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앙 제페리노 다 코스타, 과부의 헌금

주앙 제페리노 다 코스타, 과부의 헌금, 1876. 캔버스에 유채, 100 × 137.5 cm.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국립미술관 소장.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공용

여인의 뜰이라고 불리는 성전 동쪽 뜰입니다. 뜰에서 가장 밝은 곳은 어디일까요? 놀랍게도 그곳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눈부신 흰옷을 걸친 서기관들이 서 있는 중앙입니다. 브라질 화가 주앙 제페리노 다 코스타(João Zeferino da Costa, 1840-1915)의 1876년 작품 '과부의 헌금'은 우리가 익히 아는 '아름다운 헌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그림은 2000년 전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진 종교적 착취의 현장을 고발합니다. 

거룩함을 옷 입은 사람

화면 중앙을 지배하는 것은 눈부신 의복을 입은 서기관입니다. 서기관의 옷은 단순한 흰색이 아닙니다. 경건한 유대인 남성을 표하는 순백의 숄을 기본으로 하되, 붉은색과 녹색 천이 장식처럼 섞여 있습니다. 천의 주름마다 빛이 반사되고, 옷감의 무게감이 느껴지며, 심지어 옷 표면에 새겨진 문자까지 식별할 수 있습니다. 서기관의 숄 이마에는 '야웨(YHWH)'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서기관의 의상을 수놓은 세 가지 색 조합은 우연이 아닙니다. 각각의 색은 성전 지도자들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정체성과 권위를 상징합니다. 흰색은 정결함과 거룩함의 색이고(레 16:4; 단 7:9; 계 3:4-5)이고, 붉은색은 희생과 제사, 속죄의 피를 상징하며(출 26:31; 28:6; 히 9:22), 녹색은 생명과 지식, 지혜의 색(시 1:3; 잠 3:18)입니다. 이 세 가지 색의 조합, 즉 흰색(거룩함) + 붉은색(희생의 중재자) + 녹색(율법의 교사)은 성전 지도자들의 완전한 종교적 자의식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유일한 다리로 여겼습니다. 백성들은 오직 이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오직 이들에게서만 하나님의 뜻을 배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직업적 자긍심이 아니라, 절대적 종교 권력의 가시적 표현이었습니다.

서기관 앞에는 또 다른 인물이 있습니다. 화려한 노란색, 정확히는 금빛에 가까운 황토색 옷을 입은 남자입니다. 그는 서기관과 대화를 나누거나 무언가를 주고받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요? 노란색, 특히 금색에 가까운 노란색은 고대 근동 사회에서 부와 권력을 상징합니다. 구약성경에서 금은 성전 기구의 재료였고(출 25), 왕의 의복에 사용되었으며(에 8:15), 신부의 장신구를 묘사할 때 등장합니다(시 45:13). 신약시대 로마제국에서도 황금색과 자주색은 황제와 귀족 계층을 상징하는 색으로 묘사됩니다. 

그림 속 노란 옷의 남자는 아마도 부유한 헌금자이거나 성전 재정 관리인으로 보입니다. 그의 자세를 보세요. 서기관과 동등한 높이에서 대화하고 있습니다. 약간 구부정한 자세지만, 그렇다고  엎드린 자세는 아닙니다. 화가는 이 두 인물을 화면 중앙에 배치함으로써 당시 성전 시스템의 핵심을 보여 줍니다. 삼색 옷의 종교적 권위와 노란 옷의 경제적 권력이 결합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다 코스타는 화려한 의복의 질감과 색채를 극도로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종교 권력이 얼마나 정교하게 자신을 포장하고 정당화하는지, 그리고 종교가 맘몬과 손을 잡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폭로합니다. 서기관과 부자의 옷은 그저 옷이 아니라 신학적 진술이고, 권력의 선언이며, 지배 구조의 시각화입니다.

마가복음 12장 38-40절에서 예수님이 경고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긴 옷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긴 옷, 화려한 옷은 단순한 허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지 보라,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인정하라'는 권력의 과시였고, 그 권력으로 약자를 착취하는 시스템의 일부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에서 이들의 주무대인 성전 벽에는 잠언 28장 6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얼마나 통렬한 역설인지 모르겠습니다. 말씀은 돌에 새겨져 장식처럼 걸려 있지만,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화려한 삼색 옷의 서기관들이 아니라 검은 상복의 과부입니다.

거룩함의 본모습

그런데 이 그림에는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화면 중앙에서 약간 왼편, 눈먼 노인 옆에 서서 그를 부축하는 젊은 여인을 자세히 보세요. 그녀는 거의 벗은 몸이지만, 그녀가 걸친 천은 서기관의 옷과 같은 순백색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화가가 이 여인에게도 서기관들만큼이나 강한 빛을 부여했다는 사실입니다. 서기관들이 서 있는 중앙과 이 젊은 여인이 서 있는 왼편, 이 두 곳이 화면에서 가장 밝게 빛납니다.

왜일까요? 화가는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요? 이 젊은 여인의 신체를 보십시오. 그녀는 서기관들의 풍성한 옷자락과 대조적으로 최소한의 천만 두르고 있지만, 그녀의 몸은 놀랍도록 건강하고 아름답습니다. 균형 잡힌 어깨, 우아한 자세, 건강한 피부. 이 여인의 몸은 고전 조각상을 연상시키는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화가의 의도적 선택입니다. 다 코스타가 가난한 여인을 가장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 낸 이유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성전 지도자인 서기관의 아름다움은 화려한 옷에서 나옵니다. 옷을 벗으면 그들의 아름다움도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의 아름다움은 옷이 아니라 그녀 자신, 그녀의 존재 자체에서 나옵니다. 옷이 거의 없어도, 아니 오히려 옷이 최소한이기 때문에, 그녀의 본질적 아름다움이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녀가 걸친 백색 천은 풍성하게 몸을 감싸는 고급 옷감이 아니라, 최소한의 가림막으로 간신히 몸을 덮는 천 조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천의 색은 정갈한 흰색입니다. 가난 속에서도 정결함을 유지하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의 자세입니다. 그녀는 눈먼 노인을 자신의 어깨로 받치고 있습니다. 노인은 그녀 없이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녀의 몸은 노인의 무게를 지탱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함께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돌봄의 노동입니다. 사회에서 가장 연약한 사람을 자신의 몸으로 지탱하는 행위입니다. 화가는 이 장면에 메시지를 담아 냅니다. 서기관의 백색 옷과 젊은 여인의 백색 천, 같은 흰색이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다릅니다. 서기관의 흰색은 자기 의로움의 선언입니다. '나는 정결하다', '나는 거룩하다', '나는 율법을 지킨다'. 이 흰색은 타자와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죄인과 세리와 가난한 자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는 색입니다. 화려하고 풍성하며 눈부시지만, 그 안에는 자기 과시와 교만이 있습니다.

젊은 여인의 백색은 고난 속에서도 잃지 않은 순수함으로 읽힙니다. 가난해도, 몸을 가릴 천이 부족해도 그녀는 최소한의 고결함을 유지합니다. 그 백색은 자기를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사람됨의 존엄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의 백색은 타자를 향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몸으로 눈먼 노인을 부축합니다. 자신보다 더 약한 자를 돌봅니다. 그녀의 백색은 분리가 아니라 연대의 색입니다. 화가가 이 여인을 이상적으로 아름답게, 건강하게 묘사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외적 장식이 아니라 내적 덕성에서 나온다는 것, 타자를 섬기는 삶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섬김과 헌신이 사람을 진정으로 아름답게 만듭니다.

화가가 이 여인에게 서기관만큼이나 강한 빛을 부여한 이유가 이것 아닐까요? '진정한 거룩함은 여기 있다. 화려한 삼색 옷에 있지 않고, 이상적으로 아름답지만 가난한 여인의 정갈한 백색 천에 있다. 진정한 희생은 붉은 천으로 표시되지 않고, 자기 몸으로 타인을 지탱하는 이 여인에게 있다. 진정한 지혜는 녹색 천으로 과시되지 않고,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를 버리지 않는 이 여인에게 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헌신적인 삶에서 나온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진리입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4). 진정한 위대함은 섬김에 있고, 진정한 거룩함은 타자를 향한 헌신에 있으며, 진정한 아름다움은 사랑의 실천에서 꽃핍니다.

눈먼 노인: 버려진 자들의 대표

눈먼 노인에게 시선을 돌려 봅시다. 그는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손으로는 젊은 여인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습니다. 그의 몸은 앞으로 구부러져 있고, 다리는 떨리는 듯 보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통스러운 여정입니다. 그의 눈은 하얗게 흐려져 있습니다. 백내장이거나 완전히 시력을 잃은 상태입니다. 그의 몸은 세월과 고난의 흔적을 보여 줍니다. 다 코스타가 이 눈먼 노인을 그림에 추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 가장 먼저 버려지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만약 성전이 정말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면, 이 노인이야말로 가장 환대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성전의 계단에는 그를 위한 난간이 있어야 하고, 성전의 뜰에는 그를 위한 자리가 있어야 하며, 제사장들은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림 속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중앙의 두 사람은 노인을 보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서로를 향하거나, 부유한 헌금자를 향합니다. 노인은 그들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는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대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젊은 여인의 역할이 더욱 빛납니다. 성전이 돌보지 않는 사람을, 종교 지도자들이 외면하는 사람을, 그녀가 자신의 아름답고 건강한 몸으로 돌봅니다. 그녀는 아마도 품삯을 받고 노인을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천한 직업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화가는 이 여인을 가장 이상적이고 아름답게 그리고, 서기관만큼의 빛을 부여합니다.

두 종류의 빛

이제 그림의 전체 구도가 선명해집니다. 다 코스타는 화면에 두 개의 빛의 중심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중앙의 서기관들, 또 하나는 왼편의 젊은 여인과 눈먼 노인입니다. 같은 밝기의 빛이지만, 그 의미는 정반대입니다. 중앙의 빛은 권력의 빛, 자기 과시의 빛입니다. 삼색 옷의 화려함, 하나님의 이름을 새긴 쇼올, 풍성한 옷자락. 이 모든 것이 빛을 반사하여 눈부십니다. 하지만 이 빛은 타자를 향하지 않습니다. 이 빛은 자기 자신을 빛나게 만들기 위한 빛입니다. 이 빛 아래서 가난한 자들은 더 어둡게 보입니다. 대조적으로 초라해 보입니다.

왼편의 빛은 헌신의 빛입니다. 섬김의 빛입니다. 젊은 여인의 백색 천과 이상적으로 아름다운 몸이 빛나는 것은 그녀가 값비싼 옷을 입었거나 외적으로 화려해서가 아닙니다. 그녀가 자신의 정결함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아름답고 건강한 몸으로 타자를 돌보기 때문입니다. 이 빛은 타자를 향합니다. 이 빛은 가장 약한 자, 눈먼 노인을 비춥니다. 이 빛 아래서는 모든 사람이 존엄합니다. 

오늘 우리가 입은 옷

이 그림 앞에 서면 불편한 질문이 떠오릅니다. 나는 어떤 색의 옷을 입고 있는가? 교회 안에서 나는 어떤 색으로 나를 드러내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 나는 누구를 돌보고 있는가? 나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흔히 우리는 신앙을 외형으로 판단합니다. 누가 더 많이 헌금하는지, 누가 더 오래 기도하는지, 누가 더 많은 성경 지식을 가졌는지, 누가 더 많이 봉사하는지, 누가 더 신앙인다운 외양을 갖추었는지를 말입니다. 21세기 교회에도 여전히 '삼색 옷'과 '노란 옷'이 환영받습니다. 

경건함을 과시하는 종교적 엘리트주의(흰색), 희생과 헌신을 자랑하는 공로주의(붉은색), 신학 지식으로 남을 판단하는 지적 교만(녹색), 그리고 물질적 축복을 믿음의 증거로 여기는 번영신학(노란색) 등등. 우리도 이런 옷을 즐겨 입고 교회에 나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반대로 우리는 정갈한 백색 천의 젊은 여인 같은 사람들을 알아보고 있습니까? 화려하지 않지만 묵묵히 약자를 돌보는 사람, 자신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 자기 과시 없이 섬기는 사람, 헌신적 삶으로 진정으로 아름다운 사람. 이들이야말로 진짜 빛나는 사람들입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벗은 몸'의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고 있나요? 상처받은 사람, 실패한 사람,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교회에서 아무 직분도 없는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 노인. 이들을 우리는 환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조용히 뒷자리로 밀어내고 있습니까?

두 렙돈

이제 이 그림의 배경이 되는 누가복음의 이야기로 들어가 봅시다. 홀로 된 여인이 헌금함에 넣는 두 렙돈은 당시 로마제국에서 통용되던 가장 작은 동전이었습니다. 오늘날 가치로 약 3000원 정도 될까 싶습니다. 성경은 이것이 그녀의 "생활비 전부"(눅 21:4)였다고 기록합니다. 하루 품삯 전부를 헌금함에 넣은 것이지요. 우리는 흔히 이 장면을 감동적인 헌신으로 읽습니다. 가난해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린 아름다운 신앙이니 이를 본받아야 된다는 설교를 자주 듣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1세기 유대 사회의 실상을 알면 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당시 율법에는 과부 보호 규정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죽고 친족이 없으면 성전의 서기관들이 그 재산을 관리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원래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는 법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과부의 남은 재산마저 빼앗는 도구로 전락해 버립니다. 예수님이 직전 구절에서 "그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켰다"(눅 20:47)고 고발한 이유입니다.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려면 반드시 제물을 바쳐야 했는데, 가난한 사람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런 사람을 위해 율법은 '비둘기 한 쌍' 또는 '산비둘기 새끼 한 마리'(레 12:8)를 바치라고 규정합니다. 그 가격이 정확히 두 렙돈입니다. 그러니 과부는 '자발적으로' 헌금한 것이 아니라 성전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헌금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반드시 치러야 하는 입장료였습니다. 일종의 '강요된 헌신'이랄까요.

그렇게 본다면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눅 21:3)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칭찬이 아니라 사실 진술입니다. 어조를 상상해 보십시오. 분노와 슬픔이 섞인 목소리로, "이거 한 번 보라,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 그녀의 '생활비 전부'를 말이다!" 그 어디에도 '이것이 아름답다', '이런 헌금이 복 되다'는 칭찬은 없습니다.

성전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장면을 목격한 직후 성전을 나오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눅 21:6). 46년간 건축된 헤롯 성전,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비견되던 그 장엄한 건물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왜 성전은 무너져야 했을까요? 성전이 본질을 잃었으니 더는 쓸모없다는 말씀입니다. 성전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막 11:17)이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눈먼 노인이나 건강한 청년이나, 누구든 하나님께 나아와 위로받고 쉴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의 성전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소굴이 되었고, 권력자들이 경건을 과시하는 무대가 되었으며, 약자들은 투명 인간처럼 무시당하는 공공장소가 되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대교리문답>(1529)에서 이런 종교지도자들을 "대도(大盜)", 즉 "큰 도둑"이라고 부릅니다. "큰 도둑들은 귀족처럼 의자에 앉아 법을 지키며 존경받는 시민으로 칭송받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도적질하고, 거룩한 의자에 앉아 온 세상의 재물을 훔치라고 오늘도 명령하고 있다."[마르틴 루터, <대교리문답>, 최주훈 역, (서울: 복있는사람, 2017), 152.] 개혁자가 본 것은 16세기 유럽 교회의 구조악이었습니다. 법은 있되 법정신은 없고, 말씀은 많되 실천은 없는 종교의 타락.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보편적 죄악입니다.

19세기 브라질에서 21세기 한국까지

다 코스타가 이 그림을 그린 1876년, 그가 목격한 것은 1세기 예루살렘만이 아니었습니다. 19세기 브라질의 현실이기도 했습니다. 화가가 그림 속에 의도적으로 추가한 벌거벗은 아이, 눈먼 노인, 헐벗은 여인, 가진 것 없지만 그 와중에도 더 어려운 이들을 돕는 사람들 등등. 이들은 1세기 예루살렘의 최하층민이면서 동시에 19세기 브라질의 노예들, 소외된 자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상징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온 노인과 두 렙돈의 여인은 오늘날 누구일까요? 가족을 잃은 슬픔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고향을 잃은 이주 노동자들, 억울하게 직장을 잃은 이들, 전세 사기로 집을 잃은 가정들, N포 세대라 불리며 미래를 포기해야 하는 청년들, 무중력 세대라며 발 디딜 곳 없어 하는 20-30대, 목소리를 빼앗긴 모든 약자들, 이들이 21세기의 눈먼 노인, 두 렙돈의 여인들입니다. 

이들을 보면, 적어도 '교회'라는 이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표를 단 사람이라면 해야 할 일이 보입니다. 혹시 눈먼 노인과 두 렙돈의 여인에게 십일조를 드려야 복을 받는다고, 헌금을 많이 해야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지는 않겠지요. 교회라면 이들을 위해 눈물을 닦아 주고, 쉼을 주고, 그들의 생존을 위해 곁에서 함께 걸어가며 빛나는 백색 옷의 여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느 편에 서 있는가

그림 속 예수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분은 그림 정중앙에 서 계십니다. 그분은 가난한 종을 상징하는 맨발로 칙칙한 그늘 가운데 서 계시지만, 얼굴에선 광채가 빛납니다. 그분의 손이 가리키는 곳은 심판과 축복을 동시에 전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나에게 묻는 것 같습니다. "너는 어디 서 있는가? 화려한 옷을 입은 자들 편인가, 어둠 속 맨발의 자들 편인가? 네가 입고 있는 것은 어떤 색의 옷인가? 너는 누구를 돌보고 있는가? 너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예수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 배우지 못한 자, 집 없는 자, 힘없는 자, 어린아이와 노인, 장애인과 병든 자, 홀로 된 이들, 사회적 약자를 품지 않고 외면하는 교회라면 더는 교회로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가 필요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라는 거룩한 권고입니다. 

진정한 헌금은 돈이 아니라 삶입니다. 매일의 정직함, 이웃을 향한 작은 친절, 불의에 맞서는 용기, 약자를 품는 따뜻함,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을 자신의 몸으로 돌보는 헌신. 우리의 사소한 일상이 내 옆의 동료와 이웃을 위해 사용될 때, 이 작은 두 렙돈이야말로 무너져가는 공동체를 다시 세울 수 있는 기반이요 튼실한 기둥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부의 두 렙돈은 성전을 무너뜨린 화약고가 아니라, 무너진 세상을 다시 세울 씨앗입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간 작은 일상의 결실이 두 렙돈이고, 정갈한 백색 천이 헌신으로 빛나는 아름다움이라면, 그 기도와 수고가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주님은 그것으로 위대한 하나님나라의 초석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생활비를 다 넣었느니라." (누가복음 21:4)

최주훈 / 중앙루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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