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같이 묵도하심으로 O월 O일 OO교회 주일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BGM: 찬송가 1장 '만복의 근원 하나님')

[뉴스앤조이-여운송 기자] 모태신앙으로 29년 평생 교회를 다녔다. 그러나 29년 평생 그 누구도 알려 주지 않았다. 왜 예배 전에 '묵도'를 하는 건지, 그날 읽는 '교독문'은 대체 무슨 기준으로 고르며 왜 읽는 건지, 왜 예배는 항상 '축도'로 끝나는 건지, 왜…. 사실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예배는 너무 익숙하고 당연한 '습관' 같은 일이었으니까. '습관이 영성'이라는 말도 있다만,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는 습관이 곧 영성이 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예배란 무엇인가.' 3년 전 온라인상을 휩쓸며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한 김영민 교수(서울대 정치외교학부)의 칼럼에 등장하는 "추석이란 무엇인가" 만큼이나 당황스러운 물음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근본적이지만, 또 딱히 뭐라 콕 집어 답하기도 어려운 그런 질문.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의 신간 <예배란 무엇인가 - 예전에 담긴 의미와 역사 탐구>(비아토르)는 바로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쓰인 책이다. 그가 이 책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4년이 걸렸다.

△예배의 정의 △예배의 역사 △프로테스탄트 예배 △예배의 요소 △예배 순서 해설 등을 다루는 이 책에서, 최 목사는 "예배란 본디 그 교회가 가르치는 모든 신학을 포괄하는 상징이고 총합"(8쪽)이라고 강조한다. "예배의 형식에 정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230쪽)는 다소 도발적인 명제를 들고나오기도 했는데, 이에 발끈해 반박이라도 하려 하면 "그렇게 정통이라고 확신하는 자기 교회 역사와 예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31쪽)라며 뼈를 때리기도 한다.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고 읽어야 하는 무서운(?) 책이다.

최주훈 목사를 10월 5일 중앙루터교회에서 만나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최 목사는 인터뷰에 앞서 "구술시험 치르는 기분이다. 원래 인터뷰를 별로 안 좋아한다"며 너스레를 놓았지만,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자 두 눈을 반짝이며 루터의 개혁과 개신교 예배, 한국교회 예배 문화, 코로나19 상황 속 예배 등 이야기보따리를 한껏 풀었다. 최 목사와 나눈 이야기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이 책의 백미인 5장 '예배 순서 해설'에 관한 내용은 '탐독'의 즐거움을 위해 독자들 몫으로 남겨 둔다.

<예배란 무엇인가>(비아토르) 저자 최주훈 목사를 중앙루터교회에서 10월 5일 만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예배란 무엇인가>(비아토르) 저자 최주훈 목사를 중앙루터교회에서 10월 5일 만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 오랜만에 신간이 나왔습니다. 어떤 책인지 간략히 소개해 주세요.

말 그대로 '예배가 무엇인지' 추적하는 책이에요. 예배란 과연 '드리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 '참여하는 것'인가 하는 아주 기본적인 질문부터, 예배라는 단어의 의미, 예배의 역사, 예배 요소들을 다룹니다. 특별히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리는 우리 개신교회의 예배가 어떤 특징을 지니는지 다른 교파들과 비교해 가며 신학적·역사적으로 해설했어요.

- 책을 완성하기까지 4년이나 걸렸다고 들었어요.

원래는 교회력과 절기에 관한 책을 쓰려고 했는데, 중간에 목회 현장의 필요성 때문에 방향을 틀었어요. 루터교회 목사로서 '예배가 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저조차도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걸 느꼈거든요. 이러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교회력·절기도 중요하지만 좀 더 큰 틀에서 예배 순서 하나하나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자료를 뒤져 가며 하나씩 답을 얻어 왔어요. 그렇게 4년이란 시간이 걸렸네요.

많지 않은 예배학 관련 자료를 찾느라 더 오래 걸렸어요. 번역된 책도 얼마 없지만, 특히 우리나라에는 비전례적인 개론서가 대다수예요. 예배 개념이라든지 현대 열린 예배를 다룬 자료는 많은 반면, 예배의 유래와 변천사를 신학적·역사적으로 다루는 예전학·전례학 관련 자료는 거의 제로 상태나 다름없어요. 가톨릭·정교회에서는 전례학 관련 자료가 굉장히 오래 축적돼 있는데, 개신교회는 상대적으로 이 분야가 미약하기도 하고요. 게다가 한국교회 내에서는 전례학을 논한다고 해도, 그 논의가 아주 옛날 이야기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아요. 오늘날 상황에 맞게 업데이트된 내용이 전무한 거죠.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과 신학에 오롯이 부합하는 예전 개론서를 내기로 마음먹었어요. 이 책은 루터교회를 중심으로 예배 요소의 유래와 역사, 신학적 적용을 풀어 놓은 일종의 케이스 스터디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제 고민의 결과가 책에 담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해답지는 아니에요. 앞으로도 계속 업데이트해 나가야 할 과제가 하나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란 무엇인가 - 예전에 담긴 의미와 역사 탐구> / 최주훈 지음 / 비아토르 펴냄 / 340쪽 / 1만 7000원. 뉴스앤조이 김은석
<예배란 무엇인가 - 예전에 담긴 의미와 역사 탐구> / 최주훈 지음 / 비아토르 펴냄 / 340쪽 / 1만 7000원. 뉴스앤조이 김은석

- 너무 당연한 내용이지만 정작 어디에서도 똑 부러진 대답을 듣기 어려운 질문인데요. 예배가 왜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예배는 교파를 막론하고 그 교회가 지닌 모든 신학과 역사를 포괄하는 상징이자 총합이에요. 어느 교회든 예배 요소·순서를 지금과 같이 정하게 된 데는 나름의 신학적·역사적 이유가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예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면 교회가 보이게 돼 있어요. 사실 신학교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몇 년에 걸쳐 조직신학·교회사 등을 두루 배우지만, 평신도들이 신학의 전체 내용이나 교회 역사를 한눈에 파악하기는 쉽지 않잖아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장이 바로 '예배'예요. 1시간 남짓한 시간 내에 교회의 역사와 교회가 추구하는 신학적 엑기스가 응축돼 있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매주 보는 '주보' 혹은 예배 순서지야말로 가장 좋은 신앙 교육 교재라고 할 수 있죠.

- 오늘날 교회 현실을 보면 '누가누가 정통입네' 하며 다투기도 하는데, "예배에 정통은 없다"는 다소 파격적인 주장을 하셨어요.

혹자들은 초대교회를 이상화하면서 거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정통성'을 주장하는데요. 사실 이게 상당히 애매모호해요. 일단 초대교회라고 했을 때, 시기적·지리적으로 어느 시기 어디에 위치한 교회인지에 따라 그 모습이 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해요. 초대교회라는 말로 모든 것을 하나로 규정하는 일은 위험하죠. 정통 예배라는 말도 마찬가지예요. 일단 남아 있는 초대교회 예배 관련 자료가 거의 없기도 하고, 자료들을 봐도 '원형' 혹은 '정통'이라고 부를 만한 공통된 예배 형식을 뽑아내기는 어렵거든요. 오히려 초대교회 모습을 보면 이들이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어찌 보면 '초대교회'를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언어도단이죠. 오히려 교회 공동체와 예배의 다양성을 지향하자는 구호로 사용해야 해요.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로 공인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예요. 예전이 통일성과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지만 그마저도 시대와 문화에 따라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며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해 왔어요. 예배 의식은 환경에 따라 꿈틀거리며 변화하는 생물이자 역사의 산물이에요. 그러니 예배 형식을 두고 정통·비정통, 옳고 그름을 구분하며 다투는 것만큼 무익한 일도 없죠.

다소 도발적으로 들릴 순 있겠지만 "예배엔 정통이 없다"는 말을 거꾸로 하면 "우리 모두가 정통이다"는 말이기도 해요. 다만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속한 교회 예배에 담긴 나름의 신학적·역사적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해요.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내용이에요. 아무리 화려하고 멋진 형식의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정작 그 의미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문제죠. 예배 형식을 둘러싼 소모적인 정통·이단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혹시 우리가 아무런 의문이나 관심도 없이 그냥 습관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게 먼저예요.

최주훈 목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속한 교회 예배 순서에 담긴 의미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최주훈 목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속한 교회 예배 순서에 담긴 의미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 루터의 종교개혁은 '예배 개혁'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개신교 예배만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일단은 예배의 '방향'과 관련이 있어요. 개신교 신학의 핵심은 예배가 하늘에서 땅으로,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는 은총이라는 데 있어요. 한마디로 '예배의 주체는 하나님'이라는 건데요. 아래에서 위로 올려지는 '제사적인 요소'와 구분되는 '성례전적 요소'에 방점이 찍혀요. 종교개혁 당시 로마가톨릭교회는 예배를 '미사'라고 부르면서 성찬의 희생 제사적 성격을 강조했어요. 아래에서 위로 올리는 제사 기능에 방점을 찍은 거죠. 공로주의와 결합된 이러한 예배 방향을 거부하고 '칭의론'을 통해 예배의 방향을 역전시킨 것이 루터 종교개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개신교 신학에서 예배는 사람이 위로 올려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들을 불러서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은총을 베푸시는 사건으로 이해되죠.

이런 방향성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단어가 바로 '고테스딘스트(Gottesdienst)'예요. 영어로 풀이하자면 'God(신)' + 'Service(섬김)'인데요. 루터는 이 단어를 가톨릭 미사와 대비되는 개신교 예배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어요. 여기서 예배라는 서비스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수혜자는 인간이 되는 거죠. 물론 개신교 예배론도 '은총에 대한 응답'이라는 차원에서 아래에서 위로 올려 드리는 예배의 방향을 아예 무시하지는 않아요. 다만 '칭의론'에 비춰 봤을 때, 가톨릭과는 예배신학의 방점이 다를 뿐이죠.

루터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말을 걸고, 우리는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말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요. 여기에 개신교 예배론의 또 다른 핵심인 '소통'이 잘 나타나 있어요. 하나님이 죄인들을 부르시고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은총을 베푸시면, 인간들은 기도와 찬송으로 감사를 올려 드리는 거죠.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배는 하나님이 여시고 인간이 반응하는 소통의 장, 만남의 장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물론 우리나라 예배학자들도 그런 말을 많이 하죠. 예배는 하나님과의 소통이고 만남이라고요. 그런데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보면 결국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드려야 하는가'에 집중하면서 삼천포로 빠져요. 개신교 예배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아무 공로 없는 죄인들에게 은총을 베푸신다'는 건데, 강조점이 완전히 달라져서 오해하게끔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배에서 힘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예배를 준비하면서 싸우고 탈진하는 거예요. 우리 쪽에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준비하고 올려 드려야 할 것 같으니까요. 이런 면에서는 우리가 말하는 예배가 루터가 비판한 중세 공로주의와 무엇이 다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어요.

- 루터에게는 예배 형식이 중요하지 않았던 건가요?

루터가 디자인한 예배의 골자는 '청중이 알아들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루터가 시장통 언어로 된 독일어 성경 번역에 힘쓴 이유이기도 해요. 예배 형식과 요소에 아무리 좋은 신학적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그것을 목사만 기가 막히게 알고 있다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공동체 모두가 그 의미를 정확히 공유하고 예배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죠.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루터가 모든 교회에 독일어 예배를 드리라고 했을 것 같잖아요? 오히려 비텐베르크 성체교회 같은 경우에는 그냥 해 오던 대로 라틴어 예배를 드리라고 했어요. 거기는 대학생·식자층이 다니던 교회여서 라틴어 예배가 훨씬 더 청중들 몸에 익어 있었거든요. 그리고 독일어로 예배를 드리게 된 교회에도 청중에게 정확히 그 의미를 설명해 주라고 했어요. 이렇게 루터에게는 형식보다 모두가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함께 참여할 수 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했던 거죠.

루터에게 예배 형식은 '아디아포라(adiaphora·비본질적인 것)'였어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할 수도 있고, 또 상황에 맞게 공동체가 함께 합의해 바꿔 나갈 수 있는 것에 속했어요. 이것은 루터가 강조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도 맞닿아 있어요. 오늘날 어떤 전례주의자들은 현대 '열린 예배'를 무조건 잘못됐다고 비난하기도 하는데,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그 안에 들어가서 이유를 살펴본다면 결코 그렇게 비난할 수 없을 거예요.

게다가 어떤 교회든지(정교회를 제외하고) 예배 의식문 안에 자신들의 고유한 것만을 담고 있지 않아요. 다 섞여 있거든요. 당장 루터교회만 하더라도 가톨릭적 요소, 정교회적 요소, 장로교회적 요소가 다 들어가 있어요. 가톨릭도 1960년대 제2차바티칸공의회를 거치면서 전례 개혁을 통해 '말씀의 전례'를 도입하는 등 개신교회에서 배워 간 게 많아요.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배워 가면서 교회 공동의 유산을 만들어 온 거예요. 중요한 것은 형식 자체가 아니라, 무엇이 오늘날 신학적·문화적으로 가장 최적화한 것인지 고민하며 끊임없이 개혁해 나가는 자세예요.

루터에게 예배 의식은 '아디아포라'의 영역이었다. 본질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맞게 공동체가 합의해 자유롭게 바꿔 나갈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루터에게 예배 의식은 '아디아포라'의 영역이었다. 본질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맞게 공동체가 합의해 자유롭게 바꿔 나갈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 장로교회가 주류를 이루는 한국에서는 교파를 막론하고 묵도-찬송-기도-찬송-설교-헌금-찬송-축도(묵찬기찬설) 예배 일색이잖아요. 왜 이렇게 된 건가요?

책에서도 언급하는데, 미국 천막 집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청교도적 색채를 띤 국내 초기 선교사들 영향이 크고요. 사실 장로교회의 본산이라고 하는 스코틀랜드를 가 보면, 우리나라같이 간소화한 예배 형식을 취하지는 않거든요. 오히려 예전적이죠. 하지만 저는 그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오늘날 우리 상황에 가장 적합한 게 '묵찬기찬설' 예배라면, 그것도 충분히 가능한 거죠. 예배 형식은 아디아포라의 영역이니까요. 다만 왜 이렇게 하는 것인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인지, 어떻게 바꿔 나갈 것인지 고민하는 정도의 유연함은 갖고 있어야겠죠. 그냥 그동안 이렇게 해 왔으니 이것이 곧 진리이자 정통이라는 식으로 붙드는 태도는 문제가 있다고 봐요.

- 책에서 강조하는 내용 중 하나는 "기독교 예배는 언제나 개인으로 출발하지만 공동체를 지향한다"인데요.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이뤄지는 예배는 크게 공동체적이지 않은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은혜 받고 집에 가도 되는 예배가 되다 보니 교인들 신앙생활이 개인화·파편화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전례 교회 입장에서 보면 예전 순서는 역사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순서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과 함께 숨을 쉰다는 의미에서 '통시적 공동체'를 생각할 수 있어요. 한편으로 동시대적 공동체를 이야기할 수 있는 예배 요소는 '성찬'이에요. 거룩한 사귐의 공동체로서 교회의 공동체성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예배 요소이기도 하고요. 성찬은 예수님의 몸을 함께 나누는 지체가 된다는 측면에서 교회 내 공동체성을 담지하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신 것처럼 교회도 세상을 향해 자신을 내어 준다는 측면에서 세상을 향한 공동체성으로 확장할 수도 있어요. 요즘 공공신학에 대한 이야기가 활발한데, 공공신학이 제의적 형식에서 어떤 출발점을 가져야 한다면, 다른 게 아니라 성찬의 회복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대다수 한국교회는 성찬을 잘 하지 않을뿐더러, 성찬의 의미가 너무 고정돼 있어요. 예수님 장례식 치르듯이 흰 장갑 끼고 슬픈 찬송가 부르면서 '고통'에만 초점을 맞추잖아요. 개인이 그 고통을 묵상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요. 사실 성찬을 뜻하는 그리스어 '유카리스트(Eucharist)'의 뜻은 '감사 기도'예요. 주님의 은총에 공동체가 감사로 응답하고 함께 나누는 축제인 거죠. 그날 설교의 주제와 절기에 맞게 성찬 분위기도 자유롭게 바꿀 수 있어요. 즐거운 재즈풍의 찬송을 부르거나 다 같이 춤을 출 수도 있고요. 한국교회가 예배를 통해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성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져야 한다고 봐요.

최주훈 목사는 한국교회가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성찬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최주훈 목사는 한국교회가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성찬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론적·공동체적 함의에 대한 이해 부족이 한국교회의 독선적·배타적 태도, 나아가 나와 다른 것에 대한 혐오·배제로 이어진다고 보면 무리가 있을까요?

앞서 얘기했지만, 예배를 보면 그 교회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선명하게 볼 수 있어요. 단적인 예가 예배 때 방해된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본당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거예요. 루터가 말한 '고테스딘스트' 앞에는 공동체라는 뜻의 '게마인데(Gemeinde)'라는 말이 붙어요. 그래서 루터교회는 '공동 예배'라는 말을 쓰고요. 공동 예배에서는 그 누구도 배제할 수 없어요. 특별히 개신교 예배론에서 본다면, 예배는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모든 구별과 차별의 경계선이 무너지는 시간이니까요.

우리가 교회를 진정으로 '가족' 혹은 '공동체'로 여긴다면 그렇게 행동할 수 없는 거죠. 상식적으로 봐도 아이가 울거나 떠든다고 바깥으로 내쫓는 가족은 없잖아요. 이게 다 한국교회 내에서 목사의 '설교'가 너무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이에요. 예배는 설교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공동체적 삶을 응축해 놓은 것인데 말이죠. 만일 어떤 교회가 목사의 설교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쫓아낸다면, 그 교회가 생각하는 공동체가 어떤 것인지가 다 보이는 거예요. 예배에 대한 몰이해와 경직성에서 시작된 배타성·폐쇄성이, 심각하게는 교회 분열로 이어지기도 하고 나아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로까지 나타나는 것 같아요.

- 코로나 시대, 2년 가까이 비대면 예배가 이어지고 있는데요. 특히나 성찬을 중요시하는 교파의 경우 '비대면 성찬이 가능한가' 하는 부분도 논쟁이 됐죠. 이런 부분도 '아디아포라'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부분은 논의가 많이 필요해요. 무엇이 정답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워요. 우선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살펴야 하고, 또 성찬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해요. 교파마다 신학적 입장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그에 맞는 방법론을 찾아야죠. 아무래도 비대면 성찬에서 가장 약화할 수밖에 없는 것은 '공동체성'인데요. 핵심은 '어떻게 동시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인데, 여기서도 '물질적 동시성이 중요한가, 시간적 동시성이 중요한가, 성찬의 효력은 어디까지인가' 등 신학적·철학적 문제가 남아 있어요. 고민스러운 부분이고, 교파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는 지점이죠.

중앙루터교회 같은 경우는 온라인 성찬을 시행하되, 사전에 교인 심방을 통해 떡과 포도주를 나눠 줘요. 그리고 동시간에 성찬례를 집례하면서 같이 먹고 마시도록 했죠. 그렇게 해서라도 동시성·공동체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했어요. 교인들에게는 이런 방식으로라도 성찬을 시행하고 교회 공동체를 항상 기억하자고 설명했죠. 물론 눈과 눈을 마주 보고 떡과 잔을 나누는 게 온전한 성찬인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 현실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결국 우리 상황을 고려해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해요. 우리 예수님이 방식을 갖고 뭐라 하실 만큼 째째한 분도 아니고요. 어떻게 시행하든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고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뤄지면 괜찮다고 봐요. 예배 형식은 문화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것이니까요.

최주훈 목사는 예배를 보면 그 교회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최주훈 목사는 예배를 보면 그 교회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 "그리스도인의 삶이 곧 예배다"라는 명제를 언급하며 책이 끝나는데요. 한국교회 예배 담론에서 이것만큼 상투어가 된 말도 없는 것 같아요. 이 말을 어떻게 제대로 실현할 수 있을까요?

<습관이 영성이다>(비아토르)를 쓴 제임스 K. A. 스미스는 우리의 모든 삶이 예전적이라고 이야기해요. 인간은 누구든지 종교적이고, 어떤 예전의 리듬에 따라 사느냐가 그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하는(섬기는) 것을 보여 준다고 말하고요. 루터도 <대교리문답>(복있는사람)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는데요. "당신 마음이 매달려 있고 당신의 모든 것을 지탱하는 대상, 그것이 당신의 신입니다"라고 설명해요.

삶이 곧 예배라는 말이 상투어에 머무는 이유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일 예배당에서만 하나님과 소통하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주일 공동 예배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일상을 응축해 놓은 것이고, 그 안에서 드리는 감사로서의 '응답'은 우리가 주일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일상에서 이뤄져야 하는데도요. 혹자는 '일주일은 주일을 위한 날'이라고 말하는데 완전 반대예요. 오히려 우리의 일상을 하나님나라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점검하고 공급받고자 주일에 공동체로 모이는 거죠. 우리가 주일예배를 삶을 회복하는 정거장으로 삼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예전적 리듬 안에서 일상을 살게 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곧 예배'라는 말이 상투어에 그치게 되지는 않을 거예요. 일상 속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 예배적 삶의 결실을 맺게 되겠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 특별히 목회자들이 용기를 냈으면 좋겠어요. 예배의 유래와 역사를 알게 되면 무엇이 본질적이고 무엇이 임시적인지 보일 거예요. 오늘날 우리 교회의 예배를 새롭게 갱신해 나갈 힌트가 보일 거고요. 스스로 질문해 보고 교인들과 함께 나눠 가며 교회 공동체의 신학과 상황에 맞는 예배를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어요. 일상의 예배까지도요.

- <뉴스앤조이> 후원회원들과 함께하는 온라인 강연도 준비하셨다고요.

함께 책을 읽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책에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도 다룰 거고요. 모인 분들 이야기를 많이 듣고 싶어요. 저도 좀 배우려고요. 지루하고 어려운 내용은 최대한 줄이고 모두가 함께 나눌 수 있는 내용들 위주로 진행해 보려고 해요. 각 교회 목회자든 신학생이든 평신도든 자기 교회가 어떤 얼굴을 가지고 있는지, 또 앞으로 어떤 교회를 지향하고 있는지, '예배'를 통해 함께 살펴볼 수 있는 통로가 됐으면 좋겠어요.

1강. 예배의 정의와 역사(10월 14일 저녁 7시 30분)
2강. 프로테스탄트 예배(10월 21일 저녁 7시 30분)
3강. 예배의 요소(11월 4일 저녁 7시 30분)
4강. 예배의 순서(11월 11일 저녁 7시 30분)

참가비: 2만 원(<뉴스앤조이> 후원회원은 1만 원)
참가 신청 링크: https://bit.ly/3ipWP3A
문의: 02-744-4116 / task@newsnjo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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