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가 '사건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신앙고백과 응답을 신학적 접근과 표현으로 정리합니다. 매달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칼럼을 게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신학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제는 '사랑과 폭력'입니다.

2019년 4월 27일,

전남 무안군 초등학교 근처 농로에서 여중생이 살해당했다. 다음 날 아이는 머리에 비닐봉지를 쓰고, 발목이 벽돌이 가득한 마대 자루에 묶인 채 광주의 한 저수지에서 떠올랐다. 새아버지는 세 번이나 저수지에 다녀갔다. 소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는 경찰서를 찾았다.

"동생이 죽기 전 엄마 아빠가 열흘 이상 집에 안 들어왔어요. 그런데 새벽에 엄마한테 전화가 온 거예요."

의붓 언니가 말했다.

"엄마가 엄청 힘들다고 했어요. 그 사람은 맨 정신으로 엄마를 때리고 동생을 때리고 그러니까… 애를 어떻게 해 버리면…. 동생한테 메시지를 보냈어요. 저 사람이 너한테 해코지할 수도 있고 위험하니까 경찰에 신변 보호 요청을 해라. 그래서 신변 보호가 된 줄 알았어요."

소녀는 언니의 말을 듣고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이를 취소했다.

"나한테 그러더라고요. '아빠, 언니가 신변 보호 조치 하라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그런데 이미 언니 말을 듣고 했는가 봐요. 그래서 제가 '설마 뭐, 엄마, 아빠가 너를 죽이겠냐? 야, 그냥 취소해 버려.' (중략) 그들도 부모인데, 어린 딸을 해코지하겠냐. 그렇게 생각했어요."

- SBS, '궁금한이야기Y' 인터뷰 중

부모의 이혼, 친아버지의 폭행, 연이은 새아버지의 학대와 성추행, 엄마의 방임. 그사이에서 소녀는 두 집을 오갔다. 또래 친구들은 스마트폰으로 친구와 카카오톡을 하고 셀카를 찍고 BTS 노래를 듣고 학원 때문에 엄마에게 투정 부렸다. 소녀는 스마트폰으로 새아버지에게 음란메시지를 받고 언니에게 두려움을 호소하며 경찰에 신고하고 살해 현장에 끌려 나갔다.

10대의 소소한 일상은 허락되지 않았다. 소녀는 계속해서 자신의 위험을 알려야 했다. 살아 있는 한, 살기 위해서. 의붓 언니에게, 자신을 때린 아버지에게, 그리고 경찰에게. 그러나 언니는 무력했고, 아버지는 안일했으며, 엄마는 자기 안위가 더 중했다. 경찰은 더디고 미흡했다. 접수된 사건은 수많은 아동 학대, 빈번한 아동 성범죄 중 하나였다.

"동생이 엄마를 너무 좋아해요. 내가 물었어요. 너 왜 처벌 안 원한다고 했어? 그랬더니 엄마가 슬퍼할까 봐… 그러더라고요."

소녀는 간만에 걸려 온 엄마의 전화에 나갔다. 엄마에게 수면제가 든 음료수를 받아든 소녀는 엄마 등 뒤에서 목이 졸렸다. 폭력과 강간에 노출된 소녀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알렸다. 발목에 묶인 끈을 풀고 자신의 몸을 힘껏 떠올렸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소녀의 죽음을 두고 '의붓딸 살해 사건, 계부에 의한 살해 사건'으로 명명하며 아동 학대, 아동 성범죄,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논의가 불거졌다. 분명 긴요한 사안들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이 있다. 사회에서 아이가 존재해 왔던 방식과 폭력의 양상이다. 2006년생 여자아이가 가정과 학교 그리고 공적 권력의 테두리 안에서 매 맞고 발가벗겨지고 끌려 나갔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이, 호모 사케르(Homo Sacer)가 되어 죽음 앞에 내던져졌다.

고대 로마에서는 범죄자로서 제물로 바쳐질 수 없으나 누구나 죽여도 되는 자를 호모 사케르라 불렀다. 그는 공동체의 법적, 종교적 질서로부터 추방된 자로서 모든 사회질서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나, 심지어 죽음도 의미가 없다. 사회 안에 있으나 배제된 자는 벌거숭이 삶을 살다가 아무런 보호나 구속도 없는 상태에서 죽어 가는 것이다. 하여 천덕꾸러기가 되어 버린 소녀의 소리에 누구도 응답하지 않았다. 소리가 묻히고 존재를 박탈당한 자는 죽음으로 말을 건넬 수 있었다. 나 여기 있다고 말이다.

아버지라 불리는 남성은 애초에 소녀의 소리를 틀어막았다. 소녀는 자신의 성적 욕망과 분노를 충족해 줄 대상일 뿐,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 밑바닥에서 손쉽게 여성을 만나고 결혼이라는 느슨한 규제 안에서 최소한의 책임조차 방기한 남성도 소녀와 마찬가지로 호모 사케르였다. 말초적 욕망과 쾌락, 폭력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남성은 사회 안에 있으나 사회 밖으로 내던져진 자다.

그에게서 타인에 대한 배려나 관계에 대한 진정성은 찾을 수 없다. 소녀는 성적 충동의 제물이거나 분풀이 상대이자 언제든 잔악한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소유일 뿐이었다. 육체만 남은 사랑은 해소되지 않는 욕구와 비틀린 욕망이 되어 타인을 집착하고 착취한다. 이것은 엄마의 생존 방식이기도 했다. 그녀는 딸을 내어 주는 극단의 방식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고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의 야만적 행위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지닌 이들에게 혐오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구경거리로 전시됐다. 전문가들은 가정 폭력과 아동 성범죄를 지적하면서 가족의 울타리를 견고히 세우고 사회적 안전망을 철저히 시행할 것을 촉구했다. 많은 정상인들이 수긍했다. 그럼에도 폭력, 성적 타락, 왜곡된 관계성을 가족 이데올로기와 공권력으로 바로잡을 수 있을까. 의구심이 고개를 든다. 인간 사이의 넘어설 수 없는 경계, 그 불가능한 일을 시도조차 하지 않고서 말이다.

할 수 없는 일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예수가 그랬다. 제국의 식민 지배, 예루살렘성전의 몰락,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을 목도한 유대인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소리를 들어 주지 않았고, 심지어 율법과 제의, 권력과 제도가 자신을 지켜 줄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음에 넘겨주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파국을 예견하고 경험하며 되새겼다.

그 와중에 죄인, 병자, 세리, 창녀. 밖으로 내쳐진,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이들과 어울려 밥을 먹고, 바람 부는 언덕에서 수다를 떨며 예수는 그렇게 하나님과 인간의 거리를 좁혀 갔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했으며 개인의 무너진 존엄을 세우려 했다. 경계 밖에서 그들과 함께 그들 속에서 하나가 되어 갔다. 그곳엔 이유 없이 당해서 억울한 순둥이 무지렁이들만이 아니라 분노하고 절망하여 욕망으로 비틀어진 살기 가득한 이들도 많았다.

예수는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가 내 형제냐고 물었다. 그는 율법과 전승이 보증하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지탱하기보다는 그것이 담보한 허상을 과감히 깨뜨리는 편을 택했다. 그것만이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재생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조차 외면한 이들에게 바로 너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자리, 누구이든 간에 묻혔던 소리를 되찾아 말을 건네고 소통할 때 이들이 하나의 귀한 존재로 거듭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섭리인 것이다.

참혹한 뉴스를 대하면서 우리는 그리고 교회는 가족과 율법, 제도를 넘어 예수의 과감한 도전을 실현하고 있는가. 존재에 주목하는 사랑, 경계를 넘어서는 구원을 이뤄 내고자 발버둥 치고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불행하게도 정상 가족의 울타리를 더 공고히 하며, 더 세련된 방식으로 경계 안에 있는 이들의 표본을 재생산하고 있지는 않은가. 관계 회복의 동력인 사랑을 잃어버린 채 구원을 구호로 나열하고 있지는 않은가. 절망과 우려가 교차한다.

할 수 없는 일을 한다는 것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매 순간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통을 믿는 이들이라면, 이것을 사도의 신앙으로 고백하는 이들이라면 지금 여기에서 어리석은 일을 기꺼이 이어 가는 무모함이 요청된다. 불가능한 사랑이 가능한 것은 예수가 이미 그 길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소녀의 주검을 기괴한 구경거리가 아니라 시대의 징조이자 말 건넴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늦었지만 열두 살 아이가 우리 안에 존재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아이의 물음에 답해야 할 것이다.

송진순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 사건과신학팀, 이화여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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