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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과 신학자들이 기생충 아닌가
[사건과 신학] 영화 '기생충'과 가난한 사람들
  • 김근수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9.07.30 11:53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가 '사건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신앙고백과 응답을 신학적 접근과 표현으로 정리합니다. 매달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칼럼을 게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신학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제는 영화 '기생충'입니다.


문화 소양이 빈약한 나는 영화 '기생충'을 평가할 능력이 없다. 영화 보고 떠오른 느낌을 신학적으로 생각할 뿐이다. 우선 몹시 불쾌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욕당하고 있다는 비명이 먼저 다가왔다. 가난한 사람들을 발가벗겨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영화 기생충은 성서신학자 입장에서 보면 예수 메시지를 무시하는 것 같고, 해방신학자 입장에서 보면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 같았다.

영화 기생충에서 가난한 사람들보다 종교인과 신학자들의 모습이 내게 먼저 떠올랐다. 부자들의 더러운 모습을 애써 감추어 주고 가난한 사람들의 부끄러운 장면을 온 세상에 까발리고 조롱하는 짓 말이다. 우리 그렇게 살면 안 되는데 말이다. 진짜 종교인과 진짜 신학자를 나는 지금껏 별로 만나 본 적이 없다. 나는 신학자라는 사실이 너무 부끄럽다. 내가 위선적인 신학자라는 사실이 너무 슬프다. 종교인과 신학자들이 기생충 아닌가. 계단을 내려가는 게 종교인과 신학자 아니던가. 종교인과 신학자는 자기 계급을 어서 배신해야 한다. 예수도 사실 계급을 배신한 사람이었다.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

성서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이 몇 가지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예수가 한 번도 비판하지 않았던 것이 그중 하나다. 가난한 사람들의 약점이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의 약점을 정말 몰랐을까. 그렇지 않다. 부자들을 예수가 한 번도 칭찬하지 않았던 사실 또한 이해아기 어렵다. 부자들에게 긍정적인 모습이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예수가 부자들의 장점을 전혀 몰랐을까.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한 번도 비판하지 않았고 부자들을 한 번도 칭찬하지 않았다.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수수께끼보다 신비에 더 가깝다.

욥 친구들은 욥을 비판했지만 욥 입장에서 그와 함께 하느님께 기도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비판하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들 입장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느님께 기도했다. 욥 친구들이 욥을 보는 관점과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을 보는 관점은 같지 않았다. 영화 기생충은 예수 마음보다는 욥 친구들의 처세에 더 가깝다.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일과 부자를 비판하는 일은 예수에게 둘이 아니고 하나다.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일과 부자를 비판하는 일은 구분되지만 분리될 수 없다. 몸과 마음도 구분되지만 분리될 수 없다. 몸은 드러난 마음이요, 마음은 감추어진 몸인 것처럼 말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의 불의가 드러난 진실이요,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욕망이 감추어진 진실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지만 부자를 비판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를 절반만 아는 사람이다. 부자들을 비판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부자들이 천국 갈 가능성을 사실상 봉쇄해 버렸다. 영원한 생명을 묻는 부자에게 예수는 조직신학적 답변을 하지 않고 재산 전부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라는 엉뚱한 요구를 했다. 재산 10% 또는 절반만 팔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다. 바늘구멍은 넓히고 낙타는 줄이려는 어용 신학자와 종교인들이 널려 있는 교회·성당에 우리가 다니고 있다. 한국 개신교 일각에서 유행하는 낙수효과니 청부론이니 하는 요설은 예수와 아무 관계없는 이야기다.

해방신학과 가난한 사람들

해방신학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약점을 모르지 않는다. 해방신학자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실제로 가장 많이 속아 본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해방신학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포기하고 떠날 만할 이유가 수천 가지는 넘을 것이다. 예수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치유니 기적이니 빵 나눔이니 온갖 정성을 다 했지만, 가난한 사람들 대부분 예수를 훌쩍 버리고 멀리 떠나갔다(요한 6:66).

엘살바도르 유학 중, 스승 소브리노와 가장 자주 토론한 주제를 소개하고 싶다. "가난한 사람들은 신학자가 될 수 없고, 신학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다." 신학의 아픔과 그리스도교의 구조적 모순을 가장 정확히 나타내는 말은 혹시 아닐까.

가난한 사람들은 전문 신학자가 되기 위한 기나긴 과정에 필요한 돈을 감당할 수 없다. 어쩌다 신학자가 된 사람들은 교회나 대학교에 대부분 자리 잡아 가난한 사람으로 살고 있지 않다. 빈민층 출신 신학자는 개구리 올챙이 시절 기억하기 어렵다. 가난하지 않은 신학자가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고 나선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 고통과 희망을 교회에서 밝히기 쉽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과 신학자들은 멀리 떨어져 있고 서로 냄새 맡지 못하고 산다.

가난한 사람들과 신학자들은 계단에서 마주칠 일도 별로 없다. 가난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저항의 힘과 문화적 능력이 신학자에게 제대로 포착되기도 쉽지 않다. 대부분 신학자는 교회를 지키는 파수꾼으로 산다. 교회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먼저 생각하는 신학자가 얼마나 있을까. 부자들의 비서 노릇하며 밥벌이하는 신학자와 종교인은 또 얼마나 많은가. 신학자는 부자들의 변호사인가 가난한 사람들의 대변인인가.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잘 모르는 종교인과 신학자들이 수두룩하다.

그리스도교와 가난한 사람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예수처럼 한다면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가 예수보다 더 잘한다면, 혹시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스도교가 예수보다 더 잘할 가능성은, 내가 보기에 없다.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영원히 설득하지 못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가난한 사람들을 이용해 먹는 것이 그리스도교가 숨긴 목표 아닐까.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부자들에게 고개 숙이고 떡고물 얻어먹는 짓 말이다. 그리스도교 종교인과 신학자들이 집단으로 부자들에게 무릎꿇고 있다. 십자가는 신도에게 떠맡기고 부자들의 뒤를 쥐새끼처럼 따라가고 있다. 종교인과 신학자들이 그리스도교를 앞장서서 망가뜨리고 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비판하지 않았고 부자들을 비판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로왔고 부자들에게 무자비했다. 해방신학자들도 마찬가지다. 해방신학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저항과 해방 능력에 특히 주목했다. 가난과 불평등이 죄보다 더 심각한 주제임을 알아챘다. 가난은 경제문제가 아니라 신학 문제임을 보았다. 가난과 가난한 사람들을 분리하면 안 된다는 진실을 알아냈다. 생각은 두뇌로 하지 않고 발로 한다는 사실도 찾아냈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내 생각을 결정한다. 종교인과 신학자들이 서 있을 자리는 가난한 사람들 곁이다.

김근수 / 가톨릭 평신도 신학자, 해방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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