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신문이나 방송을 보다 보면, 늦은 나이에 목회자가 된 이들의 간증을 자주 접할 수 있다. 다른 직업을 갖고 활동하다 뒤늦게 '목회자가 돼라'는 음성을 듣거나 소명 의식이 생긴 이들이다. 생업을 포기하고 목회자의 길에 뛰어드는 이들을 보면, 때로 존경심이 생기기도 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범죄 이력이 있으나 과오를 다 뉘우쳤다며 목회자가 되는 이들도 있어, 진정한 회개와 용서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이유에서든 저런 이유에서든, 한국교회는 '목회자가 되는 이들'에게 관심이 많고 그들의 이야기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반대로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 준비하다 그 길에서 벗어난 이들의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별로 없다.

<뉴스앤조이>는 신학대학교 혹은 신학대학원 과정을 밟고도 목회자의 길 대신 다른 길을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었다. 이 릴레이 인터뷰의 이름은 당초 '목회 포기자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뉴스앤조이>가 만난 이들은 신앙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각자 삶의 방식에서 신앙적 가치를 실현하려 애쓰고 있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포기'라는 단어 대신 '다른 길'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다른 길로 간 신학생들' 인터뷰 네 번째 주인공은 사진작가 최반석 대표다. - 기자 주

[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웨딩 촬영 업체 '최반석스냅'을 운영하는 최반석 대표는 총신대학교 신학과 출신이다. 한때 총신대에서 '일렉기타 하면 최반석'으로 통할 정도로 유명했다. 원래 그의 꿈은 찬양사역자였는데, 신학대학원 진학 후 1년 만에 학업을 내려놓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사진'이라는 업을 택한 것 자체가 특이해서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처음 최 대표는 목회를 포기한 데다가 별로 내세울 것도 없다며 인터뷰를 고사했다. 기자는 은혜롭고 고상한 모습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를 포장하는 인터뷰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왜 신학교에 들어갔고, 왜 목회를 그만뒀는지, 지금 하는 일에서 어떤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는지 들려 달라고 요청했다. 세속적 성공 여부를 기준으로 인터뷰하는 게 아니니, 앞서 다른 길을 가는 신학생으로서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들에게 인사이트를 주면 좋겠다고 했다. 고민 끝에 인터뷰에 응한 최반석 대표를 4월 18일 서울 역삼동에 있는 공유 오피스에서 만났다.

총신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신대원 입학 후 1년 만에 학업을 그만둔 최반석 대표를 만났다. 그는 현재 웨딩 스냅 촬영 업체 대표를 맡고 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총신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신대원 입학 후 1년 만에 학업을 그만둔 최반석 대표를 만났다. 그는 현재 웨딩 스냅 촬영 업체 대표를 맡고 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 총신대 신학과에 지원한 계기가 있다면.

보통 총신에 오는 사람 대부분이 목사 자녀 아니면 장로 자녀다. 나 역시 부모님이 목회 중이시고 모태신앙이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신학교에 가야 한다고 강조하셔서, 자연스럽게 총신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 학창 시절 신앙생활은 어땠나.

고등학교 때도 수요 예배를 다닐 만큼 열심이었다. 학교에서 저녁을 먹고 교회에 갔다가 예배 후 야간 자율 학습을 하러 다시 학교로 돌아왔는데, 친구들이 이상하게 쳐다봤다. '쟤는 뭔데 집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냐'는 거였다. 근데 내가 그렇게 하기 시작하니까 친구 세 명이 "나도 수요 예배 드리고 싶다"고 하더라. 그래서 학교 앞 교회 수요 예배에 참석하고 거기서 찬양팀으로 봉사도 하고 그랬다.

고1 때는 수학여행을 갔는데, 하필 주일이 끼어 있었다. 주일 여행 일정에 나는 빼 달라고 하고 리조트에 혼자 남았다. 그때는 핸드폰도 없어서 리조트를 나와 무작정 교회를 찾아 걸었다. 거기서 오전·오후 예배를 다 드리고 리조트에 돌아온 적도 있다.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학교에 진학했다.

- 막상 총신대에 들어가 보니 목사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던가.

목사 안수에 대한 명확한 생각은 없었다. 학부를 졸업하고 나면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학교 다니면서 찬양 사역 동아리 활동을 했다. 대형 수련회 찬양팀으로도 가고, 지방 교회도 섬기면서 활동했다. 그때는 그냥 찬양이 좋았다. 악기도 너무 좋아했다. 그러면서 받는 은혜도 있었다. 원래 성격이 하나에 꽂히면 그것밖에 안 하는 스타일이어서, 새벽 늦게까지 연습하고 기숙사 휴게실에서 자고 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 학교에서 '최반석 하면 일렉기타', '일렉기타 하면 최반석'으로 통했다던데.

학교든, 교회 수련회든 내 포지션(일렉기타)이 비면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 동기들은 웬만하면 교회 전도사로 사역했는데, 나는 사역을 하지 않았다. 사당역 앞에 있는 한 교회에서 찬양팀 세션으로만 섬겼다. 계속 그렇게 지냈다. 다른 동기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전도사·교사·간사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 방학 때마다 거의 풀타임으로 수련회를 다니면서 찬양팀 봉사를 했다.

최반석 대표는 새벽 4시까지 연습에 몰두하며 기타를 연주했다. 실용음악을 공부하고 찬양 사역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한계를 느꼈고, 결국 기타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사진 제공 최반석
최반석 대표는 새벽 4시까지 연습에 몰두하며 기타를 연주했다. 실용음악을 공부하고 찬양 사역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한계를 느꼈고, 결국 기타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사진 제공 최반석

- 그렇게 좋아하던 음악을 그만둔 이유는 뭔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연주를 잘하는 분들이 너무 많이 보이더라. 그런 분들을 보면서 내 음악적 소질이 그렇게 특출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달란트가 있다기보다 엉덩이 붙이고 노력하는 걸로 버텨 왔던 거였다. 나는 새벽 늦게까지 연습해야 뭔가를 간신히 해내는 사람인데, 달란트가 있는 사람과 비교하면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던 거다.

좀 부끄러운 이야기이긴 한데, 졸업 때 학점을 잘못 계산해서 학교를 1년 더 다녀야 했다. 그 기간에 기타를 정말 열심히 쳤는데, 막상 졸업을 한 뒤로는 나를 찾아 주는 사람이 없더라. 수련회 찬양팀 같은 곳에서도 불러 주는 사람이 없다 보니 '아, 내 실력이 이 정도였구나' 체감하기도 했다. 그때 기타를 접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장비를 다 처분했다.

- 10년 가까이 잡았던 기타와 장비를 처분하는 건 인생의 가장 큰 부분을 포기하는 심정이지 않았을까.

맞다. 기타를 연주한다고 장비가 기타만 있는 게 아니다. 페달 보드(이펙터)도 많았다. 하나에 20~30만 원씩 하던 걸 12개 정도 갖고 있었는데, 마치 블록처럼 모아서 한 세트가 되는 거였다. 그걸 하나씩 팔 때마다 '이게 맞나. 잘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기타 케이블에까지 내 이름을 새길 만큼 아꼈던 장비들이었는데, 그런 걸 다 처분하려니 심란하더라.

그런데 마지막 장비를 다 팔게 된 시점까지도 "어디 와서 연주 좀 해 달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이건 진짜 아닌가 보다' 하고 생각을 빨리 접을 수 있었다.

- 장비를 다 팔고 졸업한 이후에 신대원에 진학했다. 학부야 그렇다 쳐도, 신대원은 진짜 목회하기 위해 들어가는 곳이지 않나. 원래 목사 안수 생각은 없었다고 했는데, 신대원에 진학한 이유는 뭔가.

기타까지 포기한 마당에 이제 뭘 해야 하나 고민이 들더라. 그러던 와중에 1차 목표였던 총신대에 왔으니 신대원에 진학해서 계속 섬기자는 마음이 들었다.

- 음악을 접고 난 다음에 목회 말고 다른 진로는 생각하지 않았나.

그렇다. 그냥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커 왔기 때문에 다른 생각은 못 했다.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직업을 가져 볼까 하는 생각도 안 했고, 일단 신대원을 가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시야가 좁았고, 또 당시로서는 그것밖에 없기도 했다. 사실 그 길이 맞다고도 생각했으니까.

- 그런데 입학한 지 1년 만에 휴학을 신청했다.

목적이 무엇인지 고민이 되더라. 또, 목회 자리? 경제적 욕심? 그런 부수적인 것에 대한 욕심도 생기고…. 목회를 하면 거기에 올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고민이 들었다. '사역을 시작하면 내 것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말해 엘리야처럼 까마귀가 먹을 걸 물어다 주든 그렇지 않든, 경제적인 부분은 신경 쓰지 않고 내가 먹일 양들과 내가 하는 공부에 올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었다.

- 솔직히 신학생 중에도 교회 크기나 사례비를 따지는 사람이 많다. 그런 부류가 되고 싶지 않았던 건가.

앞에서는 열정적으로 말하고 사람들을 이끌면서 은혜를 많이 주는 신학생들이, 정작 본인의 삶에서는 출세 지향적인 경우를 더러 봤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적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움은 없어야 하지 않겠나. 나는 그걸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반면 '저 사람은 진짜 목사 해야 한다' 싶은 신학생도 있었다. 그런 분들을 보면서 '아! 사역은 저렇게 하는 거구나. 나라면 저렇게 못할 텐데' 생각했다. 특정인에 대해 왈가왈부하거나 누군가를 정죄하려는 건 아니다. 여러 신학생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올인할 수 있을까'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전부 내려놓고 헌신해도 될까 말까인데, 어영부영 목회할 바에는 안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취미로 한두 사람을 찍어 주기 시작했는데, 반응이 좋아 사진을 업으로 삼게 됐다. 사진 제공 최반석 
취미로 한두 사람을 찍어 주기 시작했는데, 반응이 좋아 사진을 업으로 삼게 됐다. 사진 제공 최반석 

- 그러면서 휴학계를 내고 시작한 게 '사진'이다.

학부 다닐 때 일렉기타를 전부 처분하면서 작은 미러리스 카메라를 하나 샀다. 처음에는 전문적으로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고, 단지 지금 아내가 된 여자 친구를 더 잘 찍어 주고 싶어서 샀다. 취미로 시작한 셈이다.

총신대 출신들은 알겠지만, 교회음악과 학생들은 졸업 연주회 때 사진을 촬영한다. 내가 사진 찍는 걸 보더니, 학교에서 좀 찍어 달라고 하더라. 다행히 학교에서 되게 만족스러워했다. 의외의 반응에 나도 놀랐고, 그러면 좀 욕심을 내 볼 수 있겠다 싶었다. 북촌이나 올림픽공원 같은 야외 스팟을 찾아가서, 어디서 어떻게 하면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는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지인들 위주로 촬영하다가 그걸 보고 또 한 명씩 알음알음 연결이 됐다.

신대원 1년 차에 고등부 찬양팀 전도사로 사역하면서 교회에서 60만 원을 받았는데, 사진을 찍어서 버는 돈이 사례비의 2배나 됐다. 그러면서 고민이 되더라. 사진으로 뭔가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거다. 사진을 찍어 봐야 하나, 아니면 신대원을 졸업해서 목회자의 길을 걸어야 하나 많이 고민했다.

그런 고민을 하면서 신대원 1학년 학기 말까지 왔다. 사실 교회를 위해서도 내가 입장을 빨리 정리해 줘야 했다. 그래야 교회도 내년 사역자를 구하니까. 고민 끝에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이끌어 주시겠지'라는 마음으로 사진을 계속 찍어 보기로 했다. 그렇다고 바로 자퇴를 한 건 아니고 1년간 휴학계를 냈다.

- 사진을 부업이 아니라 전업으로 삼겠다고 결심한 건데, 두려움은 없었나.

제일 큰 두려움은 생계였다. 그때 이미 아내와 결혼한 상태였는데, 휴학한 해 5월에 아내가 직장을 그만뒀다. 둘 다 수입이 없는 무직이 된 거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싶더라. 막연하게 시작한 거라서 처음에는 고정 수입도 없었다. 일단 퇴직금으로 몇 개월을 버틸 수밖에 없었다.

고민이 많이 됐다. 목표를 정확히 세우지 못하고 고민하니까 주변에서도 조언해 주더라. 연말까지 촬영을 몇 건 이상 못 하면 그건 신대원 돌아가라는 사인으로 받아들이라고. 그런 중에 또 10월부터 졸업 연주회 촬영, 졸업 앨범 촬영, 결혼식 촬영 같은 스케줄이 잡히기 시작하더라. 목표가 채워지니 조금 더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년을 추가로 휴학했다. 휴학은 2년까지 할 수 있는데, 그 기간을 다 채운 거다.

- 부모님이나 동기·선후배들은 그래도 목회를 하라는 반응을 보였을 거 같은데.

일단 부모님은 많이 걱정하셨다. 부모님의 기도와 기대가 컸으니까. 사진을 찍는다니 일단 해 보라고 허락해 주셨지만, 할 수 있을 때 신학 공부를 해 놓으라는 마음이 더 크셨을 것 같다. 일단 목사 안수부터 받으라고 하셨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러면 너무 늦을 것 같았고 거기까지 가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의외로 주위 신학생들은 잘할 것 같다며 응원해 줬다. 아무래도 그 사람 중에 내가 사진 찍어 준 사람이 많아서 그렇지 않을까.(웃음)

- 휴학을 연장한 이후에도 일이 잘됐나.

많이들 좋아해 주셨다. 감사했다. 당시 시기적으로 잘 맞은 것도 있었다. 필름 카메라가 유행할 때여서 필터도 오래된 감성 느낌으로 찍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그걸 해 보고 싶어서 이리저리 공부하던 중에, 당시 유명한 인플루언서 커플을 한 번 찍은 일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사귄 커플이었는데, 성인이 돼서도 잘 만나면서 과거부터 찍은 사진을 올려 페이스북에서 유명해진 사람들이었다. 그 커플에게 올림픽공원에서 데이트 스냅 촬영해 보자고 제안했는데, 그게 대박이 났다. '좋아요'와 '댓글'이 몇만 개씩 달렸다. 그걸 알아봐 주고 연락해 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걸 발판으로 포트폴리오를 정리해서 다른 곳에도 제안하니까 잘됐고. 타이밍이 잘 맞았던 것 같다.

최반석스냅은 2022년 예약이 다 찼고 얼마 전 2023년 웨딩 스냅 예약을 오픈했다.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인 만큼 
최반석스냅은 2022년 예약이 다 찼고 얼마 전 2023년 웨딩 스냅 예약을 오픈했다.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인 만큼 단순히 촬영뿐 아니라 모든 과정을 성실하게 임한다고 했다. 최반석스냅 홈페이지 갈무리

- 이후 웨딩 스냅을 전문으로 하는 '최반석스냅'을 창업했다. 지금 사업도 잘된다고 들었다. 인스타그램 팔로워도 1만 명을 넘어섰고.

일단 올해 예약은 다 찼다. 취소 자리가 나는 몇몇 자리 빼고는 올해 예약을 못 받고 있다. 얼마 전 2023년 일정 예약을 시작했다. 직원은 총 8명인데, 주중 출근하는 사람이 두 명 있고, 주말 촬영하는 분이 네 명이다. 촬영하는 실장님이 총 6명에 나와 아내까지 총 8명인 셈이다.

- 규모가 상당하다. 대표로서 책임감도 있을 것 같다.

사역보다 쉬울 줄 알았는데 똑같더라.(웃음) 직원 중에는 두 아이의 아버지도 있고, 학생도 있고, 자취하는 실장님도 있다. 스케줄을 못 채우면 그분들의 생계에 영향이 가니 부담이 된다. 대표로서 단순히 일감을 챙기거나 주말에 기계처럼 보내려고는 하지 않는다. 직원들이 더 소속감을 느낄 수 있도록 더 챙기고 돌아봐야 하는 것 같다.

이 일은 단순히 촬영만 하는 게 아니다. 촬영에 앞서 신랑·신부와 상호작용이 중요하고, 그들의 니즈를 파악하는 게 필요하다. 셔터는 이런 게 갖춰진 후 맨 마지막에 누르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부분을 잘하려면 직원들이 소속감을 확실히 느끼고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수직적이기보다는 편하게 이야기하고 대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려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

- 사진도 공부가 많이 필요한 영역 아닌가. 장비도 만만치 않고, 찍고 나서 보정하는 법도 많이 배워야 하는데. 이런 건 언제 어떻게 공부한 건가.

기타도 그렇지만 사진도 독학했다. 앞에 잠깐 말한 것처럼 원래 모르면 혼자 파고드는 성격이라 더 그런 것 같다. 처음에는 사진을 찍어도 되게 밋밋하고 어둡고 자주 흔들려 있었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지 몰랐다. 이걸 스스로 배우고 해결해 나가야 했다. 주위에 사진 찍는 사람이 어디 있었겠나. 다들 성경책은 갖고 있는데 카메라는 없더라.(웃음) 유튜브도 보고 책도 찾아보고, 열심히 독학했다. 사진 책이 또 비싸다. 그래서 서점 가서 필요한 부분만 읽어 보고 그랬다.

신앙적으로 보자면 타이밍이 잘 맞은 것이지만, 개인적으로 보자면 원래 사진은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포토샵 만지는 걸 좋아했던 게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그런 걸 보면 좋아하는 일을 해야 롱런할 수 있는 것 같다.

- 사진에 관심 있는 사람들, 업으로 삼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도 몇 가지 팁을 주면 좋겠다. 사진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나.

나는 주로 웨딩 촬영을 하다 보니까 그걸 예로 말하자면, 요즘은 B컷 같은 A컷을 원하는 분들이 많다. "서세요", "웃으세요" 하고 찍는 게 아니라, 친구·가족을 만나 느끼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게끔 작위적이지 않게 찍는 걸 좋아한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예뻐야겠지만. 그 사진을 보고 고객들이 만족할 때 느끼는 보람이 크다. 그게 매력인 것 같다.

- 지금 하는 일에는 만족하나.

만족한다. 재밌다. 이 직업의 매력은 돌아오는 피드백이 확실하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대부분 결혼은 일생에 한 번 있는 날이라 그 과정을 1년 이상 준비하시지 않나. 결혼식 당일은 준비한 모든 것을 쏟아붓는 날이기에 굉장히 중요하다. 그날의 모습을 예쁘게 담아 주는 일을 한다는 데서 보람을 느낀다.

회사명(최반석스냅)을 의도하고 지은 건 아닌데, 아무래도 내 이름을 걸고 하다 보니 준비부터 섬세하게 열심히 하려 한다. 그런 걸 고객들이 알아주시고 좋은 피드백을 주면 보람도 있고, 금전적인 걸 떠나 그 다음을 준비할 수 있는 원동력도 생긴다. 성격상 대충대충 관성대로 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이 업계가 대충 하면 도태되기에 십상이니까. 고객들이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하다.

- 신대원에 갔다고 반드시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래도 많은 사람이 고정관념 때문에, 혹은 막다른 길이라고 생각해서 쉽사리 다른 길을 선택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들에게 해 줄 말이 있다면.

나 역시 한때는 신학·목회가 최후의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나의 강점이나 능력이 있다면 하나는 사진이고, 또 하나는 기타고, 마지막은 신앙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버렸다. 목회를 꼭 신학교에 다녀야만 하는 걸까. 나도 한때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지금 나와서 보니 시대의 흐름상 '평신도 사역'이라고 불리는 형태가 더 중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앞에 나서는 목회자의 자리를 감당하는 사람도 있어야겠지만, 삶 속에서 내 이웃을 위해 사역하는 사람들도 중요하다고 본다.

내 이름 때문에 교회 다니는 고객들이 많이 오기도 한다. 내가 일하는 모습, 타인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 교회 다니는 사람인가 봐', '교회 다니는 사람은 뭐가 다르네'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신앙인들의 그런 모습이 코로나 이후 우리가 맞이할 사회에서는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최근 총신대에서도 이중직 논의가 나온다고 하는데… 나는 정말 목회자는 '우물 속의 우물'에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한 발만 나와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정말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 많다. 목회자들도 사회에서 교인들이 느끼는 것을 똑같이 느끼고 그걸 삶에 녹여 설교해야 더 설득력 있게 하나님을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일하면서 고객들에게 "예수 믿으세요" 하고 사진 찍는 건 아니다. 그저 내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 속에서 그들이 감동을 받는다면 그게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일할 뿐이다. 굳이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올바른 모습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도 값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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