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선(free다)의 함께고통함께평화] 세월호 두 엄마 이야기
"엄마는 설교하는 게 그렇게 좋아? 참 행복해 보여."
어린 딸이 한창 이런 질문을 던지던 때, 나는 미국장로교회(PCUSA) 안수 준비 과정에 있는 '인콰이어러(Inquirer) 전도사'였다. 박사과정과 안수 과정을 동시에 진행하고 가족의 학비·생활비를 모두를 책임져야 했던 힘겨운 시절이었지만, 내가 행복해 보인다는 딸 말에 절로 힘이 나곤 했다. 딸의 말대로, 나는 예배드리는 게 좋다. 아름답고 거룩하게 준비된 예배는 설교 참여자로 드리든, 단순 참여자로 드리든 참 좋다.
하지만 가슴 한켠이 '쿵' 내려앉고 조용히 아리기도 하는 증세가 시작되는, 4월의 예배는 마냥 아프다. 4월 16일 해마다 드리는 예배를 준비할 때면 '아파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달래곤 하지만 문득문득 찾아오는 통증은 꽤 오래 머물다 사라진다. 자녀의 한마디에 모든 피로를 날려 버리는 엄마가 어디 나 하나뿐이겠는가. 오늘 쓰려는 나의 현장 친구 이야기는 팽목항에서 만난 두 엄마 이야기이다.
세월호 안에서 참담한 고통을 겪었을 304명과 그 가족의 억울한 아픔은 국민 다수의 고통이기도 했다. 참사 당일, 나는 여느 때처럼 강의 중이었다. 비보를 접했지만 이내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사실로 믿고 오후를 보냈다. 충격이 가시지 않아 퇴근 전 참석한 야간 채플 예배는 필리핀 선교지에서 온 청년들이 한국말로 부르는 찬양·춤으로 채워졌다. 그렇게 청년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골프채까지 사용했다고 떠벌리는 선교사에게 구토감을 느끼며 서둘러 채플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뉴스를 켜니 '전원 구조'라던 현장 상황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를 지켜봐야만 했던 모두가 그랬듯 그날부터 깊은 슬픔에 억장이 무너지는 긴 밤 같은 나날이 시작됐다.
2014년 봄 학기 종강 후, 채비를 하고 모인 제자 20여 명과 서둘러 진도로 향했다. 참사 현장에서 주의해야 할 옷매무새부터 걷는 속도에 이르기까지 봉사자 수칙을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 안내하고, 끼니와 식기는 각자 준비해 진도 팽목항에 답지해 있는 물품은 어느 것 하나 무심히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제자들은 너나없이 훌륭하게 필요한 일을 잘 감당해 줬다. 그러던 중, 우연히 내 바로 옆에서 세월호 수색단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절규하는 은화 엄마의 모습을 보게 됐다. 그 잠깐 강렬했던 장면으로, 세월호 전체 이야기는 내게 '10명의 실종자 이야기'로 다가왔다. 당시 팽목항 장기 봉사자 이승용 약사님과 '팽목항 - 안산' 구간 도보 순례를 하기로 결심했고, 제자들과 함께 실종자 귀환을 바라는 '정의와 생명의 도보 순례단'을 꾸렸다.
제자들은 가을 학기 개강까지 두 달 이상을 순례팀과 팽목항 봉사팀으로 역할을 나눠 머물렀다. 시민 봉사자 대부분이 사라진 뜨거운 여름날에도 자기 할 일을 묵묵하게 해냈다. 2014년 8월 11일부터 30일까지, 쏟아지는 땡볕과 장대 같은 빗속에도 하루 13시간 이상 걸었다. 하나같이 '예배'에 힘입어 순례를 이어 갈 수 있었다고 했던 순례자들의 고백은 지금 생각해도 신비하다. 실종자를 찾고 사고 없는 하루를 보내게 해 달라고 부탁하던 이른 새벽의 기도, '일용할 성찰'을 함께 나누던 늦은 저녁의 '예전'이 순례자들 중심에 있었던 게 분명하다.
순례를 마치고 새 학기를 시작했지만, 팽목항과 진도에 남은 실종자 가족들이 눈에 밟혀 가능한 자주 찾았다. 2014년 10월 28일 맹골수도 바다 밑 세월호 안에서 황지현 양을 마지막으로 발견한 후, 11월 11일 '수색 종료'가 결정됐다. 남은 9명 실종자 가족에게 이 소식은 또 다른 죽음과도 같았다. JTBC 김관 기자를 끝으로 팽목항으로 향했던 취재진의 발걸음도 그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당연히 곧 인양 발표를 하겠지' 했다. 그 '곧'이 6개월이 될 줄 모른 채.
상황이 평소보다 험해지면 이상하게 더 명료해지는 은화 엄마는 "9명 실종자들은 '실종된 것'이 아니라 정부가 수색을 포기해서 수습될 수 없는, 수습되지 못한 존재"라며 '실종자' 명칭을 '미수습자'로 바꾸고, 세월호 인양을 호소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다윤 엄마도 홍대입구역에서 피케팅을 시작했다. 두 가족은 오로지 딸을 찾겠다는 마음 하나로 '길 위의 삶', '팽목항의 삶'을 이어 갔다. 나는 그들 곁, 그들 뒤에서 팽목항에서 드리는 예배를 계속해 나갔다.
두 엄마의 피 끓는 호소에 대한 응답이었을까. 수색 종료 결정 6개월 뒤인 2015년 4월 22일 박근혜 정부는 마침내 세월호 인양을 결정했다. 그러고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목포신항에 세월호가 올려졌다. 천년 같은 하루를 1000일도 더 보낸 참사 후 3년, 인양 발표 후 2년만인 2017년 4월 9일 오후 5시 28분이었다. 거대한 배는 정작 '미수습자 기다림의 장소'였던 팽목항으로는 오지 못하고, 몇 번의 고비를 넘기며 지상에 거치됐다.
세월호 인양 준비 작업이 완료된 무렵, 두 엄마는 세월호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기다리겠다며 맹골수도로 향했다. 나는 두 엄마가 없는 팽목항에서 은화 엄마가 내어 준 컨테이너 방을 숙소로 사용했다. 밤에는 낮에 들리지 않던 다른 소리들이 들렸다. 간혹 오가는 차바퀴 소리, 발걸음에 치이며 '바스락 또르락 책 책' 하는 자갈돌 소리, 팽목항 난간 펜스에 맞닿는 바닷바람이 내는 쇳소리, 문과 문틀이 어긋나 닫힌 건지 열린 건지 알 수 없는 화장실 컨테이너 문 소리 등이 번갈아 아우성이었다.
첫날은 두 엄마의 길고 길었을 팽목항의 밤을 생각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샌 후 아침 세수를 하고 방으로 돌아와 거울을 찾는데 가슴이 또 무너져 내렸다. 은화 엄마 방엔 흔한 거울 한 조각이 없었다. 밤, 새벽, 아침, 낮의 경계가 빛으로만 가늠되던 그곳에서, 나는 4대 종단 종교 예식에 필요한 개신교 예배를 준비하고 기도문을 써 가며 폭풍 부는 언덕 같은 날들을 보냈다.
3년간 팽목항에 있던 가족들 짐을 목포신항으로 옮기고, 은화·다윤을 포함한 미수습자 9명을 기다리며 기도할 예배 공간 컨테이너가 마련됐다. 가톨릭·불교·원불교 컨테이너도 나란히 세워졌다. 맹골수도 바다 위와 목포신항에서 애도와 기다림을 담은 다른 종단의 예전들을 보고 또 참여하며, 우리는 '타 종교'가 아닌 '이웃 종교' 친구가 됐다. 목포신항살이 한 달이 지난 2017년 5월 13일과 18일. 거대한 녹 덩어리로 변해 누워 있는 세월호에서 엄마들은 마침내 은화와 다윤을 차례로 만날 수 있었다. 곱디고운 딸들을 글로는 형언할 수도 없고 형언해서도 안 되는 모습으로 만나게 된 두 엄마의 아픔을 어찌할 바 모른 채, 목포 유달산은 그 뜨거운 눈물에 봄에서 여름으로 젖어 들었다.
2017년 9월 23일. 참사 후 네 번째 여름이 지나고, 비로소 다윤과 은화는 가족과 함께 목포신항을 떠나게 됐다. 지인·시민들과 더불어 서울시청 다목적실에 어여쁜 꽃들로 장례 예식단을 꾸미고 24일 은화·다윤, 다윤·은화와의 이별 예배를 드렸다. 몸으로 만나지 못한 딸들을 보내며 차마 '장례'라고 이름할 수 없었던 부모들의 마음을 담아 '이별식'으로 진행됐다. 25일 아침 서울시청을 떠난 딸들은 단원고 교정, 연화장을 거쳐 엄마들의 오열 속에 경기 화성 효원납골공원에 안장됐다.
2014년 4월 16일 멈춰 버린 가족들의 시계는 3년 반이 지난 그제서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2017년 11월 17일. 이별식 후 추가 발견된 두 사람의 유골을 합하는 예배가 다시 목포에서 효원납골공원으로 가는 길에 이어졌다. 이 잔인하고 기나긴 슬픔에 오직 하나님만이 고통으로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기에 나도 그에 기대어 예배를 기도로 준비하고 인도했다.
개인 기록장을 다시 펼쳐 보며 글을 쓰다 보니 앙다문 턱에서 통증이 올라온다. 그러나 이런 아픔이 무슨 대수랴. 지난 7년간 세월호 곁에서 많은 존재를 만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월호 참사 현장이 맺어 줘 친구가 된 사람도 많다. 그중 일본 NHK 취재단이 마음에 남아 있다. 세월호 3년을 동행 취재한 분들이다. 그들 중 누구도 가족에게 함부로 카메라를 들이대거나 동선을 방해하는 일 없이 곁을 지켰다. 취재 내용을 최선을 다해 친절히 설명하며, 어디에도 없는 듯했지만 어디에나 있었던 분들로 기억한다. 그들은 취재·편집을 마치고 만들어진 CD 최종본을 내게도 건네줬다. 여직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그 취재 영상의 제목은 '통곡의 바다: 한국 세월호 사고 엄마의 3년'이다.
또 한 분이 기억에 남는다. 인양에 모든 시선이 집중되던 시기 팽목항에 도착해, 첫날부터 틈틈이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던 한 사람이 KBS '추적60분' PD 이은규 씨라는 것을 알게 됐다. 기자이기 전에 사람 냄새 나던 NHK 분들과 이은규 씨 같은 분은 현장에서 만난 또 다른 친구들이었다. '현장', 특히 '사회적 참사 현장'에는 다양한 모습의 '연대자'들이 있다. '연대'라는 단순한 두 글자 주변에는 연대자 수만큼 많은, 황망하지만 아름답기도 한 이야기들이 공존했다. 결코 쓸 일은 없겠지만 책을 써도 한 권은 나올 것이다.
나의 30대 시절, 클레어몬트신학대학교 전공 교수 엘리자베스 콘데 프래지어(Elizabeth Conde-Frazier)는 '참여 행동 연구(PAR: Participatory Action Research)' 방법론을 내게 가르쳐 준 스승이다. PAR은 연구의 객관성·중립성 개념에 저항하며 사회 이슈에 대한 연구자의 당파성을 피해자 관점에 일치시켜 그들과 형성하게 된 신뢰를 바탕으로 연구한다. 또한 연구 과정뿐만 아니라 결과까지도 당사자와 공유하는 학문적 윤리관을 중요시한다.
그분과 "연구자로 주민들에게 신뢰를 얻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현장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또한 쓴 글로 연구자만 혜택을 얻는다면, 우리는 학자의 길 가는 일을 멈춰야 한다"는 대화를 나눈 기억은 모호한 객관화, 학문적 중립성, 자칭 '장자 교단', '통합신학' 같은 귓가의 소음을 단번에 먼지처럼 날려 버리게 했다.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만난 이들은 PAR 동창생같이 느껴졌다. NHK·KBS 기자들, 또 지난 7년간 은화·다윤 가족 곁에서 '이기적·기계적 연대'가 아닌 삶으로 함께한 모든 분이 친구가 됐다.
'기억하겠다'는 시민들의 응원에, 그 말 앞에 '아이 찾고'를 붙여 달라던 두 엄마의 바람은 지난 7년의 '함께고통함께평화'를 관통하는 우리 모두의 네 글자였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닌 채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할 수 있는 만큼' 함께하고, '갈 수 있는 방식으로 갈 수 있는 만큼' 같이 간 사람들과 더불어 두 엄마는 아이들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들과 친구로 살아가고 있다. 두 엄마와 참사 현장에서 피해자와 봉사자로 만난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두 엄마는 늘 내 건강과 안부를 물어 주고,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신학자·목사'라며 교권주의자들이 맘대로 지어 붙인 이름으로 내가 신학교와 지역 교회에서 따돌림을 겪었을 때는, 안산에서 광주까지 한걸음에 달려와 위로해 주곤 했다.
글을 마무리하고 <뉴스앤조이>에 보내기 전, 글을 먼저 읽고 사실이 아니거나, 게재를 원하지 않는 내용이 있으면 얘기해 달라고 요청하며 두 엄마에게 송고했다. 이제 다시 초를 켜고 세월호 7주기 예배를 준비한다. 2021년 4월 16일에도 효원납골공원 가는 길에 함께하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함께고통함께평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