운데서 간신히 생명을 건지게 됩니다. 그 후로 39번의 수술로 몸 전체에 금속 지지대와 철심을 박아야 했고, 알코올과 모르핀의 힘으로 고통을 견뎌야 했습니다. 세 차례의 유산은 그 고통을 더욱 비극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러다 47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됩니다. 

이런 참담한 인생을 살았지만, 그녀의 남편인 화가 디에고 리비에라는 그녀의 든든한 후원자요 지지대가 되었습니다. 그 덕에 프리다 칼로는 엄청난 예술적 생산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의 그림에 있는 유다의 모습에서 남편 디에고 리비에라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아내 프리다 칼로를 사랑했지만, 배신합니다. 그것도 아내가 그토록 아끼던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불륜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 사건 후에 프리다 칼로는 이혼하게 되는데, 그때 그린 작품이 '상처 입은 식탁'입니다. 

이 그림에서 배신자와 배신당한 이들이 한 상에 둘러앉아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프리다 칼로는 자신을 배신당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배신자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일평생 그녀를 괴롭힌 건 자신의 몸이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배신자와 배신당한 사람이 한 식탁에 앉아 있습니다. 이 그림이 더 소름 끼치는 건, 배신당한 프리다 칼로가 감상하는 나를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는 '너는 어때?'라고 묻는 것 같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배신자와 배신하는 사람이 우리 밖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놀랍니다. 

여기서 식탁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식탁에서 앉거나 서고, 먹고 마시며, 만나 대화하고, 서로 무언가를 나눕니다. 그렇게 식탁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을 의미합니다. 그 식탁에 배신하는 사람과 배신당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가족으로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식탁 위에 피가 흥건하고, 그 피가 나무를 관통하여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도 보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인 식탁은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립니다. 이것은 프리다 칼로가 고발하는 우리네 삶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낯설지 않습니다. 성목요일 예수님의 최후의만찬이 있던 그 자리도 프리다가 그려 낸 식탁과 겹쳐 보입니다. 최후의만찬도 어떤 면에서 견디기 어려운 장면으로 가득합니다. 배신당하는 예수도, 배신하는 유다도 견디기 힘든 자리입니다. 모든 배신이 드러나는 순간 배신과 관련된 모든 이는 그 순간을 견딜 수 없었을 겁니다. 유다는 결국 이 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가 죽게 됩니다. 

유다의 배신

프리다 칼로의 그림에 나오는 기괴한 배신자의 모습을 가만 보면, 부활전야 멕시코 풍습인 유다 화형식이 연상됩니다. 이 모습이 꼭 유다 인형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멕시코 사람들은 부활전야 토요일이 되면 피켓과 종이로 만든 인형이나 초상화를 들고 거리에서 행진한다고 해요. 그때 들고나오는 인형과 초상화가 가룟 유다입니다. 이 인형들은 모두 멕시코 신자들에게 개인적이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삶에서 모든 악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은 피켓과 종이로 만든 유다 인형을 들고 거리로 나와 그들이 경멸하는 정치인의 이름, 경제인, 군과 경찰 고위직들의 이름을 큰소리로 외칩니다. 그리고는 행렬 마지막 순서에선 이 인형들을 한데 모아, 찢고 불태워 공중에 날리며 더욱 큰소리로 오늘 이 시대 악당들의 이름을 외칩니다. 이들이 바로 오늘의 배신자 유다라는 것이지요. 

유다가 왜 예수를 배신했는지, 사실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가 추측할 뿐입니다. 아마 유다는 예수에게 모든 희망과 기대를 걸었지만, 그가 기대한 대로 예수가 움직이지 않음을 확인하고 팔아넘겼을 겁니다. 예수는 분명히 유다와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간혹 은 삼십 냥 탓에 유다를 돈에 눈이 어두운 욕망의 화신으로 몰아가지만, 실제로 유다에게 돈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와 유다, 이 둘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삶, 새로운 나라, 즉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에 대한 서로 다른 그림 탓에 친밀하고 사랑스러운 관계가 배신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는 왜 서로 배신하나요? 우리가 배신하거나 배신당할 때를 살펴보면, 항상 그 뒤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이 도사립니다. 사랑에 대한 욕망, 무언가를 채우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데 나는 없는 것에 대한 욕망,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데 나는 못하는 것에 대한 욕망 등등. 하지만 이 모든 욕망은 우리에게 원초적이기에 완전히 제거할 수도 없고, 끊임없이 인간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배신의 세계 한가운데서 삽니다. 

주님의 성찬

그 욕망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채워지는 게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 욕망의 가시를 뽑아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다의 배신이 우리에게 깊게 각인되는 이유일 겁니다. 하지만 성경이 최후의만찬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까닭은, 그렇게 배신의 운명에 내던져진 우리는 가망이 없다는 걸 강조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성경은 최후의만찬을 통해 주님이 배신의 세계를 어떻게 다루고 해결하시는지 보여 줍니다.

배신은 삶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배신당한 사람은 정신적인 상처로 평생 회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배신은 예수님의 생명을 앗아간 것처럼 사람의 생명도 앗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배신한 사람이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배신하는 사람은 공동체에서 낙인찍히고, 배제되어 고립되며, 그로 인해 자기 자신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유다처럼 말입니다. 

멕시코의 부활절 토요일 행렬에선 종이로 만든 유다 인형을 찢고 불태워 공중으로 날려 버립니다. 이런 의식은 배신당한 사람들에게 안도감과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배신자를 공동체에서 추방하거나 제거하면, 배신당한 사람들은 그 순간 개운합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공동체에서 배신은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배신자를 내쫓거나 제거한다고 배신이 바로잡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방법을 최후의만찬 자리에서 보여 주십니다. 주님은 이미 예외 없이 우리 모두 예수를 배반할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봅시다. 만일 예수님이 잡히시고 죽으신 다음, 그분을 부인했던 제자와 도망한 제자, 그분을 배신했던 모든 사람을 모조리 색출해 예수 공동체에서 축출하고 제거했다면 어땠을까요? 분명한 사실은, 그렇게 했다면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야기는 그저 옛날이야기로 끝났겠지요. 

중요한 것은, 배신당한 사람들과 배신자들을 통합하고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유다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은 게 아니라 유다 같은 모든 이를 '위해'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가장 악랄한 행위를 짊어지고 죽었습니다. 가장 나쁜 배신, 가장 큰 욕망, 가장 교활한 탐욕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그분의 몸을 내어 주십니다. 

"받으라. 이것은 나의 몸이다. (중략) 이것은 많은 이를 위해 흘린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의 잔이다"라는 성찬 제정의 말씀을 곱씹어 봅니다. 주님은 죄인인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그분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유다의 배신에 예수님의 답은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식탁은 유다의 배신으로 피 흘려 상처 입은 식탁이 되어 버렸지만, 그 식탁을 피하지 않고 용감히 참여한 사람들에겐 생명의 선물이 됩니다. 

회개 용서 사랑
주님은 우리 모두를 식탁에 초대하시고, 우리를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식탁에 초대하시고, 우리를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배신과 복수, 폭력과 되갚음이라는 인간의 계산법은 죄인을 향한 용서와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문법으로 변환됩니다. 이 성찬의 식탁에 우리 모두 초대받습니다. 이 성찬의 식탁은 하나님을 배신하며 사는 모든 자들을 향한 자비의 신호입니다. 하나님은 그 식탁에서 모든 죄인을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가장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도 그분의 자비 가운데 초대받습니다.

주님의 식탁에서 우리는 더 이상 주님과 동료들의 얼굴을 피할 수 없습니다. 어렵지만 그 자리에서 우리는 맨얼굴을 드러내고 서로의 얼굴을 분명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주님의 식탁 앞에서 진실하게 서로를 향한 잘못을 고백하며, 서로를 위로하며 보듬어 줘야 합니다. 주님은 이 일을 위해 우리를 하나의 식탁으로 초대합니다.

어렵겠지만, 우리는 그 자리에 각자의 배신을 고백하고 인정하며,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그렇게 죄의 힘에 취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배신자도 당신의 식탁에 초대하십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고 그렇게 하신 게 아니지요. 주님은 그 식탁에 모두가 모여 배불리 먹고 마시며, 서로를 품고 서로가 이해하며 하나 되길 바라실 뿐입니다. 

그렇기에 배신한 사람은 이 식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 사랑의 신비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얼굴을 가리거나 속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내 모습 그대로 이 식탁에 진실하게 나아올 때 주님이 맞아 주십니다. 그분의 얼굴과 동료들의 얼굴이 두려워 제 모습을 가리거나 피하는 이들은 유다가 나선 사망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프리다 칼로의 상처 입은 식탁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여기엔 배신의 이미지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우울하지 않습니다. 다채로운 색상으로 그림의 분위기를 쾌활하게 만들고, 식탁 뒤에 무성하게 우거진 식물들과 식탁 옆의 아이들과 사슴을 그려 넣은 것도 인상적입니다. 이렇게 밝은 기운이 그림에 흐르는 건, 작가가 이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을 배신했던 모든 것들을 용서했다는 힌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프리다 칼로의 '상처 입은 식탁'은 한 개인의 고백이자 암시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식탁은 칼로의 식탁과 다릅니다. 주님의 식탁은 우리 모두를 향한 확실한 초대이며 약속이고, 선물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식탁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십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모든 배신, 모든 고통, 모든 죽음에 맞서 승리할 힘이 바로 여기 드러납니다. 성목요일 상처 입은 주님의 식탁을 기억해 봅시다. 주님의 이 복된 초대가 저와 여러분을 용서와 사랑으로, 자비와 평화로, 위로와 회복으로 이끄는 부활의 선물이 됩니다. 

- 2024. 3. 28. 중앙루터교회 성목요일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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