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뒤러, 네 사도

알브레히트 뒤러, '네 사도'(Die Vier Apostel), 1526년, 린든나무 패널에 유채, 각 215×76cm, 알테피나코텍, 뮌헨.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공용
알브레히트 뒤러, '네 사도'(Die Vier Apostel), 1526년, 린든나무 패널에 유채, 각 215×76cm, 알테피나코텍, 뮌헨.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공용

한 교인이 이렇게 묻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는 정말 성경 중심 교회인가요?"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습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후예를 자처하며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성경보다 목사의 말이, 장로의 입김이, 교단의 정치가 더 힘을 발휘하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각 교단 정기총회가 끝난 다음이라 그런지 씁쓸함은 더한 것 같습니다. 

10월 종교개혁 주일을 앞두고 500년 전 이 질문에 답하려 했던 화가의 그림 한 점을 소개합니다. 독일 뮌헨의 알테피나코텍미술관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의 '네 사도(The Four Apostles)'입니다.

성경을 손에 든 네 명의 사나이

이 그림 앞에 서면 누구라도 압도당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두 개의 패널로 나뉜 이 작품은 각각 높이 215cm로, 실물 크기를 훌쩍 넘는 규모입니다. 왼쪽 패널에는 앞에 젊은 요한이, 그 뒤엔 민머리의 노인 베드로가 서 있습니다. 오른쪽 패널엔 검을 든 바울이 앞에 있고, 그 뒤에 복음서 기자 마가가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제목이 '네 사도'지만 엄밀히 말하면 요한과 베드로만 12사도이고, 바울은 사도로 불린 선교사, 마가는 복음서 기자입니다. 

두 패널의 인물과 구도를 대비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붉은 망토의 요한은 복음서를 펼쳐 베드로에게 가리키는데 분위기는 평온하면서도 사뭇 진지합니다. 베드로는 일명 천국 열쇠를 들고 있는데, 뒤로 한 발짝 물러서 요한이 보여 주는 성경구절을 응시합니다. 이에 비해 오른쪽 패널의 두 인물은 바짝 긴장해서 초조해 보입니다. 바울은 신약의 서신서를 쓴 인물입니다. 그는 이 책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단단히 움켜쥐고 있습니다. 오른손에 쥔 검은색 장검은 그가 검으로 죽임당한 것을 상징하는 표식입니다. 죽음을 앞두고라도 성경의 진리를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읽힙니다. 그와 함께 서 있는 마가는 종이 두루마리를 들어 복음서 기자임을 드러냅니다. 그의 시선은 애써 정면을 피하려는 듯 불안합니다. 마가의 시대뿐 아니라 작가 뒤러의 시대가 그렇게 불안한 시대임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바른 곳을 응시하며 살기 어려운 시대, 진리를 지키며 살기 어려운 시대가 이 시선을 통해 읽힙니다. 

뒤러의 솜씨는 놀랍습니다. 붉은 망토의 주름 하나하나, 피부의 질감, 네 사람의 서로 다른 표정까지 생생합니다. 어두운 배경 속에서 인물들과 그들이 든 성경만이 빛을 받아 빛납니다. 보는 이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손에 든 책으로 향합니다.

혼돈의 시대

1526년, 이 그림이 완성되던 해의 독일을 상상해 봅니다. 마르틴 루터가 '사면증에 반대하는 95개 조항'을 발표한 지 9년이 지난 때입니다. 독일에서 종교개혁의 열풍과 혼란은 정점에 달하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의 자유와 개혁의 이름으로 교회당 안의 성상을 부수고, 또 어떤 이들은 농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교회의 파벌들은 저마다 극단으로 치닫고, 로마가톨릭은 개신교 진영을 향한 반격을 준비하던 시기였습니다.

뒤러는 이 혼란 속에서 고민합니다. 그는 루터의 열렬한 지지자이며 후원자였습니다. 루터의 95개 조항에 깊이 공감했고, 성경 중심의 교회 개혁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예술가였습니다. 이미지를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믿던 인물입니다. 개혁자 루터도 교회의 성상 파괴 운동에는 반대하며, 이미지를 교육의 도구로 활용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 그림은 의뢰작이 아니라 뒤러가 스스로 만들어서 자신이 살던 도시 뉘른베르크시의회에 헌정한 작품입니다. 당시 뉘른베르크는 신성로마제국의 자유 도시로서 도시 전체가 프로테스탄트로 전환하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뒤러가 헌정한 이 작품은 단순한 선물이 아닙니다. 이것은 한 시민이 자기 도시에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중심에 두고 살 것인가!'

뒤러는 이 작품을 뉘른베르크 시의회에 헌정했으나, 1627년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에 의해 뮌헨으로 옮겨졌습니다. 뒤러는 이 작품을 통해 종교개혁의 혼란 속에서 오직 성경만이 교회의 기초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왼쪽부터 요한, 베드로, 마가, 바울.
뒤러는 이 작품을 뉘른베르크 시의회에 헌정했으나, 1627년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에 의해 뮌헨으로 옮겨졌습니다. 뒤러는 이 작품을 통해 종교개혁의 혼란 속에서 오직 성경만이 교회의 기초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왼쪽부터 요한, 베드로, 마가, 바울.
그림 속 경고

이 그림 곳곳에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먼저 요한이 펼쳐 보이는 책을 봅시다. 가까이서 관찰하면, 거기엔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구절이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으로 새겨 있습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의도적으로 반영합니다. 그림에서 요한은 베드로에게 이 구절을 보여 주는데, 그 의미는 명확합니다. 창조의 태초부터 계신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모든 권위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교황도, 교회 전통도 아닌,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 교회의 기초라는 종교개혁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이 이렇게 담깁니다. 그리고 각 패널 하단에는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에서 발췌한 구절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요한1서 4장, 디모데후서 3장, 마가복음 12장에서 뽑은 구절들입니다. 내용인즉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화가가 그림 아래 성경 구절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사제와 지식인의 라틴어가 아닌 속어라고 멸시당하던 독일어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정신입니다. 성경을 평민의 언어로, 일반인의 손에 돌려주는 것. 사제만이 해석할 수 있는 신비한 책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리는 것, 그것이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구호입니다. 

네 사람의 조화

구도를 다시 봅시다. 왜 요한과 바울이 앞에 있을까요? 미술사학자들은 루터 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책들이 요한복음과 바울서신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루터는 로마서, 갈라디아서, 요한복음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은혜와 믿음, 복음의 핵심이 담긴 책들이었으니까요.

반면 베드로는 뒤로 물러나 있습니다. 천국 열쇠를 들고 있지만 말입니다. 이것은 교묘한 신학적 진술입니다. 로마가톨릭은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여기며 교황권의 정당성을 베드로에게서 찾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말입니다. 하지만 뒤러는 베드로를 뒤로 물러서게 함으로써, 교황권이 아니라 성경이 교회의 기초임을 말합니다. 그림에서 베드로는 요한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지만, 요한이 보여 주는 성경을 바라보며 배우는 제자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그렇다면 마가는 왜 있을까요? 마태도 누가도 아닌 마가 말입니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이유가 있습니다. 뒤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히포크라테스)에서 유래해 르네상스 시대 유행하던 의학 이론인 '네 기질(four temperaments)'을 이 그림에 담았습니다.

요한 노이되르퍼(Johann Neudörffer the Elder, 1497–1563)의 기록에 따르면, 작품 속 네 인물은 각기 다른 기질을 시각적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의 실제 성격이 아닙니다. 오히려 뒤러가 그림 속에서 색감의 의미로 메시지를 구현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은 젊고 붉은 옷을 입어 다혈질(sanguine)로, 베드로는 늙고 대머리에 뒤로 물러선 모습으로 점액질(phlegmatic)을 표현했습니다. 마가는 사자처럼 열렬한 담즙질(choleric)로, 바울은 사색적이고 깊이 있는 우울질(melancholic)로 그려냅니다. 

성경의 베드로를 아는 우리로서는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칼로 말고의 귀를 자르고, 물 위를 걷다 의심하고, 예수를 세 번 부인한 충동적이고 열정적인 베드로를 점액질(침착함)로? 이것은 뒤러가 그림 속에서 베드로를 '권위를 잃고 뒤로 물러선 인물'로 재해석했기 때문입니다. 로마가톨릭의 교황권 상징인 베드로를 의도적으로 침체되고 물러선 모습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네 기질이 균형을 이룰 때 완전함이 된다는 것이 당시 사상이었습니다. 뒤러는 이를 통해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완전성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그림 하단에는 각자가 쓴 성경 구절이 인용됩니다. 요한일서, 디모데후서, 마가복음, 베드로후서에서 발췌한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는 경고문입니다. 네 사람 모두의 목소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이자 그의 가르침을 기록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베드로가 뒤로 물러서고 마가가 그의 앞에 서 있다는 것은, 교황의 권위가 아니라 기록된 말씀, 즉 복음서가 중요함을 강조하는 대목으로 읽힙니다. 

정말 우리는 성경 중심인가

이쯤에서 불편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성경 중심 교회일까요? 종교개혁 500년이 넘었지만,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떤가요? 얼마 전 한 대형 교회에서는 담임목사의 설교가 아니라 그의 정치적 발언이 뉴스가 되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성경보다 목사의 저서가 더 많이 읽힙니다. 교단 총회에서는 성경 해석보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결정을 좌우합니다. 장로 선출은 영성이 아니라 헌금 액수로 결정되기도 합니다.

'오직 성경'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오직 목사', '오직 자리', '오직 교단'이 되어 버린 건 아닐까요? 뒤러가 그림 아래 새긴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는 경고가 50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일까요? 뒤러의 그림은 단순하지만 명료한 답을 제시합니다. 성경을 중심에 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저 성경을 손에 드는 것, 기계처럼 일년에 한 번 통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요한처럼 성경을 열어 읽고 묵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혼자만의 묵상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성경 읽기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나누며 교정하는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과 맞닿아 있습니다. 

중세 가톨릭이 성경을 사제에게 독점시켰다면, 오늘날 개신교는 성경 해석을 목사에게 독점시킵니다. 물론, 목사는 말씀 해석의 전문가입니다. 그러니 그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좋은 일이며 당연히 권장할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핑계 삼아 신자 스스로 성경을 읽지도 않고, 질문 없이 목사의 말만 맹신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태도가 종교개혁 정신과 정반대입니다. 루터가 성경을 모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한 이유는 '모든 신자가 직접 읽고 스스로 하나님과 만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경계해야 할 것은 성경을 읽되,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 구절을 끌어다 쓰는 것, 교회 성장을 위해 복음을 희석시키는 것, 정치적 목적을 위해 성경을 도구화하는 것은 모두 거짓 선지자의 행태입니다. 그림 하단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말라"는 경고가 바로 이를 겨냥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를 심판하고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의 말씀이 교회 공동체의 최고 규범(norma normans)임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베드로가 뒤로 물러선 것처럼, 인간의 권위는 물러서야 합니다. 목사도, 장로도, 교단도 성경 앞에서는 평등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겸손한 태도로 서로를 지지하고 세우며, 이웃의 유익을 위해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루터가 말한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입니다. 

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

뒤러의 '네 사도'를 보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집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에 끝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어야 할 과제입니다.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이 라틴어 격언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종교개혁의 달, 우리는 무엇을 개혁해야 할까요? 뒤러가 500년 전 뉘른베르크 시민들에게 던진 질문을 우리도 새겨 들어야 합니다. "무엇이 당신 교회의 중심입니까? 정말 성경입니까?"

네 사도는 우리를 응시합니다. 그들의 손에 성경이 들려 있습니다. 그 성경이 먼지 쌓인 장식품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살아있는 하나님의 소리(viva vox)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최주훈 / 중앙루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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