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가 '사건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신앙고백과 응답을 신학적 접근과 표현으로 정리합니다. 매달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칼럼을 게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신학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주제는 '3·1 운동 100주년'입니다.

삼일운동 이후 백 년이 지났다. 신학교 시절, 한국교회사 시간에 삼일운동 당시 전체 인구 1%에 지나지 않던 기독교인 비율에 비해 삼일운동에 참여했던 기독교인의 비율은 30%에 달했다고 들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에게는 "대한 독립 만세"라는 구호가 자신들의 신앙에 아무런 걸림이 없었던 모양이다. 참기독교인이 참조선인이라는 믿음과 조선의 독립이 결박을 풀고 자유하게 되는 신앙 체험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서양 종교였던 기독교의 힘을 빌려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고자 했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친일보다는 친미, 친유럽이 더 조선의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식민과 전란의 시대에서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독립의 의지는 당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었다. 삼일운동은 그렇게 비폭력 해방운동으로 전국에 번져 갔고 일본 제국은 철저한 폭력 진압으로 맞섰다. 강력한 폭력을 전시하는 방법밖에는 들불처럼 번지는 물결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의 방법에 폭력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제국은 더욱 강력한, 그러나 달콤한 책략으로 피식민인 마음을 물들이고, 분리시키고, 그리고 지배하기 시작했다. 혹자들은 한국인의 민족성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살아가고 강한 자에게 아부하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깊고도 깊은 친일의 역사는 한국인들 심성에서보다는 일본 제국의 교활함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피식민인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확실하게 착취하려면 권력과 부를 불균등하게 나누어 그들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을 일본은 알고 있었다.

식탁의 부스러기라도 나누어 주며 그것을 놓고 서로 싸우게 하는 것이 고전적인 제국의 통치 방법인 'Divide and Rule'(분리하여 지배함)이다. 얼마나 더 교활하고 약삭빠르게 일본의 이익에 봉사하느냐에 따라 권력과 부가 나누어지는 방식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효율적으로 한민족을 분열시켰다. 일단 몇몇의 집단을 분열되어 그 집단의 정체성이 생겨나면 그 이후로 그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은 자신의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경향이 있다. 더 큰 대의와 명분이 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의 이익과 결부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예수 시대의 갈릴리는 바로 삼일운동 이후의 한국 사회와 비슷했다. 로마는 하나님 신앙으로 똘똘 뭉쳐 있는 골치 아픈 유대인들을 다스리기 위해 그들을 세분하여 분리시켰다. 먼저 로마의 이익에 충실히 복종하는 대신에 로마의 권력을 나누어 가진 분봉왕들이 있었다. 헤롯 아켈라우스, 헤롯 필립, 헤롯 안티파스가 그들이었다. 그리고 그 분봉왕들을 충실히 따르는 유대인들이 있었다. 또한 당시 예루살렘성전을 중심으로 성전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일정 부분 로마의 요구를 들어 주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독계 제사장 집단들과 그들의 이익을 중심으로 야합했던 유대인들이 있었다. 복음서는 이들을 사두개인이라 칭한다.

그리고 당시 분봉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 집단들과 성전 집단들을 비판하면서 미래의 유대교를 이끌기 위해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곳곳에 퍼져있는 조직들을 활용하여 유대인들의 오피니언 리더로 부상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하여 지금까지 언급한 집단들이 결국에는 로마에 굴복한 친식민 세력이라 규정하고 그들을 심판하고 새로운 유대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믿는 무장 저항 세력들이 있었다. 그들을 젤롯이라 후대의 신약학자들은 이름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정치와 종교가 세속화했고 그것이야말로 타락이라 규정하고 광야로 떠난 집단이 있었다. 에세네, 또는 쿰란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생존을 위협받으며 식민 세력들에 착취당하는 민중들이 있었다. 이들은 마음 둘 곳 없이 여기저기서 봉기하는 무장 세력들에 자신의 삶을 위탁하거나 곳곳에 출몰하는 메시아(지도자)에게 희망을 찾는 사람들이거나 하루하루 연명하기 위해 먹을 것으로 주는 누구에게라도 충성을 바치는 가난한 자들이었다.

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의 모습은 종종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당시의 화석화한 성전 종교를 비판했지만 개혁하지는 못했고, 오병이어를 통해 몰려든 군중들과 뭔가 특별한 일을 계획하지도 않았고, 로마제국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지 않겠다고 했지만 저항하지도 않았고,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비판했지만 그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지도 않았다. 과부와 고아들을 사랑했지만 그들을 위해 당시 권력자들과 싸우지도 않았고, 미래를 설계하거나 새로운 정치, 즉 민주정치나 경제체제 등을 구체화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때론 예수는 우리 믿음의 대상이 되기는 하지만 삶의 모범이 되거나 현실 사회나 정치에서 따를 만한 인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위와 같은 상황을 생각하여 예수가 무엇을 했는지를 상상해 보면, 이때까지와는 좀 더 다른 인물로 나타난다. 예수는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고, 어느 누구의 것을 빼앗아서 다른 이에게 주려 하지도 않았다. 자기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었지만 그를 통해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을 따르는 정치집단도, 나라도, 재물도 취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누구나 누구에게 사랑과 희생을 베풀어야 됨을 가르쳤다. 자신들의 이익에 눈이 멀어 뿔뿔이 흩어져 버린 유대인들, 또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가 되어야 하는지 가르쳤다. 남의 입에 있는 음식을 집어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기 바쁜 사람들에게 대의와 명분, 즉 신이 주는 대의와 명분에 합당해야 함을 가르쳤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으로 과연 누가 지금 우리를 분열시키고 있고, 누구 우리가 맞서야 할 악인지를 보여 주려 했다.

삼일운동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기독교라는 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더욱 뜨겁게 하는 신의 소명 앞에 두려움 없이 나서는 믿음이 아니었을까. 여러 다른 종교나 이념에 휘둘리지 않고 함께 연대하는 용기와 희생이 그들에게 있지 않았을까. 예수가 보여 주고자 했던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살아내려는 용기가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독립을 원한다!"가 아니라 "대한 독립 만세"를 통해 이미 그 마음에 온 신의 소명과 자유를 외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삼일운동은 예수 운동의 또 다른 모습일 수 있다.

또는 삼일운동은 당시의 민중들이 예수를 기억했던 또 다른 방식이었다. 가장 정치적이면서도 이념적이지 않았고, 하나님나라의 선명한 임재였지만 전혀 종교적이지 않았던 삼일운동. 바로 예수 운동이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토록 종교적 기득권을 가진 이들은 예수를 미워했고 등을 돌리지 않았던가. 삼일운동을 기억하는 방식은 또 다른 새로운 운동을 준비하는 것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정치적이지만 이념적이지 않고 하나님을 말하지만 종교적이지 않고 자신이나 자신의 집단의 이익이 아닌 역사의 부름에 충실한 운동이 우리 안에 살아날 때에 우리는 다시금 삼일운동의 뜨거운 마음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한수현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 사건과신학팀, 감리교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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