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신문이나 방송을 보다 보면, 늦은 나이에 목회자가 된 이들의 간증을 자주 접할 수 있다. 다른 직업을 갖고 활동하다 뒤늦게 '목회자가 돼라'는 음성을 듣거나 소명 의식이 생긴 이들이다. 생업을 포기하고 목회자의 길에 뛰어드는 이들을 보면, 때로 존경심이 생기기도 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범죄 이력이 있으나 과오를 다 뉘우쳤다며 목회자가 되는 이들도 있어, 진정한 회개와 용서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이유에서든 저런 이유에서든, 한국교회는 '목회자가 되는 이들'에게 관심이 많고 그들의 이야기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반대로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 준비하다 그 길에서 벗어난 이들의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별로 없다.

<뉴스앤조이>는 신학대학교 혹은 신학대학원 과정을 밟고도 목회자의 길 대신 다른 길을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었다. 이 릴레이 인터뷰의 이름은 당초 '목회 포기자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뉴스앤조이>가 만난 이들은 신앙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각자 삶의 방식에서 신앙적 가치를 실현하려 애쓰고 있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포기'라는 단어 대신 '다른 길'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다른 길로 간 신학생들' 인터뷰 여섯 번째 주인공은 IT 개발자 박민수 씨(가명)다. - 기자 주

[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박민수 씨(가명)는 어려서부터 "커서 목사가 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부모 기대와 목사 권유 때문에 말은 그렇게 하고 다녔는데, 막상 그 생태계가 어떤지 잘 알지는 못했다. 다만 목사가 멋있어 보였고, 남을 돕는 직업이 좋아 보였을 뿐이다.

사춘기에 접어들어서는 꼭 목사가 되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바로 신학교에 진학하기는 싫었다. 당장 목사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지를 남겼다. 신학대학교에 있는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한 것이다.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굳힌 건 군대를 다녀온 후였다.

인도 단기 선교가 그의 삶에 변곡점이 됐다. 인도에서 청소년들을 돌보는 선교사를 보며 '이게 말씀의 힘이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민수 씨는 청소년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리고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학부 졸업 직후 1년간 고시원에서 신학대학원 입시를 준비했고, 2018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민수 씨가 가장 좋아했던 분야는 구약학이었다. 학부 3학년 때부터 히브리어를 공부할 정도였다. 배우는 과정은 너무 힘들었으나 알아 가는 기쁨이 더 컸다. 그는 그렇게 목회자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마음을 정한 듯했지만, 지금은 목회를 포기한 상태다.

지난 5년간 민수 씨의 삶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2년 전에는 대형 교회 파트 전도사, 1년 전에는 인테리어 일을 병행하는 이중직 전도사, 6개월 전에는 IT 개발자 취업 준비생, 지금은 취업에 성공한 IT 개발자가 됐다. 그는 왜 목회를 포기했을까. 또 어떻게 개발자가 되었을까. 5월 25일 서울 구로디지털단지에서 만난 박민수 씨에게서 급격하게 바뀐 삶의 이야기를 들었다. 본인 요청으로 가명을 사용한다.

목회를 포기한 민수 씨(가명)는 더 좋은 자리,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 정치를 하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며 목회에 대한 환상을 내려놓았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목회를 포기한 민수 씨(가명)는 더 좋은 자리,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 정치를 하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며 목회에 대한 환상을 내려놓았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 히브리어를 좋아하던 신대원생이 지금은 IT 개발자가 됐네요. 왜 목회를 포기한 건가요?

신대원에 들어가면서 '교회 정치'가 뭔지를 알게 됐어요. 그게 너무 싫더라고요. 교인으로 교회를 다닐 땐 몰랐는데, 목회하려면 정치가 필요하더라고요. 부목사 되는 것도 정치고, 대형 교회 사역자 되는 것도 정치인데 그게 너무 싫었어요.

- 정치가 싫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요?

좋은 교회에 가기 위해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는 거죠. 담임목사님이나 부목사님 밑에 찰싹 붙어서, 바른 소리 한번 못 하고 노예처럼 살다가 결국 한자리 차지하는 거요. 그게 나중에 노회·총회에서 한자리 차지하려 하는 모습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해요. '이 교회만큼은 아니겠지' 싶던 곳에서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걸 보면서 더 절실하게 느꼈어요.

2018년 신대원에 입학했을 때 명성교회 세습 사건이 공론화됐죠. 그때 수업도 제대로 못 하고 많이 시끄러웠어요. 그 사건도 저를 많이 고민하게 했죠. 교단에서 선배고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에도 크게 실망했어요. 결국 다 자기들 욕심을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 같았거든요.

신대원생들이 광나루에서부터 명성교회까지 걸어가는 '걷기도회'라는 시위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시위 참가자들 이름을 다 서명했거든요. 근데 세습 반대를 외치는 학생들 중에서도 서명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이유는 단순했어요. '여기 이름을 남기면 나중에 내 앞길이 막히지 않을까' 싶었던 거였죠. 그게 현실이에요. 저조차도 순간적으로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이런 생각하면 안 돼' 하면서 서명했는데, 나중에 보니 결국 교단 목사들이 서명한 학생 명단 들고 다니더라고요.(웃음)

- 세습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명성교회 세습 사건은 진로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제일 열 받는 지점은 교회를 자기 소유물같이 여기는 모습이었어요. 교인들이 진짜 피땀 흘려서 일한 돈으로 세운 교회인데, 왜 목사들은 자기 자식에게까지 물려주는 걸까 싶더라고요. 심지어 더 떵떵거리고 살잖아요. 굳이 따지자면, 저는 물려주는 사람보다 물려받는 사람이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부모님 세대는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자녀들은 아니라고 말했어야 하니까요.

그 사건에서 깨달은 건 결국 부모가 목사여야 앞길에 유리하다는 것이었어요. 그게 아니면 대형 교회 장로나 안수집사여야 하고요. 학교에서도 그런 부모를 둔 자녀들끼리 뭉쳐 다니더라고요. 저희 아버지는 지방 교회 평범한 집사님이시거든요. 신학교에는 출신을 '성골(목사 자녀)', '진골(장로 자녀)', '6두품(집사 자녀)', '해골(안 믿는 집안 자녀)'이라고 구분하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따지자면 저는 하위 계층이에요.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내가 생각했던 목회자의 삶과 굉장히 다르구나. 나도 목회하려면 지금부터라도 친분을 쌓아서 어디 교회 전임을 하고, 그 경력으로 어디서 부목사를 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너무 싫었어요.

명성교회 세습 사태 때, 민수 씨는 신대원생이었다. 그는 세습 반대 시위에 참가하면서 '줄'이 없으면 목회 앞길이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명성교회 세습 사태 때, 민수 씨는 신대원생이었다. 그는 세습 반대 시위에 참가하면서 '줄'이 없으면 목회 앞길이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 정치하지 않고 올바르게 목회하려 노력하는 분도 많지 않나요?

그렇기는 하죠. 근데 개인적인 충격도 있었어요. 신대원 때 사역했던 교회에서, 어떤 부목사님이 대심방 기간 때 "수금하러 간다"고 말하더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심방을 하면 교인들이 심방비를 주는데, 그걸 모으면 1년 치 등록금 정도가 나온다고 자랑하더라고요. 그 말이 너무 충격이었어요. '이게 목사의 본모습이구나' 싶었어요.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제가 다녔던 그 교회는 적당한 중형 사이즈였는데, 생각해 보니 교단에서 중간, 평균 정도의 모습이 딱 이럴 것 같더라고요. 시간이 지나면 나도 결국 어쩔 수 없이 저런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고민되더라고요. 지금은 욕하지만, 나중에 나도 목사가 되면 심방 대신 수금이라고 생각할 것 같고, 권위적이고 정치 열심히 하는 사람이 될 것 같았어요. 물론 제가 경험한 목사님들은 굉장히 적기 때문에 모두가 그렇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내가 본 목사의 모습이 진짜 본모습이라면, 그 길을 갈 수는 없겠더라고요.

- 그래서 목회를 포기하기로 결심한 건가요?

사실 그때까지도 목회를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명성교회 세습이나 사역하던 교회에서의 사건을 겪으면서 정치에 휘둘리지 않는 목회 방법이 뭐가 있을지 고민했어요. 보통 담임목사로 나갈 나이가 40대 중반, 지금부터 10~15년 후잖아요. 그때면 이미 목회 자리는 포화 상태일 것 같고, 교회 개척밖에 방법이 없을 것 같았어요. 그때부터 이중직을 고민했어요.

담임목사를 못 한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바르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노력을 한다면 조금은 다른 사역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있었어요. 애초에 목사가 되려는 목적이었던 '약자를 돌보고 배려하겠다'는 가치관을 실현하고, 공부하면서 배웠던 것들을 가감 없이 나누려면, 차라리 내가 주중에 돈을 벌고 주말에 사역을 하는 게 낫겠더라고요. 그래서 2021년 초 신대원을 졸업한 후, 교회 사역을 병행하면서 6개월간 인테리어 회사에서 일했어요. 이중직을 하고 있는 전도사님이 대표로 있는 회사였어요.

- 이중직 생활은 어땠나요?

결론적으로는 잘 안 됐어요. 합당한 보수를 받지 못했거든요. 처음에 페이(임금)가 낮을 거라고 해서 알겠다고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첫 달 20만 원, 그다음 달 30만 원, 그다음 달 40만 원. 주말 교회 사역과 월요일 쉬는 날 빼고 거의 매일 일했거든요. 인테리어 공사 외에 대표님이 운영하는 보호 종료 청소년 셰어 하우스 청소 같은 다른 일도 해야 했죠.

더 배우려 했는데 결국 그만뒀어요. 돈 때문이었어요. 큰 공사가 3개가 연속으로 들어왔는데 대표님이 수입이 얼마인지는 전혀 공개하지 않으시더라고요. '얼마 들어왔고, 얼마가 남았고, 그래서 너희한테 줄 수 있는 돈이 얼마다'라는 말도 없었어요. 저는 그냥 주는 대로 받으라는 거죠. 그때 '이중직을 하면 어쩔 수 없이 돈에 매이게 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그래서 내린 결론이 기성 교회 목회도 안 되고, 이중직도 안 되겠다는 것이었나요?

그때 느낀 거죠. 기성 교회 목회자의 길을 쭉 걸어간다면 내 가정을 돌볼 수 있을까? 목사로서 가정을 먹여 살리려면 어느 정도 규모 있는 교회 담임목사가 되어야 하잖아요. 아직도 세습하는 교회가 이렇게나 많은데 그건 쉽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이중직도 마찬가지었어요. 인테리어를 배운다고 해도 5년 후 내 모습이 어떨까 고민해 보면 답이 없겠더라고요.

이런 고민을 하는 동안 아내가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수행했어요. 저는 신대원 2학년 때 결혼했는데, 그동안 아내가 일하면서 저를 먹여 살렸거든요. 아내가 제 고민을 듣더니 차라리 다른 일을 하라고 하더라고요. 신대원 졸업할 때까지 자기가 일해서 벌겠다면서. 그래서 고민 끝에 선택한 게 'IT 개발자'였어요.

전임 목회, 이중직을 다 내려놓은 그는 IT 개발자의 길로 뛰어들었다. 7달간 치열하게 공부하고 두 달간 취업 시장의 문을 두드린 끝에, 그는 개발자가 됐다. 사진 제공 박민수

- 왜 하필 IT 개발자였을까요? 학부 때 사회복지를 전공했으니 그쪽으로 갈 수도 있었을 텐데요.

단순한 이유였어요. 이 직업에는 미래가 있다고 봤어요. 앞으로도 개발자 수요는 계속 있을 테니까요. 제가 이 고민을 한 게 신대원 졸업 직후인 작년이었어요. 서른 초반에 사회복지 관련 회사에 신입 사원으로 뽑힐 수 있을까 생각해 봤어요. 쉽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취업 시장에서는 나이가 있는 편이니까요. '코딩'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나이가 있어도 실력이 되면 뽑아 주는 회사가 많아요.

코딩을 선택한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어요. 원래부터 청소년에 대한 관심이 많았기 때문인데요. 아까 이중직 할 때 보호 종료 청년들이 머무는 셰어 하우스 일을 했다고 말했잖아요. 그들을 보면서, 목회를 하겠다고 처음 마음먹었던 청소년에 대한 비전을 하나님께서 다시금 생각나게 해 주셨어요. 내가 개발자가 되면 이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만일 개발자가 미래 있는 직업이라면, 학생들도 그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죠. 그런 마음으로 이중직을 포기하고 공부에 뛰어들었어요.

- 코딩에는 소질이 있었나요?

아니요. 살면서 이과 쪽은 접해 본 적도 없어요. 처음 시작했을 때는 재능 없는 것 같아서 엄청나게 좌절했고요. 개발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보통 '부트 캠프'라는 이름의 개발자 양성 프로그램 학원에서 공부해요. 부트 캠프도 종류가 다양한데, 제가 공부한 곳은 세션이 총 3개로 나뉘어 있어요. 한 세션을 끝낼 때마다 시험을 봐야 하고, 세 번 떨어지면 그냥 탈락이에요.

저는 첫 시험부터 떨어졌어요. 포기해야 하나 많이 고민했어요. 다음 시험에서 떨어지면 접자는 마음으로 했어요. 처음 한 달은 진짜 '어버버' 했어요. 처음에 기초 과제 하나 수행하는 것도 힘들더라고요. 기초 과제에도 난이도별로 초급·중급·고급이 있어요. 나는 초급도 못하겠는데 어떤 분은 고급 과제까지 다 하는 거예요.

처음 시험에 떨어지고 나서 기본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변수가 뭔지, 함수가 뭔지, 선언은 어떻게 하는지 용어부터 다시 찾아봤어요. 구글링도 많이 했어요. 제가 했던 부트 캠프는 하루에 1시간만 가르쳐 주고 나머지는 혼자 복습하는 식이었어요.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학원도 있지만, 제가 배운 과정은 스스로 학습해서 답을 찾아야 했거든요. 그런데도 학원에서도 구글에서 찾아보라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욕 많이 했어요.(웃음) 돈 내고 수업 듣는데 왜 나보고 알아서 찾으라고 하나 하고요. 혼자 찾아가면서 알아 가는 게 맞는 방법이긴 했지만 정말 고통스러웠죠. 한 15주 정도 되니 그제서야 적응이 되더라고요. 왜 스스로 찾아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 찾아야 답을 얻을 수 있는지 어렴풋이 알았다고 해야 할까요. 이후로는 시험에 안 떨어졌어요.

- 공부 일과는 어땠나요? 전도사 생활을 병행하느라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22주 과정인데 저는 5주 더 해서 총 27주간 했고요. 지난해 7월 시작해서 올해 2월 초에 끝났어요. 매일 새벽 5시 반에서 6시에 무조건 기상했어요. 일과가 9시부터 시작이었거든요. 3시간 동안 그 전날 공부한 걸 복습했고요. 저녁 6시에 일과가 끝나면 아내랑 잠깐 시간 보내고 한두 시간 정도 또 꾸준히 공부했고요. 주일에는 공부를 거의 못 했어요. 또 코로나 때문에 교회에서 영상 편집을 돌아가며 해야 하는 상황이 됐어요. 할 줄 모르니 그것도 너무 버거웠죠.

- 7개월 만에 공부를 마치고 취업 시장에 나왔는데 초조하지 않았나요?

그때가 정말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이었어요. 이력서를 40~50군데 넣었는데, 서류 넣자마자 탈락하는 회사도 많았어요. 그나마 저는 나은 편이더라고요. 어떤 분은 80개도 넣는다고 하더라고요.

올해 3월부터는 제 수입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전까지는 조금이나마 교회에서 파트타임 전도사로 사역하면서 받은 사례비가 있고, 부모님도 조금씩 도와주셨거든요. 3월부터는 전부 아내 수입에 의존해야 했어요. 근데 취업은 안 되지, 돈은 필요하지… 최선을 다해서 면접 준비도 하고 서류도 넣었지만 번번이 탈락하니까 정말 자존감이 바닥을 치더라고요. 5월까지 취업이 안 되면 아르바이트를 병행할 생각이었죠.

40~50군데 중에 면접까지 간 건 딱 3번이었어요. 전부 희망 연봉을 물어보더라고요. 학원 다니며 들은 게 있어서 대비는 했는데, 실제로 질문을 받으니 머리가 하얘지더라고요. 사실 교회에서 전도사가 연봉 협상할 일은 없잖아요. 사회생활 하나하나가 생소하고 처음 겪는 일이었어요.(웃음) 다행히 한 곳에 취업했어요. 4월 말부터 출근했으니 이제 한 달 됐네요.

- 5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신대원에 가지 않고 바로 코딩 공부를 할 것 같나요?

일찍 (전업을) 결정했다면 개발자 경력을 더 쌓을 수 있지 않았을까… 요즘 이 고민을 많이 해요. 그런데 아내랑 대화하면서 내린 결론은, 그래도 신대원에 갔을 것 같다는 거였어요. 결론적으로는 신대원에 가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가치관을 갖지 못했을 것 같거든요. 신학을 공부하면서 배운 소중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이력서 넣을 때, 신대원 졸업 학력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많이 고민했어요. 실제로 어떤 회사에서는 "신학 석사까지 하셨는데 괜찮겠냐"고 물어보기도 했고요. 그 얘기 들으니 '내가 전도사 출신이라 떨어지나?' 하는 고민도 들더라고요. 아내가 옆에서 마음을 붙잡아 줬어요. "당신이 목회의 길을 포기하고 이쪽에 온 이유는 아이들을 돕고 싶어서 아니냐. 그런 마음이면 당당히 신대원 졸업이라고 써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이력을 숨기고 취업하는 것보다 이력을 드러내고 탈락하는 게 낫겠다면서요.

지금은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지만, 민수 씨는 앞으로 보호 종료 청소년들에게 코딩을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돕는 건 민수 씨의 오랜 꿈이다. 사진은 민수 씨의 전도사 시절 모습. 사진 제공 박민수
지금은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지만, 민수 씨는 앞으로 보호 종료 청소년들에게 코딩을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돕는 건 민수 씨의 오랜 꿈이다. 사진은 민수 씨의 전도사 시절 모습. 사진 제공 박민수

- 앞으로의 계획은 뭔가요?

목회에 대한 미련은 전혀 없고요. 보호 종료 청소년들을 돕고 싶어요. 전도사를 사임하고 지금은 온라인 예배를 참석하면서 이곳저곳 다녀 보고 있는데, 앞으로는 그런 친구들과 함께 신앙생활 하면서 가르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제 실력을 더 키워야 할 것 같아요. 지금부터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있어요. 정규직으로 들어온 이상 쉽게 잘리지는 않겠지만, 더 욕심을 내서 실력을 향상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 개발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신학생이 꽤 있는 것 같아요. 이 인터뷰 시리즈에도 또 다른 개발자가 나올 예정이거든요. 비슷한 직종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조언 부탁드려요.

1년 전만 해도 제가 개발자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1년 전의 저는 주말에 교회 가고 주중에 일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상태였거든요. 아까 말한 것처럼 다른 목회자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되는 것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을 것 같아요.

신대원까지 졸업했다면 취업 시장에서 나이가 많은 편이긴 해요. 그러나 최선을 다해 공부한다면 불러 주는 곳이 있을 거예요. 아까 말한 것처럼 개발자 시장은 나이에 크게 구애받지 않아요. 실제로 저희 팀에서 제가 나이가 두 번째로 많아요. 저보다 나이 많은 다른 한 분은 서른 후반이고요.

앞으로의 상황을 볼 때 개발자라는 직업에는 미래가 분명히 있다고 보여요. 신학을 공부한 동생 한 명도 개발자가 됐는데, 쿠팡에서 서너 달 일하고 학원비 벌어서 죽어라 공부했어요. 지금은 취업해서 회사 잘 다니고 있어요. 혹시라도 저처럼 개발자가 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늦지 않았으니 한번 도전해 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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