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의 마지막 자존심

금방이라도 오실 것 같았던 주님이 오시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초기 교회의 종말신앙은 그들이 보여 준 후퇴 없는 사랑의 토대였다. 그러나 주님의 오심이 지연되자, 공동체 안에 불안과 패배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재림은 여러 신학적 주제 중 하나가 아니라 모든 것의 완성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신앙의 삶을 격려하기 위한 노력이 성서 곳곳에서 보인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벧후3:8)라는 상대성이론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하지만 기다림 속에 사는 이들에게 '하루'는 마치 천 년처럼 지독한 시간이었을 테다. 스스로에 대한 회의와 실망, 외부의 조롱과 비난이 교회의 목을 죄어 오는 시간이었다. 그렇다. 기다림이란 전혀 유쾌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교회력의 축을 이루는 부활절, 성령강림절, 성탄절은 4세기경에 자리 잡았다. 이 절기들은 발전을 거듭하며 다양한 의미를 품은 훌륭한 유산이 됐지만, '기다림의 사람들'에게 교회력은 사실상 '종말론의 패배 선언'과도 같았다. 예수의 재림을 기다렸던 초기 교회는 교회력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스도께서 당장에라도 오실 텐데, 매년 반복할 절기가 필요할 리 없었다. 이런 면에서 교회력의 등장은 종말의 열망이 식고 있음을 보여 주는 굴욕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회력은 종말론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5세기경 마련된 '대림절'은 성탄절을 준비하는 시간이면서,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를 향한 감사와 '오실' 그리스도를 향한 기대의 시간이다. 시간에 패배한 것 같아 보이지만, 종말의 기대가 버젓이 담겨 있다. 대림절은 교회력 새해의 시작으로서, 종말을 향한 열망이 곧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이라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기다림의 의미> / 폴라 구더 지음 / 이여진 옮김 / 학영 펴냄 / 200쪽 / 1만 5000원
<기다림의 의미> / 폴라 구더 지음 / 이여진 옮김 / 학영 펴냄 / 200쪽 / 1만 5000원

폴라 구더는 <기다림의 의미>(학영)에서 기다림을 생각하며 종말론의 문제를 우회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보고 듣는 설교와 논의에서 종말신학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 버리면, 아주 열정적으로 종말을 선포하는 대림절 찬송뿐 아니라 성경 그 자체도 허튼소리가 되어 버립니다. 종말에 대한 신학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칭의, 구원, 부활, 하나님나라와 같은 성경의 주제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주제가 되어 버립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종말신학을 이러한 주제들로부터 제거해 버리면 그 내용이 근본적으로 뒤바뀌게 되어서, 더 이상 예수님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제기하고 논의했던 주제가 아니게 되어 버립니다." (42~43쪽)

어쩌면 대림절은 종말신앙의 마지막 자존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작은 자존심조차 외면한 듯, 대림절을 그리스도의 오심을 갈망하는 시기로 지내기보다는 성탄일 행사나, 아기 예수의 n번째 생일을 준비하는 시기쯤으로 여기는 문화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종말을 향한, 정의와 평화의 새로운 세상을 향한 믿음이 식어도 괜찮은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천 년을 하루같이 살 수 있는 사람들, 기다려도 괜찮은 사람들, 기다릴 수 있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대림절은 기다림을 깊이 생각하는 절기다. 그러나 이 기다림의 이야기는 기다림은 '기다려도 괜찮은 사람들'의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기다림이 의미가 있어서 기다림을 선택한 절기가 아니다.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들'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음을 알려 주는 절기이자 기다림의 의미를 발견하는 시간이다. 즉, 대림이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들을 위한 위로다. 폴라 구더의 <기다림의 의미>는 이들을 위로하는 책이다. 대림절 한 주가 지날 때마다 대림초를 켜며 기다림의 사람들, 아브라함과 사라, 선지자, 세례 요한 마리아를 소환해 우리에게 말을 건다.

아브라함은 위대한 나라의 약속과 함께 새로운 자리로 완전히 떠나라는 부름을 받았지만, 그 결실을 보지 못한 채 삶을 마감했다. 그런 그가 기다림의 여정 속에 지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위로는 무엇일까? 참담한 현실에 불만족하며 오실 그분과 새로운 세상을 선포한 선지자들과 나란히 설 때, 우리의 기다림 너머에 올 희미한 무언가를 선명히 볼 수 있지 않을까? 옛 세상과 새 세상 사이 중간에서 세례 요한이 우리에게 토해 내는 새로운 삶의 방향은 무엇인가? 결코 일어나길 원치 않는 일을 기다려야만 했고, 결국에 그 일을 보았던 한 사람, 마리아. 그는 어떻게 두려움과 절망을 넘어 영광과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을까?

이 기다림의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스스로 기다림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기다림을 선택한 사람들이 아니라, 기다림에 선택된 사람들이다. 이들의 기다림은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권태, 위태로움, 허망함, 괴로움, 두려움으로 색칠돼 있었다. 그러나 구더는 그 기다림 속에서 의미를 기어코 발견해 낸다. 이 책은 기다림에서 우리를 건져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외면과 낙담 속에 처박힌 기다림을 구원해 제자리에 돌려놓도록 한다. 우리는 계속, 새롭게 기다려야 한다. 이미 기다리고 있지만, 더욱 적극적으로 기다려야 한다. 이 기다림은 일그러지고 분열된 세상이 계속되기를 거부하고,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변화하고 행동하는 일이며, 눈앞의 결과에 조급하며 흔들리거나 불안과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으며, 틔워 낸 희망의 불빛을 간직하는 일이다. 결국 구더가 말한 것처럼, 기다림의 계절인 대림절은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를 품은 이야기가 된다.

"무엇보다 대림절은 우리를 현재의 순간으로 부릅니다. 고요하지만 능동적으로, 평온하지만 확고하게 현재의 삶에 전념하게 합니다. 대림절은 바로 그러한 기다림으로 우리를 손짓하여 부릅니다. 그 기다림이 없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결국 피폐해지고 말 것입니다." (47쪽)

<기다림의 의미>는 제목 그대로 대림절 동안 기다림의 풍성한 의미를 발견하도록 돕는 책이다. 난이도와 분량 모두 누구라도 읽기에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물론 한 번에 다 읽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한 주에 한 챕터씩 읽는 구성이다. 조금 더 쪼개면 하루에 한 단락씩 매일 읽을 수도 있도록 배치돼 있는 묵상집이다. 그러나 함께 제작돼 묶인 묵상 노트는 <기다림의 의미> 옆에 나란히 두고 묵상하기에는 구성과 분량이 잘 맞지 않는다. 책을 더욱 곱씹으며 대림절 하루하루를 보다 풍성하게 보낼 수 있도록 세심한 안내를 더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모쪼록 이 책이 천 년이 하루같이 길게 느껴지는 사람들, 그분과 그의 나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한 작은 위로가 되기를.

이광희 /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목사. 예배학에 관심이 있어 조금씩 공부하며 글을 쓰고 번역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 '예배에 관한 아무 말', 팟캐스트 '모두의 아멘'을 운영하고 있으며, '온라인중앙교회'에서 사이버 사역 중이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