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가 '사건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신앙고백과 응답을 신학적 접근과 표현으로 정리합니다. 매달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칼럼을 게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신학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제는 '사월과 부활'입니다.

찬란한 봄, 꽃들의 향연을 바라보면서도, 깊이 새겨진 슬픔을 지울 수 없는 4월입니다. 산자락에 꽃이 붉게 물드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맺혔던 한이 터져 나온다 하고, 속절없이 꽃이 지는 광경 앞에서 수없이 쓰러져 간 젊은 죽음들을 떠올리는 우리의 4월입니다.

4월은 역설입니다. 더할 수 없이 찬란한 봄이지만, 아직 이르지 못한 봄입니다. 겨울과 여름, 어둠과 빛, 옛것과 새것, 죽음과 생명의 길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산천을 두고 겨루는 4월입니다. 어둡고 추웠던 과거가 봄을 두려워하며 그 잔인한 발톱을 드러내는가 하면, 무수한 죽음들이 상처 입은 십자가로 서서 새 희망을 합창하는 계절입니다.

4월의 기억은 아픔입니다. 4월의 꽃은 억울한 죽음들이 미완의 꿈들을 피워 내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꽃을 보며 함께 울고, 꽃을 보며 함께 일어서는 것입니다.

부활은 빈 무덤이다

성서는 부활 이야기를 빈 무덤으로 전합니다. 십자가는 당대의 기득권 질서를 지키기 위한 최고의 법적 수단이었습니다. 십자가는 기성의 질서에 도전하는 어떤 위협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권력의 단호함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지배 권력을 향한 도전이 가야 할 마지막 종착지로 정해져 있습니다. 무덤도 다르지 않습니다. 무덤은 죽은 자의 공간입니다. 아니, 십자가에 죽은 예수의 무덤은 그보다 더합니다. 죽인 것도 모자라 깊숙이 유폐하여 가둔 감옥입니다. 행여나 죽은 자가 산 자를 향해서 말을 걸어오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당대의 지배 권력이 봉인을 쳐 철저히 가두어 놓은 공간이 바로 무덤입니다.

그런데 그 무덤이 비어 있습니다. 아니 무덤 안에 있는 것이, 이미 말문을 닫아 버린 죽음들이 아니라, 무덤 밖 사람들을 향해서 말을 전하는 살아 있는 목소리입니다. 무덤이 더 이상 죽은 자들의 공간이 아닌 것입니다. 무덤이 더 이상 어두운 침묵의 공간이 아닌 것입니다. 무덤 밖에 살고 있는 자들을 향해서 위로하고, 질문을 던지고, 도전하는 목소리를 끊임없이 내보내는 살아 있는 무덤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빈 무덤은 살아 있는 무덤이요, 무덤의 기능 상실입니다. 십자가와 무덤이라는 가장 강력하고도 치명적인 지배 수단의 기능 상실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와 무덤에 죽어 묻힌 자가 말을 하는 상황은, 폭압적 통치 권력의 끝을 말하는 것이며, 그 권력이 죽이고, 가두고, 유폐한 모든 목소리들이 다시 일어나 외치는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부활이라고 믿습니다. 십자가와 무덤을 통해, 죽이고 배제하고 까맣게 잊어버리게 만들려는 자들의 법과 질서와 가치가 무너지고, 십자가와 무덤이 살아서 말을 하는 그것, 곧 억울하게 죽어 간 자들이 다시 말을 하는 그곳, 그래서 우리가 억울하게 죽어 간 자들의 꿈과 희망을 이어 갈 결단을 하는 그 순간이 바로 부활이라고 믿습니다.

부활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래서 일시적으로 예수가 십자가 수난을 당했던 것이라면, 그것은 맥없는 희극입니다. 하느님이 들어 올리실 것을 알기에 자처해서 고통을 감당하신 것이라는 말에는 참을 수 없는 교만이 가득합니다. 아닙니다. 부활은 죽어서도 재갈이 물린 채 무덤에 갇힌 자들이 말을 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우리가 함께 화답하여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부활 같은 것이 어디 있냐?
이제 그만해라!"

성서에서, 빈 무덤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당황스러움과 공포였습니다. 십자가와 무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했던 그들에게, 남은 할 일은 적절한 장례 절차를 통해서 망자가 가야할 곳으로 고이 보내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무덤이 비어 있다니,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습니까? 죽어 있어야 할 자가 죽어 있지 않다는 것은 정말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십자가에 죽은 사람들이 어찌 예수만이었겠습니까? 이미 수많은 저항과 죽음들을 보았고, 수많은 무고한 희생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죽음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세상 질서를 보아왔던 것입니다. 오직 이긴 자만이, 오직 힘 가진 자만이, 목소리를 가진 세상에서, 죽은 자는 말없이 무덤 속으로 유폐되고 잊혀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도 그렇게 말없이 잊혀지고, 세상은 예전처럼 변함없이 돌아가게 될 것을 믿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이 빈 무덤의 소식을 전하는 자들, 예수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자들, 십자가와 죽음으로 끝난 게 아니라고 말하는 자들,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을 향해 "징글징글하다. 이제 고마해라!"라고 말했을 법합니다.

부활의 약속을 믿고
꼭 기억하겠습니다

부활이 어디 있나? 죽은 사람이 어떻게 말을 하나? 꽃은 꽃이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일 뿐,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꽃을 보며, 왜 죽어 간 이들을 생각하는 거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평생, 4월의 꽃 잔치 한복판에서, 기억하고 도전하고 다시 세우며 나아갈 것입니다. "이제 고마해라 지겹다!"라고 말하고 싶은 수많은 이들에게도, 부활의 믿음이 함께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이번 달은 '사월과 부활’이었습니다. 부활이 4월을 버리려 하고, 4월이 부활절을 밀어내는 형국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 있는 4월과 부활의 불협화음을 읽어 내고 싶었습니다. 서로 다른 시선을 통해서 소외되고 잊혀지고 침묵해 온 다양한 목소리들을 듣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많이 늦어버렸습니다. 4월이 다 가고 5월이 오는 길목에서, 뒤늦게 '사건과 신학'의 목소리를 전합니다. 때로는 계절을 보내고 조용히 앉아 깊이 성찰하는 그 시간이 더 귀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마음을 보냅니다. 부족한 생각들이지만, 함께 새기고 더불어 나눌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양권석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 사건과신학팀 위원장, 성공회대학교

*이 글은 4월 '사건과 신학' 취지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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