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가 '사건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신앙고백과 응답을 신학적 접근과 표현으로 정리합니다. 매달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칼럼을 게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신학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제는 영화 '기생충'입니다.

*이 글에는 영화 기생충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함께 본 사람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사람은 반지하방을 살아 본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박 사장(이선균 분)이 언급한 넘지 말아야 할 선에 뒤섞인 감정을 표현하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선을 넘는 냄새에 관심을 갖기도 했고, 박 사장의 어린 아들 다송(정현준 분)에게 등장하는 유령과 기이한 행동에 대해서 말하기도 했고, 또 아무리 살기가 어렵다고 그렇게까지 참혹한 짓을 해서야 되겠느냐고 기택(송강호 분)네 가족의 행태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영화이기에 보는 사람마다 각자 나름대로 즐길 필요가 있다. 공감이어도 좋고, 반감이나 거부감이라도 얼마든지 좋다. 그리고 영화가 표현하고 있는 수많은 은유적 기호들 중 하나를 가지고 생각을 이어 가는 것도 더없이 좋은 일이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고 또 1000만 관객이 관람하면서, '기생충'은 이제 우리들의 공통 관심들을 전달하는 언어가 되어 있고 우리들의 생각을 나누며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새롭게 열린 마당이 되고 있다.

나는 이 영화를 우리 시대의 삶의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라고 본다. 예술적으로 그리고 영화적으로 우리 시대의 삶이 감추고 있는 실상을 드러내는 데 집중하고 있는 영화다. 이런 영화를 향해 문제를 말했으니 해결책까지 달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이 영화는 끝까지 문제를 말할 뿐 아무런 해결책도 주지 않는다. 문제를 문제로 느끼게 하는 데 목적이 있을 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기택의 아들 기우가 돈을 왕창 벌어서 그 집을 사고 말테니 지하실에 숨어 있던 아버지는 그때 걸어서 나오기만 하면 된다는 각오 같기도 해결책 같기도 한 말을 한다. 하지만 이는 실현 불가능한 말이다. 아니 그 엄청난 사건을 겪고 나서도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음을 증명하는 말이다. 당할 만큼 당하고도 문제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고, 그것이 이 영화가 다루는 문제의식이다.

먼저 '기생'(parasitism)이라는 말을 생물학적으로 생각해 보자. 생물학적 정의에 의하면, '기생'은 '공생'(symbiosis)의 반대말이 아니다. 오히려 기생은 공생의 다양한 방법들 가운데 하나다. 생물체들이 함께 살아가면서 이익을 주고받는 관계에 따라서 공생의 방식을 분류하는데, 쌍방이 모두 이익이 되는 상리공생, 함께해서 한쪽만 이익을 얻는 편리공생, 같이 살면 한쪽에만 손해가 가는 편해공생, 그리고 명백히 한쪽에는 손해가 다른 한쪽에는 이익이 생기는 공생관계를 '기생'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공생 방식이 언제나 고정 불변하게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관찰하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그리고 다양한 환경 조건에 따라서, 공생의 형태가 변하기도 하고 달리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한쪽에만 이익이 되었다가 다른 때에는 반대편에 이익이 되기도 하고, 서로 이익이 되었다가도 서로 손해를 보는 관계가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인간 사회에서도 기생이라는 공생 방식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고정 불변하는 관계 형식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형식과 사람 사이의 관계 형식이 그 어느 때보다도 특징적으로 기생의 관계로 보인다는 것이 이 영화의 문제의식이다.

치열한 후기 자본주의의 경쟁 사회를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이 사회가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회라는 믿음을 감히 버리기 쉽지 않다. 어쨌든 공존하고 공생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강변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함께 사는 방식이 가장 나쁜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관계가, 높은 자와 낮은 자의 관계가, 주류와 주변의 관계가, 지배나 독점이나 소외나 불평등과 같은 표현들보다도 더 지독하게 서로를 무시하고 무관심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기생의 관계로 변하고 있음을 이 영화가 폭로하고 있다. 우리의 먹고사는 방식이, 우리가 서로 관계하는 방식이 얼마나 문제인지 보여 주려고 이 영화는 모든 시각적 과장을 아낌없이 동원하고 있다.

이 영화가 말하는 기생의 삶의 형식은 수직적이고 소통 불가능한 공간 배치에서 이미 드러나기 시작한다. 찾아가려면 한없이 올려다 보며 계속 걸어 올라가야 하는 박 사장의 언덕 위의 대저택. 그리고 취객이 창문을 향해 방뇨를 하고 싶은 곳, 박 사장네 집을 탈출한 기택의 가족이 비를 쫄딱 맞으며 한없이 걸어 내려와야 하는 곳, 높은 곳으로부터 흘러내린 오폐수가 역류하여 솟구치는 곳, 기택네 가족이 사는 반지하방이다. 둘은 대한민국 서울의 하늘 아래 같이 살지만, 전혀 소통 불가능하다. 둘 사이에는 휴전선 비무장지대보다 더 견고한 장벽이 가로 놓여 있다. 하늘에 비가 내리면 박 사장네 가족에게는 신선한 공기와 파티하기 좋은 날의 약속이 되지만, 기택네 집은 침수의 위험이요 가난한 곰팡내가 더욱 짙게 우러날 가능성이다. 두 가족은 서울에 함께 살지만, 전혀 다른 하늘과 땅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박 사장 저택의 비밀스러운 구조는 기생의 관계가 바탕에 깔고 있는 구조를 또 한 번 구체화한다. 그 저택의 지하는 전에 살던 사람이 언제든 도망치거나 숨을 공간으로 만들어 놓은 비밀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주인인 박 사장 가족은 이 지하의 존재를 모른다. 오직 한 사람, 이전 주인 때부터 가정부를 하고 있던 또 다른 기생충 가족만이 이 지하의 존재를 알고 그 지하를 지키며 살고 있다. 그 지하는 박 사장네 가족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장소이고, 문광(이정은 분)과 그 남편의 입장에서 보면 또 다른 기생충이 스스로를 유폐한 공간이다. 그리고 그 기생충은 안전한 자신의 지하 세계를 위해서, 박 사장과 그 가족을 끝까지 '리스펙트'하면서 스스로 존재를 부인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지하 세계의 존재는 박 사장의 아들 다송에게만 유령으로 등장한다. 기택네와는 다른 기생의 형식이다. 유령이 되고 외계인이 되고 좀비가 되어 버린 기생의 형식이다.

박 사장네 가족이 아들의 생일 파티를 위해서 집을 비우고, 기택네 가족이 몰래 저택의 삶을 훔쳐 살던 그 밤, 갑작스럽게 박 사장네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한 순간에 넒은 거실은 두 개의 넘어설 수 없는 공간으로 분할된다. 저택의 정원이 내다보이는 소파 위에 누운 박 사장 부부에게 거실과 소파 위는 낭만적 사랑의 공간이 되고,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몸을 감춘 비정상적으로 넓은 테이블 아래 공간은 기택네 가족이 벌레처럼 기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감추어야 하는 공간이요, 아무런 반응도 못하고 박 사장이 하는 자신들에 대한 평가를 엿들어야 하는 공간이다. 그 넓은 거실을 분할하면서, 박 사장네 가족과 기택네 가족을 갈라놓고 있는 분단선, 그것이 바로 기생의 관계가 지배하는 삶의 가장 구체적인 현실이다. 박 사장이 강조하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의 실체도 바로 여기에 있다.

기택의 가족에게 그 선은 한바탕 저택의 삶이 한순간 비참한 벌레의 삶이 되는, 꿈과 현실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선이다. 그 선은 박 사장네의 삶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저택의 삶이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허황된 꿈을 간직하게 하는 타협과 공모의 선이며, 동시에 박 사장네 삶은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엄청난 좌절을 겪으며 벌레처럼 기어야 하고 다시 반지하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끊임없는 추락을 경험하는 선이다.

이 기생의 관계가 꿈꾸는 공존의 꿈은, 박 사장네의 일요일 파티 장소에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기택이 공존의 가능성을 표명하는 순간은 곧 선을 넘는 순간이다. 박 사장으로부터 "당신은 내가 돈 주고 산 사람이야. 그러니 계약대로 돈 받은 만큼 일하라"는, 비인간적인 냉혹한 요청 앞에 직면하는 순간이요, 또 다른 기생충으로부터 왜 숙주를 존중하지 않고 이 안정된 기생의 관계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느냐는 공격을 동시에 받는 순간이 된다. 그 순간 숙주와의 공존의 꿈은 피로 얼룩진 참극으로 변하고 만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생충이 된 세계, 서로가 서로를 불쾌하게 선을 넘는 냄새로 그리고 자신의 삶을 빼앗는 유령이나 좀비나 외계인처럼 바라보게 된 세계, 이 기생적 공생 관계가 사람다운 공존의 관계로 변할 수 있는 길을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영화는 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섣불리 올바른 공생과 공존의 길을 말하려 했다면 아마도 지금과 같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더불어 숲'이 되어 우리의 삶을 지켜 나가야 하는 책임은 우리 삶의 참담한 현실을 피하지 않고 직시할 수 있는 사람, 문제의 깊이를 인내하며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있다고 본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세상의 문화와 삶의 방식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리고 에베소서 6장에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싸워야 하는 싸움의 실체를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뿐만 아니다.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는, 배불리 먹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살리고 모두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먹고 사는 새로운 방식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 이런 가르침을 물려받은 우리는 이 시대에 어떻게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전할 것인가. 기생의 관계가 함께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된 이 시대에 우리가 바라고 꿈꾸는 새로운 삶의 세계에 관해서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까. 아마도 냄새로, 유령으로, 외계의 언어 같은 모스부호로 선을 넘어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신호들 안에 길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 신호들 안에 감춰진 메시지를 해독해 내는 일, 그래서 그 신호들이 우리를 향한 간절한 호소의 메시지가 되는 그날, 우리는 새로운 삶의 길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양권석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 사건과신학팀 위원장, 성공회대학교

*이 글은 '사건과 신학' 7월 전체 취지문입니다. 더 많은 원고를 홈페이지(바로 가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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