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독의 시간] 폴 틸리히 <성서 종교와 궁극적 실재 탐구>(비아)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법한 것들이 있다. 그것은 나이가 들면서 개인에게 찾아온 자연스러운 변화 혹은 상실일 수도 있고, 시간이 흘러 사회가 이전과 달라지며 생긴 결과일 수도 있다.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1965) 같은 '신학자'가 다시 나오기 힘든 현실은 후자의 사례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학문적 탁월성이나 저술의 양으로만 따질 것 같으면, 틸리히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의 성과를 내는 학자를 보게 될 가능성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처럼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시대와 나라를 대표하는 영향력 있는 지성인으로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이 앞으로 등장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실제 그는 급속도로 세속화하던 20세기 중반 혼란한 미국 사회에서 '지성인의 사도' 혹은 '회의주의자의 사도'라고 불렸고, 신학 영역을 넘어 철학·심리학·문화·예술·정치 등 다방면에 영향을 미치며 비교 불가한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인류의 삶은 지난 세기를 거치며 많은 것이 달라졌다. 특히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는 제도적 종교에 대한 무관심, 권위에 대한 저항, 전통에 대한 환멸이 퍼져 갔고, 이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쪼그라드는 일도 불가피했다. 삶의 의미를 찾게 도와주고, 공동체를 다잡아 줬던 신념 체계도 함께 와해되며 사람들은 허무·회의·두려움의 위협을 직접 마주해야 했다. 신학은 더는 현실을 해석하는 보편적 모델로 인정받지 못했고, 신학자가 교회 울타리를 넘어 시대의 지성과 양심으로 인정받기는 더더욱 어려워졌다. 이것은 단지 후기 그리스도교 사회에 진입하면서 사람들이 과거처럼 기성 종교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현대사회에서 동시대인이 체감하는 문제를 신학적 담론으로 끌어올 만한 언어·방법론을 찾기 힘들어졌다는 데 있었다.

신학의 고리타분함이 세속화에 따른 사회 변화와 대비돼 크게 느껴질 때, 신학과 철학을 독창적 방식으로 오가며 현대 미국인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이 여전히 의미와 가치를 지녔음을 매력적이고 지적인 방식으로 보여 준 이가 있었다. 그는 20세기 초반 독일 여러 명문 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 교수로 활동하고, 한때 바르트·브루너·불트만 등과 함께 19세기 자유주의 유산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었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환멸 속에서 사회주의적 이상을 가진 현실 참여적 지성인으로 활동했고, 전체주의의 위협을 비판하다 히틀러 정권에서 '독일인 중 첫 해직 교수'라는 명예로운 불명예를 뒤집어쓰고는, 결국 1933년 47세에 미국으로 건너온 틸리히였다. 미국인들은 어눌한 영어를 쓰던 이 독일 루터교 목사를 곧 시대와 문화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 인정했다. 그에 대한 애정과 지지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이어졌다.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1965).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1965).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틸리히는 자신의 삶과 사상을 '경계선 위(On the boundary)'라는 은유를 사용해 설명하곤 했다. 그의 일생은 신학과 철학, 그리스도교와 문화, 이론과 실천, 독일과 미국, 학교와 교회가 자아내는 긴장 위에 있었다. "사유를 하려면 새로운 가능성을 기꺼이 수용해야만 하기에, 경계선 위에 설 때 사고하기가 유리합니다. 그러나 경계선 위에 서는 일이 실제로는 고달프고 위험한데, 그것은 우리 삶이 끝없이 결단을 내려야 하고 다른 선택 가능성을 배제하려 들기 때문입니다."1) 이러한 경계선상에서의 실존을 반영하듯, 틸리히의 사상에는 언제나 이성과 계시, 존재와 비존재, 영원과 시간, 무한자와 유한자, 믿음과 탐구, 아가페와 에로스의 '양극성'이 발견된다. 그는 대조적 개념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최대한 생동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사상의 틀을 만들고자 했다. 일상의 무력감을 느끼던 현대인들은 그 긴장이 자아낸 역동적 공간 속에서 허무와 무의미를 벗어나는 '존재의 용기'를 배워 갔다.

미국에서 경력의 정점을 맛봤던 틸리히는 많은 글을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영어로 썼지만, 그의 영향력은 곧 북미 대륙을 넘어섰다. 틸리히의 작품은 그의 조국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소개됐다. 한국에서도 틸리히의 인기는 대단했다. 1970~1980년대 군사독재와 정부 주도 산업화로 삶이 피폐해지고 '사람됨'의 의미가 흐려지던 때, 대학생들 외투 주머니에 틸리히의 설교집이 들어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전설처럼 들려온다. 이런 유명세를 반영하듯 1950년대 후반 이래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틸리히의 대표작과 설교집의 상당수가 번역됐고, 그의 대작 <조직신학>은 지금껏 번역자와 출판사를 달리하며 국내 독자에게 3번째 선보이고 있다.2)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본다면, 다른 현대 신학자와 비교할 때 한국에서 틸리히 수용은 약간 결을 달리한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유명 해외 신학자는 주요 작품이 제대로 번역되지 않아 한국 독자에게 진입 장벽이 높았다. 반면 틸리히는 꽤 많은 책이 번역됐고 사람들 사이에 그 이름이 꽤 많이 오르내렸음에도, 특유의 난해함과 옛 번역 어투의 낯섦, 틸리히를 둘러싼 여러 선입견이 그의 사상에 접근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러한 복합적 어려움에도 지난 몇 년간 이전에 번역되지 않았던 작품뿐만 아니라 기존에 출간된 책을 재번역한 작품들까지 계속 출판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틸리히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와 철학을 연결하는 질문이란

틸리히에 대한 깊은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틸리히의 사상(혹은 '틸리히다움')을 제대로 맛보게 해 줄 책을 추천하라면, 사람과 관심사에 따라 각기 다른 작품이 거론될 것 같다. 특정 주제가 아니라 틸리히의 신학 전반 혹은 방법론을 짧지만 강렬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라면, 1951년 미국 버지니아대학교의 제임스 W. 리처드 강연(James W. Richard)을 1955년에 출판한 <성서 종교와 궁극적 실재 탐구 Biblical Religion and the Search for Ultimate Reality>(비아)를 단연 떠올리게 된다. 사상의 원숙기에 도달한 60대 중반의 틸리히가 <조직신학> 1권을 출간하고 2권을 준비하던 중에 소개된 책인 만큼, 이 소책자는 <조직신학> 1권의 핵심 주제인 신학과 철학의 문제, 혹은 성서와 존재론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잘 설명한다. 그뿐만 아니라 <조직신학> 1권을 바탕으로 2, 3권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구체적 내용이 어떤 식으로 재해석될지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는 실마리도 곳곳에 들어 있다.

<성서 종교와 궁극적 실재 탐구 - 종교와 철학의 관계> / 폴 틸리히 지음 / 남성민 옮김 / 비아 펴냄 / 160쪽 / 1만 2000원
<성서 종교와 궁극적 실재 탐구 - 종교와 철학의 관계> / 폴 틸리히 지음 / 남성민 옮김 / 비아 펴냄 / 160쪽 / 1만 2000원

영어 원서에 없는 한국어판의 담백한 부제, '종교와 철학의 관계'는 이 책이 공들여 다룰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초기 교회 이래 오늘날까지 그리스도교 안팎에서 종교와 철학, 혹은 신앙과 이성이 어떤 관계인지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있었고, 둘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여러 방법도 제안돼 왔다. 틸리히는 그 어떤 신학자·철학자보다도 종교와 철학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봤고, 그 특별한 관계로부터 신학과 철학 모두를 이해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성서의 상징들이 불가피하게 존재론적 물음을 유발하며, 신학이 제시하는 대답은 필연적으로 존재론이 요소를 포함하고"(10쪽)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종교와 철학의 관계를 바라보는 틸리히 특유의 관점은 '존재론적 물음'이고, 그 둘의 상호작용을 규정하고 설명하고 체계화하는 그만의 방식은 존재론적 물음에 대한 답을 성서적 상징에서 찾는 '상관의 방법'이다.

틸리히에게 인간은 근원적으로 '질문'하는 존재, 특별히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 자신의 존재에 관해 물음을 던지는 존재다. 질문이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질문자가 물음의 대상을 소유하지 않다는 뜻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파편적으로나마 물음의 대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질문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존재 물음'을 하는 인간은 존재를 소유하지 못했지만 동시에 존재를 불완전하게 소유하고 있다. 존재와 비존재가 얽혀 있기에, 인간은 생명과 죽음 모두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유한자다. 인간이 상호작용하며 살아가는 삶의 배경인 '세계' 역시 존재와 비존재의 유한한 혼합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과 세계를 위협하는 비존재를 극복할 초월적인 존재의 형식을 열망함으로써, 가시적이고 유한한 것을 넘어선 그 무엇에 관심을 기울인다. 결국, 비존재와 혼합되지 않은 궁극적 실재에 대한 탐구는 "존재 자체, 존재하는 만물에 있는 존재의 힘"(30쪽), 혹은 무한자로서 신에 대한 물음과 맞닿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틸리히는 종교적 물음과 철학적 물음이 궁극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고 봤고, 바로 이 특별한 지점에서 종교와 철학의 연결을 도모한다.

이때 눈여겨볼 점은 틸리히가 종교와 철학을 다리 놓으려 할 때, 추상적 의미에서의 종교·철학을 상정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철학이 구체적으로 '존재론'이라면, 종교는 일반 종교 이론이 아니라 '성서 종교'다. 성서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인격 간 상호성으로 규정하고 있기에, 성서 종교는 '인격주의'를 근원적 특성으로 삼는다. 하지만 성서의 인격주의는 존재론적 사유와 여러모로 이질적이다. 인격주의에 '만남'의 요소가 있다면, 존재론은 '탐구'를 요구한다. 인격주의가 '구체적' 개별자 간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두는 반면, 존재론은 '일반적' 실재의 구조를 분석한다. 대화를 매개로 하는 인격은 나와 너의 '거리'를 전제하지만, 존재론은 존재의 근원으로의 '참여'를 통한 연합을 지향한다. 성서 속 인격주의가 '상징'과 '형상 언어'를 사용한다면, 존재론은 '개념'과 '철학의 언어'에 의존한다. 이렇게 인격주의와 존재론이 충돌하는 여러 지점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둘을 연결하는 작업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섣부른 종합의 시도가 성서 종교와 존재론 각각의 고유성을 훼손하는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하지만 틸리히는 성서 종교와 존재론을 피상적으로 관찰하지 않고, 각각의 본성을 깊게 파고들어 둘 사이의 차이 속에서 상호 의존성과 연결을 발견하고자 한다. 게다가 복음이 그리스철학과 만나 그리스도교신학이 탄생하게 된 역사의 이면에서도 존재론적 물음을 바탕으로 종교와 철학의 상호작용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92쪽). 틸리히는 그리스철학과의 만남이 복음의 헬라화를 초래했다고 비판적으로 봤던 19세기 자유주의신학(특별히 알브레히트 리츨과 아돌프 하르나크의 주장)을 넘어서면서도, 이전 세대가 그리스도교와 문화를 종합했던 것과 차별화된 방식(변증법)으로 둘의 관계를 정의하는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한다.3)

궁극적인 관심에 사로잡힌다는 것

틸리히는 성서 종교와 존재론이 긍정적으로 상호 관계를 맺는 지점을 '인간의 실존'에서 찾았다. 달리 말하면, "성서 종교의 주관적 측면을 분석해 이를 존재론 작업의 주관적 측면을 연결"함으로써 "성서 종교와 존재론이 긍정적인 관계를 맺는 지점을 발견"(71쪽)하게 된다. 이를 위해 성서 종교의 핵심인 '인격적 신에 대한 믿음'을 존재론적 시각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우선 틸리히는 하느님을 모든 유한자가 존재하는 힘이 되는 '존재 그 자체' 혹은 우리가 무조건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궁극적 관심'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철학적 언어가 성서의 인격주의를 훼손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리스도교 전통의 위대한 신학자들은 알게 모르게 신을 인격적이면서도 인격성을 넘어서는 '존재의 근거'로 이야기했다. 예를 들면, "철학을 매우 못 미더워했던 루터가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보다 더 그들에게 가까운 분이라고 말했을 때, 또는 하느님은 모래 알갱이에도 온전히 현존하시지만, 만물 전체로도 담을 수 없는 분이라고 말했을 때 (중략) 루터는 성서의 인격주의를 초월하며 만물 안에 있는 존재의 힘인 하느님을 존재론적으로 긍정"(127쪽)한 셈이다. 따라서 궁극적 관심으로서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에는 인격적 요소와 비인격적 요소가 긴장 속에 공존한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한 발짝 더 나아가, 틸리히는 종교적 인간에게 필수적인 신앙이 무엇인지도 존재론적 언어로 재정의한다.

"신앙은 궁극적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입니다. 오직 우리 존재, 의미의 근거인 것에만 우리는 궁극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신앙은 우리 삶의 궁극적인 기원과 목적에 관한 관심입니다. 이는 온 인격을 발휘해 기울이는 관심입니다. (중략) 누구도 우리에게 신앙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신앙을 갖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에 사로잡힙니다." (83쪽)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신앙과 존재론적 탐구 모두 무조건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라는 점에서 구조적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순종'을 덕목으로 삼는 신앙과 '비판적 사고'를 강조하는 철학적 사유가 쉽게 조화를 이루기는 어렵다. 하지만 놀랍게도 틸리히는 인간의 무능함과 불신마저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루터교 '칭의' 개념을 급진화하며 존재론적 물음에 내포된 불확실성과 회의를 용납하는 '용기'를 신앙의 본질로 파악한다.4) "신앙은 신앙 자체와 신앙 안에 있는 의심, 이 둘 사이에서 계속 일어나는 긴장입니다(중략) 신앙은 무조건적인 것에 대한 깨달음과 불확실성이라는 위험을 감내하는 용기를 모두 아우릅니다. 신앙은 '부정'의 불안에도 불구하고 '긍정'을 말합니다."(93~94쪽) 루터의 '믿음으로 칭의' 교리에 존재론적 색채를 더함으로써, 불안과 의심마저 껴안는 용기를 강조하는 틸리히의 신앙 개념을 '의심으로 칭의'라고 부르는 신학자도 있다.5)

틸리히는 삶의 표피가 아닌 깊은 차원에서, 실용적 질문이 아닌 무조건적이고 영원한 것을 향한 관심 속에서, 인간 실존에 관해 철학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 성서의 상징으로 답을 찾는 '상관의 방법'을 전개한다. 하지만 상관의 방법이 신학과 철학의 완전한 통합이라든지, 계시와 이성의 섣부른 조화를 추구하는 방법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의인이면서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라는 루터교의 인간 이해에 내재한 긴장처럼, 유한성의 조건 아래에 있는 인간의 활동으로서의 신학과 철학은 상호성 속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절대 극복되지 않는 차이를 지닐 것이다.6) 그렇기에 "존재론과 성서 종교의 상관관계는 결코 종결될 수 없는 과제"(127쪽)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구원론적 관심과 존재론적 물음 사이에서

틸리히에 따르면 '삶의 궁극적 근원에 기울이는 관심'으로서의 신앙과 '존재의 궁극적 근거에 대한 철학적 탐구'로서의 존재론은 서로 연결돼 있다. 이 둘의 밀접한 관계는 이 책의 제목 <성서 종교와 궁극적 실재 탐구>의 '와(and)'라는 한 음절에서 압축적으로 포착된다. 이로써 테르툴리아누스가 던졌던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인가"라는 고전적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서, 둘을 교조적으로 떼어 놓지도, 소박하게 일치시키지도 않는, 둘 사이의 긴장과 구조적 유사성을 함께 강조하는 특별한 모델이 제시된다.

앞서 강조했듯, 신학과 철학을 연결하고자 틸리히는 '존재론적 질문'에 집중한다. 하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틸리히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중립적으로 기술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소외 상태로부터 치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구원론적' 맥락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존재 자체'라는 철학적 개념이 '궁극적 관심'이라는 종교적 색채가 짙은 개념과 동일시됨으로써, 그의 상관의 방법은 철학과 신학의 균형을 잡는 것이 아니라 신학 쪽으로 기울어지게 됐다.7) 틸리히의 저서 심층에 깔린 신학적 지향성은 루터교 신학자라는 자기 정체성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는 "궁극적 관심이 주는 실존적 물음과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에 대한 실존적 대답이 나의 영적 생활을 항상 지배하고 있었으니, 나는 신학자일 수밖에 없었다"8)고 말했다.

이러한 이유로, 존재론의 언어가 틸리히의 저서를 뒤덮고 있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개신교신학의 심층 문법 속에서 존재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틸리히의 신학이 예전과 비교할 때 호소력이 약화한 이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성서 종교에서 '존재론적 물음'과 공명을 일으키는 측면을 강조하다 보니, 그의 방법론이 그리스도교가 가진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 주며 철학과 대화하기에는 유연성이 떨어질 수도 있다(그런 의미에서 신학의 '형식'을 우선시하면 '내용'의 왜곡 혹은 협소화가 일어난다는 바르트의 비판에 귀 기울여 볼 만하다). 또한 틸리히가 존재론적 관점에서 신학과 철학의 구조적 동일성을 분석했지만, 사실 철학은 존재론 외에도 다양한 분과가 있고, 전문 철학자들은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에 대한 담론을 발전시켰다. 즉, 틸리히의 상관의 방법이 신학의 영역을 확장했고, 그가 이뤄 낸 업적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도 끊이지 않지만, 정작 그의 사상은 동시대와 그 이후 신학·철학의 전반적 흐름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다고 평가할 여지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관심사가 다양할지라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은 그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탈종교화한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관심을 궁극적 실재에 이끌리게 함으로써 신앙의 매력과 필요성을 재발견해 준 틸리히의 '변증' 작업과 방법은 여전히 중요하다. 종교와 철학의 상이한 언어·문법·방법론을 놓고 혼란스러워하는 이들이라면, 둘의 차이와 유사성을 '변증법적'으로 함께 포착하도록 만든 틸리히의 사고의 틀·형식을 통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힘을 기를 수도 있을 것이다. 틸리히의 제안에 동의하든 안 하든 '성서 종교와 궁극적 실재 탐구' 강연을 맺으며 그가 기술한 '인간으로서 사유한다는 것'의 의미는 유한자의 삶을 숙명처럼 살아가야 할 모든 이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길 것이다.

"신앙은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신에 대한 의심 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중략) 성서 종교는 존재론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이를 긍정합니다. 이러한 긴장 가운데 고요하게, 동시에 용기 있게 사는 것, 그리하여 끝내 자기 영혼 깊은 곳에서, 신성한 삶 깊은 곳에서 성서 종교와 존재론의 궁극적 일치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인간 사유의 과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간 사유의 위엄입니다." (128쪽)

김진혁 /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부교수

1) 폴 틸리히, <경계선 위에서> 김흥규 옮김 (서울: 동연, 2018), 33.
2) 틸리히의 <조직신학>은 1978~1986년에는 김경수 번역으로 성광문화사에서, 2001~2010년에는 유장환 번역으로 한들출판사에서, 2021년부터 남성민 번역으로 새물결플러스에서 출간됐다.
3) 틸리히는 대립하는 두 이론 혹은 주장을 마주했을 때 둘을 섣불리 조화시키거나, 옳은 하나를 선택하고자 다른 하나를 버리는 피상적 방식을 경계했다. 오히려 그는 둘 사이의 관계를 긴장 속에서 종합하거나, 각각의 긍정과 부정을 함께 잡아내는 변증법적 방법에 크게 의지했다. 한때 그가 마르크스에게서 받은 영향을 회고하며 말한 바에 따르면, "우리의 사고가 자율적인 것인 한, 위대한 역사적 인물들과의 관계는 긍정인 동시에 부정이어야 한다. 변증법적이지 못한 부정은 변증법적이지 못한 긍정처럼 원시적이고 비생산적이다." 폴 틸리히, <절대를 찾아서> 이찬수·장성현 옮김 (서울: 전망사, 1993), 32.
4) 이러한 '프로테스탄트 원리'에 대한 압축적 설명으로는 다음을 참고하라. 폴 틸리히, "프로테스탄트 메시지와 오늘의 인간," <프로테스탄트 시대> 이정순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1), 299-317.
5) Gordon Kaufman, In the Beginning... Creativity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4), 115.
6) 틸리히는 개신교의 칭의교리를 구원론적 혹은 윤리적 맥락을 넘어 지적 사유의 원리로 삼는 방법을 마르틴 캘러(Martin Kähler, 1835-1912)에게서 배웠다. 폴 틸리히,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 송기득 옮김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1980), 262.
7) 틸리히는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신명기 6:5이 '궁극적 관심'이 의미하는 바라고 말하기도 한다. 폴 틸리히, <믿음의 역동성> 최규택 옮김 (서울: 그루터기하우스, 2005), 28.
8) 틸리히, <절대를 찾아서>,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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