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가 '사건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신앙고백과 응답을 신학적 접근과 표현으로 정리합니다. 매달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칼럼을 게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신학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제는 '바캉스'입니다.

여름휴가를 고대하면서 힘든 노동의 나날을 견딘다는 분이 많습니다. 휴가는 짜릿함? 혹은 여유로운 분위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갔다 오면 또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나 아련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열심히 일해 온 당신, 휴가 또한 일처럼 해치우지는 않았는지요? 엄청난 강도와 몰입도로 일하고 나서, 바로 공항으로 가 비행기를 타고 어느 낯선 휴양지에서 편안히 휴식하는 상황은 그저 꿈일 뿐, 빡센 여행 스케줄 소화하느라 몸이 두세 개라도 모자랐다고요?

놀러 갈 기운이 없어 꼼짝도 하지 않고 방안에서 뒹굴뒹굴하셨다고요? 놀러 갈 기분이 안 나 아무 계획 없이 시간을 보내려니 무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요? 그래도 이런 사연들은 괜찮은 형편인 것 같아요. 놀러 가는 데 너무 돈이 많이 들어 또다시 내년을 기약하면서 휴가를 반납하고, 동료 대신 일하고 있었던 분들도 계셨을 테니까요. 그래도 당신은 일자리가 있으니 대신 일이라도 하지, 그 과로조차 부럽다는 사람 또한 있으니까요.

아직 휴가를 갖지 못한 저는 머릿속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우리 사회에 기본 소득제가 도입되어, 모두 어딘가에서 자기 나름대로 휴식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소모적인 구직 활동을 증명해야 할 필요 없이 '조건 없는 기본 소득'을 받게 된 청춘들은 사회가 생산적인 활동으로 격려하지 않을 일들을 할 경비를 갖게 될 테지요. 취미 생활을 하든 연애 사업을 하든 그 돈으로 무엇을 하든 자유며, 그 시간을 보내고 난 후 일할 맛이 나고 뭔가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볼 마음이 된다면 숫자로 나타나지 않는 효과가 무지 크다고 생각합니다.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자신의 가난을 설명해야 할 필요' 없이 기본 소득을 갖게 될 사람들은 누구 앞에서라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어깨를 펴게 될 테지요. 우리 사회가 개인의 노동과 재능을 상품화하면서 연봉순으로 혹은 자산순으로 줄 세우는 과정에서 거의 모든 시민들을 크고 작은 삶의 불안에 잠기게 만들었던 자본주의의 그늘, 그 문명적 야만의 시간에 대한 더 이상의 순응은 없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은 일부의 희망 사항인 기본 소득제는 우리 사회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다줄 새 시대의 가치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자리가 없어도, 대물림된 부가 없어도, 투자 수익을 낼 수 있는 주주가 아니어도, 그 사회 구성원이기만 하면 기본 생활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공생과 공존의 가치 말입니다. 이는 경제적인 가치 외의 모든 것을 무용한 것으로 부정해 온 경제 일변도의 사회 문화로부터 결별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와 영혼의 무게를 상품 가치의 단 한 차원으로 투명하게 환원해 온 참 쉬운 계산법에 대한 해제입니다. 몸이 아플수록, 돌봄을 상품화할수록, 자연에 속한 것들을 베고 운반하고 가공해서 판매할수록 과정마다 발생하는 GDP의 이면을 두 눈 부릅뜨고 바라보게 하는 거울입니다.

기본 소득제 시행이 현실로 되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우선 푹 자고 싶다고 합니다. 허리가 아파서 더 이상 누워 있을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합니다. 자기가 진정 무엇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와의 깊은 대화 속에서 모색해 보지 않았던, 혹은 그럴 시간조차도 갖지 못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비로소 '생각'이란 걸 좀 해 보겠다고 합니다. 자신의 꿈을 찾는 게 꿈이 되어 버린 대학 생활의 황폐함을 떨치기 위해 학교를 자퇴하고 떠난 선배의 길을 좇아가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자신이 남아 있는 이유는 분명하게 파헤쳐 보겠다고 합니다. 그런 여행을 다녀온 후에는요? 먹고살지 못할까 봐 마음 한편에 넣어 두었던 자신의 꿈을 찾아 한 발 한 발 걸어가겠다고 합니다.

저희 집에 암탉 두 마리 영이, 순이가 있습니다. 예닐곱 살 먹었는데 영이가 몸이 좀 안 좋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지난해 봄에는 식음을 전폐하고 횃대에서 내려오지 않은 지 근 2주일 만에 겨우 회복이 되었습니다. 올봄에는 먹는 것도 시원치 않고 자꾸 그늘을 찾아 가만히 서 있어서 몸을 살펴보니 뭐에 물렸는지 엉덩이 위쪽에 생채기가 나 있고 날벌레가 꾀기 시작해서 소독해 주었습니다. 요 근래에 다시 볏 색깔이 흐릿해지면서 잘 먹지 않고 몸이 둔해지는 건강 이상 신호를 보냈는데, 다시 뒷부분을 들춰 보니 큰 상처를 입고 있었습니다. 알코올을 들이부으니 작은 구더기들이 기어 나왔습니다. 그 후에 저희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모이 외에 특식(유기농 현미가 얘들에게 최고 인기 곡식입니다)을 주고, 자주 들여다보면서 힘내라고 응원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영이는 몸이 아픈 정도에 따라 횃대, 철쭉나무 그늘, 토방 밑을 찾아서 쉽니다. 맹수가 다치면 동굴에 틀어박혀 상처가 아물 때까지 시간을 보내는 자기 치유가 이런 식인가 봅니다.

영이, 순이가 노니는 텃밭에는 깻잎이랑 여러 푸성귀가 있습니다. 수국은 깻잎과 모양이 닮았는데 물을 참 좋아합니다. 어쩌다 물 주는 시간을 넘기면 시들시들해져서 곧 말라비틀어질 정도가 됩니다. 응급처치로 물을 주면 언제 그랬냐 싶게 생생한 잎이 됩니다. 그 임계 시간을 넘기면 살리기 어렵습니다.

뙤약볕에 타들어 가는 잎이 되어 뜨겁게 절망하는 주변의 사람들을 봅니다. 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이들에게 생명의 시간이 남아 있을 때 사회가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기본 소득에 대한 아이디어를 확산하고, 정교화하고, 현실의 사건으로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신의 삶을 보듬어 가면서, 상처를 치유하고, 성장의 물을 주는 일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말입니다.

윤혜린 / 윤혜린철학글짓기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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