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독의 시간] 리처드 마우·산더 흐리피운 <다원주의들과 지평들>(IVP)

신앙? 그건 네 생각이고

신학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를 진단할 때 한동안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을 많이 사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주로 '포스트크리스텐덤'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 말은 우리가 '기독교 세계'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서구 유럽이나 북미의 문화적 배경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면 이 개념이 왜 중요한지 짐작할 수 있다. 계몽주의 이후 기독교는 공적 영역에서 쫓겨나 영광스러운 왕좌에서 변방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건전한 민주주의를 이룩해야 할 시점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이나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하면 공적 영역에서 스스로의 지분을 깎아 먹는 꼴이 되고 만다. 어쩌면 그동안 기독교는 끈질기게, 그리고 고집스럽게 그들이 사는 세상이 변했다는 사실, 즉 다원화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포스트크리스텐덤'이라는 말이 이제야 유행처럼 여러 신학 저서에 등장하는 걸 보니 그들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로 했나 보다.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신학자들이 '포스트크리스텐덤'이라고 명명한다면, 사회학자나 정치학자들은 주로 '다원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세속화 이론으로 유명한 종교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젊은 시절 자신의 이론을 철회하면서 근대적 세속화의 귀결은 결국 다원주의였다고 말한다. 후기 세속 사회는 결국 다원주의 사회였다. 신학자들에게는 포스트크리스텐덤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분석하고 이를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을 일종의 사명으로 알던 사회학자들에게는 다원주의가 심각한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다원주의를 인정하고 허용할수록 상대주의에 빠지게 되고 결국에는 허무주의로 전락하고 마는 것 아니냐는 불안이었다. 특히 목적론적 세계관이 강한 종교 입장에서는 다원주의가 큰 위협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배타적 진리를 소유한 종교 공동체가 다원주의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건 네 생각이고'라는 말을 가장 못 견디는 부류가 바로 종교 집단일 것이다.

<다원주의들과 지평들 - 다양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공공철학> / 리처드 마우·산더 흐리피운 지음 / 신국원 옮김 / IVP 펴냄 / 256쪽 / 1만 3000원
<다원주의들과 지평들 - 다양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공공철학> / 리처드 마우·산더 흐리피운 지음 / 신국원 옮김 / IVP 펴냄 / 256쪽 / 1만 3000원

<다원주의들과 지평들>(IVP)은 더 이상 통합 이론과 메타 서사가 작동하지 않는 학문의 장에서 어떻게 다원주의를 철학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지를 탐구한 학술서다. 이 책은 굉장히 많은 내용을 축약해서 간략히 설명했기 때문에 난이도가 높은 편이다. 책에서 언급하는 학자도 상당히 많고, 이들이 사용하는 개념 하나하나가 상당히 많은 설명을 요구한다. 자칫 정신을 놓으면 길을 잃기 쉽다. 하지만 끝까지 정신을 차리고 읽는다면 저자들이 주장하는 바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정치적 자유주의>로 가는 길목에서

다원주의를 껄끄러워한 건 종교뿐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공정하고 공평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한 정치학자들에게도 다원주의는 다루기 힘든 주제였다. 다양한 욕구와 욕망을 조절하고 통제하면서 누구든지 납득하고 인정할 수 있는 정의론을 만드는 것이 이들의 과제였다. 그러려면 가능한 한 공평한 합의 조건을 만들어야 했고, 개인과 집단의 전통과 이념은 잠시 접어 둬야 했다. 존 롤스는 <정의론>을 통해 탁월한 정의론을 구축했고, 많은 이가 이에 공감하며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정의론이 탄생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내 자신의 두터운 정체성을 배제한 얇은 합의로는 정치적 정의를 만들 수도 없고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인의 특정한 신앙과 신념 체계를 그저 사적 영역에 따로 떼어 놓으니, 공론장은 말 그대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텅 빈 공간', '빈 성소'로 남기 시작했다. 저마다 주장하는 '좋은 삶'의 내용이 천차만별이니 이를 모두 수용하면 상대주의로 빠질 것 같고, 고집스레 자기만의 도덕적 이념을 주장하면 자칫 광신·불관용을 부추겨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다원주의에 태생적으로 내포된 불안 요소를 인지하고 있었기에 이를 어떻게든 제도적으로 통제하려 했다. 하지만 자신의 전통과 정체성을 붙잡으려는 인간 본성이 생각처럼 쉽게 통제되지는 않는다.

롤스의 <정의론>은 출간 이후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을 통해 미국에서는 슈퍼 루키들이 탄생했는데, 그중 한 명이 마이클 샌델이다. 롤스 역시 논쟁을 통해 생각을 다듬으면서 자신의 이론에서 취약한 부분을 보완해 나갔다. 여기서 그 유명한 '중첩적 합의(overlapping consensus)'와 '공적 이성(public reason)' 같은 개념이 나온다. 롤스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형이상학적·도덕적·종교적 선이해를 포기하고 공론장에 나갈 수는 없지만, 이들이 서로 다른 전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정치적으로는 동일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고, 아니 이르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이들 역시 '공적 이성'을 가지고 있을 테니, 공적 정의를 위해 자신의 이성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두터운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얇은 합의로도 충분히 공적 정의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롤스의 정의론은 '좋은 삶'이나 '선의 우선성'보다 '옮음', '정당성', '절차', '합의' 같은 개념을 중요시한다. 다원주의도 인정하고 서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포괄적 교의'도 인정하되, 어찌됐건 '공적 이성'을 통해서만 정치적 정의가 확보될 수 있기 때문에, 정의를 도출하는 과정은 정당하고 공정해야 한다. 롤스의 정의론에 대한 기독교 신학자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공공신학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주로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지만, 스탠리 하우어워스 같은 신학자는 이런 분배 정의에 기독교가 휘둘릴 이유도 없고 그들이 정한 규칙을 따를 이유도 없다고 말한다.

'열린 하늘' 공유하기

롤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기독교와 정의론을 연결하는 이들도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무례하고 과격한 종교 집단이 공론장을 어지럽히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두터운 정체성을 가진 집단일수록 자유주의적 관용도 부족하고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덕을 함양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마우와 흐리피운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두 저자는 존 머리 커디히, 리처드 뉴하우스, 로버트 벨라, 레슬리 뉴비긴의 사상을 인용하면서 공론장이 중립적이라는 신화를 폭로하고, 기독교가 공론장과 건강한 방식으로 결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이해 당사자들의 얇은 합의를 통해서는 결코 사회적 질병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다. 뉴하우스는 종교가 공론장에 개입하면 물의를 일으킨다고 생각하는 자유주의의 견해에 반대해, 오히려 초월적 책임을 수용한 종교 집단이야말로 겸손하게 공적 의제를 수용할 수 있는 동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는 기독교 정신이야말로 다원주의를 인정하고 장려할 수 있는 내적 이유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마우와 흐리피운이 생각하는 '방향적 다원주의'의 기독교적 이상이다.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신념은 '겸손과 경청'이라는 구체적 가치로 실현되고, 이는 강압적으로 다른 집단이나 공동체를 억누르지 않는다. 하지만 목적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는 그들이 지향하는 분명한 방향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이념이 궁극적 종말의 때에는 온전하게 실현되리라고 고백하면서도 현재의 다원주의 상태를 인정하고 다른 이들과 공존하는 방식을 터득해야 한다. 기독교는 충분히 그런 삶의 방식을 장려하고 배양할 수 있는 내적 이유를 가지고 있다. 계약 관계로 맺어진 근대적 자아의 정치적 결속은 불안정하지만, 종교적 헌신을 바탕으로 한 공공성은 강력한 기초를 가지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공적 가치를 이어 갈 수 있다.

계몽주의 시민 교양은 사회계약을 통해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적 체계를 만들었을지언정, 사람들의 열망을 끄집어내지는 못했다. 더 좋은 사회와 더 좋은 마을을 만들려는 열망, 상호 신뢰와 책임으로 서로의 삶을 돌보고 도와주는 넉넉한 인심, 자신의 사유와 신념을 맘껏 표현하고 공개함으로 공론장에 활기를 불어넣는 삶의 열망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로버트 벨라는 종교적 열망이 건강한 공적 공간을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봤고, 공적 삶의 큰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의 욕망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공적 삶의 비전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인간 사회를 초월하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알았다. 모든 이가 공유하는 '열린 하늘'은 다원주의를 장려하면서 동시에 연합과 연대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

개혁신학과 다원주의의 조화

내가 생각하는 개혁신학의 매력은 인간의 죄를 겸허히 인정한다는 점이다. 모든 인간은 인식론적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죄로 인해 오염됐다. 따라서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도 그 자체로 완벽할 수 없으며 언제나 개혁의 대상이 돼야 한다. 교회나 기독교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하나님나라의 이상을 실현한다고 주장하는 교회 내에서도 인간 존엄성이나 평등이 실현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와 공동체는 잠정적이며, 늘 개혁의 대상이 돼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는 기독교라는 종교 집단에서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 세계의 모든 영역에서 실현된다. 따라서 교회보다 더 선하고 정의로운 사회 집단과 체계가 있을 수 있으며, 기독교는 그들을 통해 다시 개혁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개혁신학이 다원주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지지할 수 있는 이유다. 내 안에 있는 죄를 볼 수 있고 타자 안에 있는 선함을 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내가 아는 개혁신학의 매력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이 가져야 할 덕목은 다양성 인정, 나와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할 줄 아는 공감 능력, 그들과 함께 의견을 조율하고 연대할 수 있는 마음 씀씀이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가장 말이 통하지 않는 집단이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다. 고집불통에 비상식적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하지만 뒤집어서 생각해 보자. 기독교 공동체는 민주주의의 덕목을 학습하고 배양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소 아닌가? 매주 전 세대가 어울려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이 함께 식사하며, 심지어 정치적 이념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성경 공부를 한다. 어떤 공동체에서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연대를 매주 구현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다. 그렇다면 교회야말로 다원주의를 학습·실습할 수 있는 훈련소라 할 수 있다. 교회에서 나와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훈련을 했다면, 이제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귀담아듣는 훈련을 해 보자. 기독교는 다원주의를 배척할 이유가 전혀 없다.

최경환 / 대학과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출판사와 아카데미에서 일하면서 강연을 기획하고 다양한 세미나를 진행해 왔다. 현재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공공신학과 정치철학을 꾸준히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들>(공저), <태극기를 흔드는 그리스도인>(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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