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신문이나 방송을 보다 보면, 늦은 나이에 목회자가 된 이들의 간증을 자주 접할 수 있다. 다른 직업을 갖고 활동하다 뒤늦게 '목회자가 돼라'는 음성을 듣거나 소명 의식이 생긴 이들이다. 생업을 포기하고 목회자의 길에 뛰어드는 이들을 보면, 때로 존경심이 생기기도 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범죄 이력이 있으나 과오를 다 뉘우쳤다며 목회자가 되는 이들도 있어, 진정한 회개와 용서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이유에서든 저런 이유에서든, 한국교회는 '목회자가 되는 이들'에게 관심이 많고 그들의 이야기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반대로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 준비하다 그 길에서 벗어난 이들의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별로 없다.

<뉴스앤조이>는 신학대학교 혹은 신학대학원 과정을 밟고도 목회자의 길 대신 다른 길을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었다. 이 릴레이 인터뷰의 이름은 당초 '목회 포기자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뉴스앤조이>가 만난 이들은 신앙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각자 삶의 방식에서 신앙적 가치를 실현하려 애쓰고 있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포기'라는 단어 대신 '다른 길'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다른 길로 간 신학생들' 인터뷰 일곱 번째 주인공은 축구 교실 코치 민웅기 씨다. - 기자 주

[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민웅기 코치(35)의 신앙 여정은 드라마틱하다. 중고등학생 때 축구 선수를 하면서 '골 넣게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믿었던 그는, 대학교 1학년 때 축구를 포기했다. 이후에는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 들어갔다. 그때까지 그는 철저한 근본주의 신앙에 빠진 그리스도인이었다.

신학대학원 입학 한 달 만에, 304명이 죽는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다. 하나님은 늘 선하고 의롭다고 배워 왔던 민웅기 씨는 그 사건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교회에 빠져 살았고, 목사가 되기 위해 신대원에 왔는데, 세월호 참사 이후 고민할수록 목사가 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시 축구 세계로 돌아갔다. 전공을 되살려 축구 교실을 열었고, 현재는 수강생이 100여 명에 이를 만큼 성장했다. 이 모든 과정이 벌어지기까지 1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목회를 포기했다는 민 씨를 5월 27일 서울 성내동 서울씨드축구클럽에서 만났다. 이번 인터뷰는 그가 겪었던 신앙관의 변화에 초점을 맞췄다.

프로 축구 선수를 꿈꿨던 민웅기 씨. 그는 대학교 1학년까지 선수 생활을 하다 축구의 꿈을 접었다. 사진 제공 민웅기
프로 축구 선수를 꿈꿨던 민웅기 씨. 그는 대학교 1학년까지 선수 생활을 하다 축구의 꿈을 접었다. 사진 제공 민웅기

- 먼저 축구 선수로서의 삶부터 들어 볼까요. 축구는 언제 시작하셨나요?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참 좋아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마추어 대회를 나갔는데, 중학교 축구부 감독님이 제가 뛰는 모습을 잘 보셨나 봐요. 축구 해 보지 않겠냐고 해서 그때 시작했어요. 늦게 시작한 편이에요. 다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시작하거든요. 실력은 나름대로 괜찮았던 것 같아요. 잘나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공격수를 했고, 고등학교 3학년부터 대학교 다닐 때까지는 수비와 미드필더를 했어요.

- 운동선수로서의 삶이 힘들지는 않았나요?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하고 나서는 괴로웠죠. 운동은 지루함과의 싸움이거든요. 그걸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목표는 정확했어요. 프로 축구 선수가 되겠다는 것. 그 목표 때문에 괴로움을 잡아먹었던 거죠. 명문 고등학교 축구부에 진학했고, 좋은 대학교에 갔어요. 지금은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프로 선수가 될 수 있는데, 당시에는 지명 제도가 없어서 무조건 대학에 진학해야 했어요.

- 대학교 1학년 때 축구를 그만뒀어요. 목표가 명확했다면서 왜 그만둔 건가요?

프로 팀과 경기를 하고 나니 확 체감되더라고요. 당시 FC서울이랑 경기를 많이 했거든요. 귀네슈가 감독을 맡고 박주영·곽태휘·기성용·이청용·이을용·아디 선수가 한 팀일 때예요. FC서울 최전성기로 불리던 시절이죠. 다른 프로 팀들도 FC서울에는 농락당하던 때였으니까요. 그 팀과 연습 경기를 하면서 레벨의 차이를 체감했어요. 특히 박주영 선수랑 부딪히면 무슨 돌이랑 부딪히는 것 같더라고요.

꾸준히 하면 프로 선수로 어영부영 뛸 수 있을 것 같긴 했는데, 그러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태극 마크(국가 대표) 못 달 거면 지금 포기하고 다른 길을 도전해 보자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라고요. 바로 대학교 축구부 숙소를 나왔죠. 그게 대학교 1학년 때였어요.

- 프로 선수들도 버거워하는 강팀과 붙은 거니 당연히 기량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을 텐데, 스스로를 과소평가한 것 아닐까요?

3~4년 내에 졸업하고 프로 선수가 될 텐데, 현실적으로 FC서울 수준까지 올라갈 자신이 없었어요. 그걸 과소평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꿈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 같더라고요.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노력만큼은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고 생각했기에 미련은 없었어요. 그때는 새로운 시작에만 포커스를 맞췄어요. 아깝다는 생각보다는 지금 포기하는 게 빠르다는 생각이었죠.

- 운동선수를 포기한 후에는 뭘 해야겠다고 생각했나요?

말이 좋아 새로운 시작이지 눈앞이 캄캄했어요. 어떻게 보면 한국 스포츠 교육의 문제점인데, 저는 초등학교 이후로 시험지를 풀어 본 적이 없어요. 진학할 때 체육 특기생 전형으로 진학을 하거든요. 공부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시험 기간이 너무 좋았어요. 축구부들은 시험 기간에 답안지에 3번으로 쫙 찍고 자요. 그런 학창 시절을 보낸 거죠.

대학교도 체육 특기생으로 온 거잖아요. 그러니 (축구를 포기하고 나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당시 생활체육학과 특기생으로 입학했기 때문에 학과를 계속 다녔어요. 일단 군대 다녀와서 학교생활 열심히 하자고만 생각했어요.

- 그런데 대학 4년을 다닌 후에 갑자기 신대원에 들어갔는데요. 계기가 있었나요?

원래부터 모태신앙이었고 교회를 다니기는 했어요. 경기 과천 토박이인데, 어렸을 때 같이 축구했던 동네 친구 김신욱 선수를 따라서 은혜와진리교회 과천 예배당에 다녔어요. 그때는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신앙생활을 했어요. '기독교인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프레임이 있잖아요. 축구를 하면서 교회 가는 게 생각보다 어렵거든요.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랑 막 늦게까지 놀아도, 이상하게 주일만 되면 아침에 눈이 떠져서 교회를 가야겠는 거예요. 밤늦게까지 놀았으니까 그 문제를 해결해야 될 거 같은 거예요.

그러다가 대학생 때는 양재 온누리교회에 다녔어요. 군대 다녀와서 흔히 얘기하는 '주님을 만났다'는 시기가 찾아왔어요. 교회에 미쳤던 것 같아요. 원래 운동선수는 목표를 세우면 그것만 파고들어요. 군대 다녀오고 나서는 그 포커스가 운동에서 신앙으로 모였던 것 같아요. 운동을 대체할 뭔가가 필요했던 거죠.

어느 정도였냐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새벽 예배에 매일 갔고, 저녁에 있는 예배도 다 갔어요. 화요일 집회, 수요 예배 등 '예배' 이름 붙은 건 다 갔어요. 금요일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이 있었는데 밤새 철야를 했고, 토요일에는 리더 모임, 주일에는 종일 평신도 사역을 하고요. 진짜 미쳐 있었어요. 그래서 신대원 외에 다른 길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나름의 '콜 사인'도 있었고요. 교회 목사님이나 주변인들, 심지어 지금 아내도 "네가 목사를 안 하면 누가 하겠냐"고 할 정도로 교회에 미쳤던 것 같아요. 1년 공부하고 2014년 장신대 신대원에 입학했어요.

군대를 다녀온 이후에는 누구보다 교회에 열심인 청년이었다. 일주일 내내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고, 이내 신대원에 진학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진 제공 민웅기
군대를 다녀온 이후에는 누구보다 교회에 열심인 청년이었다. 일주일 내내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고, 이내 신대원에 진학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진 제공 민웅기

- 신대원 생활은 어땠나요?

처음 입학했을 때 엄청 충격받았어요. 다 저 같은 사람만 신학교에 오는 줄 알았어요. 강력한 신앙에 사로잡혀서 확신도 있고, 열정도 있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들만 오는 줄 알았는데, 너무 다른 거예요. 예를 들어 성경을 해석하는 것도, 역사의식도 다 다른 거예요. 저 같은 전형적인 온누리교회 스타일 청년이 얼마나 충격을 받겠어요.

장신대 기숙사는 4명이 한 방에서 함께 살거든요. 깜짝 놀랐어요. 같이 살았던 형들은 당시 진보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과 매일 먹고 자야 되잖아요. 형들이랑 밤마다 토론하고 싸웠어요. 형들은 사유 체계가 아예 다르더라고요. 접근 방법이 굉장히 '인간 중심적'이라고 해야 하나? 당시에는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고요.

그러다 입학한 지 한 달 만에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어요. 신앙의 뿌리를 뒤흔드는 사건이었어요. 그때 든 생각은 '하나님은 선하시고 완전하시고 실수가 없는 분인데, 어떻게 수백 명 넘는 사람이 죽을 수 있을까'뿐이었어요.

- 당시 몇몇 목회자가 세월호 참사는 '하나님의 심판' 또는 '경고'라고 설교해 상당히 논란이 됐는데요.

그런 말을 하는 목사들이 부끄러웠어요. 저에게 세월호는 심판이니 뭐니를 다 떠나서 '하나님은 정말 나쁜 분'이라는 생각뿐이었어요. 도대체 사람들이 이렇게 죽어 가는데 목사들은 심판이라고 하고… 당시 신정론 책도 엄청 많이 읽었지만,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답을 모르겠어요. 하나님이 하신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 가지 확실히 배운 건 우리에게 그들의 슬픔을 돌봐줄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때 '상대화'가 무엇인지를 경험했어요. '내가 지녀 온 신앙이 여러 갈래 중 아주 가느다란 줄기 하나에 불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전까지는 내 신앙이 전부인 줄 알았어요. 그때부터 다시 생각해 보자 하고 신학을 열심히 공부했어요. 신학에서는 이런 사건에 대해 뭐라고 얘기하는지 너무 궁금했거든요. 수업도 진짜 재밌었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보고 토론도 많이 하고… 그때 정말 다 빨아들였어요. 처음에는 거부하고 쳐냈지만 세월호 이후에는 다 받아들였어요.

- 신대원 시절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했을 텐데요. 교회 사역은 어땠나요?

담임목사님, 부목사님을 보면서 '앞으로 나도 저렇게 살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교인들은 너무 순수하고 불쌍해서 바보같이 당하는 느낌인데, 목사님들은 그 순수함을 이용하는 것 같더라고요. 교회가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교인들을 이용하는 것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어요.

목사님들끼리 식사하면 늘 "교인들이 순종을 안 한다"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제일 많이 들은 얘기가 "이 교회는 청년들 신앙 교육이 전혀 안 돼 있다"였는데, 그건 결국 제도화가 안 돼 있다는 것이었죠. 근데 또 청년들은 "목회자다운 목회자를 못 만나 봤다. 목사 말고 목자를 만나보고 싶다"고 해요. 얘기가 완전히 다른 거예요. 이 정도 되니 교회 돌아가는 게 뻔하지 않겠어요? 교인들이 말로만 "목사님, 목사님" 했던 거지 진짜 존경하지는 않았던 거죠. 그 모습을 보자니 10년 후에 나도 저러고 있을 것 같은 거예요. 양심상 저렇게는 못 하겠다 싶었어요. 그 구조 속에 들어가면 똑같이 될 것 같더라고요.

세월호 참사에다가 그릇된 교회 구조까지 경험하고 나니까 신앙 자체가 와르르 다 무너지더라고요. 신앙이 뭐고, 하나님은 누구고,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는 뭔지 회의감이 밀려오는 거예요. 얼마나 심했냐면 길을 돌아다니면서 '신은 없다'고 생각하며 울고 다녔어요. '신이 없는데 내가 왜 그동안 여기에 미쳐서 신대원까지 입학하고 전도사로 사역을 하고 있나' 싶으면서 너무 괴로운 거예요. 너무 힘들어서 술 마시고 혼자 돌아다니면서 울었어요.

- 건강한 신앙과 수평적인 교회를 위해 애쓰는 목사님들도 많잖아요. '나도 저런 사람처럼 되어야지' 생각하면서 목회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맞는 말이기는 해요. 그렇지만 세계관이 와르르 무너진다는 건 경험해 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때는 목회가 아니라 교회를 더 다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어요. 신앙의 근간이 무너졌으니까요. 그런 상황인데도 나는 전도사니까 또 설교는 해야 하고… 그게 너무 괴로운 거예요. 신앙의 집이 완전 무너졌고, 벌거벗고 있는 것 같았어요. 너무 외로웠고요. 진리가 무엇인지 엄청 찾아 헤맸던 것 같아요.

수업은 제대로 안 듣고 학교 도서관에 내려가서 쇼펜하우어·키에르케고르의 책을 많이 읽었어요. 회의주의자 책만 열심히 읽는 모습에 '내가 정신질환이 있나' 심각하게 고민도 했어요. 그때 위로를 준 분이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이었는데, 내 고민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소름이 끼쳤어요. 목사님도 저처럼 신앙의 회의감이 확 찾아올 때가 있대요. 그렇지만 이게 하나님이 자기한테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회의감 때문에 어느 정도 욕심을 버릴 수 있다는 거예요. 진짜 공감이 많이 됐어요.

김기석 목사님도 20대 때 방황한 적이 한 번 있다더라고요. 그때 읽었던 책이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범우사)라는 책이라기에 저도 그 책을 탐독했죠.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거는 '이 사람도 나처럼 외롭구나', '이 사람도 나처럼 공허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많이 위로가 됐어요.

- 회의 끝에 내린 결론이 목회를 포기한다는 것이었나요?

그때 내면을 많이 돌아보면서, 내가 왜 목사가 되려고 했는지를 성찰했어요. 결국 자아도취와 욕심이더라고요. 운동선수 출신이라 그런지 모르겠어요. 뭘 해도 정점을 찍어야 한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선교를 간다고 해도 제일 힘든 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요. 그런 생각에서 '최고'가 되고 싶었던 거고, 결국에는 신대원이라는 정점을 찍고 싶었던 거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는 이름으로 그걸 가렸던 것일 뿐, 내면을 파헤쳐서 들어가 보니 욕심, 뭔가를 이루려는 야망이 있었던 거예요.

부끄러웠어요. 물론 질문하신 것처럼 나쁜 목회자가 안 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목사가 되려는 동기 자체가 잘못됐다는 걸 이미 내가 알아 버린 이상, 목회를 할 수는 없었어요. '메시아닉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잖아요. 예수님처럼 살려면 한 걸음 뒤에서 따라가야 하는데, 자기가 예수님인 줄 알고 앞에 나섰던 거죠.

그걸 발견하니까 교인들에게 너무 미안하더라고요. 교인들한테 '내가 이런 동기 때문에 신대원을 왔는데 이런 마음을 지우고 새롭게 목회자의 길을 시작하겠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용납이 안 됐어요.

- 갑자기 목회를 하겠다고 했다가, 또 3년 만에 포기하겠다고 하니 주위에서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극단적이라고 생각했죠. 다들 반대했고, 부모님도 말렸어요. 아내도 그랬고요. 근데 저는 확고했죠. 왜냐하면 제가 진짜 저를 봤으니까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구구절절 설명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남들에게 지시하고 복종시키고… 그러려는 마음을 드러낼 수가 없었고요.

- 목회를 포기한 후 지금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나요?

지금도 한곳에 정착을 못 했어요. 그동안 계속 돌아다녔어요. 이 교회 저 교회 다녀 보고, 성공회도 가 보고, 가톨릭도 가 보고… 계속 돌아다녔어요. 그러면서 코로나19도 터지고. 그렇다고 정착 못해서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아요. 솔직히 집을 다 부수고 새로운 집을 다시 지은 것 같아요. 신앙의 집을 다시 짓고 싶다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많이 노력했고요. 요즘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많아요. 내가 진짜 그리스도인인가 싶기도 하고요. 하나님이 누구인가보다는 인간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에 더 관심이 가요. 그런 점에서 불교나 타 종교에도 마음이 많이 열려 있고요.

아내에게 많이 미안해요. 온누리교회에서 만나서 결혼했거든요. 이 모든 과정을 다 지켜본 거잖아요. 왜 나를 만나서 이렇게 폭풍 같은 과정을 지켜봐야 하나 싶었죠. 본인도 힘들 거예요. 아내에게는 내가 신앙의 지주였는데, 내가 이렇게 되니까 함께 많이 흔들렸던 것 같아요.

민웅기 씨는 다시 축구로 돌아왔다. 축구 교실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보람을 느낀다. 그는 "주위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 한 가지는 확실히 배웠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민웅기 씨는 다시 축구로 돌아왔다. 축구 교실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보람을 느낀다. 그는 "주위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 한 가지는 확실히 배웠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 급격한 신앙의 변화를 통해 느낀 점이 있을까요?

한 가지는 확실해요.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살고 싶다는 거예요. 그 사랑을 온누리교회 목사님께 느꼈어요. 주례를 서 주신 목사님이신데, 지금은 미국에 계세요. 제가 신대원에서 한창 방황하고 힘들 때 잠깐 한국에 들어오셨거든요. 힘들다고 얘기하니까 바쁘신 와중에도 짬을 내서 만나 주셨어요. 갑자기 우리 집에 들어가자고 하시더니 예배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기도를 해 주시더라고요. 그때 무슨 기도가 되겠어요. 엄청난 회의감에 사로 잡혀 있을 때인데. 속으로 '무슨 예배고 기도냐' 그랬는데, 그 목사님이 울면서 기도해 주시는 거예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울컥한데요. 당신이 저와 같은 생각이든 아니든 간에 그냥 제가 힘들어하니까 함께 힘들어해 주신 거예요. 그때 '신앙의 본질은 자기 주변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달렸다'는 걸 느꼈어요. 그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저도 부채 의식을 느끼죠. 그래서 남을 사랑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결국 다시 축구 세계로 돌아가서 축구 교실을 열었는데요.

신대원 졸업한 후에 축구 교실에서 일했어요. 김신욱 선수가 연 축구 교실에서 3년 정도 일한 후에 2020년 말 이곳에 축구 교실을 열었어요. 진짜 민웅기가 누구인지 객관화하려고 노력했어요. 당연히 학교에서 축구를 제일 잘했으니 선수가 되었을 테고, 그건 제게 주어진 재능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축구라는 재능을 선물로 주신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또 하나는 가르치는 것이 너무 재밌고 즐거웠어요. 그래서 과감히 목회를 포기하고 축구 교실을 열어서 아이들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수강생이 100명 가까이 돼요. 그동안 우여곡절도 많았고 힘들었는데, 지금은 혼자서 코치할 수 있는 마지노선까지 왔어요. 깜짝 놀란 건, 요즘 SBS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 덕분에 여성 회원이 엄청 늘어났다는 점이에요. 문의 전화도 여성분들이 많고요. 지금 하남에 2호점을 오픈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 축구 교실 코치로서 어떤 목표가 있나요?

신대원을 졸업한 이후로 이상, 목표, 꿈 이런 것에 대한 환상이 많이 없어졌어요. 원래 특별함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면, 지금은 평범함을 추구하고 있어요. 어울려 사는 데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취미반으로 하는 아이들도 있고, 특출난 재능이 있으면 선수로 보내는 투 트랙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다른 한편으로 여성 회원이 늘어나는 데 보람도 많이 느껴요. 특히 아이 엄마들이 많이 하는데, 우리나라 여성들은 학교 다닐 때 대개 체육과 담을 쌓고 입시에만 포커스를 맞추거든요. 뒤늦게나마 여성들이 축구를 통해 자기 삶을 발견하고 에너지를 느낀다는 데 보람을 많이 느껴요.

- 마지막으로 다른 직업을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 중인 신대원생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려요.

주위에 비슷한 고민하시는 분을 많이 봤어요. 개인적으로는 현실적인 준비를 얼마나 하느냐가 제일 중요하다고 봐요. '너는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해 오지 않았느냐'라고 하면 할 말이 없긴 하지만, 현실을 외면하면 안 돼요. 교회 구조가 싫은 건 싫은 거고, 현실을 외면하면 결국 산으로 가는 거죠. 현실적으로 뭘 해야 할지 목표를 세우고 가는 분들을 보면, 기술을 배우든지 버스 운전면허를 딴다든지 해서 결국은 만족하면서 살고 계시더라고요.

신대원까지 오신 분들은 정말 똑똑한 분들이에요. 원하는 게 있다면 몸을 좀 괴롭혀서라도 박차고 나오시면 충분히 하실 수 있어요. 목표를 세우고, 다른 생각은 잠시 넣어 두고 열망을 가지시면 좋겠어요. 뭐든지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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