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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봄, 어머니 집으로!
[사건과 신학] 애도는 어떻게 폭력에 대항하는가
  • 이미경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9.06.04 15:07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가 '사건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신앙고백과 응답을 신학적 접근과 표현으로 정리합니다. 매달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칼럼을 게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신학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제는 '사랑과 폭력'입니다.


계절의 여왕이자 가정의 달인 5월, 나는 이 계절이 참 좋다. 만물이 소생하고 생명들이 만개하기를 꿈꾸는 봄날은 언제 보아도 사랑스럽고 매혹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이 아름다운 봄 날, 우리의 역사는 참 많이도 아프고 시렸다. 4월의 봄엔 제주 양민 학살(4·3)과 세월호 침몰의 비극(4·16)의 소리가 들리고, 5월의 봄엔 광주 민주화 항쟁(5·18)의 뼈저린 외침이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5월의 울부짖음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가깝게는 불과 3년 전인 2016년 5·17 강남역 살인 사건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 범죄와 생명 부재 의식의 심각성을 수면 위로 드러나게 했다. 작년에는 미투 운동까지 시작되었으니, 이쯤 되면 성차별 및 성폭력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그러나 며칠 전 진행한 CBS '시사자키' 방송을 들으며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남역 사건 이후 성폭력 범죄율이 오히려 10% 이상 증가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광주 의붓딸 살해 사건'(4·27)이라는 엽기적인 충격 속에서 올해의 5월을 맞이해야 했다. 12살의 어린 딸을 친부는 폭행하고, 계부는 성추행에 이어 살해하고, 친모는 이 모든 것에 공모했다. '어린' '여자' '아이'에게 가정은 있으나 없는 것이었고, 소녀에게 봄은 경험할 수 없는 계절이 되고 말았다.

그/녀들에게 잃어버린 5월을, 가정을 돌려줄 방법은 없을까. 기독교는 기억의 종교다. 출애굽의 해방뿐 아니라 애굽의 종 되었던 때를 기억하라고 요청받았듯이, 부활의 예수뿐 아니라 죽음의 십자가를 기억해야 하듯이, 생명의 피어오름과 더불어 이름도 없이 짓밟힌 생명들을 외면하는 대신 모두 소환하여 마주할 때 이 봄은 진정 따스한 봄이 되지 않을까.

아버지의 집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먼저 사사기 마지막 이야기(19~21장)의 아픔을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자. 이 아픔의 이야기에는 네 부류의 아버지 집이 등장한다. 성서는 여기서 딸-여성들이 거하는 집이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고발한다.

첫 번째는 딸을 사랑했지만 끝내 지키지 못한 아버지 집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레위인의 첩이 되어 살던 딸이 친정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고, 넉 달이 흐른 뒤에야 레위인은 첩을 데리러 온다. 남편은 다정한 말을 잃어버리고 오직 떠남의 목적지향주의에만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아버지는 딸과 사위가 더 머무르며 친밀한 회복을 원하지만 결국 떠나보내야 했다.

두 번째는 딸-여성들을 내치는 기브아 땅 한 노인의 집이다. 길을 떠난 레위인과 그의 첩은 밤이 깊어진 때에 노인의 집에 유숙하게 된다. 비극적 사건은 이 집에서 발생한다. 레위인을 욕보이겠다며 내어 달라는 베냐민 지파 불량배들에게 노인은 말한다. "여기 처녀인 내 딸과 그 남자의 첩을 끌어내다 줄 터이니 그들을 데리고 가서 당신들 좋을 대로 하시오. 그러나 이 남자에게만은 그런 악한 일을 하지 마시오."(19:24) 남자를 지켜내기 위해 자기의 딸마저 버리는 냉혹한 아버지 집이다. 이때 불량배들이 노인의 말을 듣지 않고 남자만을 요구하자 레위인은 자기 첩을 문밖으로 내치고는 문을 잠근다. 성서는 그 불량배들이 그녀를 밤새도록 윤간하였노라고 말한다.(19:22-25) 노인의 집은 남자를 지켜내기 위해서 여성들을 희생하게 하는 집이었다.

세 번째는 남편 레위인의 집이다. 그동안 그토록 서둘러 돌아가고자 한 집에 도착해서 그가 한 일을 보라. 칼을 잡는 일, 밤새 윤간당하다 죽은 아내의 몸을 열두 도막을 내는 일을 한다(19:29). 여호와의 불을 지피는 대신 분노와 복수의 불을 지피는 엽기적인 공간이다.

마지막 네 번째는 열두 지파 모든 아버지들의 집이다. 토막 난 여성의 신체를 받아들고 폭력과 전쟁을 결의하는 집, 불량배를 처단하겠다며 베냐민 지파 남녀노소 모든 생명을 말살하고 죽이려는 집. 그리고 그 폭력 행위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정당화하는 집이다.

폭력과 전쟁은 남성들을 더욱 결속하게 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집단화되었다. 베냐민 지파가 사라질 것을 우려하며 남은 베냐민 남자 600명의 대를 잇기 위한 프로젝트를 실행하는데, 그 방법이 참혹하다. "야베스 길르앗 주민과 부녀와 어린아이를 칼날로"(21:9) 쳐서 그중 "젊은 처녀 400명을"(21:10) 강제로 얻고, 그래도 모자라는 여성 200명을 매년 실로의 야훼 축제에 올라오는 여인들을 몰래 '납치'하는(21:20-23) 폭행을 허용하는 것으로 완성시킨다. 이것이 소위 여호와를 경외하는 남자들이 선택한 방법이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히: 이쉬, 남자)'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성서는 고발한다. 남자(이쉬)들이 연대하여 자신이 옳다고 한 행위들을.

애도성, 문지방으로 돌아온 몸

세상의 딸들은 아버지가 있으나 없으며, 아내들은 남편이 있으나 없는 삶이다. 수천 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매한가지다. 과연 여성이 안전하게 거할 집은 어디일까.

주디스 버틀러는 자신의 책 <불확실한 삶>에서 폭력을 금지하기 위해서 애도성을 회복하고 무감각에서 빠져나올 것을 호소한다. 애도의 능력이야말로 폭력에 대항하게 하는 중요한 감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애도의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폭력에 대항하는 데 필요한 삶에 대한 더욱 예리한 느낌을 잃게 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버틀러, 19-20)

왜 애도해야 하는가. 약한 감정으로도 보일 수 있는 애도성이 어떻게 폭력에 대항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문지방으로 돌아온 그녀의 몸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녀는 왜 돌아왔을까. 문지방의 그녀의 몸은 헛되이 스러져 가는 몸이 아니었다. 남자에게 잃어버린 눈물과 다정한 언어를 회복할 기회를 준다. 예수의 십자가의 몸이 우리에게 구원이었듯이, 남자는 여자의 몸을 그렇게 만나야 했다. 그녀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고, 그녀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다시 듣고, 이름을 다시 불러 주면 된다. 죽어 가는 여자를 보며 눈물을 흘릴 때 그 공간은 폭력이 사라지고, 경직된 마음이 부드러워지며, 신의 은총이 깃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안한다.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그녀에게 남자가 던지는 단 한마디, "일어나 가자!"(19:28)

사사기는 이렇게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그러면 누가 그녀를 애도하랴. 그녀들을 위한 새로운 세상은 어떻게 열어야 하는가.

어머니의 집

사사기에 이어지는 룻기에서는 여성들이 주인공이다. 그러나 룻기의 여성들 역시 부재와 결핍으로 처절하다. 과부가 된 세 여인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룻기의 하나님은 그 여성들을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열겠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애도성을 잃지 않으며, 문지방 너머로 돌아온 그녀의 몸을 마주하는 곳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오미의 집은 어떤 집일까. 그것은 사사기의 아버지 집과 대조된다. 나오미의 가정에는 아버지가 없고 남자가 없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그녀들은 더 이상 아버지를 찾지 않고 아버지 집을 욕망하지 않는다.

먼저 나오미의 집 공간에서는 모든 여성이 내 딸들이요 내 벗이 된다. "내 딸들아!" 그리고 세상이 유린하도록 내어 버린 딸들의 이름을 불러 준다. '나오미야, 오르바야, 룻아!' 인종이 달라도 선민사상을 뛰어넘는 차별 없는 여성들의 연대를 이루는 공간이다.

두 번째로 나오미는 자신을 따라오는 딸들에게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룻1:8)고 한다. 왜 어머니의 집이어야 하는가. "내 딸들"이 돌아가야 할 곳은 "사사기의 아버지 집"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녀의 시대에 대한 저항 정신과 새로운 가치의 구현이 얼마나 철저하고 전복적인지를 보여 준다.

세 번째로 나오미의 집은 '다정한 말'이 회복되는 공간이다. 그녀들은 사랑에 대한 충만한 감사를 표현하며 서로가 축복을 빈다. 그들은 서로를 할퀴거나 투사하지 않고 도리어 '축복받아야 하는 존재'요 '내가 책임져야 할 내 사랑'으로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한다.

네 번째로 눈물이 회복되고 '애도성'으로 서로를 끌어안는 공간이다.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 높여 울며"(룻1:9) 그들은 모두 문지방에 내쳐진 몸들을 서로 보아 주었고 서로 보듬고 사랑한다.

이처럼 룻기는 딸들에게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울타리 되어 주고, 아버지 집 대신 어머니 집을 제공하고 안내해 준다. 이것이 나오미가 남자 없는 결핍과 고통의 공간에서 한 일이다. 이토록 위대한 여인을 어찌 존경하고 믿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아버지를 잃은 세상에서 원망과 분노의 불을 지피는 대신 어머니의 사랑의 크기를 키우고 어머니 집을 하나님나라로 세우는 일에 주력한다.

이렇게 여성들의 사랑과 연대로 이루어진 집은 더욱 확장되어 룻과 보아스라는 새로운 여자와 새로운 남자의 연대를 통해 다정한 말이 오가는 에덴으로 열매 맺는다.

성서가 꿈꾸는 어머니의 나라는 폭력의 취약성 앞에서 애도성을 회복하는 공간이다. 애도란 단순히 상대방의 슬픔을 이해하고 해소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슬픔의 눈물을 버리려 하지 않는 노력에서 오는 힘이다.

"우리는 취약성이 사라지길 바랄 수 없다. (중략) 취약성을 경청하고 심지어 취약성을 지켜야 한다." (버틀러, 58)

오늘날 사사기 같은 마지막 때에 닫힌 문 앞에서 함께 울고 함께 고백하는 자 되어, 새로운 친밀한 관계를 꿈꾸며 일구어 가는 작은 연대의 몸짓으로도 충분하리라!

이미경 / 감리교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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