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미, <장소에 뿌리내리기>(한티재)

<장소에 뿌리내리기 - 삶의 기술과 민중의 평화에 관한 에세이> / 박경미 지음 / 한티재 펴냄 / 264쪽 / 1만 8,000원
<장소에 뿌리내리기 - 삶의 기술과 민중의 평화에 관한 에세이> / 박경미 지음 / 한티재 펴냄 / 264쪽 / 1만 8,000원

[뉴스앤조이-박요셉 사역기획국장] 잃어버린 것들에 관하여 성찰하는 책. 민주주의 한계, 파시즘의 대두, 기후 위기와 환경 파괴, 경제적 양극화 등 우리 사회 곳곳에서 어디선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자는 우리에게 찾아온 위기가 장소의 파괴와 인간성 상실에서 비롯했다고 지적하며, 진정한 삶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장소에 뿌리내리기>(한티재)를 쓴 박경미 교수는 성서학자로서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정치·역사와 분리된 성서 연구의 한계를 느끼고, 성서와 그것이 쓰인 시대를 연결하는 작업을 해 왔다. <마몬의 시대, 생명의 논리>(녹색평론사),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성서, 퀴어를 옹호하다>(한티재) 등을 썼다.

이 책은 지금까지 박 교수가 <기독교사상>·<녹색평론>에 쓴 글과 학교 예배 설교문을 다듬어서 엮은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일상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지팡이 삼아 보편의 가치와 의미를 짚어 간다. 늦여름에 찾아온 계절의 변화에서 기후 위기와 정치적·경제적 양극화, 더 나아가 인간의 탐욕을 묵상하고,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다가 예수의 죽음과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한다. 집 앞 골목길에서 개똥·고양이똥을 치우다가 물리적 장소에 뿌리내린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예수의 사랑을 깨닫는다.

표제인 '장소에 뿌리내리기'는 단순한 지역주의나 소유 의식을 뜻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생명과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가리킨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개별적으로 아는 대상을 사랑한다. 예수가 말한 사랑도 인류애가 아니라 '장소에 뿌리내린' 이웃 사랑이었다. 장소를 되찾는 일은 곧 삶을 되찾는 일이고, 공동체를 회복하는 첫 걸음이다.

"빵과 권력의지, 야망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자유 의식은 역설적으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음'에 대한 의식, 달리 말하자면 하느님에 대한 겸허한 복종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러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음'에 대한 의식은 소극적으로 말하면 삶의 부정성에서 비롯되고, 적극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의식이 우리를 하느님에 대한 인식과 믿음으로 인도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삶의 부정성, 곧 고통과 고난을 통해 자유를 얻고 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이른다." (1장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31쪽)

"전쟁의 기계들은 강력하고, 생명은 강보에 싸인 아기처럼 연약하다. 그러나 그 연약한 생명이 쇳소리 나는 기계 바퀴 아래서 살아남는다. 마태의 이 이야기는 아무리 전쟁 기계들이 굉음을 울리며 돌진해서 모든 것을 파괴해도 생명은 살아남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도 생명은 지속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세상의 가장 못난 것들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을 한다. 아무리 땅을 빼앗기고 곡식을 빼앗겨도 못난 농부는 다시 쟁기질을 한다. 또 아무리 전쟁이 일어나고 자식을 빼앗겨도 바보 같은 여자들은 다시 아이를 낳는다. 이 바보들이 계속해서 농사를 짓고 아이를 낳기 때문에 내 입에 밥이 들어가고 인류의 생명이 지속된다." (3장 '샬롬, 민중의 평화', 68-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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