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가 '사건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신앙고백과 응답을 신학적 접근과 표현으로 정리합니다. 매달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칼럼을 게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신학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제는 '국가조찬기도회'입니다.

기도회를 왜 문제 삼느냐고, 지나친 비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국가조찬기도회'로 이름 붙인 그 연례행사가 거룩한 기도와 식탁의 남용이고, 오용이고, 모욕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전 판단이 끝난 일이었다.

독재 정권하에서 수많은 신자와 교회 지도자들이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눈물의 기도와 식탁을 나누고 있었다. 또 때로는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서 많은 신자와 목회자들이 심한 고문과 옥살이를 감당해야 했었다. 그때도 그들은 독재자를 찬양하며, 그 독재자와 식탁을 나누고자 달려갔던 사람들이다. 오월 광주의 시민들이 독재 정권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 쓰러져 가고 있을 때에도, 그리고 수많은 신자가 부활의 신앙을 품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고 있을 때에도, 그들은 학살자를 찬양하며 기도했고, 학살자와 식탁을 나누기 위해서 모였던 사람들이다.

사실은 이미 그때 끝난 일이었다. 1980년 8월 6일 롯데호텔 에메랄드룸,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둘러싼 23명의 목사가 함께 기도하는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했을 때, 이미 더 이상 용서할 수도, 두고 볼 수도 없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쿠데타 세력과 학살자를 고무 찬양 선동했고, 신앙의 양심도 최소한의 윤리적 판단과 도덕성도 헌신짝처럼 내팽개쳤었다. 1987년 6월 항쟁을 거쳐 민주화되는 과정에서 당연히 그들은 적폐요, 청산의 대상이었다. 1990년 성결교회의 한 목사님은 그들을 반란 방조 혐의로 대검찰청에 고발하기에 이른다. 고발장은 이렇게 적고 있다.

"어떠한 희생이 온다 해도 예언자적 사명으로 불의에 항거해야 할 기독교 목사들이 오히려 12·12, 5·17 등 쿠데타군의 만행을 고무 찬양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기도회를 개최, 전두환 장군이 정권을 찬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끝내 변화는 없었다. 23명의 목사 중 단 두 사람만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다고 한다. 그들이 강단에서 쉴 새 없이 말했을 '회개'를 그들 스스로 외면하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교회 권력과 정치권력이 서로의 필요성을 은밀히 나누면서 그 수치스러운 기도와 식탁은 계속되고 있었다. 다시, 그 국가조찬기도회는 보수 우익 정치 세력과 기독교 권력의 정교유착의 상징이 되고 있다. 역사 왜곡, 그 왜곡의 과정과 은밀히 결탁하고 있는 일종의 기독교 패권주의, 이슬람을 포함한 이웃 종교 혐오, 그리고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 여성 혐오와 차별 등의 혐의가 항상 그들과 함께하고 있다. 독재자 학살자를 마치 하느님이 보낸 사자처럼 찬양했던 그들에게서, 5·18 관련 망언과 세월호 관련 망언이 광범위하게 만들어지고 유포되는 것은 그들의 부패한 기도와 식탁의 논리에서 보면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는 결과다.

기도와 식탁의 회복을 위해

국가조찬기도회가 교회에 미친 가장 큰 폐해를 나는 기도와 식탁의 오용이라고 생각한다. 최영실은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 예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경청하는 자리다. 내 말이 무너지고 내 주장이 무너지고, 하느님의 뜻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자리다. 기도는 결코 나의 독단을 강변하는 자리가 아니다. 나의 권력을 위해서 하느님을 앞세우는 자리는 더더욱 아니다. 권력자의 권력을 이용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파는 기도라면, 그 자체가 이미 수많은 진실한 기도를 조롱하고 농락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향한 모욕이다.

식탁은 또 어떠한가? 적어도 신자라면, 기도와 함께 식탁을 나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안다. 출애굽 해방의 신비가 서린 그 식탁이다. 예수와 제자들이 나눈 마지막 만찬의 기억을 담은 식탁이다. 모든 억압과 차별의 질서를 넘어 유다인도 이방인도 없는, 주인도 종도 없는,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차별도 사라진 세계를 꿈꾸는 식탁임을 어찌 모를 수 있는가. 하지만 그들의 식탁은 배제와 차별의 권력을 탐하는 식탁이었고, 이집트의 폭군을 찬양하고, 억압적 종교 권력을 지속하려는 야합의 식탁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의 밥상을 짓밟는 식탁이었다.

무너진 기도와 식탁의 의미를 다시 보여 주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그들에게 멈추라고 말하는 것이다.

종교 자유를 차별의 자유로 말하지 말라

또 한 가지 우리를 참담하게 하는 것은, 그들이 국가조찬기도회를 '종교 자유'를 왜곡하고 선전하는 자리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촛불을 불러온 부패하고 타락한 권력을 비호하고 찬양하기에 급급했던 그들이, 정부를 향해 적폐 청산에 매달리지 말라고 주문하는가 하면, "정부는 교회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거나 억압하지 말고 오히려 교회의 역할을 원활하게 펼칠 수 있도록 교회 생태계를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라고 대통령을 훈계하면서, 차별금지법은 역차별을 불러오는 것이니 입법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사실상 겁박하고 있다(2018년 소강석 목사의 국가조찬기도회 설교문을 보라).

정부가 교회의 고유 영역 곧 종교 자유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고 한다. 자신들의 종교적 망발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차별금지법은 생각도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종교의자유는 원하는 신앙을 가지고 실천할 자유이기도 하지만, 특정한 신앙형태를 강요할 수 없다는 원칙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이 종교의자유가 정교분리의 원칙과 결합한다면, 그것은 국가가 다양한 다른 사람들을 희생해 가면서, 특정 종교나 한 종교의 특정 해석이나 가치 이해를 선택해서 보호해서는 안 된다는 법적 원칙이다.

하지만 국가조찬기도회로 모인 그들의 종교적 자유는, 그들이 가진 특정한 신학적 관점과 해석을 절대화할 수 있는 자유이며, 다른 사람을 저주하고 정죄하고 배제할 자유이며, 성적·종교적·문화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는 자유다. 교회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그들의 주장은 종교적·성적·문화적 선택은 시민권의 영역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결국 이들이 말하는 종교 자유는 차별의 자유이며 스스로 종교 자유를 없애는 자유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모든 판단의 권력을 자신들이 전체주의적으로 독점할 때만 실현 가능한 자유다. 그래서 저들이 한 도시 혹은 한 나라를 완전히 기독교 도시나 기독교 국가로 만들어 보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복음은 세상 권력에 '맞서는' 수단일 수는 있어도 세상 권력을 '쟁취하는' 수단은 결코 될 수 없다. 권력 욕망의 도구가 된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반역이다. 나와는 다른 종교적·성적·문화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내가 배우고 도전받고 변화할 가능성을 애초에 차단해 버린 사람들이 말하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한 무자비한 폭력 그 자체다.

윤리의식의 마비를 본다

왜 그들은 학살자를 찬양 고무하면서도 동시에 성적·종교적·문화적 소수자들을 향한 끊임없는 혐오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그들은 가장 패륜적인 지도자를 찬양 고무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교회가 할 일이고, 또 교회를 위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애초에 도덕성이나 윤리 같은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기독교의 특정한 해석과 그것에 기초한 교권을 위해 도움이 되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특권을 위해서 이익이 되는 사람이라면, 그가 독재자라고 해도 그가 학살자라고 해도, 그를 민족과 교회를 위해 하느님이 보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어쩌면 그들은 독재자가 무자비한 살인과 폭력의 총칼을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 폭력의 희생자들 편에 서기보다는, 하느님은 악한 지도자를 통해서도 역사하신다고 믿고 싶었고, 그 믿음을 강변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깊은 참회의 기도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면서, 기도와 식탁의 참된 의미를 되살리고 증언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6월 사건과 신학은 국가조찬기도회를 향해 "이제 그만"이라고 엄중히 선언한다. 그사이에 대통령이 불참한 가운데 금년 국가조찬기도회가 지나간 모양이다. 잘된 일이라고 믿는다. 앞으로는 조금 더 서로 거리를 두고 살았으면 좋겠다. 반드시 있어야 하는 간격과 거리를 구태여 좁혀야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 비판적 거리와 간격이 애정의 표현이고 서로를 지켜 주는 신실함의 표현일 수 있다.

양권석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 사건과신학팀 위원장, 성공회대학교

*이 글은 '사건과 신학' 6월 전체 취지문입니다. 더 많은 원고를 홈페이지(바로 가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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