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청년의료인회 이야기

내게 '함께고통함께평화'의 인사를 설명 없이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앞선 연재 글에 소개한 분들과 더불어 '기독청년의료인회(기청의·강대곤 회장)'를 주저 없이 꼽을 것이다. 기청의는 '무료 주말 진료소' 활동을 하던 기독학생회 회원들이 1987년 6월 민중 항쟁 정신을 이어받아 그해 10월 만든 모임이다. 의료 행위에 '생명·사랑·치유'의 기독 정신을 담아 '보편적 의료 복지'와 '의료 공공성'을 지향하는 의료인 및 연대인들이 함께하는 단체로, 설립 후 34년간 활동을 이어 오고 있다.

기청의와의 만남은 2004년 우여곡절 끝에 귀국한 나의 삶을 기청의가 끌어안아 준 때부터 시작됐다. 미국에서 목사 안수 과정과 박사 학위 과정을 마친 후에도 미국에 남아 가족 뒷바라지를 해야 했던 어느 날, 한국에 있는 엄마가 급작스럽게 입원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미국에서 제안받았던 일을 포기하고 홀로 귀국해 '기러기'의 삶을 살았다. 여느 가장들처럼 원가족과 내 가족을 모두 돌보기 위해 365일 쉼 없이 살아야 했던 내게, 기청의가 협동목사직을 제안해 왔다. 한 주에 한 번 모이는 성서 연구 시간에 함께해 달라는 초대였다.

당시 나는 영적으로 고갈 직전이었고, 엄마의 장례를 마치고서야 겨우 초대에 온전히 응할 수 있었다. 기청의 회원들과 주중에 모여 찬양하며 기도했던 시간, 함께 성서 본문을 묵상하고 성찰하며 각자의 이야기로 응답했던 성서 연구 시간이 내가 누릴 수 있었던 유일한 영혼의 안식이었다. 성서 연구 시간 외에도 회원들의 의료 활동에 담긴 '공동 지향성(Communal Directivity)'과 '예언적 실천성(Prophetic Praxis)'을 보며 기청의가 추구하는 정신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회원들은 개신교 직업 소명설을 넘어서는 그 아름다운 정신을 삶 속에서 '따로 또 같이' 꾸준히 드러냈다.

다. 사진 제공 프리다
1991년 기청의 세미나 당시 사진. '정의', '평화', '창조 질서의 보전', '건강하고 온전한 민중의 삶' 등을 주제로 내걸고 있다. 사진 제공 프리다

기청의 회원들의 '공동 지향성'을 볼 수 있었던 일들은 내 개인적인 삶의 접촉면에서도 무수히 일어났다. 고작 6개월 만에 생을 마감한 우간다 난민 부부의 아기를 마지막까지 돌봐 준 회원들, 장신대 대학원 강사 시절 수업 중 한 나이지리아 학생이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며 "교수님, 나 말라리아 증세인 것 같아요" 하고 고통을 호소하던 순간, 내가 전화로 도움을 청한 곳은 학교 행정실이 아니라 기청의였다. 그 학생을 안내하고 치료하는 모든 과정에 동행해 준 회원들, 병원을 찾지 못하는 미등록 이주민을 위해서라면 언제나 진료를 하겠다며 이주 노동자 목회를 응원하던 회원들이 있었다.

이외에도 세월호 가족의 주치의로 치료·상담을 하고 있는 회원들, 세월호 참사로 40일 단식기도를 하던 두 목사님을 출근 전 매일 방문 진료한 회원, 강남역 고공 크레인 위에서 삼성과 싸운 해고 노동자 김용희 님을 진료하는 등 쫓겨나고 찢기는 민중 투쟁 현장에 필요한 의료 지원 활동을 해 오고 있는 회원도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한국 의료 역사에 남길 만하다. 기청의 회원들은 내가 재직하던 학교 총장의 교권 침해 행동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가장 먼저 보내 준 고마운 분들이기도 하다.

내가 기청의 회원들의 활동에 '공동 지향성'뿐 아니라 '예언적 실천성'이라는 해석을 더하는 이유는, 이들이 시대적 한계에 가려 드러나지 않는 반생명적 현장을 깊이 응시하고, 그곳에서 발견한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가시화해 왔기 때문이다. 이들은 1989년 인천 지역 노동자의 건강과 산업재해(직업병·과로사) 예방·대책 활동을 위해 당시로선 유일하게 '상담실'을 갖춘 민중병원(평화의원)을 운영했고, 고엽제·다이옥신·석면 등의 문제를 의료적 관점에서 제기했다.

또, 노인 의료 및 노인 친화 사회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지 않았던 20여 년 전부터 요양·간병을 포함한 노인 친화적 의료 체계가 필요하다는 문제를 제기해 시민사회의 의식적 진보에도 기여했다. 최근 수년간 진행되고 있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과도 함깨하며 피해 시민의 권익 보호를 위해 최전선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들의 예언적 실천 활동은 사회적 의료를 향한 공공의 이야기로 더 많이 알려지고 기억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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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청의는 의료인으로서 고엽제·다이옥신·석면 등 피해자들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 사진 제공 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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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의원 건립을 추진했던 1992년 당시 기청의 정기 집회 모습. 사진 제공 프리다

'예언적 실천성'의 꽃은 생활협동조합의 가치를 의료계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기청의 회원들의 공유된 인식에서 만개하고 있다. 1994년 안성 '농민의원'을 시작으로 의료 협동조합 개념을 연구·시도하며 예언적 실천의 순례를 본격화했다. 기청의는 의료 협동조합 발전 기금 조성의 초석을 마련했고, 지속적이고 역사적인 공동의 노력을 통해 2003년 '한국의료생협연대(현 한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을 창립하는 데도 기여했다. 지금은 '의료 복지 사회적 협동조합'을 가시화하는 운동에 전국 회원들이 실질적으로 이바지하고 있다. 이들의 예언적 실천성은 한국 사회 의료 시스템의 고질적인 의료 공급자 중심 체계를 수요자 중심 체계로 전환하는 '마을 주치의 혹은 한국형 주치의 제도' 도입을 위한 운동으로 전개될 예정이다.

2004년 있는 대로 고갈돼 만신창이로 돌아온 나를 따스하게 품어 준 기청의 회원들과의 성서 연구 시간은, 엄마가 머물던 중환자실에서 발견한 의료 체계의 모순, 미등록 이주 노동자와 난민의 생명권, 피의료 행위권이 부재하는 현실을 인식하게 해 준 새로운 학습의 장이었다. 이들과 함께 가난한 외국인 유학생의 질병을 돌보는 과정은 국가 공공 의료의 필요성과 거대 자본의 증식 수단이 돼 버린 사보험 체계의 허울에 눈을 뜨게 하는 각성의 거울이었다. 기청의는 내가 언제라도 머물수 있는 사회-영적 공간(Socio-Spiritual Space)이며, 내가 발견한 예수를 자유롭게 고백할 수 있는 '주소 없는 교회'다. 비의료인인 나를 준회원으로 받아 준 기청의는 앞으로도 나의 엘리사벳이자 나의 교회로 존재할 것이며, 나 또한 그들의 증언자로서 '함께고통함께평화'의 인사를 더불어 나누며 살아갈 것이다.

여울교회 이야기

'주소 없는 교회'에는 교회의 모습을 지녔지만, 건물은 소유하지 않겠다는 교회 정신이 담겨 있다. 내가 담임목사로 함께하고 있는 '여울교회' 역시 주소 없는 교회다. 경기 고양으로 이주한 2019년 5월, 여울은 내게 한 달에 한 번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했고, 예상치 못하게 2020년 1월부터는 담임목사로 초대했다. 교수로 있던 학교와 협동목사로 있던 지역 교회를 떠나면서 앞으로는 어떤 기관·조직에도 들어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다른 대학들의 시간강사 제안도 고사해 왔던 차였다. 더욱이 한 주 한 편 고된 설교 노동을 해야 하는 담임목사로 사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기에 감당할 자신이 없어 고사했다. 그러나 결국 한 달에 두 번 설교 하는 것으로 상호 동의하면서 지금까지 함께 흘러오고 있다.

'여울(강이나 바다의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세게 흐르는 곳 - 편집자 주)'이라는 이름은 나의 생 철학과 통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몸에 힘을 빼고 물 흐르듯 유영하며 살겠다는 내 나름의 속다짐이 담긴 말처럼 여겨졌다. 안산에 갔을 때도, 광주에 갔을 때도, 그곳들을 떠나올 때도 그랬다. 그런 생각으로 만나게 된 여울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의 한 교회로 16년 역사를 흐르며, 예배처를 옮겨 다니더라도 공간을 소유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켜 오고 있다. 코로나19라는 특수 상황에서 주로 비대면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대면 예배 시에는 주일에 영업을 하지 않는 카페에 월세를 내고 공간을 빌리고 있다.

여울은 어떤 교리라도 억압적으로 작동하면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는 원칙, 교회 직제가 가진 위계성을 극복하기 위해 운영위원회와 전교인회의로만 교회를 운영한다는 원칙을 지켜 왔다. 그만큼 젠더 평등을 지향하고, 목회자 의존도를 최소화하고 있는 교회다. 이렇게 교회를 지켜 온 교우들의 자발적 정체성이 마음에 들어 '함께고통함께평화'의 인사를 함께 나누는 내 삶의 현장에 여울을 받아들이게 됐다. 목사 임금은 교회가 결정한 액수와 나의 의견이 겹쳐 상호 동의하에 결정됐다. 내가 한 달을 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벌이에서 내가 일정하게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을 제하고, 나머지를 채워 달라는 방식으로 제안했다. 교회에서 받는 임금은 나의 생존을 위한 식생활비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내게 위임된 사회적 선교 활동비로 생각해 다달이 남김없이 소비하며 살고 있다.

여울은 다양한 현장과 나를 이어 준 좋은 친구다. 작년 말 선교비 지출 재조정을 위해 교우들이 논의하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내가 조심스레 제안한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도움이 필요한 곳에 돈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교우들이 함께 연대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을 우선적으로 정하자는 것, 그래서 선교처 보고를 되도록 교우가 해 가자는 제안이었다. 그 정신에 따라 나 역시 여울과 이어진 현장 가운데 두 곳, 서울역 앞 '동자동 쪽방촌'과 제주 강정마을의 '개척자들'을 마음에 두고 방문과 기도로 함께하고 있다.

여울에는 벌써 십수년 이상 지속적으로 동자동 주민의 친구이자 사진 기록자로 주민들과 신뢰 관계를 맺고 있는 교우가 있다. 그는 금강경의 '여시아견如是我見', 즉 '본 것을 전한다'는 뜻을 담아 자신의 렌즈를 통해 본 쪽방의 일상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나는 그 교우를 통해 동자동 쪽방에 사는 화가 윤용주 님을 만나게 됐다. IMF 위기로 고통스런 삶의 한가운데로 몰린 용주 님은 여울 교우들과 이어지며 다시 붓을 잡게 됐다고 했다. 최근 몇 년간은 두 다리를 크게 수술하는 고통을 겪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는 거듭되는 재수술로 병원에 입원 중이다.

나는 용주 님의 그림과 글을 모두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서울역'과 '동자동의 봄' 그림이 가장 먼저 마음에 먼저 떠오른다. 그의 전시회가 열린다면 꼭 사고 싶은 그림이기도 하다. 최근 공공 개발에 나선 정부와 서울시, 피해자 코스프레 중인 쪽방 주인의 횡포, 나눔이라는 명목으로 자기만족적 선행을 베푸는 종교인들의 소음에 가까운 방문, 주면 뭐든 먹는 줄 아는 선심성 도시락 반찬 앞에서도 어찌 그리 아름다운 서울역과 동자동을 그릴 수 있었는지…. 그의 그림에 시선을 두고 있으면 그의 마음도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다.

윤용주 화가가 그린 '서울역'(사진 위)과 '동자동의 봄'(사진 아래). 사진 제공 김원
윤용주 화가가 그린 '서울역'(사진 위)과 '동자동의 봄'(사진 아래). 사진 제공 김원

어느날 먹과 물감을 사용해 한지에 나무·꽃·산·물·들판을 웅장하고도 섬세하게 그려 내는 용주 님에게 자연 풍경을 주로 그리는 이유가 뭔지 물었다. 동갑내기 친구 용주 님은 "가 보고 싶어서요"라며 마치 그곳에 가 있는 듯한 미소를 담아 내게 답했다. 동자동에 코로나19 감염 환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그를 본 지도 두 달이 넘은 것 같다. 수술로 병원에 있는 그가 퇴원할 날을 기다리는 중이다. 최근 백신 접종도 했으니 수박과 나물을 싸 가서 맛나게 같이 먹고 싶다. 이 글을 함께 읽는 나의 친구들이 서울역 동자동 쪽방촌 공공 개발에 더 많은 시선과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사회적 모순을 가장 먼저 고통으로 견뎌야 하는 삶의 자리를 되도록 가까이 가서 바라보며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사람들, 특히 '기청의'와 '여울'을 스승 삼아 친구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글을 쓰며 돌아보니, 하나님은 내게 기청의 성서 연구 시간을 통해 '거룩한 책 읽기(Lectio Divina)'를, 용주 님의 그림을 통해 '거룩한 관상(Visio Divina)'을 수련하게 하신 듯하다. '멈추고 흐르기'를 반복하는 순례의 삶을 이렇게 이어 가며 살아가고 싶다. 멈춰 서서 깊이 묵상하고, 깨어 있는 채로 흘러가는 삶을 나의 소중한 '함께고통함께평화'의 친구들과 함께하고 싶다. 함께고통함께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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